연고지 이전
緣故地移轉
Relocation
연고지 이전, 또는 연고 이전은 혈통, 정분, 법률 따위로 관계나 인연이 맺어진 곳인 연고지를 옮기는 행위를 말한다.
과거에는 주민등록상 본적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연고지 이전이라는 단어는 지역 밀착이 강한 프로스포츠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구단을 소유한 구단주의 입김 또는 지자체+지역 주민의 비협조 등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기업형 구조를 가진 독립 리그형태의 운영 국가에서 특히나 자주 일어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유럽 축구의 경우는 대부분의 구단이 지분은 외국인에게 있다고 해도 지역 기반으로 창단한 지역클럽이 많고 축구팀은 어지간히 큰 도시면 다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연고 이전할 곳이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지만, 미국, 일본, 한국같은 기업형 리그에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도시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며,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가장 인구가 많고 광고효과를 누릴 수 있는 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을 가지 못하는 구단의 경우 서울 인근의 위성도시에 구단을 연고지 이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프로스포츠 팀이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면 그 파장은 상당히 크다. 사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프로스포츠 팀 정도면 경기 한번에 최소 1,000명, 구장 규모에 따라 수천 수만 명의 유료관중이 경기장을 찾아오게 되어있고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 인한 경제효과가 생기기 때문에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국내 스포츠에선 종목마다 발생 빈도나 이에 따른 반응이 갈린다.
태동기부터 대기업의 지원 아래 기업과 관련있는 대도시에서 시작했고, 지역감정까지 맞물려 연고밀착이 굉장히 강하게 이뤄진 KBO리그는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다 실패해서 수원에서 유목 생활을 했던 현대 유니콘스를 제외하곤 연고 이전이라 할 만한 사례도 없고[2] 모기업에서 그런 논의 자체를 안 한다. 오히려 팬이나 구단이 연고에 너무 집착해서 생기는 부작용도 많다.[3]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 유니콘스의 사례는 프로야구판에서 유례없이 욕을 먹었고 현대는 수원에서 붕 떠버려서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4회 우승에 빛나는 성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인기 구단이었다.[4]
반면 상대적으로 스몰마켓인 '''프로배구'''와 '''프로농구'''는 상당히 흔했다. 남자프로농구의 경우 원주 DB 프로미, 창원 LG 세이커스, 안양 KGC인삼공사[5]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6] 를 제외한 전 구단, 여자프로농구는 전 구단이 연고 이전 경험이 있다.
한편 미국식의 프랜차이즈 체제보다 유럽식의 연고 개념을 지향하려는 성향이 강한 K리그의 경우 반발이 심한 편인데, 이로 인해 2000년대 이후 연고지 이전을 한 성남 FC, FC 서울, 제주 유나이티드 등의 팀을 지칭하는 '''패륜'''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런 연고지 이전이 나중에 구단 간 악감정이나 마찰을 통해 더비 매치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FC 서울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슈퍼매치.
뉴올리언스 세인츠처럼 팬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7] 으로 연고지 이전 떡밥을 잠재우는 경우도 존재한다. 반면 신규구장을 요구하다가 지자체에서 세금인상을 들어 반대해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하는 일도 있다 로스앤젤레스 차저스나 오클랜드 레이더스[8] 가 이런 경우. 볼티모어 레이븐스역시 전신격인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였던 시절[9] 클리블랜드 시에서 신규구장 신축에 미온적으로 나왔던 것 때문에 팀을 터트려버리고 볼티모어에다 새 팀을 만든 것이다.
리그 출범 시점부터 현재까지 안 떠난 팀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연고지 이전이 빈번한 편이다. 한국프로농구/문제점 참조.
2011년 모기업인 오리온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연고지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홈 관중난으로 인해 결국 대구에서 고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다만 대구 오리온스 시절에도 대구시에 대한 연고정착 의지는 부족했는데 숙소와 훈련시설은 용인시에 있었고 '''구단 사무실은 서울특별시에''' 위치해 있었다. 그나마 용인시의 훈련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2010년 9월에 대구로 훈련장과 숙소를 이전했는데 1년후에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였다. 이 때문에 대경권에 남자 농구단은 하나도 없어 연고 공백 상태가 되었으며, 2017년부터는 구미 KB손해보험도 의정부로 떠나는 바람에, 남자 겨울 스포츠 자체가 없다.[10] 이 연고지 이전으로 인해 대구, 경북 사람들은 오리온스를 금지어 취급하고 있다.
1961년에 창단된 중소기업은행 실업 농구단을 1997년 나산그룹이 인수, 광주광역시를 홈으로 사용하는 광주 나산 플라망스라는 이름으로 구단을 창단했다. 그러나 나산그룹이 2년 만에 부도나면서 골드뱅크가 인수, 1999-00시즌 이후 여수시로 연고지 이전을 했다. 그러나 골드뱅크-코리아텐더도 썩 좋은 사정의 팀이 아니라 더 나은 인수 기업을 찾기 위해 좀 더 큰 연고지로 이전하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2002-03시즌이 끝난후 부산광역시로 연고지 이전 했다.
수많은 연고지 이전 사례 중 이전 과정에서 잡음이 없었던 사례 중 하나인데 코리아텐더 구단 측이 '''"농구 밖에 모르는 선수들의 생존을 위해 여수를 떠납니다. 집안의 미래를 위해 가난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낸다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래야만 친정이 있는 서쪽 여수의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시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했고 여수시민들도 "아쉽지만 이왕 큰 도시 가서 잘 되길 바란다"고 환송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한 바 있다. 결국 코리아텐더는 부산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 초대형 무선 통신기업이었던 KTF에 인수돼 안정적 생존 기반을 갖추게 됐다.[12]
이 당시의 인연으로 당시 부산 KTF 매직윙스는 2007~2008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코리아텐더 시절 연고지였던 여수시에서 치르기도 했다. 감동적인 당시 경기 관련 기사.
현재 kt 구단 홈페이지에는 합병이전인 전신 KTF 시절이 사라진 뒤 kt로 이름이 바뀐 시점부터만 표기하고 과거는 모두 지워버린 상태. 결과적으로 2003년 여름부터 광주 전남에서는 정신적으로 묶어줄 구단이 없기 때문에 농구 공백 상태라 할 수 있다. 2006-2007 KBL 파이널 역사까지 사라지면서 또 하나의 공백을 만들었다.
2017년 1월 경 북수원에 위치한 수원 kt빅토리움과 kt 스포츠단 본사인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가 있는 수원으로의 연고이전 떡밥이 있었지만 부산 사직 팬들의 반발과 이미 매각을 목표로 대구를 떠나 고향으로 짐을 싼 오리온의 뜬끔없는 연고이전이 있는 바람에 부산 사직 홈 팬들과 kt 고객들을 강한 반발과 함께 무산되기도 했다. 실제로 수원에는 과거 삼성 썬더스의 홈이었던 수원실내체육관[13] 이외에 아마추어 대회로 개장한 후 한 시즌 동안 임시연고로 여자프로농구를 개최했던 서수원칠보체육관이 있다.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했는데, 너무 시설이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구리로 연고를 이전했다. 그러나, 이후 배구의 대한항공-흥국생명, 여농의 신한은행이 그곳을 쓰는데다가 교통편도 좋은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이러니.[14] 게다가 현재의 구리체육관은 여자부 최악의 관중 동원력을 자랑한다.[15] 결국 공중분해 직전까지 갔고, WKBL이 수습해서 OK저축은행이 임시로 스폰서를 맡아 1년 동안 수원시를 임시 연고로 했었다. 임시 연고였기에 팀명에는 공식적으로 수원이 붙지 않았다. BNK의 인수 이후에는 모기업을 따라 부산에서 홈 경기를 할 계획이다. 이는 KDB-OK-BNK 프랜차이즈 첫 지방 연고지 이전이다.
연고지가 멀리 있다 보니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홈, 원정 할 것 없이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했고, 그래서 결국 버티다 못해 비어있는 부천으로 가버린 케이스다. [16] 더욱이 광주 연고 시절 홈구장이었던 구동체육관[17] 의 시설도 상당히 낙후된 데다 광주광역시의 지원 미비로 인한 설도 있다. 이후 신세계에서 하나금융지주로 구단이 넘어간 이후에도 부천을 연고로 계속 쓰고 있다.
1997년 프로농구 출범 당시 연고지는 모기업 삼성전자와 연관 관계가 깊은 경기도 수원시였다. 그러다 2000-01시즌이 끝난 후 KBL에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A] 당시 청주를 홈으로 사용하던 청주 SK 나이츠와 함께 서울 입성금을 지불하고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해 서울 삼성 썬더스가 되었다. 연고지 이전 과정에서 청주 팬들의 반발을 샀던 SK 나이츠와 달리 삼성 썬더스의 연고지 이전에는 큰 반발이 없었다.
삼성이 나름의 텃밭인 수원을 떠나 서울로 농구단 연고지를 옮긴 배경으로는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프로스포츠 팀을 통해 전국에 고르게 판촉해야하는 모기업집단 입장에서 수원에 '삼성' 팀이 축구·농구 두 개나 몰려있는 것보다는 거대시장인 서울에 하나를 분산배치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 탓도 있다.[18] 현재는 수원에서 삼성 썬더스 경기를 보러 가려면, 지하철을 타거나 수원 버스 3000(강남역)이나 777번, 7770번(사당역)을 타고 2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1997년 프로농구출범 당시 연고지는 청주시였다. 그러다 2000-01시즌이 끝난 후 KBL에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A] 청주시의 지원 미비를 이유로 들어서[19] 당시 수원을 홈으로 사용하던 수원 삼성 썬더스와 함께 서울 입성금을 지불하고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해 서울 SK 나이츠가 되었다.[20]
청주가 농구 인기가 높은 도시라 반발이 상당히 많았던 연고이전이다. 현재 청주에는 청주 KB 스타즈 여자농구단이 자리잡아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서울 SK 나이츠는 2018년에야 2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이유는 춘천호반체육관의 난방 문제. 2011년 한파로 인해 시설이 동파되어 다른 경기장으로 변경된 적이 있다. 몇몇 언론사에서는 우리은행이 위성우 감독 부임 이후 거의 매 시즌 우승한 데 비해 관중동원이 아쉬웠다는 점을 이전의 이유로 들기도 했다. 우리은행의 아산 이전으로 인해 WKBL 모든 구단이 한번씩 연고이전을 하게 되었다.
과거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21] 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프로농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설적인 명문구단이었으나 2001년 해태 타이거즈를 기아자동차가 인수하면서 현대차그룹의 1사 1팀 정책에 따라 현대모비스로 운영 주체가 변경되어(인수 대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연고지를 울산광역시로 옮겼다. 울산은 현대모비스의 본사와 현대모비스 울산공장에 이어 현대모비스 사원 기숙사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울산 모비스-현대모비스 선수단은 타구단이 호텔을 대관할 때 경비절감을 포함해서 마치 고등학생과 대학생 및 군인 시절처럼 숙사형 합숙을 한다.
이 연고이전은 옆도시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나마 논란은 적었지만 연고지 이전과 함께 농구대잔치의 역사를 간직한 기아자동차를 지워버리려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큰 비난을 받았다. 기아자동차 소속 선수들은 대부분이 팀에서 쫓겨나가게되었다. 이러면서도 기아자동차의 1997년 우승만 버리지않고 KBL 최다 우승구단이라고 지속적으로 자랑질을 하면서 다른 KBL 구단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22]
이전에 기아 시절 사용했던 부산사직체육관은 연고이전 이후 5년뒤인 2006년부터 KTF 매직윙스가 사용중이며 kt 소닉붐으로 이어진다.
연고지 때문에 속을 많이 썩힌 구단이다. 원래 연고지는 성남시였지만, 곧바로 천안시로 옮겼다. 국민은행 연수원을 연습장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내린 조치였다. 그런데 천안시에서 남자 배구단만 밀어주면서 체육관 대관을 해 주지 않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연습구장인 KB인재개발원을 임시 경기장으로 사용하였다.[23] 청주시와 2년간의 협상 끝에 2011년 1월부터 청주에서 경기를 치루게 되었다. 천덕꾸리기 신세였던 천안과 달리 청주 첫 경기에서 매진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연고 이전을 했다. 충청북도에 프로스포츠 팀이 없는 것도 이유겠지만, SK 나이츠의 청주 시절에 늘 만원사례를 이뤘을 정도로 농구 인기가 있다는 것도 이유다. 그런데 2014-15 시즌 현재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듯 하다. 특히 3년차인 홍아란의 맹활약으로 남자팬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청주실내체육관은 부천 하나원큐의 부천실내체육관,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도원체육관,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이순신체육관과 더불어 WKBL에서 수용 인원이 3000명 이상인 구장이다.
여기는 다른 팀과는 다르게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 케이스이다. 2004년부터 쓰고 있던 안산 와동체육관은 원래 지역민을 위한 생활체육용으로 지은 체육관이라 프로농구단이 쓰기엔 규모도 작고 관중석의 배치도 불편하며, 교통도 안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이 체육관을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였고, 결국 한계에 부딪혀 인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2001년 현대전자 소속이었던 대전 현대 걸리버스가 KCC로 주체가 바뀌면서 팀 명 변경과 동시에 연고지를 전주시로 옮겼다. 연고지 학교였던 대전고등학교에서 프로농구 선수를 배출하지 못하게 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사유는 흥행 저조. 이후 대전 지역에서 반발했으나 연고 이전을 막지는 못했다.
2016년에 연고지 이전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김승수 전주시장이 '''새 구장을 신축'''한다는 약속으로 겨우 붙잡아놨다.[24] 결국 2024년까지 전주월드컵경기장 부근에 새로운 체육관을 건립한다.
여자부는 연고이전이 많고, 남자부는 위 설명과는 달리 연고이전을 한 팀이 두 팀 있다.
아무문제도 없었고 인기도 많아서 관중도 많이 들어오고 심지어 인천시절에 우승까지 했는데 이전한 이유는 그냥 GS그룹의 서울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012~2015의 임시 연고지로는 구미에서 1시즌을 치른 뒤에 평택에서 2013년 가을부터 2015년 1월 03일까지 경기했다. [2020년]
경북에서 수도권으로 갔다가 다시 경상북도로 유턴한 케이스. 공기업 특성상 연고 이전이 본사의 이동과 맞물린다. 연고지 이전 후 이호 감독이 선수들과의 불화로 사퇴했음에도 건강악화라고 발표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 팀이 김천으로 연고이전해서 성남시에는 프로팀이 성남 FC 한 팀밖에 안 남았다.
KOVO 초대 총재가 김혁규였다.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라 그분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창기에 아직 프로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에 일정도 제멋대로였던 상황에서 마산 연고지를 쓰다보니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홈, 원정 할 것 없이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했는데다가 당시엔 옆동네인 창원의 창원 LG 세이커스라는 큰 산이 있던 점과 결합 되면서 결국 버티다 못해 수원으로 가버린 케이스다.[25] 한국전력의 경우 광주광역시 측에서 2019년에 광주로의 연고이전을 제안했으나, 수원시에 잔류하여 여전히 현대건설과 같은 체육관을 쓴다.
위의 WKBL KB 스타즈처럼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등쌀에 밀린 케이스다. 초창기에는 현캐와 공동 연고를 쓰고 있었으나, 현대캐피탈에서 각종 개념찬 행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범하게 운영하고 싶었던 흥국생명과 계속 부딪히게 되었다.[26] [27] 그래서 서로 불편해 하던 와중에 천안시 측에서 현대캐피탈의 손을 들어주면서 내쫒기게 되었다. 마침 서울에 우리캐피탈 드림식스가 창단하면서 자매 구단으로 GS칼텍스가 베팅하였고, 이참에 비게 된 대한항공 점보스의 짝으로 갈아타서 인천으로 옮기게 되었다. [28]
이 연고지 이전이 지금봐도 경악스러운 이유는 당시 흥국생명에는 '''김연경''' + '''황연주'''라는 여자배구 역대 최고의 스타들이 있었으며 우승도 4년새 3번이나 한 상황이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3번째 우승을 한 다음 시즌에 바로 쫓겨났다. 그리고 이 벌이었는지 몰라도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에게 처절하게 준우승을 당하는 세월을 10년 동안 보내게 된다.
LG화재 - LIG 시절에는 공장도 있었고 모기업이 구미에 애착이 있어서 정착이 잘 되었으나 손해보험사가 KB금융그룹으로 넘어가자 지점이 2개밖에 없는 구미에 남을 이유가 없어졌다.구단은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구미를 떠나냐는 말에 떠난다고 답했으며, 여러군데를 놓고 보다 경기도 의정부시로 연고지를 옮겼다.[29] 참고로 새로 사용하게 된 의정부실내체육관은 안양 KGC 인삼공사 팀이 SBS 시절 초창기에 안양시에 체육관이 없어서 1년간 홈구장으로 몇 경기를 치렀던 전력이 있다.
이로써 경상도는 경기도에게 배구단을 또 빼앗겼으며, 대경권 남자 추춘제 스포츠는 전멸, 경상도 남자 배구단도 명맥이 끊겼다.
때문에 다른 종목과 달리 연고지 이전이 쉽지 않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연고지를 옮긴다고 하면 동네 민심이 해당 기업에 완벽히 등을 돌려도 모자랄 수준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진다.[33] 따라서 구단 오너 측이 자의적으로 연고지를 옮긴 사례는 2000년 현대 유니콘스가 사실상 유일하다. 후술하겠지만 OB 베어스의 연고지 이전은 최초 서울을 연고로 창단하려던 계획을 KBO의 중재로 충청 연고 구단 창단으로 변환한 것에서 시작된다. 3년간 임시 연고지로 충청지역을 썼다가 KBO와의 약속대로 연고지를 옮긴 것이기 때문에 현대 유니콘스의 사례와는 다르다.
NC 다이노스의 경우도 홈구장 부지 선정 문제로 연고지 이전을 할 뻔 한 적이 있다.
멀쩡하게 운영되던 팀이었지만 원래 연고지였던 인천에서 모기업의 기대만큼의 인기가 없었고[35] 서울특별시 지역을 원했던 현대그룹의 지시로 2000시즌부터 대뜸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 속에 결국 서울 입성은 미뤄졌고[36][37] 해체될 때까지 수원시를 임시 연고지로 삼으며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가 수원시에 있는 동안 수원시민들은 수원을 서울 연고지 진출의 간이역처럼 생각하던 현대 구단의 행태에 무관심으로 대응했고[38] 이는 결국 흥행 대참패로[39] 이어졌다.
수원에 있는 동안에는 공식적인 연고지가 없었으므로 1차 지명권이 소멸되어 KBO 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1차 지명을 하지 못했다.
한국프로야구 창단 당시 서울연고를 원했지만, 지역분배로 어쩔수 없이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다. 단 이때 한국야구위원회와 이용일 사무총장이 "3년후에는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게 해주겠다."라고 약조를 받았다. 창단 때부터 충청도를 완전히 비워둘수는 없는일이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가야했던것. 원년 우승도 하고 3년정도 연고지를 삼아 경기 했던 향수가 남았는지 지금도 충청도는 한화를 제외하면 두산의 팬들이 꽤 있는 편이다.
1985년에 "이제 약속 지켜!"라며 서울특별시로 연고 이전, 동대문야구장을 홈으로 썼었으나 아마야구계의 반발이 심했고, 이때문에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임시로''' 잠실 야구장을 같이 쓴다는 조건으로 MBC 청룡이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잠실 야구장으로 구장 이전(?)을 시도했다. 그런데 1988년 후에도 아마야구의 텃세등 여러가지사정으로 인해 동대문야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잠실 야구장에 눌러 앉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잠실라이벌인 '''LG 트윈스''' 팬들과 '''두산 베어스''' 팬들은 사이가 영 좋지 못하고 LG 팬들은 두산 팬들을 '세입자'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진정한 잠실의 주인은 엘지다!"라고 일상적으로 비아냥 대고 있다. 잠실을 2개 구단이 이용하면서 잠실에서는 사실상 매일 경기가 열리는 상황이라 KBO와 일반 팬들 입장에서는 좋지만, 구장 내 공간 활용에 있어 제약이 많고, 특히 원정 팀의 경우 공간 문제로 별도의 원정 라커룸이 없는 등으로 인해 더욱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현 K리그의 전신인 슈퍼리그가 개설되면서 5개 구단이 참여 하는데, 명목상의 연고지만 있었을뿐, 당시 전국 9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경기를 하는 방식이라 사실상 중립경기의 연속 이라서 홈과 원정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연고지 정착이 더디었다. 또한, 팀 수 확충을 이유로 실업리그의 우승팀에게 슈퍼리그 참가권을 주었는데, 이렇게 참가한 한일은행과 상무는 아예 '''연고지가 없는''' 상태로 참가 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연고지 배분이 제대로 되지않았고, 구단이 실업리그로 가는등 정리가 되지 않는 모습이 계속 되다가, 1990시즌 부터 어느정도 틀이 잡히게 된다.단, 이때도 서울 3팀, 경상도 3팀(울산, 포항, 부산)의 구조 여서 전국단위의 팀 구성이 되지 않는 상태 였다.[40] 1994시즌 전북 버팔로, 1995시즌 전남 드래곤즈가 창단하여 서울 VS 영남 구도가 타파 되었으나 1996시즌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 3개 구단이 연고이전을 하게 된다. 또한 1996년부터 지역연고제가 실시됐다.
광역지역연고제를 도입했던 초기에는 인천과 경기도를 홈으로 하고 있었으나 1987년에 강원도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후 1990년 현대의 본거지라고 할수있는 울산광역시로 연고를 이전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유니폼에 기업명 대신 지역명을 크게 찍은 것도 최초로 시도했다. 가슴에 현대를 빼고 '울산' 두 글자를 크게 넣었던 것. 그러나 팀명을 기업명에서 지역명으로 바꾼 조치가 내려지자 가슴엔 다시 현대가 새겨졌다.
K리그 초창기인 슈퍼리그 시절, 광역연고제에 의해 충청도를 연고지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출범하였다.[41] 그 후 1987년 광역연고제에 이어 1990년 도시지역연고제가 도입되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 일화, 유공과 함께 동대문 3대 구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6년만인 1996년 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월드컵 유치를 위한 지방 축구열기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서울 연고지에서 강제 축출하면서 안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당시 프로연맹이 내건 구실은 서울 구단들의 홈경기 소화율이 너무 낮아 지역연고 확립을 저해한다는 것. 하지만 당시 서울 동대문운동장은 지금처럼 양잔디가 아니기 때문에 5월 이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고 특히 서울은 3개 구단이 한 구장을 사용하고 지방 구단들 역시 잔디 보호와 운동장 대관 사정 등으로 지방에서 홈경기를 개최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서울만 딱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당시 실제 연고지에서의 홈경기 비율을 보면 LG, 일화, 유공 서울 연고 구단들이 대략 75퍼센트, 대우, 포철, 현대 지방 구단들이 85% 정도를 소화했다. 즉 서울 3개 구단이 단일 경기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엄청난 홈경기 소화비율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지방 순회 경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계기는 2002 월드컵 이후 전용구장 비롯 4철잔디와 라이트 시설 등 축구장 인프라가 완비되면서부터 거의 없어진 것이지 지역명을 붙이기 시작한 1996년부터 뚝딱 시행된게 아니다. 1995년까지는 서울이 아닌 타도시에서 홈경기를 가졌기 때문에 서울에서 안양으로 연고이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안양 LG 역시 출범 첫 해인 1996년은 계속 동대문에서 홈경기를 가지고 그 외에 창원, 진주, 구미 등에서 홈경기를 가졌고 부천SK는 2000년까지 서울에서 홈경기를 가졌다. 지방 구단들 또한 울산이 1997년에 경주, 포항이 2000년에 안동, 부산이 2000년에 창원에서 2경기를 했었다. 2002 월드컵 개최 이전까지 당시 경기장 인프라 사정 때문에 비연고지에서 홈경기 개최가 심심찮게 있었던 것처럼 1990년에서 1995년 사이에도 똑같이 경기장 인프라 때문에 지방순회경기를 했던 것이다. 1990년과 1995년 서울 동대문 시절에 비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안양 연고이전이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안양LG 시절에도 비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했기 때문에 2004년 안양에서 서울로 연고이전도 문제가 없다는 논리에 도달할 수 있다.
LG, 일화, SK 모두 옮길 생각 전혀 없는 상태에서 '''쫓겨났고''' 이는 훗날 더 큰 논란을 불러온다. 그 후 2000년 연맹이 주최한 서울 연고지 가치 평가회에 참가하는 등 다시 서울로 연고지 이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관련 기사 2003년 후반기부터 언론을 통해 서울로 연고이전을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기사가 나왔다. 2002 월드컵 인프라 혜택을 못 받은 안양 LG는 2003년에도 창원에서 홈경기를 가졌다. 심지어 2003년 가을에 안양 홈경기를 킥오프 5분 전에 우천취소 시켜버리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는데 구단 측이 안양에 마음이 떠났음을 보여주는 사례. 2003년 말 서울 연고 신생팀을 창단하려던 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계획이 유치 작업을 했던 대기업들에게 모두 거절 당하고 또한 시민구단 창설에 부정적인 서울시의 태도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프로축구연맹은 신생팀으로 서울 연고팀을 만들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기존 구단의 연고이전을 통해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전 구단에 서울로 연고지 이전 신청을 받는다. 이에 안양 LG는 가장 먼저 연고이전 의사를 내비쳤고 역시 서울로 연고이전을 희망했던 부산 아이파크가 신청 철회를 하자 단독 후보가 되어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연고이전 승인을 받고 다시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였다. 일련의 과정들은 '''서울연고공동화정책'''과 FC 서울 문서를 참조.
K리그 최초 단독으로 서울을 연고로 하는 일화 천마 축구단으로 창단하였지만 유공과 LG가 잇따라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면서 서울 연고를 세 팀이서 나눠쓰게 된다. 1996년 지방 축구열기 활성화라는 명목하에 천안으로 연고지를 이전당했다. 그 후 천안시에서 천안오룡경기장의 부실한 시설때문에 1998년 11월경부터 성남시와 접촉을 시작했고 2000년 마침내 연고지 유치 제안을 받아들여 연고지를 이전했다. 처음부터 연고이전 생각하고 움직인건 제주, 서울과 똑같은데 마침 성남시 시설이 개판이고 축구팬 수도 적어 묻어가는데 성공한 케이스. 동대문 일화가 천안으로 밀려나는 과정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 참고.
당시 축구단을 못 마땅하게 여기던 SK그룹 때문에 입지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제주도에서 프로축구단 유치를 하기 위해 클럽하우스 부지 무상제공을 내걸며 접촉해왔고 2006년 제주도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K리그 챌린지 첫해인 2013년에는 연고지가 없어서 전 경기를 원정으로 치렀다. 2023년까지 의무경찰 폐지 결정에 따라 해체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시민구단 전환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K리그 연맹에선 안산 무궁화와 아산 무궁화는 별개의 클럽으로 구별함으로 연고 이전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2015년부터 연고 이전설이 나돌더니 2016년을 마지막으로 충주를 떠나는게 되었다. 모기업인 대원이노스는 불황과 충주시의 지원미비를 이유로 2016년을 마지막으로 축구단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2016년이 지나도록 인수하겠다는 지자체도 나타나지 않아 이제 단순 연고이전이 아니라 사실상 팀 해체에 들어갔다.
충주 험멜과 마찬가지로 실업 리그 시절 줄창 연고지를 옮겨다닌 사례. 2003 시즌은 익산 원불교도들의 항의로 전기 리그만 치르고 떠났다. 2004년에는 김포로 옮겨갔지만 역시 3년간의 연고 협약 기간 이후 연장에 실패, 신축한 와~스타디움을 놀리고 싶지 않았던 안산시의 러브콜에 응하여 안산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당시만 해도 할렐루야는 아슬아슬하게 우승에 실패하는 등 가능성이 있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안산은 이런 할렐루야를 유치하여 빠른 시일 내에 연고 프로 구단을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안산시가 계산적인 자세로 나오다보니 할렐루야의 성적이 시들해짐에 따라 지원 또한 줄어들었고, 2011년에 연고 협약 연장 문제로 잡음을 빚으며 관계가 파토나버렸다.
2013 시즌을 앞두고 마침 고양 KB의 해체로 연고 축구단을 잃어버린 고양에, 그것도 시로부터 지원도 얼마 받지 못하는 조건을 수용하는 저자세를 취하면서까지 옮겨갔으나 종교색 등으로 인해 환영은 받지 못하는 상황. 구단 사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결국 2016년11월28일 프로축구연맹에 탈퇴서를 제출했고# 구단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상기한 연고이전 사례들과는 다른 경우로, 10년간의 연고지 계약을 맺고 10년마다 지역을 옮겨다니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44] 기존에는 별도의 연고지 설정 없이 존재하다가 2002년 광주광역시에 처음 연고를 가졌으며, 2011년부터는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한 문경시 인근의 도시에서만 연고를 트고 있다.
대만은 연고지 정착이 매우 안 되어있는 리그 중 하나다. 퉁이 라이온즈를 제외한 모든 팀이 연고지 이전 경험이 있을 정도. 애초 출범시부터 타이베이에 야구장은 딱 하나 있는데 3개팀이 타이페이를 연고지로 삼고 있었으니 연고지 정착이 될 리가 만무했다. 홈 경기를 자기네 연고지에서 치루지 않는 리그였으나 2018년 이후로는 홈 경기를 메인 구장에서만 소화하고 있으며, 지역명 표기가 된 얼트 유니폼들도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2002년 대만의 양대리그중 하나였던 TML 소속의 "타이베이 타이양"과 "가오핑 레이공"이 합병한 디이진강이라는 팀이 전신이다. 이후 2003년에 대만의 라뉴 그룹이 인수, 라뉴 베어스로 창단되었고 최초 연고지는 가오슝이었는데 2011년 연고지를 가오슝에서 타오위안으로 옮기며 이름을 라미고 몽키즈로 변경했다.
1993년에 타이중을 연고로 창단되었다. 이후 2012년에 모기업이었던 싱농그룹이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매각을 선언, E-United 그룹이 인수했고 인수와 동시에 그룹 본거지가 있는 연고지를 가오슝으로 옮겼다. 그후 EDA 라이노스라는 이름으로 운영 되던 중 모기업이 푸방(Fubon)금융그룹으로 변경[45] 되면서 연고지를 타이페이로 옮기게 되었다.[46] 해체후 재창단이 아니라 EDA 라이노스의 역사를 계승하기 때문에 연고이전 역사에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바로 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두 팀이 사실상 연고지를 맞바꾼 상태다. 물론 연고지 이전도 시기가 다르고 푸방의 경우 가오슝으로 갔다가 타이페이로 간 것이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리그가 출범한 해는 1934년이지만[47] , 본격적으로 연고지 개념이 생긴 건 프로야구 지역 보호권이라는 제도가 도입된 1952년부터다. 여기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곤즈는 과거 태생지(도쿄, 나고야)를 연고지로 삼았고, 한신 타이거스는 태생지인 오사카 대신 효고를 연고로 삼으며 문제 없이 정착했는데, 나머지 팀들은 구단주의 사정 혹은 흥행 문제에 따라 연고지 이전을 경험해야 했다. 한 때는 도쿄에 4팀, 간사이에 4팀이 몰려있었을 정도로 2점 집중이 심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는 닛폰햄과 다이에가 각각 삿포로와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2005년에 창단한 신생팀 라쿠텐이 미야기를 연고로 삼으면서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후쿠오카를 연고로 창단되었으나 모기업이 니시테츠 라는 지방 사철이라 돈도 없고 관중동원도 시원치 않은 판에 검은 안개 사건이라는 희대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게 되어 성적까지 밑바닥을 쳐버리고 결국 1972년을 끝으로 손을 뗐고 당시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 나카무라 나가요시가 인수해 현재의 넥센 히어로즈처럼 구단 명명권과 광고 수익 그리고 사재등으로 운영했으나 결국 gg를 치게 되며 1978년에 세이부 철도에 매각하게 된다. 세이부 철도는 매각 조건으로 사이타마로의 연고지 이전을 제시했는데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결국 승인하고 1979년에 사이타마현으로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 뒤 후쿠오카 팬들이 다시 그들 지역의 야구단을 얻는 데는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한큐 시절에는 오사카 근교의 니시노미야에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이라는 구단 소유의 전용구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니시노미야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은 고시엔에서 차로 불과 10여분 떨어진 거리에 한큐전철 니시노미야 기타구치역 앞에 있었다.[48] 구단이 한큐로부터 오릭스로 인수된 후에도 구단 매각조건에 따라 2년동안은 '''오릭스 브레이브스'''로서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을 사용했다. 그러다 1991년부터 구단 이름을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바꾸고 홈구장도 당시 신축구장인 그린 스타디움 고베[49] 로 연고지를 이전했다.[50] 그후 2004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를 합병함으로써 구단 이름을 오릭스 버팔로즈로 바꾸고 긴테쓰의 홈인 오사카 돔을 주 홈경기장으로 블루웨이브시절의 홈구장인 홋토못토 필드 고베를 보조 홈경기장으로 사용하는 현재의 체제에 이르게 되었다.
센트럴 리그 구단 중 유일하게 연고지 이전이 있는 팀. 1950년 시모노세키를 연고로 다이요 훼일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는데 1953년 영화회사 쇼치쿠 산하 구단 로빈스와 합병하면서[51] 팀 이름을 다이요-쇼치쿠 로빈스로 바꾸고 쇼치쿠 본사가 있는 교토로 이전했다. 2년후 쇼치쿠가 구단 운영에서 손을 때면서 다시 다이요 훼일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왔고 가와사키로 연고지를 옮겨 가와사키 구장을 사용했다. 1978년 요코하마 스타디움이 건설되자, 떠돌이 생활하던 롯데 오리온스와 치열한 경쟁끝에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52]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바다 건너 자매구단은 당초에 서울을 원했지만, 일련의 과정 끝에 부산을 선택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되며 현재까지 부산에 정착하고 있다. 치바 롯데가 우승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2번 우승한 것은 덤.
보면 알겠지만 구단주의 욕심이 아니라 집이 없어서 떠돌이 생활한 정말 안습한 연고지 이전 케이스다.
1946년에 창단된 후 여러 기업에 매각과 인수를 거쳤지만 연고지는 도쿄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도쿄돔을 홈구장으로 쓰는 전국구 구단을 응원하는 팬들이 압도적이었고, 만년 비인기 구단의 설움을 누리고 있었다.[55] 결국 닛폰햄에서는 이러한 안습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실내 돔구장이 있음에도 야구단이 없어서 비어있는[56] 홋카이도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게 되며 이는 홋카이도 닛폰햄의 최고의 한수가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도쿄나 오사카 혹은 그 인근에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무너지고 '지방이라도 지역민들의 사랑만이라도 차지하면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57] , 일본야구 팀명에 지역명이 하나둘씩 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시 연고지 이전 떡밥이 돌고 있다. 삿포로 시의 비협조로 키타히로시마시에 새 구장을 짓고 그 쪽으로 옮기겠다는 것. 팬들 역시 삿포로 시가 협조를 전혀 안 했다는 것에 대해 대차게 비판하며 키타히로시마시 이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같은 홋카이도인데다 삿포로 시 근처라 팀명이나 팬베이스가 바뀔 것 같지는 않을 듯 하다.
1938년부터 1988년까지 50년의 시간동안 오사카를 연고지 오사카 구장을 사용하던 팀이었다. 난카이 전기철도가 모기업이었던 난카이 호크스는 팀의 에이스였던 노무라 카츠야가 1977년 떠난 이후로 B클래스(리그 4~6위) 비밀번호를 찍고 있었다.[58] 결국 1988년 구단 창단 50주년 기념(...)으로 매각을 추진했고[59] 일본의 유통업체 다이에가 인수해 1989년 후쿠오카로 연고지 이전 했다. 그리고 다이에는 당시 800억엔, 한화 8천억원을 직접 때려박으며 신식 돔구장을 지었는데 10만에 소프트뱅크에 기업을 매각했다. 돔 구장은 해외자본에의 매각을 거쳐 최종적으로 소프트뱅크 측에서 경영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원래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으나 뉴욕 주에도 아메리칸 리그 팀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뉴욕으로 옮겼다.
이 팀이 다저스타디움에 있으면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라는 팀명을 쓴 시기는 애초 창설 때부터 홈구장으로 쓰려고 계획한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을 신축하기 이전까지, 세입자로 잠깐 있었던 것이고 66년 완공후 팀이 이사하고 난 이후에는 지역명만 몇번 바뀌었을 뿐이지 홈구장 자체를 옮긴적은 없다.
시애틀 파일러츠가 재정난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1970년 버드 셀릭이 투자자들과 함께 이 구단을 사들여 밀워키로 팀을 옮겼다. 팀을 잃은 시애틀은 1977년 리그 확장을 통해 시애틀 매리너스가 창단되어 자리잡게 되었다.
뉴욕 자이언츠[60] 로 맨하튼의 폴로구장을 홈으로 쓰고 있었으나 역시 뉴욕 양키스로 인해 입지가 줄어들면서 다저스가 서부로 옮길때 따라 나왔다. 다만 이후 재연고지이전 위기를 '''두 번이나 겪었는데''', 1976년에는 구단주가 당시 팀을 토론토의 주류 회사인 래뱃 그룹(Labatt Brewing Company)에 파는데 합의까지 했었으나, 미국 법정에서 이를 무효화 시켜버리는 덕분에 연고이전이 무산이 되었다[61] . 이후 90년대 초반에는 캔틀스틱 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열악한 홈구장의 상태에 진저리를 내고 당시 신규구장으로 유혹을 해오던 탬파로 구장을 이전할 것도 고려했으나 샌프란시스코 팬들이 '제발 가지마(Please don't go)!'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한데다 시에서도 새구장을 지어줄 것을 약속하면서 결국 잔류를 결정했다. 이후 오라클 파크가 지어진 후 부터는 새로운 구장도 생긴데다 우승도 자주 하게 되어 확실하게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캐나다 연고 최초인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창단하였으나 워싱턴 D.C로 이전하였다.
1961년 미네소타 주로 이전한 워싱턴 세네터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텍사스 주로 이전하였다.
보스턴 레드삭스에 밀려 흥행이 저조해지면서 1953년 밀워키로 연고지 이전을 하는데, 이는 190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체제 정립 이후 최초의 연고지 이전으로 이후 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대대적인 연고지 이동이 일어나게 된다. 밀워키에서 우승을 1회 기록한 브레이브스는 1966년 다시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이전하였으며, 199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연고지로 삼았던 세 도시에서 각각 우승하는 기록을 남겼다.
최초 캔자스시티에 창설되었지만 캔자스시티 치프스가 버티고 있어서 1976년에 콜로라도주 덴버로 연고지 이전한다. 그곳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로 팀명을 바꾸고[64] 노력을 해보지만 역시나 인기를 얻지 못하고 뉴저지주 이스트러더퍼드로 연고지 이전 했다.
캔자스시티엔 다시 아이스하키팀이 생기지 않은 반면, 덴버는 새 하키팀이 생겼는데 그 것이 바로 퀘벡의 눈물이라는 후술할 그 팀.
캐나다와 가까워 아이스하키가 무지막지하게 인기가 많은 미네소타주지만 대학 아이스하키에 밀려 인기도 없고 존재감이 미미한 팀이었기에 구단주 노먼 그린이 언론재벌 톰 힉스에게 매각한후 텍사스 주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팀명에서 '노스'를 뗐다.
이후 NHL팀이 사라지자 섭섭했던 미네소타 시민들의 청원으로 미네소타 와일드가 새로 창단되었다.
애틀랜타는 전통적으로 풋볼과 야구가 강세인 지역이었고 미국 남부는 하키 인기가 없기도 해서 아이스하키팀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았고, 결국 10-11시즌을 끝으로 舊 위니펙 제츠가 떠나서(1996년 이전) 아이스하키 팀이 없던 캐나다의 중소도시 위니펙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상단에 나와있는 위니펙 제츠의 선구자격 연고지 이전이다. NHL은 또 한번 애틀랜타 시장을 노렸으나 역시 안될 곳은 안된다.
팀이 매각되면서 캐나다를 떠나 미국으로 옮겼다. 이후 퀘벡 연고는 몬트리올만 남게 된다.
이 연고지 이전을 두고 "퀘벡의 눈물"이라 불렀다. 아시다시피 캐나다 아이스하키 인기는 극강이었고 대도시 퀘백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컬 팀을 사랑했던 퀘백 시는 팀을 잃자 절망감과 박탈감에 앓아누웠다.
캐나다 위니펙에 위치했던 팀이었다. 팀명도 위니펙 제츠로 현재의 위니펙 제츠와 동일한 팀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95-96시즌을 끝으로 애리조나주 피닉스로 연고지 이전했고, 위성도시 글렌데일에 새 체육관이 생기며 2003년에 또 연고이전을 했다.[68] 그 후 아이스하키 팀이 없던 위니펙에 한 팀이 연고지 이전을 했는데 그팀이 바로 위에 언급한 위니펙 제츠.
상술한 콜로라도처럼 캐나다에서 연고이전한 둘밖에 없는 팀이다.
로스앤젤레스 이전이 확정된 램스와 더블어 LA 이전의 우선 협상권을 가지고 있다. 협상 여하에 따라서는 램스와 홈구장을 공유하면서 LA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 그러나 소속 주전 선수들 중에 쿼터백 필립 리버스를 위시하여 샌디에이고 도시 자체에 애착을 가진 선수들이 꽤 있어서 이 선수들이 LA 이전에 반발하고 팀을 떠나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할 위험이 있다. 게다가 애초에 자신들이 낸 제안이 부결되고 램스의 제안이 채택된 상황에 불만을 가진 상황이라 LA 이전의 가능성은 꽤 불투명한 상황.
그러나 현지시간으로 1월 12일, 결국 LA로의 연고이전이 확정되었다. 그나마 LA에서 팬덤을 가지고 있던 램스와 달리 차저스는 LA에 팬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MLS 로스앤젤레스 갤럭시가 사용하는 작은 구장 디그니티 헬스 스포츠 파크를 빌려 쓰고 있으며 관중 동원은 잘 되지 않고 있다가 좋은 성적을 내자 팬이 많이 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 정확히는 산타클라라에 새로 지은 리바이스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그러나 팀명도 샌프란시스코로 포티나이너스로 유지하고 있고 홈구장 위치만 옮겼지 연고지 이전이라고 생각 안하는 분위기다. 사실 거리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되지 않는 곳이라 연고지 이전이라고 하기도 뭣한 상황.
시카고 베어스에 밀려 만년 2류팀으로 전락해버리자 1960년에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다. 그런데 인기를 얻고자 연고지 이전을 했는데 그곳에 이름이 똑같은 야구팀이 존재했고 "인기 얻으려고 팀이름을 따라짓냐!"라는 비아냥도 얻게 되었다.[69] 이팀 때문에 인기는 커녕 투명팀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연고지 이전한 팀 + 성적은 개판인 상황에서 카디널스는 두번째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고 1988년 현재의 연고지인 애리조나 피닉스로 다시 이전하게 된다.
이미 한번 오클랜드를 배신하고 로스앤젤레스로 튄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로 복귀하자, 홈 경기장인 오버스톡 닷컴 콜리시엄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연고지 이전을 추진했다. 일단 램스, 차저스와 경합한 LA 이전은 구단주 회의 때 램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차저스가 우선 협상자로 선정이 돼서 밀려났지만, 차저스가 협상을 포기하고 샌디에이고로 남기로 결정할 경우에는 레이더스에게 LA 이전을 놓고 램스와 협상을 할 권리가 주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2020년부터 라스베이거스로 이전이 결정되었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역대 최악의 연고지 이전 작전'''이 벌어진 팀이다. 그야말로 연고 이전계의 '''안좋은 쪽으로 레전설'''이자 '''NFL판 북패 No. 1'''.[71] 볼티모어 시와 팬들 등에 칼빵을 놓고 튀어 버린 팀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원조 야반도주 문서 참조. 아직도 미국에서 연고지 이전의 가장 안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정확하게는 '''해체 후 재창단'''이다. 쌍방울 레이더스와 SK 와이번스의 관계, 현대 유니콘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구단주였던 아트 모델이 클리블랜드시에 노후해가던 기존구장 대신 신축구장 건설을 요구했지만 시에서는 돈이 없다며 거절했고[72] 이후 신축구장을 건설해주겠다는 볼티모어로 기습적으로 연고지 이전을 했다. [73] 레이븐스의 전신인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역사는 1999년에 재창단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계승하고 있다.
원래 휴스턴 오일러스로 창단되었는데 홈구장인 애스트로돔[74] 이 노후화되었고 이때문에 신축구장 건설을 요구했으나 당시 휴스턴 시장이었던 밥 레이니어가 거절을 했고 같이 애스트로 돔을 홈으로 쓰던 야구팀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엔론 필드라는 신축야구장 건설을 시에서 허가한 상태였다. 이에 시에 대한 불만이 커진 휴스턴 오일러스는 1997년 새로운 구장을 건설해주겠다는 테네시 주 내슈빌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다. 단, 이전 시점에서는 새 구장이 막 삽을 뜬 상태라 첫 1년은 멤피스의 리버티 볼, 그 다음 해에는 내슈빌의 밴더빌트 스타디움을 임시 홈으로 사용했다.
AFL 창설때 생긴 구단으로 댈러스를 연고로 창설했지만, NFL이 댈러스 카우보이스로 견재를 하고 흥행에서 밀리자, 적극적으로 새로운 연고지 정착을 도운 캔자스시티로 연고를 이전했다. 이때 텍산스에서 치프스로 구단 명칭을 변경.
1988년에 창단된 샬럿 호네츠가 2002년에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로 연고지 이전하면서 뉴올리언스 호네츠라는 팀명을 사용햇으며 이후 2013년에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팀명을 바꿨다. 2005년 카트리나로 인해 홈구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때 옆동네 오클라호마에서 2년 동안 홈구장을 빌려썼고, 이때 뉴올리언스/오클라호마 호네츠로 잠시동안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호네츠는 2014년부터 원래 있던 지역의 상징인 펠리컨을 따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이름을 바꿨고, 2004년에 샬럿에서 호네츠를 대신해 창단된 샬럿 밥캣츠가 NBA와 뉴올리언스의 동의를 얻어, 샬럿 호네츠로 이름을 바꿨다. 또한 양 구단 간 협의 끝에 족보도 확실히 정리하면서 펠리컨스 창단은 1988년이 아닌 2002년으로 확정되었고, 현 호네츠는 1988년 창단, 2002년 탈퇴, 2004년 재가입이라는 복잡하지만 연고지 기준으로는 깔끔한 구단 역사를 확립했다. 설령 공식 역사에 따라서 샬럿 역사를 파낸다 해도 뉴올리언스에서 오클라호마 연고이전이 있으므로 연고이전 구단인 건 맞다.
원래 뉴저지에서 창단을 했는데 당시 ABA소속이었기에 NBA의 견제로 제대로 된 홈구장을 가지지 못했고, 결국 홈구장으로 티넥 무기고[77] 를 쓰게 되었는데 이곳도 뉴저지의 서커스단이 공연을 한다는 이유로 ABA 플레이오프 자격을 박탈당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아 씨발 여기선 못해먹겠다."라고 해서 간게 뉴욕 롱아일랜드 아레나였고 그곳에서 NBA 소속이던 뉴욕 닉스의 압박으로 결국 팀명을 뉴욕이 아닌 뉴저지를 쓰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학교 홈구장을 전전긍긍하다 1981년에 뉴저지 브렌던 번즈 아레나로 연고지 이전 했다. 그야말로 안습의 향연.
그리고 07-08시즌이 끝난후 세계 34위의 갑부인 미하일 프로호로프가 구단을 인수하고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뉴올리언스의 문화인 재즈를 팀의 이름으로 삼았고, 모르몬교가 대다수인 솔트레이크 시티로 연고이전하면서도 팀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뉴올리언스 시절 팀에서 뛰었던 피트 마라비치는 대학도 뉴올리언스에서 나온 지역을 대표하는 레전드 선수였고, 나중에 뉴올리언스에서 창단된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도 그를 영구결번했다.
시라큐스에서 챔피언 결정전 단골손님으로 활약했으나 스몰마켓의 한계로 좀더 큰 도시로 나갔는데 그곳이 현재의 필라델피아였다.
구단주였던 하워드 슐츠가 홈 구장인 키 아레나 보수 제안을 시애틀 시에 요구했으나 시 의회에서 이를 거절하자 구단을 오클라호마 지역 사업가 클라이 베넷에게 넘겼고, 베넷은 새 구장 건설을 우선 요구했다가 시 측에서 배째라로 나오자 아예 구단을 자신의 기반인 오클라호마시티로 연고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선수단과 구단 프런트는 그대로 옮겨가는 대신 팀의 로고, 뱃지, 트로피를 비롯한 다른 권리들은 시애틀 시에 귀속시킴으로써 새롭게 탄생한 팀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는 사실상 새로 창단한 팀이 되었다.
J리그 출범 당시 도쿄에 리그 규격을 만족시키는 구장이 없어 가와사키로 이전했으며, 2001년 도쿄로 돌아왔다.
대륙 스케일 답게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다. 광저우 부리, 베이징 런허, 상하이 선신, 허난 젠예, 저장 이텅 등 원래 연고지에서 대륙 한바탕 유랑하고 다시 원래 연고지로 복귀한 경우도 많고 거기에 갑급리그, 을급리그까지 포함시키면 독립 문서로 만들어야 할 정도이며 다 합치면 연고이전 발생횟수가 '''200회''' 정도가 된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연고 이전팀들에 대해서 중국의 축구팬들은 "유랑거우"(流浪狗-떠돌이 개새끼)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있다.
결국 2016년 1월부터 중국축구협회는 연고이전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금지시키는 기한까지 여러 도시, 여러팀에서 연고이전이 진행되었고 대표적으로 구이저우 런허가 베이징으로 연고 옮겼다.
2014년 8월 공교롭게도 MK 돈스와 AFC 윔블던 두 팀이 리그컵 토너먼트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역사의 연속성을 뜻하는 머플러를 들어올린 MK 돈스의 팬이 카메라에 잡혔다. MK 돈스가 윔블던의 후신이지, 너희가 후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고 이전의 뒷처리가 참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기에 한국 프로축구에서 벌어진 큼지막한 연고 이전사례 몇 건을 생각해보면 씁쓸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루 아침에 지역 팀이 떠나갔음에도 팬들이 모여 다시 새로운 팀을 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기에 가능한 일.
결국 한국 프로축구는 3S 정책의 일환으로 기업들 옆구리 찔러 급조된 태생적 한계상 팬들의 사랑으로만 자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78] 저런 사단이 났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프로축구연맹도 각 기업구단 오너나 관계자들이 총재를 비롯한 높은 자리를 돌려먹는 판국이라, 저런 수 차례의 연고이전 건에서 중재는 커녕 지역 밀착보다 이익을 더 우선시하려는 구단측의 동향을 그냥 손놓고 지켜보거나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를 연고지로 하다가 아과스칼리엔테스 로 연고지 이전을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멕시코 축구 리그는 연고지 이전이 많은 편이다.
201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역 아마추어 클럽이 디나모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다시 변경하면서, 이전의 디나모의 역사를 승계하게 되었다.
Relocation
1. 사전적 정의
연고지 이전, 또는 연고 이전은 혈통, 정분, 법률 따위로 관계나 인연이 맺어진 곳인 연고지를 옮기는 행위를 말한다.
과거에는 주민등록상 본적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2. 스포츠에서의 연고지 이전
연고지 이전이라는 단어는 지역 밀착이 강한 프로스포츠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구단을 소유한 구단주의 입김 또는 지자체+지역 주민의 비협조 등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기업형 구조를 가진 독립 리그형태의 운영 국가에서 특히나 자주 일어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유럽 축구의 경우는 대부분의 구단이 지분은 외국인에게 있다고 해도 지역 기반으로 창단한 지역클럽이 많고 축구팀은 어지간히 큰 도시면 다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연고 이전할 곳이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지만, 미국, 일본, 한국같은 기업형 리그에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도시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며,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가장 인구가 많고 광고효과를 누릴 수 있는 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을 가지 못하는 구단의 경우 서울 인근의 위성도시에 구단을 연고지 이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프로스포츠 팀이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면 그 파장은 상당히 크다. 사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프로스포츠 팀 정도면 경기 한번에 최소 1,000명, 구장 규모에 따라 수천 수만 명의 유료관중이 경기장을 찾아오게 되어있고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 인한 경제효과가 생기기 때문에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국내 스포츠에선 종목마다 발생 빈도나 이에 따른 반응이 갈린다.
태동기부터 대기업의 지원 아래 기업과 관련있는 대도시에서 시작했고, 지역감정까지 맞물려 연고밀착이 굉장히 강하게 이뤄진 KBO리그는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다 실패해서 수원에서 유목 생활을 했던 현대 유니콘스를 제외하곤 연고 이전이라 할 만한 사례도 없고[2] 모기업에서 그런 논의 자체를 안 한다. 오히려 팬이나 구단이 연고에 너무 집착해서 생기는 부작용도 많다.[3]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 유니콘스의 사례는 프로야구판에서 유례없이 욕을 먹었고 현대는 수원에서 붕 떠버려서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4회 우승에 빛나는 성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인기 구단이었다.[4]
반면 상대적으로 스몰마켓인 '''프로배구'''와 '''프로농구'''는 상당히 흔했다. 남자프로농구의 경우 원주 DB 프로미, 창원 LG 세이커스, 안양 KGC인삼공사[5]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6] 를 제외한 전 구단, 여자프로농구는 전 구단이 연고 이전 경험이 있다.
한편 미국식의 프랜차이즈 체제보다 유럽식의 연고 개념을 지향하려는 성향이 강한 K리그의 경우 반발이 심한 편인데, 이로 인해 2000년대 이후 연고지 이전을 한 성남 FC, FC 서울, 제주 유나이티드 등의 팀을 지칭하는 '''패륜'''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런 연고지 이전이 나중에 구단 간 악감정이나 마찰을 통해 더비 매치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FC 서울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슈퍼매치.
뉴올리언스 세인츠처럼 팬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7] 으로 연고지 이전 떡밥을 잠재우는 경우도 존재한다. 반면 신규구장을 요구하다가 지자체에서 세금인상을 들어 반대해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하는 일도 있다 로스앤젤레스 차저스나 오클랜드 레이더스[8] 가 이런 경우. 볼티모어 레이븐스역시 전신격인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였던 시절[9] 클리블랜드 시에서 신규구장 신축에 미온적으로 나왔던 것 때문에 팀을 터트려버리고 볼티모어에다 새 팀을 만든 것이다.
2.1. 관련 문서
3. 대한민국 스포츠의 연고지 이전 사례
3.1. KBL/WKBL
리그 출범 시점부터 현재까지 안 떠난 팀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연고지 이전이 빈번한 편이다. 한국프로농구/문제점 참조.
3.1.1.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2011년 모기업인 오리온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연고지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홈 관중난으로 인해 결국 대구에서 고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다만 대구 오리온스 시절에도 대구시에 대한 연고정착 의지는 부족했는데 숙소와 훈련시설은 용인시에 있었고 '''구단 사무실은 서울특별시에''' 위치해 있었다. 그나마 용인시의 훈련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2010년 9월에 대구로 훈련장과 숙소를 이전했는데 1년후에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였다. 이 때문에 대경권에 남자 농구단은 하나도 없어 연고 공백 상태가 되었으며, 2017년부터는 구미 KB손해보험도 의정부로 떠나는 바람에, 남자 겨울 스포츠 자체가 없다.[10] 이 연고지 이전으로 인해 대구, 경북 사람들은 오리온스를 금지어 취급하고 있다.
3.1.2. 부산 kt 소닉붐
1961년에 창단된 중소기업은행 실업 농구단을 1997년 나산그룹이 인수, 광주광역시를 홈으로 사용하는 광주 나산 플라망스라는 이름으로 구단을 창단했다. 그러나 나산그룹이 2년 만에 부도나면서 골드뱅크가 인수, 1999-00시즌 이후 여수시로 연고지 이전을 했다. 그러나 골드뱅크-코리아텐더도 썩 좋은 사정의 팀이 아니라 더 나은 인수 기업을 찾기 위해 좀 더 큰 연고지로 이전하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2002-03시즌이 끝난후 부산광역시로 연고지 이전 했다.
수많은 연고지 이전 사례 중 이전 과정에서 잡음이 없었던 사례 중 하나인데 코리아텐더 구단 측이 '''"농구 밖에 모르는 선수들의 생존을 위해 여수를 떠납니다. 집안의 미래를 위해 가난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낸다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래야만 친정이 있는 서쪽 여수의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시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했고 여수시민들도 "아쉽지만 이왕 큰 도시 가서 잘 되길 바란다"고 환송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한 바 있다. 결국 코리아텐더는 부산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 초대형 무선 통신기업이었던 KTF에 인수돼 안정적 생존 기반을 갖추게 됐다.[12]
이 당시의 인연으로 당시 부산 KTF 매직윙스는 2007~2008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코리아텐더 시절 연고지였던 여수시에서 치르기도 했다. 감동적인 당시 경기 관련 기사.
현재 kt 구단 홈페이지에는 합병이전인 전신 KTF 시절이 사라진 뒤 kt로 이름이 바뀐 시점부터만 표기하고 과거는 모두 지워버린 상태. 결과적으로 2003년 여름부터 광주 전남에서는 정신적으로 묶어줄 구단이 없기 때문에 농구 공백 상태라 할 수 있다. 2006-2007 KBL 파이널 역사까지 사라지면서 또 하나의 공백을 만들었다.
2017년 1월 경 북수원에 위치한 수원 kt빅토리움과 kt 스포츠단 본사인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가 있는 수원으로의 연고이전 떡밥이 있었지만 부산 사직 팬들의 반발과 이미 매각을 목표로 대구를 떠나 고향으로 짐을 싼 오리온의 뜬끔없는 연고이전이 있는 바람에 부산 사직 홈 팬들과 kt 고객들을 강한 반발과 함께 무산되기도 했다. 실제로 수원에는 과거 삼성 썬더스의 홈이었던 수원실내체육관[13] 이외에 아마추어 대회로 개장한 후 한 시즌 동안 임시연고로 여자프로농구를 개최했던 서수원칠보체육관이 있다.
3.1.3. 부산 BNK 썸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했는데, 너무 시설이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구리로 연고를 이전했다. 그러나, 이후 배구의 대한항공-흥국생명, 여농의 신한은행이 그곳을 쓰는데다가 교통편도 좋은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이러니.[14] 게다가 현재의 구리체육관은 여자부 최악의 관중 동원력을 자랑한다.[15] 결국 공중분해 직전까지 갔고, WKBL이 수습해서 OK저축은행이 임시로 스폰서를 맡아 1년 동안 수원시를 임시 연고로 했었다. 임시 연고였기에 팀명에는 공식적으로 수원이 붙지 않았다. BNK의 인수 이후에는 모기업을 따라 부산에서 홈 경기를 할 계획이다. 이는 KDB-OK-BNK 프랜차이즈 첫 지방 연고지 이전이다.
3.1.4. 부천 하나원큐
연고지가 멀리 있다 보니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홈, 원정 할 것 없이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했고, 그래서 결국 버티다 못해 비어있는 부천으로 가버린 케이스다. [16] 더욱이 광주 연고 시절 홈구장이었던 구동체육관[17] 의 시설도 상당히 낙후된 데다 광주광역시의 지원 미비로 인한 설도 있다. 이후 신세계에서 하나금융지주로 구단이 넘어간 이후에도 부천을 연고로 계속 쓰고 있다.
3.1.5. 서울 삼성 썬더스
1997년 프로농구 출범 당시 연고지는 모기업 삼성전자와 연관 관계가 깊은 경기도 수원시였다. 그러다 2000-01시즌이 끝난 후 KBL에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A] 당시 청주를 홈으로 사용하던 청주 SK 나이츠와 함께 서울 입성금을 지불하고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해 서울 삼성 썬더스가 되었다. 연고지 이전 과정에서 청주 팬들의 반발을 샀던 SK 나이츠와 달리 삼성 썬더스의 연고지 이전에는 큰 반발이 없었다.
삼성이 나름의 텃밭인 수원을 떠나 서울로 농구단 연고지를 옮긴 배경으로는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프로스포츠 팀을 통해 전국에 고르게 판촉해야하는 모기업집단 입장에서 수원에 '삼성' 팀이 축구·농구 두 개나 몰려있는 것보다는 거대시장인 서울에 하나를 분산배치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 탓도 있다.[18] 현재는 수원에서 삼성 썬더스 경기를 보러 가려면, 지하철을 타거나 수원 버스 3000(강남역)이나 777번, 7770번(사당역)을 타고 2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3.1.6. 서울 SK 나이츠
1997년 프로농구출범 당시 연고지는 청주시였다. 그러다 2000-01시즌이 끝난 후 KBL에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A] 청주시의 지원 미비를 이유로 들어서[19] 당시 수원을 홈으로 사용하던 수원 삼성 썬더스와 함께 서울 입성금을 지불하고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해 서울 SK 나이츠가 되었다.[20]
청주가 농구 인기가 높은 도시라 반발이 상당히 많았던 연고이전이다. 현재 청주에는 청주 KB 스타즈 여자농구단이 자리잡아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서울 SK 나이츠는 2018년에야 2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3.1.7. 아산 우리은행 위비
이유는 춘천호반체육관의 난방 문제. 2011년 한파로 인해 시설이 동파되어 다른 경기장으로 변경된 적이 있다. 몇몇 언론사에서는 우리은행이 위성우 감독 부임 이후 거의 매 시즌 우승한 데 비해 관중동원이 아쉬웠다는 점을 이전의 이유로 들기도 했다. 우리은행의 아산 이전으로 인해 WKBL 모든 구단이 한번씩 연고이전을 하게 되었다.
3.1.8.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과거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21] 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프로농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설적인 명문구단이었으나 2001년 해태 타이거즈를 기아자동차가 인수하면서 현대차그룹의 1사 1팀 정책에 따라 현대모비스로 운영 주체가 변경되어(인수 대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연고지를 울산광역시로 옮겼다. 울산은 현대모비스의 본사와 현대모비스 울산공장에 이어 현대모비스 사원 기숙사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울산 모비스-현대모비스 선수단은 타구단이 호텔을 대관할 때 경비절감을 포함해서 마치 고등학생과 대학생 및 군인 시절처럼 숙사형 합숙을 한다.
이 연고이전은 옆도시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나마 논란은 적었지만 연고지 이전과 함께 농구대잔치의 역사를 간직한 기아자동차를 지워버리려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큰 비난을 받았다. 기아자동차 소속 선수들은 대부분이 팀에서 쫓겨나가게되었다. 이러면서도 기아자동차의 1997년 우승만 버리지않고 KBL 최다 우승구단이라고 지속적으로 자랑질을 하면서 다른 KBL 구단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22]
이전에 기아 시절 사용했던 부산사직체육관은 연고이전 이후 5년뒤인 2006년부터 KTF 매직윙스가 사용중이며 kt 소닉붐으로 이어진다.
3.1.9. 청주 KB 스타즈
연고지 때문에 속을 많이 썩힌 구단이다. 원래 연고지는 성남시였지만, 곧바로 천안시로 옮겼다. 국민은행 연수원을 연습장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내린 조치였다. 그런데 천안시에서 남자 배구단만 밀어주면서 체육관 대관을 해 주지 않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연습구장인 KB인재개발원을 임시 경기장으로 사용하였다.[23] 청주시와 2년간의 협상 끝에 2011년 1월부터 청주에서 경기를 치루게 되었다. 천덕꾸리기 신세였던 천안과 달리 청주 첫 경기에서 매진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연고 이전을 했다. 충청북도에 프로스포츠 팀이 없는 것도 이유겠지만, SK 나이츠의 청주 시절에 늘 만원사례를 이뤘을 정도로 농구 인기가 있다는 것도 이유다. 그런데 2014-15 시즌 현재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듯 하다. 특히 3년차인 홍아란의 맹활약으로 남자팬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청주실내체육관은 부천 하나원큐의 부천실내체육관,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도원체육관,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이순신체육관과 더불어 WKBL에서 수용 인원이 3000명 이상인 구장이다.
3.1.10.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여기는 다른 팀과는 다르게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 케이스이다. 2004년부터 쓰고 있던 안산 와동체육관은 원래 지역민을 위한 생활체육용으로 지은 체육관이라 프로농구단이 쓰기엔 규모도 작고 관중석의 배치도 불편하며, 교통도 안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이 체육관을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였고, 결국 한계에 부딪혀 인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3.1.11. 전주 KCC 이지스
2001년 현대전자 소속이었던 대전 현대 걸리버스가 KCC로 주체가 바뀌면서 팀 명 변경과 동시에 연고지를 전주시로 옮겼다. 연고지 학교였던 대전고등학교에서 프로농구 선수를 배출하지 못하게 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사유는 흥행 저조. 이후 대전 지역에서 반발했으나 연고 이전을 막지는 못했다.
2016년에 연고지 이전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김승수 전주시장이 '''새 구장을 신축'''한다는 약속으로 겨우 붙잡아놨다.[24] 결국 2024년까지 전주월드컵경기장 부근에 새로운 체육관을 건립한다.
3.2. V-리그
여자부는 연고이전이 많고, 남자부는 위 설명과는 달리 연고이전을 한 팀이 두 팀 있다.
3.2.1. GS칼텍스 서울 KIXX
아무문제도 없었고 인기도 많아서 관중도 많이 들어오고 심지어 인천시절에 우승까지 했는데 이전한 이유는 그냥 GS그룹의 서울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012~2015의 임시 연고지로는 구미에서 1시즌을 치른 뒤에 평택에서 2013년 가을부터 2015년 1월 03일까지 경기했다. [2020년]
3.2.2.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경북에서 수도권으로 갔다가 다시 경상북도로 유턴한 케이스. 공기업 특성상 연고 이전이 본사의 이동과 맞물린다. 연고지 이전 후 이호 감독이 선수들과의 불화로 사퇴했음에도 건강악화라고 발표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 팀이 김천으로 연고이전해서 성남시에는 프로팀이 성남 FC 한 팀밖에 안 남았다.
3.2.3.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KOVO 초대 총재가 김혁규였다.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라 그분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창기에 아직 프로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에 일정도 제멋대로였던 상황에서 마산 연고지를 쓰다보니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홈, 원정 할 것 없이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했는데다가 당시엔 옆동네인 창원의 창원 LG 세이커스라는 큰 산이 있던 점과 결합 되면서 결국 버티다 못해 수원으로 가버린 케이스다.[25] 한국전력의 경우 광주광역시 측에서 2019년에 광주로의 연고이전을 제안했으나, 수원시에 잔류하여 여전히 현대건설과 같은 체육관을 쓴다.
3.2.4.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위의 WKBL KB 스타즈처럼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등쌀에 밀린 케이스다. 초창기에는 현캐와 공동 연고를 쓰고 있었으나, 현대캐피탈에서 각종 개념찬 행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범하게 운영하고 싶었던 흥국생명과 계속 부딪히게 되었다.[26] [27] 그래서 서로 불편해 하던 와중에 천안시 측에서 현대캐피탈의 손을 들어주면서 내쫒기게 되었다. 마침 서울에 우리캐피탈 드림식스가 창단하면서 자매 구단으로 GS칼텍스가 베팅하였고, 이참에 비게 된 대한항공 점보스의 짝으로 갈아타서 인천으로 옮기게 되었다. [28]
이 연고지 이전이 지금봐도 경악스러운 이유는 당시 흥국생명에는 '''김연경''' + '''황연주'''라는 여자배구 역대 최고의 스타들이 있었으며 우승도 4년새 3번이나 한 상황이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3번째 우승을 한 다음 시즌에 바로 쫓겨났다. 그리고 이 벌이었는지 몰라도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에게 처절하게 준우승을 당하는 세월을 10년 동안 보내게 된다.
3.2.5.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
LG화재 - LIG 시절에는 공장도 있었고 모기업이 구미에 애착이 있어서 정착이 잘 되었으나 손해보험사가 KB금융그룹으로 넘어가자 지점이 2개밖에 없는 구미에 남을 이유가 없어졌다.구단은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구미를 떠나냐는 말에 떠난다고 답했으며, 여러군데를 놓고 보다 경기도 의정부시로 연고지를 옮겼다.[29] 참고로 새로 사용하게 된 의정부실내체육관은 안양 KGC 인삼공사 팀이 SBS 시절 초창기에 안양시에 체육관이 없어서 1년간 홈구장으로 몇 경기를 치렀던 전력이 있다.
이로써 경상도는 경기도에게 배구단을 또 빼앗겼으며, 대경권 남자 추춘제 스포츠는 전멸, 경상도 남자 배구단도 명맥이 끊겼다.
3.3. KBO 리그
KBO 리그는 최초 창설 과정은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당지역에서 성장한 향토기업이나[30] 지역 출신 오너가 운영하는 기업[31][32] 을 구단 운영 주체로 선정하는 등 강력한 지역 연고제 정착 을 리그 탄생의 기반으로 했던 덕분에 연고지 팀에 대한 지역민들의 충성도가 국내 프로스포츠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제21조 [연고지역의 변경]''' ① 연고지역은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의사에 반하여 변경 또는 합병할 수 없다. 다만, KBO 규약에 따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연고지역을 변경하고자 하는 구단은 전년도 10월 31일까지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KBO 정관 제 4장 연고권
때문에 다른 종목과 달리 연고지 이전이 쉽지 않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연고지를 옮긴다고 하면 동네 민심이 해당 기업에 완벽히 등을 돌려도 모자랄 수준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진다.[33] 따라서 구단 오너 측이 자의적으로 연고지를 옮긴 사례는 2000년 현대 유니콘스가 사실상 유일하다. 후술하겠지만 OB 베어스의 연고지 이전은 최초 서울을 연고로 창단하려던 계획을 KBO의 중재로 충청 연고 구단 창단으로 변환한 것에서 시작된다. 3년간 임시 연고지로 충청지역을 썼다가 KBO와의 약속대로 연고지를 옮긴 것이기 때문에 현대 유니콘스의 사례와는 다르다.
NC 다이노스의 경우도 홈구장 부지 선정 문제로 연고지 이전을 할 뻔 한 적이 있다.
3.3.1. 현대 유니콘스[34]
멀쩡하게 운영되던 팀이었지만 원래 연고지였던 인천에서 모기업의 기대만큼의 인기가 없었고[35] 서울특별시 지역을 원했던 현대그룹의 지시로 2000시즌부터 대뜸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 속에 결국 서울 입성은 미뤄졌고[36][37] 해체될 때까지 수원시를 임시 연고지로 삼으며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가 수원시에 있는 동안 수원시민들은 수원을 서울 연고지 진출의 간이역처럼 생각하던 현대 구단의 행태에 무관심으로 대응했고[38] 이는 결국 흥행 대참패로[39] 이어졌다.
수원에 있는 동안에는 공식적인 연고지가 없었으므로 1차 지명권이 소멸되어 KBO 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1차 지명을 하지 못했다.
3.3.2. OB 베어스
한국프로야구 창단 당시 서울연고를 원했지만, 지역분배로 어쩔수 없이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다. 단 이때 한국야구위원회와 이용일 사무총장이 "3년후에는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게 해주겠다."라고 약조를 받았다. 창단 때부터 충청도를 완전히 비워둘수는 없는일이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가야했던것. 원년 우승도 하고 3년정도 연고지를 삼아 경기 했던 향수가 남았는지 지금도 충청도는 한화를 제외하면 두산의 팬들이 꽤 있는 편이다.
1985년에 "이제 약속 지켜!"라며 서울특별시로 연고 이전, 동대문야구장을 홈으로 썼었으나 아마야구계의 반발이 심했고, 이때문에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임시로''' 잠실 야구장을 같이 쓴다는 조건으로 MBC 청룡이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잠실 야구장으로 구장 이전(?)을 시도했다. 그런데 1988년 후에도 아마야구의 텃세등 여러가지사정으로 인해 동대문야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잠실 야구장에 눌러 앉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잠실라이벌인 '''LG 트윈스''' 팬들과 '''두산 베어스''' 팬들은 사이가 영 좋지 못하고 LG 팬들은 두산 팬들을 '세입자'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진정한 잠실의 주인은 엘지다!"라고 일상적으로 비아냥 대고 있다. 잠실을 2개 구단이 이용하면서 잠실에서는 사실상 매일 경기가 열리는 상황이라 KBO와 일반 팬들 입장에서는 좋지만, 구장 내 공간 활용에 있어 제약이 많고, 특히 원정 팀의 경우 공간 문제로 별도의 원정 라커룸이 없는 등으로 인해 더욱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3.4. K리그
현 K리그의 전신인 슈퍼리그가 개설되면서 5개 구단이 참여 하는데, 명목상의 연고지만 있었을뿐, 당시 전국 9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경기를 하는 방식이라 사실상 중립경기의 연속 이라서 홈과 원정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연고지 정착이 더디었다. 또한, 팀 수 확충을 이유로 실업리그의 우승팀에게 슈퍼리그 참가권을 주었는데, 이렇게 참가한 한일은행과 상무는 아예 '''연고지가 없는''' 상태로 참가 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연고지 배분이 제대로 되지않았고, 구단이 실업리그로 가는등 정리가 되지 않는 모습이 계속 되다가, 1990시즌 부터 어느정도 틀이 잡히게 된다.단, 이때도 서울 3팀, 경상도 3팀(울산, 포항, 부산)의 구조 여서 전국단위의 팀 구성이 되지 않는 상태 였다.[40] 1994시즌 전북 버팔로, 1995시즌 전남 드래곤즈가 창단하여 서울 VS 영남 구도가 타파 되었으나 1996시즌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 3개 구단이 연고이전을 하게 된다. 또한 1996년부터 지역연고제가 실시됐다.
3.4.1. 울산 현대
광역지역연고제를 도입했던 초기에는 인천과 경기도를 홈으로 하고 있었으나 1987년에 강원도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후 1990년 현대의 본거지라고 할수있는 울산광역시로 연고를 이전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유니폼에 기업명 대신 지역명을 크게 찍은 것도 최초로 시도했다. 가슴에 현대를 빼고 '울산' 두 글자를 크게 넣었던 것. 그러나 팀명을 기업명에서 지역명으로 바꾼 조치가 내려지자 가슴엔 다시 현대가 새겨졌다.
3.4.2. FC 서울
K리그 초창기인 슈퍼리그 시절, 광역연고제에 의해 충청도를 연고지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출범하였다.[41] 그 후 1987년 광역연고제에 이어 1990년 도시지역연고제가 도입되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 일화, 유공과 함께 동대문 3대 구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6년만인 1996년 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월드컵 유치를 위한 지방 축구열기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서울 연고지에서 강제 축출하면서 안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당시 프로연맹이 내건 구실은 서울 구단들의 홈경기 소화율이 너무 낮아 지역연고 확립을 저해한다는 것. 하지만 당시 서울 동대문운동장은 지금처럼 양잔디가 아니기 때문에 5월 이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고 특히 서울은 3개 구단이 한 구장을 사용하고 지방 구단들 역시 잔디 보호와 운동장 대관 사정 등으로 지방에서 홈경기를 개최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서울만 딱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당시 실제 연고지에서의 홈경기 비율을 보면 LG, 일화, 유공 서울 연고 구단들이 대략 75퍼센트, 대우, 포철, 현대 지방 구단들이 85% 정도를 소화했다. 즉 서울 3개 구단이 단일 경기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엄청난 홈경기 소화비율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지방 순회 경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계기는 2002 월드컵 이후 전용구장 비롯 4철잔디와 라이트 시설 등 축구장 인프라가 완비되면서부터 거의 없어진 것이지 지역명을 붙이기 시작한 1996년부터 뚝딱 시행된게 아니다. 1995년까지는 서울이 아닌 타도시에서 홈경기를 가졌기 때문에 서울에서 안양으로 연고이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안양 LG 역시 출범 첫 해인 1996년은 계속 동대문에서 홈경기를 가지고 그 외에 창원, 진주, 구미 등에서 홈경기를 가졌고 부천SK는 2000년까지 서울에서 홈경기를 가졌다. 지방 구단들 또한 울산이 1997년에 경주, 포항이 2000년에 안동, 부산이 2000년에 창원에서 2경기를 했었다. 2002 월드컵 개최 이전까지 당시 경기장 인프라 사정 때문에 비연고지에서 홈경기 개최가 심심찮게 있었던 것처럼 1990년에서 1995년 사이에도 똑같이 경기장 인프라 때문에 지방순회경기를 했던 것이다. 1990년과 1995년 서울 동대문 시절에 비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안양 연고이전이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안양LG 시절에도 비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했기 때문에 2004년 안양에서 서울로 연고이전도 문제가 없다는 논리에 도달할 수 있다.
LG, 일화, SK 모두 옮길 생각 전혀 없는 상태에서 '''쫓겨났고''' 이는 훗날 더 큰 논란을 불러온다. 그 후 2000년 연맹이 주최한 서울 연고지 가치 평가회에 참가하는 등 다시 서울로 연고지 이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관련 기사 2003년 후반기부터 언론을 통해 서울로 연고이전을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기사가 나왔다. 2002 월드컵 인프라 혜택을 못 받은 안양 LG는 2003년에도 창원에서 홈경기를 가졌다. 심지어 2003년 가을에 안양 홈경기를 킥오프 5분 전에 우천취소 시켜버리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는데 구단 측이 안양에 마음이 떠났음을 보여주는 사례. 2003년 말 서울 연고 신생팀을 창단하려던 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계획이 유치 작업을 했던 대기업들에게 모두 거절 당하고 또한 시민구단 창설에 부정적인 서울시의 태도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프로축구연맹은 신생팀으로 서울 연고팀을 만들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기존 구단의 연고이전을 통해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전 구단에 서울로 연고지 이전 신청을 받는다. 이에 안양 LG는 가장 먼저 연고이전 의사를 내비쳤고 역시 서울로 연고이전을 희망했던 부산 아이파크가 신청 철회를 하자 단독 후보가 되어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연고이전 승인을 받고 다시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였다. 일련의 과정들은 '''서울연고공동화정책'''과 FC 서울 문서를 참조.
3.4.3. 성남 FC
K리그 최초 단독으로 서울을 연고로 하는 일화 천마 축구단으로 창단하였지만 유공과 LG가 잇따라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면서 서울 연고를 세 팀이서 나눠쓰게 된다. 1996년 지방 축구열기 활성화라는 명목하에 천안으로 연고지를 이전당했다. 그 후 천안시에서 천안오룡경기장의 부실한 시설때문에 1998년 11월경부터 성남시와 접촉을 시작했고 2000년 마침내 연고지 유치 제안을 받아들여 연고지를 이전했다. 처음부터 연고이전 생각하고 움직인건 제주, 서울과 똑같은데 마침 성남시 시설이 개판이고 축구팬 수도 적어 묻어가는데 성공한 케이스. 동대문 일화가 천안으로 밀려나는 과정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 참고.
3.4.4. 제주 유나이티드
-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1983 ~1986 (4년)
- 인천광역시, 경기도: 1987 ~ 1990 (4년)
- 서울특별시: 1991 ~ 1995 (5년)
- 경기도 부천시(실질 연고지 서울특별시): 1996 ~ 2000 (5년)[42]
- 경기도 부천시: 2001 ~ 2005 (5년)
- 제주특별자치도: 2006 ~ 현재
당시 축구단을 못 마땅하게 여기던 SK그룹 때문에 입지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제주도에서 프로축구단 유치를 하기 위해 클럽하우스 부지 무상제공을 내걸며 접촉해왔고 2006년 제주도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3.4.5. 아산 무궁화
K리그 챌린지 첫해인 2013년에는 연고지가 없어서 전 경기를 원정으로 치렀다. 2023년까지 의무경찰 폐지 결정에 따라 해체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시민구단 전환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K리그 연맹에선 안산 무궁화와 아산 무궁화는 별개의 클럽으로 구별함으로 연고 이전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3.4.6. 충주 험멜
- 경기도 의정부시: 2003 ~ 2005 (3년)
- 경기도 이천시: 2006 ~ 2007 (2년)
- 서울특별시 노원구 : 2008 ~ 2009 (2년)
- 충청북도 충주시: 2010 ~ 2016 (7년)
2015년부터 연고 이전설이 나돌더니 2016년을 마지막으로 충주를 떠나는게 되었다. 모기업인 대원이노스는 불황과 충주시의 지원미비를 이유로 2016년을 마지막으로 축구단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2016년이 지나도록 인수하겠다는 지자체도 나타나지 않아 이제 단순 연고이전이 아니라 사실상 팀 해체에 들어갔다.
3.4.7. 고양 자이크로 FC
충주 험멜과 마찬가지로 실업 리그 시절 줄창 연고지를 옮겨다닌 사례. 2003 시즌은 익산 원불교도들의 항의로 전기 리그만 치르고 떠났다. 2004년에는 김포로 옮겨갔지만 역시 3년간의 연고 협약 기간 이후 연장에 실패, 신축한 와~스타디움을 놀리고 싶지 않았던 안산시의 러브콜에 응하여 안산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당시만 해도 할렐루야는 아슬아슬하게 우승에 실패하는 등 가능성이 있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안산은 이런 할렐루야를 유치하여 빠른 시일 내에 연고 프로 구단을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안산시가 계산적인 자세로 나오다보니 할렐루야의 성적이 시들해짐에 따라 지원 또한 줄어들었고, 2011년에 연고 협약 연장 문제로 잡음을 빚으며 관계가 파토나버렸다.
2013 시즌을 앞두고 마침 고양 KB의 해체로 연고 축구단을 잃어버린 고양에, 그것도 시로부터 지원도 얼마 받지 못하는 조건을 수용하는 저자세를 취하면서까지 옮겨갔으나 종교색 등으로 인해 환영은 받지 못하는 상황. 구단 사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결국 2016년11월28일 프로축구연맹에 탈퇴서를 제출했고# 구단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3.4.8. 상무 축구단
상기한 연고이전 사례들과는 다른 경우로, 10년간의 연고지 계약을 맺고 10년마다 지역을 옮겨다니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44] 기존에는 별도의 연고지 설정 없이 존재하다가 2002년 광주광역시에 처음 연고를 가졌으며, 2011년부터는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한 문경시 인근의 도시에서만 연고를 트고 있다.
4. 해외의 연고지 이전 사례
4.1. 야구
4.1.1. 대만프로야구
대만은 연고지 정착이 매우 안 되어있는 리그 중 하나다. 퉁이 라이온즈를 제외한 모든 팀이 연고지 이전 경험이 있을 정도. 애초 출범시부터 타이베이에 야구장은 딱 하나 있는데 3개팀이 타이페이를 연고지로 삼고 있었으니 연고지 정착이 될 리가 만무했다. 홈 경기를 자기네 연고지에서 치루지 않는 리그였으나 2018년 이후로는 홈 경기를 메인 구장에서만 소화하고 있으며, 지역명 표기가 된 얼트 유니폼들도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4.1.1.1. 라쿠텐 몽키스
2002년 대만의 양대리그중 하나였던 TML 소속의 "타이베이 타이양"과 "가오핑 레이공"이 합병한 디이진강이라는 팀이 전신이다. 이후 2003년에 대만의 라뉴 그룹이 인수, 라뉴 베어스로 창단되었고 최초 연고지는 가오슝이었는데 2011년 연고지를 가오슝에서 타오위안으로 옮기며 이름을 라미고 몽키즈로 변경했다.
4.1.1.2. 푸방 가디언즈
1993년에 타이중을 연고로 창단되었다. 이후 2012년에 모기업이었던 싱농그룹이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매각을 선언, E-United 그룹이 인수했고 인수와 동시에 그룹 본거지가 있는 연고지를 가오슝으로 옮겼다. 그후 EDA 라이노스라는 이름으로 운영 되던 중 모기업이 푸방(Fubon)금융그룹으로 변경[45] 되면서 연고지를 타이페이로 옮기게 되었다.[46] 해체후 재창단이 아니라 EDA 라이노스의 역사를 계승하기 때문에 연고이전 역사에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4.1.1.3. 중신 브라더스
바로 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두 팀이 사실상 연고지를 맞바꾼 상태다. 물론 연고지 이전도 시기가 다르고 푸방의 경우 가오슝으로 갔다가 타이페이로 간 것이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4.1.2. 일본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한 해는 1934년이지만[47] , 본격적으로 연고지 개념이 생긴 건 프로야구 지역 보호권이라는 제도가 도입된 1952년부터다. 여기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곤즈는 과거 태생지(도쿄, 나고야)를 연고지로 삼았고, 한신 타이거스는 태생지인 오사카 대신 효고를 연고로 삼으며 문제 없이 정착했는데, 나머지 팀들은 구단주의 사정 혹은 흥행 문제에 따라 연고지 이전을 경험해야 했다. 한 때는 도쿄에 4팀, 간사이에 4팀이 몰려있었을 정도로 2점 집중이 심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는 닛폰햄과 다이에가 각각 삿포로와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2005년에 창단한 신생팀 라쿠텐이 미야기를 연고로 삼으면서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4.1.2.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를 연고로 창단되었으나 모기업이 니시테츠 라는 지방 사철이라 돈도 없고 관중동원도 시원치 않은 판에 검은 안개 사건이라는 희대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게 되어 성적까지 밑바닥을 쳐버리고 결국 1972년을 끝으로 손을 뗐고 당시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 나카무라 나가요시가 인수해 현재의 넥센 히어로즈처럼 구단 명명권과 광고 수익 그리고 사재등으로 운영했으나 결국 gg를 치게 되며 1978년에 세이부 철도에 매각하게 된다. 세이부 철도는 매각 조건으로 사이타마로의 연고지 이전을 제시했는데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결국 승인하고 1979년에 사이타마현으로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 뒤 후쿠오카 팬들이 다시 그들 지역의 야구단을 얻는 데는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4.1.2.2. 오릭스 버팔로즈
한큐 시절에는 오사카 근교의 니시노미야에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이라는 구단 소유의 전용구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니시노미야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은 고시엔에서 차로 불과 10여분 떨어진 거리에 한큐전철 니시노미야 기타구치역 앞에 있었다.[48] 구단이 한큐로부터 오릭스로 인수된 후에도 구단 매각조건에 따라 2년동안은 '''오릭스 브레이브스'''로서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을 사용했다. 그러다 1991년부터 구단 이름을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바꾸고 홈구장도 당시 신축구장인 그린 스타디움 고베[49] 로 연고지를 이전했다.[50] 그후 2004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를 합병함으로써 구단 이름을 오릭스 버팔로즈로 바꾸고 긴테쓰의 홈인 오사카 돔을 주 홈경기장으로 블루웨이브시절의 홈구장인 홋토못토 필드 고베를 보조 홈경기장으로 사용하는 현재의 체제에 이르게 되었다.
4.1.2.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센트럴 리그 구단 중 유일하게 연고지 이전이 있는 팀. 1950년 시모노세키를 연고로 다이요 훼일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는데 1953년 영화회사 쇼치쿠 산하 구단 로빈스와 합병하면서[51] 팀 이름을 다이요-쇼치쿠 로빈스로 바꾸고 쇼치쿠 본사가 있는 교토로 이전했다. 2년후 쇼치쿠가 구단 운영에서 손을 때면서 다시 다이요 훼일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왔고 가와사키로 연고지를 옮겨 가와사키 구장을 사용했다. 1978년 요코하마 스타디움이 건설되자, 떠돌이 생활하던 롯데 오리온스와 치열한 경쟁끝에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52]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1.2.4. 치바 롯데 마린즈
- 도쿄도: 1950 ~ 1973 (24년)
- 센다이시 (미야기현): 1974 ~ 1977 (4년)
- 가와사키시(가나가와현) : 1978 ~ 1991 (14년)
- 치바(치바현): 1992 ~
한편 바다 건너 자매구단은 당초에 서울을 원했지만, 일련의 과정 끝에 부산을 선택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되며 현재까지 부산에 정착하고 있다. 치바 롯데가 우승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2번 우승한 것은 덤.
보면 알겠지만 구단주의 욕심이 아니라 집이 없어서 떠돌이 생활한 정말 안습한 연고지 이전 케이스다.
4.1.2.5.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946년에 창단된 후 여러 기업에 매각과 인수를 거쳤지만 연고지는 도쿄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도쿄돔을 홈구장으로 쓰는 전국구 구단을 응원하는 팬들이 압도적이었고, 만년 비인기 구단의 설움을 누리고 있었다.[55] 결국 닛폰햄에서는 이러한 안습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실내 돔구장이 있음에도 야구단이 없어서 비어있는[56] 홋카이도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게 되며 이는 홋카이도 닛폰햄의 최고의 한수가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도쿄나 오사카 혹은 그 인근에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무너지고 '지방이라도 지역민들의 사랑만이라도 차지하면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57] , 일본야구 팀명에 지역명이 하나둘씩 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시 연고지 이전 떡밥이 돌고 있다. 삿포로 시의 비협조로 키타히로시마시에 새 구장을 짓고 그 쪽으로 옮기겠다는 것. 팬들 역시 삿포로 시가 협조를 전혀 안 했다는 것에 대해 대차게 비판하며 키타히로시마시 이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같은 홋카이도인데다 삿포로 시 근처라 팀명이나 팬베이스가 바뀔 것 같지는 않을 듯 하다.
4.1.2.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38년부터 1988년까지 50년의 시간동안 오사카를 연고지 오사카 구장을 사용하던 팀이었다. 난카이 전기철도가 모기업이었던 난카이 호크스는 팀의 에이스였던 노무라 카츠야가 1977년 떠난 이후로 B클래스(리그 4~6위) 비밀번호를 찍고 있었다.[58] 결국 1988년 구단 창단 50주년 기념(...)으로 매각을 추진했고[59] 일본의 유통업체 다이에가 인수해 1989년 후쿠오카로 연고지 이전 했다. 그리고 다이에는 당시 800억엔, 한화 8천억원을 직접 때려박으며 신식 돔구장을 지었는데 10만에 소프트뱅크에 기업을 매각했다. 돔 구장은 해외자본에의 매각을 거쳐 최종적으로 소프트뱅크 측에서 경영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4.1.3. MLB
4.1.3.1. 뉴욕 양키스
원래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으나 뉴욕 주에도 아메리칸 리그 팀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뉴욕으로 옮겼다.
4.1.3.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브루클린 : 1893 ~ 1957 (65년)
- 로스앤젤레스 : 1958 ~
4.1.3.3.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 로스앤젤레스 : 1961 ~ 1965
- 애너하임 : 1966 ~
이 팀이 다저스타디움에 있으면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라는 팀명을 쓴 시기는 애초 창설 때부터 홈구장으로 쓰려고 계획한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을 신축하기 이전까지, 세입자로 잠깐 있었던 것이고 66년 완공후 팀이 이사하고 난 이후에는 지역명만 몇번 바뀌었을 뿐이지 홈구장 자체를 옮긴적은 없다.
4.1.3.4. 미네소타 트윈스
- 캔자스시티 : 1894 ~ 1900 (7년)
- 워싱턴 D.C. : 1901 ~ 1960 (60년)
- 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 1961 ~
4.1.3.5. 밀워키 브루어스
시애틀 파일러츠가 재정난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1970년 버드 셀릭이 투자자들과 함께 이 구단을 사들여 밀워키로 팀을 옮겼다. 팀을 잃은 시애틀은 1977년 리그 확장을 통해 시애틀 매리너스가 창단되어 자리잡게 되었다.
4.1.3.6. 볼티모어 오리올스
4.1.3.7.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뉴욕 자이언츠[60] 로 맨하튼의 폴로구장을 홈으로 쓰고 있었으나 역시 뉴욕 양키스로 인해 입지가 줄어들면서 다저스가 서부로 옮길때 따라 나왔다. 다만 이후 재연고지이전 위기를 '''두 번이나 겪었는데''', 1976년에는 구단주가 당시 팀을 토론토의 주류 회사인 래뱃 그룹(Labatt Brewing Company)에 파는데 합의까지 했었으나, 미국 법정에서 이를 무효화 시켜버리는 덕분에 연고이전이 무산이 되었다[61] . 이후 90년대 초반에는 캔틀스틱 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열악한 홈구장의 상태에 진저리를 내고 당시 신규구장으로 유혹을 해오던 탬파로 구장을 이전할 것도 고려했으나 샌프란시스코 팬들이 '제발 가지마(Please don't go)!'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한데다 시에서도 새구장을 지어줄 것을 약속하면서 결국 잔류를 결정했다. 이후 오라클 파크가 지어진 후 부터는 새로운 구장도 생긴데다 우승도 자주 하게 되어 확실하게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4.1.3.8. 시카고 화이트삭스
- 수시티 : 1888 ~ 93 (5년)
- 세인트폴 : 1894 ~ 99 (5년)
- 시카고 : 1900 ~
4.1.3.9.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필라델피아 : 1901 ~ 1954 (54년)
- 캔자스시티 : 1955 ~ 1967 (13년)
- 오클랜드 : 1968 ~
4.1.3.10. 워싱턴 내셔널스
캐나다 연고 최초인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창단하였으나 워싱턴 D.C로 이전하였다.
4.1.3.11. 텍사스 레인저스
1961년 미네소타 주로 이전한 워싱턴 세네터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텍사스 주로 이전하였다.
4.1.3.1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보스턴 레드삭스에 밀려 흥행이 저조해지면서 1953년 밀워키로 연고지 이전을 하는데, 이는 190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체제 정립 이후 최초의 연고지 이전으로 이후 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대대적인 연고지 이동이 일어나게 된다. 밀워키에서 우승을 1회 기록한 브레이브스는 1966년 다시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이전하였으며, 199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연고지로 삼았던 세 도시에서 각각 우승하는 기록을 남겼다.
4.2. 아이스하키
4.2.1. NHL
4.2.1.1. 뉴욕 아일런더스
- 유니언데일(뉴욕주) : 1972 ~ 2014 (43년), 2018 ~
- 브루클린(뉴욕시): 2015 ~ 2020 (5년)
4.2.1.2. 뉴저지 데블스
최초 캔자스시티에 창설되었지만 캔자스시티 치프스가 버티고 있어서 1976년에 콜로라도주 덴버로 연고지 이전한다. 그곳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로 팀명을 바꾸고[64] 노력을 해보지만 역시나 인기를 얻지 못하고 뉴저지주 이스트러더퍼드로 연고지 이전 했다.
캔자스시티엔 다시 아이스하키팀이 생기지 않은 반면, 덴버는 새 하키팀이 생겼는데 그 것이 바로 퀘벡의 눈물이라는 후술할 그 팀.
4.2.1.3. 댈러스 스타스
캐나다와 가까워 아이스하키가 무지막지하게 인기가 많은 미네소타주지만 대학 아이스하키에 밀려 인기도 없고 존재감이 미미한 팀이었기에 구단주 노먼 그린이 언론재벌 톰 힉스에게 매각한후 텍사스 주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팀명에서 '노스'를 뗐다.
이후 NHL팀이 사라지자 섭섭했던 미네소타 시민들의 청원으로 미네소타 와일드가 새로 창단되었다.
4.2.1.4. 위니펙 제츠
애틀랜타는 전통적으로 풋볼과 야구가 강세인 지역이었고 미국 남부는 하키 인기가 없기도 해서 아이스하키팀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았고, 결국 10-11시즌을 끝으로 舊 위니펙 제츠가 떠나서(1996년 이전) 아이스하키 팀이 없던 캐나다의 중소도시 위니펙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4.2.1.5.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
4.2.1.6. 캘거리 플레임스
상단에 나와있는 위니펙 제츠의 선구자격 연고지 이전이다. NHL은 또 한번 애틀랜타 시장을 노렸으나 역시 안될 곳은 안된다.
4.2.1.7. 콜로라도 애벌랜치
팀이 매각되면서 캐나다를 떠나 미국으로 옮겼다. 이후 퀘벡 연고는 몬트리올만 남게 된다.
이 연고지 이전을 두고 "퀘벡의 눈물"이라 불렀다. 아시다시피 캐나다 아이스하키 인기는 극강이었고 대도시 퀘백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컬 팀을 사랑했던 퀘백 시는 팀을 잃자 절망감과 박탈감에 앓아누웠다.
4.2.1.8. 애리조나 카이오티스
캐나다 위니펙에 위치했던 팀이었다. 팀명도 위니펙 제츠로 현재의 위니펙 제츠와 동일한 팀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95-96시즌을 끝으로 애리조나주 피닉스로 연고지 이전했고, 위성도시 글렌데일에 새 체육관이 생기며 2003년에 또 연고이전을 했다.[68] 그 후 아이스하키 팀이 없던 위니펙에 한 팀이 연고지 이전을 했는데 그팀이 바로 위에 언급한 위니펙 제츠.
상술한 콜로라도처럼 캐나다에서 연고이전한 둘밖에 없는 팀이다.
4.3. 미식축구
4.3.1. NFL
4.3.1.1. 로스앤젤레스 차저스
로스앤젤레스 이전이 확정된 램스와 더블어 LA 이전의 우선 협상권을 가지고 있다. 협상 여하에 따라서는 램스와 홈구장을 공유하면서 LA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 그러나 소속 주전 선수들 중에 쿼터백 필립 리버스를 위시하여 샌디에이고 도시 자체에 애착을 가진 선수들이 꽤 있어서 이 선수들이 LA 이전에 반발하고 팀을 떠나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할 위험이 있다. 게다가 애초에 자신들이 낸 제안이 부결되고 램스의 제안이 채택된 상황에 불만을 가진 상황이라 LA 이전의 가능성은 꽤 불투명한 상황.
그러나 현지시간으로 1월 12일, 결국 LA로의 연고이전이 확정되었다. 그나마 LA에서 팬덤을 가지고 있던 램스와 달리 차저스는 LA에 팬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MLS 로스앤젤레스 갤럭시가 사용하는 작은 구장 디그니티 헬스 스포츠 파크를 빌려 쓰고 있으며 관중 동원은 잘 되지 않고 있다가 좋은 성적을 내자 팬이 많이 늘었다.
4.3.1.2.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 정확히는 산타클라라에 새로 지은 리바이스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그러나 팀명도 샌프란시스코로 포티나이너스로 유지하고 있고 홈구장 위치만 옮겼지 연고지 이전이라고 생각 안하는 분위기다. 사실 거리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되지 않는 곳이라 연고지 이전이라고 하기도 뭣한 상황.
4.3.1.3. 로스앤젤레스 램스
- 클리블랜드 : 1937 ~ 1945 (8년)
- 로스앤젤레스 : 1945 ~ 1979 (35년)
- 애너하임 : 1980 ~1994 (단, 팀 명칭은 계속해서 로스앤젤레스 램스) (15년)
- 세인트루이스 : 1995 ~ 2015 (21년)
- 로스앤젤레스 : 2016 ~
4.3.1.4. 애리조나 카디널스
시카고 베어스에 밀려 만년 2류팀으로 전락해버리자 1960년에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다. 그런데 인기를 얻고자 연고지 이전을 했는데 그곳에 이름이 똑같은 야구팀이 존재했고 "인기 얻으려고 팀이름을 따라짓냐!"라는 비아냥도 얻게 되었다.[69] 이팀 때문에 인기는 커녕 투명팀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연고지 이전한 팀 + 성적은 개판인 상황에서 카디널스는 두번째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고 1988년 현재의 연고지인 애리조나 피닉스로 다시 이전하게 된다.
4.3.1.5.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
이미 한번 오클랜드를 배신하고 로스앤젤레스로 튄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로 복귀하자, 홈 경기장인 오버스톡 닷컴 콜리시엄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연고지 이전을 추진했다. 일단 램스, 차저스와 경합한 LA 이전은 구단주 회의 때 램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차저스가 우선 협상자로 선정이 돼서 밀려났지만, 차저스가 협상을 포기하고 샌디에이고로 남기로 결정할 경우에는 레이더스에게 LA 이전을 놓고 램스와 협상을 할 권리가 주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2020년부터 라스베이거스로 이전이 결정되었다.
4.3.1.6. 워싱턴 레드스킨스
4.3.1.7.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역대 최악의 연고지 이전 작전'''이 벌어진 팀이다. 그야말로 연고 이전계의 '''안좋은 쪽으로 레전설'''이자 '''NFL판 북패 No. 1'''.[71] 볼티모어 시와 팬들 등에 칼빵을 놓고 튀어 버린 팀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원조 야반도주 문서 참조. 아직도 미국에서 연고지 이전의 가장 안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4.3.1.8.
정확하게는 '''해체 후 재창단'''이다. 쌍방울 레이더스와 SK 와이번스의 관계, 현대 유니콘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구단주였던 아트 모델이 클리블랜드시에 노후해가던 기존구장 대신 신축구장 건설을 요구했지만 시에서는 돈이 없다며 거절했고[72] 이후 신축구장을 건설해주겠다는 볼티모어로 기습적으로 연고지 이전을 했다. [73] 레이븐스의 전신인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역사는 1999년에 재창단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계승하고 있다.
4.3.1.9. 테네시 타이탄스
원래 휴스턴 오일러스로 창단되었는데 홈구장인 애스트로돔[74] 이 노후화되었고 이때문에 신축구장 건설을 요구했으나 당시 휴스턴 시장이었던 밥 레이니어가 거절을 했고 같이 애스트로 돔을 홈으로 쓰던 야구팀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엔론 필드라는 신축야구장 건설을 시에서 허가한 상태였다. 이에 시에 대한 불만이 커진 휴스턴 오일러스는 1997년 새로운 구장을 건설해주겠다는 테네시 주 내슈빌로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다. 단, 이전 시점에서는 새 구장이 막 삽을 뜬 상태라 첫 1년은 멤피스의 리버티 볼, 그 다음 해에는 내슈빌의 밴더빌트 스타디움을 임시 홈으로 사용했다.
4.3.1.10. 캔자스시티 치프스
AFL 창설때 생긴 구단으로 댈러스를 연고로 창설했지만, NFL이 댈러스 카우보이스로 견재를 하고 흥행에서 밀리자, 적극적으로 새로운 연고지 정착을 도운 캔자스시티로 연고를 이전했다. 이때 텍산스에서 치프스로 구단 명칭을 변경.
4.4. 농구
4.4.1. NBA
4.4.1.1.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필라델피아 : 1946 ~ 1962 (17년)
- 샌프란시스코 : 1962 ~ 1971 (10년)
- 오클랜드 : 1971 ~ 2019 (49년)
- 샌프란시스코 : 2019~
4.4.1.2.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1988년에 창단된 샬럿 호네츠가 2002년에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로 연고지 이전하면서 뉴올리언스 호네츠라는 팀명을 사용햇으며 이후 2013년에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팀명을 바꿨다. 2005년 카트리나로 인해 홈구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때 옆동네 오클라호마에서 2년 동안 홈구장을 빌려썼고, 이때 뉴올리언스/오클라호마 호네츠로 잠시동안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호네츠는 2014년부터 원래 있던 지역의 상징인 펠리컨을 따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이름을 바꿨고, 2004년에 샬럿에서 호네츠를 대신해 창단된 샬럿 밥캣츠가 NBA와 뉴올리언스의 동의를 얻어, 샬럿 호네츠로 이름을 바꿨다. 또한 양 구단 간 협의 끝에 족보도 확실히 정리하면서 펠리컨스 창단은 1988년이 아닌 2002년으로 확정되었고, 현 호네츠는 1988년 창단, 2002년 탈퇴, 2004년 재가입이라는 복잡하지만 연고지 기준으로는 깔끔한 구단 역사를 확립했다. 설령 공식 역사에 따라서 샬럿 역사를 파낸다 해도 뉴올리언스에서 오클라호마 연고이전이 있으므로 연고이전 구단인 건 맞다.
4.4.1.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4.4.1.4.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4.4.1.5.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4.4.1.6. 멤피스 그리즐리스
4.4.1.7. 브루클린 네츠
원래 뉴저지에서 창단을 했는데 당시 ABA소속이었기에 NBA의 견제로 제대로 된 홈구장을 가지지 못했고, 결국 홈구장으로 티넥 무기고[77] 를 쓰게 되었는데 이곳도 뉴저지의 서커스단이 공연을 한다는 이유로 ABA 플레이오프 자격을 박탈당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아 씨발 여기선 못해먹겠다."라고 해서 간게 뉴욕 롱아일랜드 아레나였고 그곳에서 NBA 소속이던 뉴욕 닉스의 압박으로 결국 팀명을 뉴욕이 아닌 뉴저지를 쓰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학교 홈구장을 전전긍긍하다 1981년에 뉴저지 브렌던 번즈 아레나로 연고지 이전 했다. 그야말로 안습의 향연.
그리고 07-08시즌이 끝난후 세계 34위의 갑부인 미하일 프로호로프가 구단을 인수하고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4.4.1.8. 새크라멘토 킹스
4.4.1.9. 애틀랜타 호크스
- 버팔로 : 1946 (1년)
- 트라이시티 : 1946 ~ 1951 (6년)
- 밀워키 : 1951 ~ 1955 (5년)
- 세인트루이스 : 1955 ~ 1968 (14년)
- 애틀랜타 : 1968 ~
4.4.1.10. 유타 재즈
뉴올리언스의 문화인 재즈를 팀의 이름으로 삼았고, 모르몬교가 대다수인 솔트레이크 시티로 연고이전하면서도 팀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뉴올리언스 시절 팀에서 뛰었던 피트 마라비치는 대학도 뉴올리언스에서 나온 지역을 대표하는 레전드 선수였고, 나중에 뉴올리언스에서 창단된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도 그를 영구결번했다.
4.4.1.1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라큐스에서 챔피언 결정전 단골손님으로 활약했으나 스몰마켓의 한계로 좀더 큰 도시로 나갔는데 그곳이 현재의 필라델피아였다.
4.4.1.12. 휴스턴 로키츠
4.4.1.13.
- 시애틀 : 1969 ~ 2008 (40년)
구단주였던 하워드 슐츠가 홈 구장인 키 아레나 보수 제안을 시애틀 시에 요구했으나 시 의회에서 이를 거절하자 구단을 오클라호마 지역 사업가 클라이 베넷에게 넘겼고, 베넷은 새 구장 건설을 우선 요구했다가 시 측에서 배째라로 나오자 아예 구단을 자신의 기반인 오클라호마시티로 연고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선수단과 구단 프런트는 그대로 옮겨가는 대신 팀의 로고, 뱃지, 트로피를 비롯한 다른 권리들은 시애틀 시에 귀속시킴으로써 새롭게 탄생한 팀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는 사실상 새로 창단한 팀이 되었다.
4.5. 축구
4.5.1. 일본 J리그
4.5.1.1. 도쿄 베르디
J리그 출범 당시 도쿄에 리그 규격을 만족시키는 구장이 없어 가와사키로 이전했으며, 2001년 도쿄로 돌아왔다.
4.5.2. 중국 슈퍼리그
대륙 스케일 답게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다. 광저우 부리, 베이징 런허, 상하이 선신, 허난 젠예, 저장 이텅 등 원래 연고지에서 대륙 한바탕 유랑하고 다시 원래 연고지로 복귀한 경우도 많고 거기에 갑급리그, 을급리그까지 포함시키면 독립 문서로 만들어야 할 정도이며 다 합치면 연고이전 발생횟수가 '''200회''' 정도가 된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연고 이전팀들에 대해서 중국의 축구팬들은 "유랑거우"(流浪狗-떠돌이 개새끼)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있다.
결국 2016년 1월부터 중국축구협회는 연고이전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금지시키는 기한까지 여러 도시, 여러팀에서 연고이전이 진행되었고 대표적으로 구이저우 런허가 베이징으로 연고 옮겼다.
4.5.3. 잉글랜드 풋볼 리그
4.5.3.1. 밀턴킨스 던스 FC
- 런던(윔블던 지역) : 1889 ~ 2003 (115년)
- 밀턴케인스 : 2004 ~
2014년 8월 공교롭게도 MK 돈스와 AFC 윔블던 두 팀이 리그컵 토너먼트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역사의 연속성을 뜻하는 머플러를 들어올린 MK 돈스의 팬이 카메라에 잡혔다. MK 돈스가 윔블던의 후신이지, 너희가 후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고 이전의 뒷처리가 참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기에 한국 프로축구에서 벌어진 큼지막한 연고 이전사례 몇 건을 생각해보면 씁쓸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루 아침에 지역 팀이 떠나갔음에도 팬들이 모여 다시 새로운 팀을 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기에 가능한 일.
결국 한국 프로축구는 3S 정책의 일환으로 기업들 옆구리 찔러 급조된 태생적 한계상 팬들의 사랑으로만 자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78] 저런 사단이 났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프로축구연맹도 각 기업구단 오너나 관계자들이 총재를 비롯한 높은 자리를 돌려먹는 판국이라, 저런 수 차례의 연고이전 건에서 중재는 커녕 지역 밀착보다 이익을 더 우선시하려는 구단측의 동향을 그냥 손놓고 지켜보거나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4.5.4. 멕시코 리가 MX
4.5.4.1. 클럽 넥카사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를 연고지로 하다가 아과스칼리엔테스 로 연고지 이전을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멕시코 축구 리그는 연고지 이전이 많은 편이다.
4.5.5.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4.5.5.1. PFC 소치
- FC 디나모 상트페테르부르크 : 1922-2018, 2019-
- PFC 소치 : 2018-
201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역 아마추어 클럽이 디나모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다시 변경하면서, 이전의 디나모의 역사를 승계하게 되었다.
[1]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의 역사도 포함[2] 원년 6개 팀의 연고를 정하는 데 제일 큰 근거가 된 게 모기업의 발원지였다. OB의 충청 연고는 처음부터 기한한정이란 답을 받아놓은 임시연고였다. 모기업 두산그룹의 발원지는 서울이다. 하지만 프로야구 창설 주체인 MBC가 먼저 서울을 선점했고, 충청권을 제외하고 5기업뿐이 안되는 상황에서 사전 접촉했던 두산이 프로야구를 하겠다고 했기에 서울 이전 약속으로 창단을 시킨 것이다.(홍순일의 프로야구 창단비화 참고)[3] 팬들이 감독 출신 지역, 선수 출신 고교 따지고 심한 구단(ex. 롯데)은 그걸로 성골/진골 나누고, 리그 최정상급 선수(강민호)가 성골/진골 고교 출신이 아니라서 소속팀 올드팬들에게 부당하게 욕먹고, 무능력한 철밥통들이 출신 앞세워 코치 자리에 앉고, 연고지 배려성 신인지명으로 명백히 자질 떨어지는 선수 뽑거나 해서 문제가 되는 스포츠는 대한민국에 야구 뿐이다. 은퇴한 프렌차이즈 스타가 없는 신생팀 제외하면 철밥통, 공무원 논란이 안나오는 팀이 없다.[4] 이는 현대의 해체 이후 현대를 모태로 재창단한 히어로즈의 악몽같은 초기 관중수에 한몫 했다. 가뜩이나 현대를 직접 인수한 게 아닌 재창단 형식으로 팀을 넘겨받은거라 현대 팬층을 대부분 흡수하긴 했어도 다는 데려오지 못했는데 몇없던 현대 팬층을 생각한다면... 그래도 서울 연고라 원정팬들 수가 증가하면서 관중 수는 말년 현대에 비해 늘었다.[5] 프로 초기에는 안양에 경기장이 없어서 주로 서울에서 경기를 치렀고 의정부에서도 몇 경기를 소화했다.[6] 인천도원체육관의 시설 미비를 이유로 인천삼산월드체육관 개장 전까지 부천실내체육관을 임시로 썼다.[7]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고지 이전 설이 돌던 2005년에는 초대형 태풍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지역민들의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지역의 중대한 볼거리인 세인츠가 연고지 이전한다면? 이 때문에 지자체에서도 필사적으로 구단을 붙잡았다.[8] 2018-19시즌을 끝으로 구단을 라스베가스로 이전한다.[9] 현재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와는 공식적으로 다른 팀이다.[10] 여자까지 합치면 김천 도로공사가 있다. 하지만 이 팀도 원래 구미를 연고로 하다가 성남으로 옮긴 바 있다. 2015년에 김천으로 유턴을 했다지만.[11] 단, 1998~99, 1999-00 시즌 중 일부 경기는 군산시 월명체육관에서 치렀다. 사실상 전북·전남 광역 연고였던 셈.[12]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금정체육관에서 경기를 했지만 불편한 교통편 때문에(노포동 종합터미널에서는 가깝지만 부산 시내와는 완전 동떨어진 곳에 있다.) 2006년 사직체육관으로 홈 경기장을 옮겼다.[13] 이쪽은 겨울 시즌에 남녀 프로배구 경기를 개최하기 때문에 프로농구팀의 이전을 가정했을 때 사용이 어렵다.[14] 근데 이건 뭘 모르고 하는 비판이다. 지금 신한은행은 여러번의 수리끝에 그나마 괜찮아진 체육관을 쓰고 있는거고, 그 전의 도원체육관은 진짜 심각했다. 일례로 관중석 의자는 작은데다 등받이도 없어서 관중들이 말그대로 다닥다닥 붙어서 앉아야 했고, 그마저도 모자라서 조금만 관중이 들어차면 입석으로 관중석 뒤쪽이 띠를 이룰 정도였다. 선수들이 쓸 공간 역시 말할것도 없고. 그래서 대한항공이 도원에 간 이후 매년 인천시에 징징대서 조금씩 수리가 되었고, 결정적으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때문에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거쳐서 좀 괜찮아진게 지금 체육관이다. 그래도 규모가 작은건 해결이 불가능해서 대한항공과 흥국생명은 계양체육관이 생기자 그곳으로 옮겼고, 그나마 규모가 작은 WKBL의 신한은행이 들어가게 된 거다.[15] 이는 구리체육관의 턱없이 적은 수용 인원도 한 몫 했다.[16] 수도권 몰빵의 핑계 중 자주 나오는 것들이 바로 수도권에 몰린 숙소와 이동 거리, 그리고 수도권과 지방 간 시장 크기 차이다. 거기다 지방에 숙소와 연습장을 옮길 의지가 있는 지방 연고팀도 드물다.[17] 현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빛고을 시민문화관'''이 들어서 있다.[A] A B 당시 서울 연고권 취득 조건으로 'KBL 출범 이후 우승 경험이 있는 팀'으로 한정했다. 고로 이 당시 연고지 이전 권한을 갖고 있던 팀은 부산 기아(1997 원년리그 우승), 대전 현대(1997~1998, 1998~1999 우승), 청주 SK(1999~2000 우승), 수원 삼성(2000~2001 우승)만이 갖고 있었다. 이 중 SK와 삼성이 연고지 이전을 택했다.[18] 게다가 그 시기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고종수 신드롬으로 인기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1998년 첫 우승 및 1999년 전관왕을 달성하면서 상대적으로 밀리기도 했다.[19] 청주체육관 지붕에 '''불이 난 적이 있다.'''[20] 야구도 사실 청주구장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지만 한화는 꾸준히 청주에서 경기를 개최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연고의식은 야구가 한수 위다. 사실 제2구장서 경기하는 거 자체가 선수들에겐 피곤한 일인데 팬들을 위한것이니 꾸준히 경기를 개최하는 것이다. 일본같은 경우는 제2구장 경기가 매우 활발한 편이다.[21] 현대모비스에 인수되기 전 부산시의 비협조로, 홈구장은 부산에서 울산으로 옮긴 상태였다.[22] 2019~2020 시즌 기준으로 기아 원년 우승을 버려도 최다 우승팀이라서 이 논란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V7 달성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23] 잘 알려져있듯, 이건 여자배구에서도 인기팀 으로 잡아가던 흥국생명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흥국생명은 아예 충청도를 떠나 인천광역시로 이전.[24] 사실 김완주, 송하진 등등의 전임 시장들이 한결같이 한 얘기가 '''새 구장 신축'''이었지만...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았다.[2020년] 기준으로 서울로 이전한지 임시연고 시절을 포함해서 11년이 되었는데 아직 GS칼텍스 서울 KIXX라는 이름으로 우승한적은 없다.[25] 정확히는 당시까지는 한국전력이 프로팀이 아닌 아마 초청팀이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이전한 것이었고, 한전은 그냥 따라 간거다. 물론 어차피 한전의 경우에도 훈련 체육관이 의왕이니 땡큐이긴 했지만.[26]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자면, 현대캐피탈에서 정태영 부회장이 외국처럼 관중석에서 일반 관중과 같이 볼테니 권위를 타파하자고 나서면서, 2007년에 목 좋은 자리에 이른바 VIP들이 폼잡고 앉아 보라고 만든 본부석을 싹 없애버리고 거기를 팬들이 앉는 가족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흥국생명 역시 어쩔 수 없이 VIP들이 그냥 일반 지정석에서 봐야 되었는데, 흥국 프런트의 높으신 분들에선 당연히 그걸 불편해할 수 밖에 없었다.[27] 평범하게 운영하고 싶었던 당시 막장 흥국 프런트는 김연경이적 사태와 13-14시즌 류화석감독 선임으로 침몰하던 팀이 완전히 망가지자 14-15시즌 박미희감독 선임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그런지 홈구장을 계양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도원시절에는 체육관의 노후화와 구조문제로 하지 못했던 이벤트석을 만들고 17-18시즌에는 같은 연고지 야구장의 스카이박스와 비슷한 단체석인 “핑크하우스”를 제작하는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28] 오히려 인천으로 이전한것이 역사적의미가 있는것이 1991년에 태광산업 배구단의 운영권이 흥국생명으로 이관되어 지금에 이르기 전, 태광산업 배구단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1963년에 창단된 동일방직 배구단의 운영체인 동일방직이 바로 인천 동구에 있었다, 즉 흥국이 인천으로 이전한 2009년을 기준으로 잡으면 46년만에 원 연고지로 돌아온것이다. 물론 흥국에서는 모기업이 동일방직 배구단을 인수한 1971년을 시작으로 보고있다. 18-19시즌 우승 티셔츠 뒷면에 Since 1971이라는 프린팅이 증거[29] 당시 여론은 기왕 옮길 거면 인구도 많고 비슷한 권역이며 오리온스의 연고이전으로 경쟁자가 없는 대구광역시로 옮기자고 했다.[30] 삼성 라이온즈는 삼성그룹이 대구에서 탄생한 기업이여서,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는 해태와 KIA차 공장이 모두 광주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연고지를 대구광역시와 광주광역시로 정한 것이다.[31] 빙그레 이글스가 대표적 사례. 당시 제7구단 운영 주체가 된 한국화약그룹 자체가 충청지역 향토기업이었고 창단 당시부터 구단주를 맡고 있는 김승연 회장도 충청남도 출신이다.[32]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에도 모그룹과 구단측에서는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하고 싶었으나 당시 프로야구기획팀에서 울산광역시 출신인 신격호가 있다는 이유로 부산에 강제로 앉혔다. 그 외에 강원도 연고 구단 창설과 관련해 현대그룹에 접촉한 것도 정주영 회장이 강원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33] 장기 불매운동은 기본이요, 상품 파괴 인증도 줄이을 게 뻔하다. 비교적 인기가 덜한 축구에서도 상품을 파괴하고, 농구에서도 불매운동이 일어났는데, 하물며 야구는 인기도 더 많은데 무사한 게 더 이상할 정도다. 비교를 해서 오리온스의 야반도주랑 삼성 야반도주랑 비교한다면 어느쪽이 더 후폭풍이 셀까? 당연 후자다. 삼성이 대구를 버린다면 불매운동, 유니폼 찢어버리기를 넘어서 구장 테러가 나올수 있다. 대구시민들이 진짜 갤럭시 버리고 아이폰으로 갈아탈수도 있다(...)[34]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의 역사도 포함[35]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둔 이후 첫 경기인 1999시즌 개막전이 매진되지 못한 것이 연고지 이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인천 나름대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인천에는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와 협력사들이 위치해있어 1999년 대우그룹의 부도는 인천 경제에 타격이 매우 컸기 때문. 게다가 평소 숭의야구장의 시설이 낙후됐던데다 팀의 모기업이 너무 자주 바뀌었고 성적도 만년 꼴찌였다. 심지어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도 암흑기에는 사직 야구장 관중석이 텅텅 빈 적이 있다. 인천은 도원전사로 대표되는 강성 팬덤을 갖췄고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도시인 만큼 야구 자체에 대한 열기는 충분한 지역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삼청태현 문서 참조.[36] 결정적인 사정이 돈 문제였다. 당시 현대는 SK로부터 인천 연고권 이전에 대한 대가로 54억원을 받고 이 돈을 서울 연고지 분할에 대한 보상금 형식으로 27억원씩 기존 서울팀인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에 넘겨줬어야 했다. 그러나 유니콘스 구단의 모기업인 현대전자가 자금난에 있다는 이유로 기존 서울팀에게 줘야 할 54억원을 현대전자의 경영 자금으로 다 써버리고 말았다. 제대로 된 보상금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기존의 서울팀들이 현대에게 공짜로 서울을 허락할 리가 만무했고 현대는 결국 수원에 눌러 앉게 된다.[37] 이후 서울 연고지 입성권은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팀에게 주기로 했고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재창단 방식으로 이장석의 센테니얼인베스트먼트가 히어로즈를 창단하면서 서울 연고지 입성권은 히어로즈로 갔다.[38] 이 당시 프로야구의 인기도가 유독 낮기도 했었고 수원이 축구도시의 이미지가 강했던데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영향 덕분에 수원에서는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인기가 가히 압도적이었다.[39] 인천에 있던 시절에는 그래도 시즌 홈 관중 누적치가 최소 20만명을 넘겼지만 수원에서 홈경기를 치른 8시즌 중 시즌 홈 관중 누적치가 20만명을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원에서 홈경기를 치르던 시절 중 가장 많은 관중이 온 해는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2003년의 17만4915명(경기당 평균 관중 2611명)이었다. 참고로 옛 인천팀과 새 인천팀이 맞붙은 그 해 한국시리즈는 단 한 경기도 매진시키지 못한 흥행 참패 시리즈였다.[40] 1990, 91, 92, 93까지 이 구도였다.[41] 청주시에 모기업인 럭키금성 공장이 있었다. 현재도 LG전자, LG화학, LG생활건강, LG하우시스, LG이노텍과 LG그룹에서 분리된 LS산전 등의 공장이 SK그룹과 함께 청주산단을 양분하고 있다.[42] 참고로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명목상으로는 "부천시"를 연고로 하고 있지만 홈구장은 목동운동장으로 사실상 서울 연고 구단이었다. 2001년 부천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부천에서 홈경기를 치르면서 실질적인 부천 연고팀이 되었다.[43] 기존의 연고지는 도, 시, 군 이었는데 최초로 구로 연고지를 잡은 것 때문에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느냐 면서 논란이 되었다. 다만, 인구수에서 의정부시 43만명, 이천시 21만명인데 노원구 55만으로 오히려 많아서 시장성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44] 정확히는 기존 연고지 구단은 해체하고 새 연고지에서 새로 창단하는 형식이라 엄밀히 말하면 연고이전은 아니다.[45] 푸방은행의 공식 명칭이 타이베이푸방은행이다.[46] 중신 브라더스가 연고이전한 상황이라 프로팀이 없었다.[47] NPB 이전 역사를 포함해서. NPB는 1950년에 출범했다.[48]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 구단 창단을 주도했던 사철 회사들의 부대사업으로서의 프로야구 비즈니스 모델의 전형이다. 당시 사철회사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철도 노선을 따라서 택지, 백화점, 문화시설 등을 건설함으로써 고정적인 승객들을 유치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프로야구단 창단과 소속 프로야구단이 사용할 구장 건설 등도 그러한 비즈니스 모델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을 따라간 구단으로는 한큐 브레이브스를 위시하여, 한신 타이거스, 난카이 호크스, 긴테쓰 버팔로즈, 도큐 플라이어즈, 니시테쓰 라이온즈 등이 있었다. 현존 하는 구단 중에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의 잔재로서 남아있는 구단이 한신 타이거스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이다.[49] 명명권을 매각한 현재는 홋토못토 필드 고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50] 한큐의 홈구장이던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은 오릭스의 고베 이전 후 경륜장으로 용도를 바꾸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4년에 헐리고 한큐전철은 그 자리에 대형 쇼핑센터를 지었다.[51] 3할 이하는 초대형 벌금이라는 사실상 해체빵을 걸었는데 쇼치쿠 로빈스가 3할을 못 넘겨서 자삭을 하든지 다른 데와 합치든지 해야 했다.[52] 다이요가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차지할 명분은 충분했다. 다이요가 요코하마에게 "새 구장 지어주시면 그 쪽으로 갈텐데 어떻게 할 것임?"하자 요코하마 시가 "OK, 조금만 기다려"라고 하며 만든 게 하마스타다. 날로 먹으려는 롯데가 명분이 밀려도 한참 밀린다.[53] 이건 1969년 다이에이 구단을 롯데가 인수하면서 다이에이 그룹측이 "너네 야구단 사간 김에 우리가 지은 야구장도 사가!"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롯데가 "여기 쓰다간 투수 죽어나간다"며 거부하면서 결국 철거되었다.[54] 이때 롯데가 했던 개드립이 유명하다. "우리는 이제 전국구 구단이다." "우리는 어느 한 지역이 아닌 일본 국민 전체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우리의 연고는 일본 그 자체다."(.....)[55] 셋방살이 - 심지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상대적으로 탄탄한 팬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닛폰햄 파이터즈는 그런게 없었다.[56] J리그의 콘사도레 삿포로라는 축구팀이 있다. 하지만 삿포로 돔이 몇천억을 꼴아박으며 공기부양식으로 야구장과 축구장 겸용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하면...[57] 이 영향으로 신생구단이 오사카 긴테츠의 연고지였던 오사카를 포기하고 미야기 현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리고 태어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긴테츠의 홈이었던 오사카로 연고이전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인기 차이는 적잖게 벌어졌다.[58] 그리고 이 비밀번호는 '''무려 1997년까지 20년을 이어지게 된다!'''[59] 실제로는 난카이 전기철도의 회장이었던 가와카츠 덴이 열혈 야빠로 자식들이 돈만 축내는 야구단을 팔아버리려 할때마다 "내눈에 흙이 들어오기전까지 절대 못판다!"라고 했는데 진짜 눈에 흙이 들어가자마자 냅다 팔아버린 것이다.(...) 사실 B클래스만 찍고 관중도 그닥 잘 못 모으는 야구단을 난카이 전철 이사회와 노조가 "적자만 내고 그룹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구단을 매각하라"고 요구해왔음에도 계속 잡고 있던 난카이 전기철도가 대인배스럽긴 하지만..[60] 뉴욕 자이언츠와는 다른 뉴욕 시절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61] 이 결정이 나자 당시 자이언츠의 토론토 입성 준비를 이미 다 마쳤던 토론토시는 당연히 빡쳤고, 자이언츠를 인수하려 했던 래뱃 그룹은 메이저리그에 인수 대신 신생팀을 만들어달라고 항의하게 된다. 이 덕분에 1년 후 아메리칸리그에 토론토 신생팀이 생겼는데 그 팀이 바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다.[62] 댈러스-포트워스 중간에 껴 있다.[63] 그 이전에는 캔자스시티로 이적할 것이란 카더라가 나왔었다.[64] 1993년 창단한 야구팀 이름과 똑같다.[65] 미네아폴리스의 위성도시로 미국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몰 오브 아메리카가 위치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66] 애틀랜타 쓰래셔스란 팀명을 가졌었다.[67] 퀘벡 노르디크 드 케베크란(영어명:퀘벡 노르딕스) 팀명을 가졌었다.[68] 당시엔 피닉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었다. 애리조나로 바뀐 건 2014년.[69] 근데 카디널스는 시카고에서 창단 되었을 당시부터 사용된 팀명이었다. 지역연고를 옮겼는데 그게 하필 세인트루이스여서 팀명이 같아진 것일 뿐인데, 당시에 이런 비아냥도 많이 받았다. [70] 초창기 팀명이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예전 이름과 같다.[71] NFL판 북패 No.2는 똑같이 야반도주로 옛 연고지를 떠난 구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현 볼티모어 레이븐스이다. 참고로 NFL판 남패는 휴스턴에서 테네시로 연고지를 이전한 구 휴스턴 오일러스, 현 테네시 타이탄스. 그리고 뉴올리언스 세인츠가 NFL판 남패 No.2가 될 뻔 했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상처받은 뉴올리언스 시민들의 통합의 상징 비슷하게 되면서 그냥 뉴올리언스에 눌러 앉아서 남패가 되는 것은 면했다. [72]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야구팀 인디언스의 신축구장은 허가해주고 돈지랄해가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n Roll Hall of Fame)"을 건설했다. 이 사건 이후 구단주 아트모델이 연고지 이전을 결심했다.[73] 그래서 볼티모어 레이븐스는 리그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적이 많은 팀이다. 일단 연고이전으로 얽힌 팀만 콜츠-브라운스이니....[74] 1965년 완공된 세계 최초의 돔경기장이다.[75] 샬럿 호네츠와의 협의 끝에 샬럿 시절을 구단 역사에서 지웠다.[76] 이전 홈구장이었던 폰티악 실버돔, 더 팰리스 오브 어번 힐스는 디트로이트에 없다.[77] 실제 무기를 저장하는 무기고였다.[78] 사실 4대 스포츠 중 자생 가능한 스포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