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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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있었던 야구장. 2002년 인천SK행복드림구장이 개장되기 이전까지 인천에서 사실상의 정식 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유일한 경기장이었다.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자락의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인천 야구의 역사가 시작됐다면, 숭의야구장은 해방 이후 인천고와 동산고가 주도했던 인천 야구의 전성기와 삼청태로 대표되는 인천 프로야구의 암흑기를 거쳐 현대 유니콘스의 첫 우승과 연고지 이전의 쓰라림, 꼴찌로 시작된 SK 와이번스의 초창기를 동시에 경험했던 인천 야구 역사의 1.5~2.0세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숭의종합운동장이 완공된 후 1934년에 야구장이 건립되었다. 한동안 인천 지역의 아마야구 팀들을 위해 쓰이다가 전국체전을 맞아 1964년에 새롭게 단장했다.
그 뒤 프로 출범 전까지는 아마야구 위주로 야구장이 쓰였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보조 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흔히 "도원야구장"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야구장이 도원동에 있었고 1994년에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 도원역이 지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인천구장. 당시 대부분의 인천 시민들은 ‘공설운동장’으로 불렀다
1982년 KBO 리그 출범과 함께 인천 지역 연고 팀들의 홈 구장으로 이용되었지만, 후술하게 될 보수공사로 인해 개막 후 3개월이 지난 1982년 7월에서야 처음으로 프로야구 홈 경기를 치르게 된다. 과거의 영화를 안고 인천 연고 팀이 창단됐지만 이 곳을 홈으로 쓰던 인천 지역 야구팀들의 역사는 워낙 안구에서 쓰나미가 차오를 정도로 처절한지라 가을잔치의 영광을 많이 누리지는 못했다. 이 경기장에서 포스트시즌이 치러진 것은 20번의 시즌 동안 딱 4번에 불과했다. 1989년, 1994년, 1996년, 1998년. 그래도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 곳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만년 꼴찌 시절부터 숭의야구장을 지키던 팬들을 환희의 눈물에 젖어들게 했다.
이 구장의 특징은 높은 철망 펜스였다. 팀의 전력이 워낙 약했던 데다 무엇보다 인천을 연고로 했던 팀들은 하나같이 투타의 불균형이 심각했다. 투수 쪽은 KBO 리그에서 손꼽힐 정도로 수요가 풍부했지만, 타선은 KBO 리그 역사상 가장 흐물흐물한 물방망이였다. 애초에 구장이 작아도 홈런을 제대로 못 치는 타선이었다. 그래서 투수가 9이닝 1실점으로 완투를 해도 타선이 상대 투수를 털지 못해 0-1 완투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 피해자가 좌완투수 최창호였다.[2] 구장 크기도 작고 펜스까지 너무 낮아서, 구단의 주인이 바뀌고 감독이 바뀔 때마다 구장 활용 방안을 새로 마련했다. 특히 구장 크기를 넓힐 수 없어서[3] 콘크리트 펜스 위에 철망을 덧대고 그 철망의 높이를 조절하는 형태로 대책을 세웠다. 1989년에 김성근이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는 "어차피 홈런 못칠거 맞지도 않겠다" 라면서 펜스 높이를 철망 포함 4.5m에서 7.5m까지 올렸다.[4] 박영길 감독 재임 당시에도 7.5m의 철망 펜스를 유지했으나 박 감독의 후임으로 들어온 정동진 감독은 철망 높이를 낮춰 6.5m로 바꾸었고 팀 간판을 현대 유니콘스로 바꾼 김재박 감독 시절에 최종 펜스 높이가 4.5m 가량이 되었다. 그래도 감당이 안되어서 해태나 삼성같이 타력이 강한 팀과는 당시 제2홈구장이자 숭의야구장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5]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자주 치렀다.
좌 91m-중 110m-우 91m으로 1960~70년대 스타일의 극단적으로 작은 규모의 야구장이었으나 철망의 힘으로 그나마 버틴 사례.[6]
사실 이 경기장은 프로야구 경기장으로도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인천에서 야구를 배우고 선수로 성장한 야구인들에게는 동대문야구장급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특히 인천 지역의 수많은 학생 야구선수들은 동대문에서 열리는 고교야구 및 대학야구 전국대회에 출전하려면 무조건 이 경기장에서 지역 예선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인천 출신 야구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배움의 성지였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인천 야구의 대부인 박현식 선생이나 김진영 선생부터 1980~1990년대 야구 스타였던 임호균, 양승관, 김경기, 정민태, 송지만, 오늘날 류현진, 이재원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리그에서 이름을 알린 인천 출신 스타들에게 숭의야구장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현대 유니콘스의 등장과 함께 구장은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현대가 돈을 들여 구장을 개보수했는데, 먼저 비만 조금 오면 경기를 치를 수 없던 배수 시설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잔디보다 모래가 더 많아 흉해보였던 외야 그라운드에 인조잔디를 깔았다. 도원 구장은 프로 초창기에도 외야 잔디의 질은 인정받았으나 80-90년대 초반의 열악한 지원 환경과 무관심 속에 외야수 자리는 흙이 노출되었었다.
내야는 산뜻한 황토로 변경되었으며 1997년부터는 일본에서 들여온 회색 흙(배수성이 좋은 화산석 흙)을 내야에 깔았다. (1996년과 1997년 이후의 내야 흙 색이 다르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구장 광고판과 전광판의 변신. 천연색의 내외야 광고판이 난무하던 국내 야구장에 처음으로 녹색배경의 노란색/흰색 글씨의 외야 펜스 광고를 도입했다.[7] 구장은 낙후했으나 방문한 관중들에게 색다른 산뜻함을 제공하였다. 1998년부터는 4색 전광판을 도입하여 애니메이션까지 나오는 것으로 새롭게 고쳤고,[8] 관중석도 새단장했다.
하지만 새롭게 단장해 봤자 너무 낙후되어서 그리 티가 안 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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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열악한 곳이 무려 중앙 지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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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쪽 좌석.
경기장 입구는 총 3곳으로 1루, 3루 내야 1곳씩, 중앙 1곳(지정석용)이었는데 입구의 옆에 협소하게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워낙 비좁은 탓에 현대 시절에 화장실 수리를 했음에도 옛 고속도로 휴게소 타입의 뻥 뚫린 수세식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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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숭의야구장 화장실. 오른쪽은 무등 야구장 화장실이다.
작은 규모라서 그런지 구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소위 '개구멍'이 있었으며, 심지어 구장 벽을 타고 올라가 구장에 출입했다는 도시전설이 있기도 하다. 거기에 우측 펜스 뒷편 광성고교 쪽 언덕배기와 중앙여상 건물과 그 옆에 교회가 있는데 이 곳에서 야구장을 바라보는 조망이 좋은지 여기서 공짜로 경기관람을 하던 야구팬들이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하고 야반도주한 뒤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SK 와이번스는 이 구장에서 2000년 4월 8일 한화 이글스 전을 시작으로 홈 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이후 한화 이글스가 막장 투수진을 가지고도 깨지 못한 기록이 있는게, 그게 피홈런 기록이다. 2000년 195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때 인천에서 115피홈런을 기록했다.(원정80) 홈경기 115피홈런도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 얼마나 친 타자 구장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 그러나 광주의 234홈런[9] 을 깨지는 못했다. 당시 SK 타자들이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를 제외하면 모두 막장이었으니..
2002년 초 문학 야구장이 완공되어 그 해부터는 문학 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쓰게 되었으나, 월드컵과 일정이 겹치는 관계로 문학경기장에서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에는 SK가 숭의야구장을 쓰기로 하여 정규리그 홈경기 중 6경기를 숭의야구장에서 치렀다. 2002년 6월 9일 현대전을 끝으로 더이상 1군 경기는 열리지 않았지만 시범경기로 폭을 넓히면 2004년 3월 14일에 열린 롯데와의 시범경기가 마지막 경기였다. 그 뒤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와 SK 와이번스 2군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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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 야구장처럼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이 경기장에 들어 올 수 있게 하였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한 시즌 동안 1군 경기가 없을 경우 2군 홈 구장으로도 사용되었다. 2001년 용현동 드림파크가 완공된 후에는 2군을 용현동으로 이전했다가, 2006년 용현동 일대 재개발로 드림파크가 철거된 뒤에는 다시 숭의야구장을 철거 직전까지 2군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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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당시 전광판인데, SK가 도원을 떠나고 나서 개 보수가 잘 없었기 때문에 전광판에 적힌 이름이 밝기가 낮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CH 아래 II는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심재학, 송산, 조동화, 이재원, 김재현(1987), 임훈, 김성현(1987)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철거 후에는 한동안 송도 LNG 야구장을 이용했다.
초창기 숭의야구장의 홈팀인 삼미, 청보, 태평양은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경기장에서 안습의 기록을 적지 않게 양산했다. 물론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특급 기록도 간혹 탄생했다. 예를 들어 밑에서 후술할 임호균의 최소투구 완봉승 등의 기록이 그렇다. 더불어 KBO 리그 최초의 기록이 숱하게 탄생한 기록의 산실이기도 하다.
2008년 인천광역시의 도시재생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 지역이 재개발 대상이 되자, 한국 야구사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숭의야구장은 옆의 숭의종합운동장과 함께 철거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숭의 아레나 파크라는 축구전용구장으로 변신해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으로 활용 중이다. 2013년 이후 건설경기 불황으로 주상복합 건설은 지지부진하다 도원서희스타힐스라는 지역 주택조합 아파트로 변경되어 2016년 8월 분양에 들어가 2017년 6월 조합 설립인가가 완료되었고 2020년까지 주상복합아파트 47층 7개 동 오피스텔 1동을 건설할 예정이다. 2017년 10월에 공사를 준비 중이다.
인천광역시는 숭의야구장 철거 과정에서 인천 지역 아마야구 대체 구장 마련을 약속했는데, 인천대공원 근처에 짓는다는 말만 있을 뿐이다. 대체구장이라고 지은 것이 바다 한가운데 LNG 기지에 지은 것이니... 거기다 2019년 12월 말까지 된 계약 기간이 지나면 철거하고 물류창고를 만든다고 한다. 물론 대체 야구장 10곳을 조성한다지만 2곳을 제외하곤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그 사이 SK 와이번스가 강화군 길상면에 SK 퓨처스 파크를 지었지만, 숭의야구장의 대체 경기장과는 무관하다.
야구장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숭의야구장의 흔적은 도원역에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앞 썬큰광장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건축 과정에서 철거된 야구장의 옛 의자와 덕아웃 등 일부를 보존해 별도 공간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역대 인천 연고 야구단의 역사도 기록하고 있다.
참고: 인천 도원구장 연고팀의 사건사고
1. 개요 및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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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있었던 야구장. 2002년 인천SK행복드림구장이 개장되기 이전까지 인천에서 사실상의 정식 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유일한 경기장이었다.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자락의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인천 야구의 역사가 시작됐다면, 숭의야구장은 해방 이후 인천고와 동산고가 주도했던 인천 야구의 전성기와 삼청태로 대표되는 인천 프로야구의 암흑기를 거쳐 현대 유니콘스의 첫 우승과 연고지 이전의 쓰라림, 꼴찌로 시작된 SK 와이번스의 초창기를 동시에 경험했던 인천 야구 역사의 1.5~2.0세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숭의종합운동장이 완공된 후 1934년에 야구장이 건립되었다. 한동안 인천 지역의 아마야구 팀들을 위해 쓰이다가 전국체전을 맞아 1964년에 새롭게 단장했다.
그 뒤 프로 출범 전까지는 아마야구 위주로 야구장이 쓰였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보조 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흔히 "도원야구장"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야구장이 도원동에 있었고 1994년에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 도원역이 지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인천구장. 당시 대부분의 인천 시민들은 ‘공설운동장’으로 불렀다
1982년 KBO 리그 출범과 함께 인천 지역 연고 팀들의 홈 구장으로 이용되었지만, 후술하게 될 보수공사로 인해 개막 후 3개월이 지난 1982년 7월에서야 처음으로 프로야구 홈 경기를 치르게 된다. 과거의 영화를 안고 인천 연고 팀이 창단됐지만 이 곳을 홈으로 쓰던 인천 지역 야구팀들의 역사는 워낙 안구에서 쓰나미가 차오를 정도로 처절한지라 가을잔치의 영광을 많이 누리지는 못했다. 이 경기장에서 포스트시즌이 치러진 것은 20번의 시즌 동안 딱 4번에 불과했다. 1989년, 1994년, 1996년, 1998년. 그래도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 곳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만년 꼴찌 시절부터 숭의야구장을 지키던 팬들을 환희의 눈물에 젖어들게 했다.
이 구장의 특징은 높은 철망 펜스였다. 팀의 전력이 워낙 약했던 데다 무엇보다 인천을 연고로 했던 팀들은 하나같이 투타의 불균형이 심각했다. 투수 쪽은 KBO 리그에서 손꼽힐 정도로 수요가 풍부했지만, 타선은 KBO 리그 역사상 가장 흐물흐물한 물방망이였다. 애초에 구장이 작아도 홈런을 제대로 못 치는 타선이었다. 그래서 투수가 9이닝 1실점으로 완투를 해도 타선이 상대 투수를 털지 못해 0-1 완투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 피해자가 좌완투수 최창호였다.[2] 구장 크기도 작고 펜스까지 너무 낮아서, 구단의 주인이 바뀌고 감독이 바뀔 때마다 구장 활용 방안을 새로 마련했다. 특히 구장 크기를 넓힐 수 없어서[3] 콘크리트 펜스 위에 철망을 덧대고 그 철망의 높이를 조절하는 형태로 대책을 세웠다. 1989년에 김성근이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는 "어차피 홈런 못칠거 맞지도 않겠다" 라면서 펜스 높이를 철망 포함 4.5m에서 7.5m까지 올렸다.[4] 박영길 감독 재임 당시에도 7.5m의 철망 펜스를 유지했으나 박 감독의 후임으로 들어온 정동진 감독은 철망 높이를 낮춰 6.5m로 바꾸었고 팀 간판을 현대 유니콘스로 바꾼 김재박 감독 시절에 최종 펜스 높이가 4.5m 가량이 되었다. 그래도 감당이 안되어서 해태나 삼성같이 타력이 강한 팀과는 당시 제2홈구장이자 숭의야구장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5]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자주 치렀다.
좌 91m-중 110m-우 91m으로 1960~70년대 스타일의 극단적으로 작은 규모의 야구장이었으나 철망의 힘으로 그나마 버틴 사례.[6]
사실 이 경기장은 프로야구 경기장으로도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인천에서 야구를 배우고 선수로 성장한 야구인들에게는 동대문야구장급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특히 인천 지역의 수많은 학생 야구선수들은 동대문에서 열리는 고교야구 및 대학야구 전국대회에 출전하려면 무조건 이 경기장에서 지역 예선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인천 출신 야구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배움의 성지였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인천 야구의 대부인 박현식 선생이나 김진영 선생부터 1980~1990년대 야구 스타였던 임호균, 양승관, 김경기, 정민태, 송지만, 오늘날 류현진, 이재원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리그에서 이름을 알린 인천 출신 스타들에게 숭의야구장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1.1. 현대 유니콘스 시절(1996~1999). 도원 구장의 혁명적 변화
현대 유니콘스의 등장과 함께 구장은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현대가 돈을 들여 구장을 개보수했는데, 먼저 비만 조금 오면 경기를 치를 수 없던 배수 시설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잔디보다 모래가 더 많아 흉해보였던 외야 그라운드에 인조잔디를 깔았다. 도원 구장은 프로 초창기에도 외야 잔디의 질은 인정받았으나 80-90년대 초반의 열악한 지원 환경과 무관심 속에 외야수 자리는 흙이 노출되었었다.
내야는 산뜻한 황토로 변경되었으며 1997년부터는 일본에서 들여온 회색 흙(배수성이 좋은 화산석 흙)을 내야에 깔았다. (1996년과 1997년 이후의 내야 흙 색이 다르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구장 광고판과 전광판의 변신. 천연색의 내외야 광고판이 난무하던 국내 야구장에 처음으로 녹색배경의 노란색/흰색 글씨의 외야 펜스 광고를 도입했다.[7] 구장은 낙후했으나 방문한 관중들에게 색다른 산뜻함을 제공하였다. 1998년부터는 4색 전광판을 도입하여 애니메이션까지 나오는 것으로 새롭게 고쳤고,[8] 관중석도 새단장했다.
하지만 새롭게 단장해 봤자 너무 낙후되어서 그리 티가 안 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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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열악한 곳이 무려 중앙 지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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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쪽 좌석.
경기장 입구는 총 3곳으로 1루, 3루 내야 1곳씩, 중앙 1곳(지정석용)이었는데 입구의 옆에 협소하게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워낙 비좁은 탓에 현대 시절에 화장실 수리를 했음에도 옛 고속도로 휴게소 타입의 뻥 뚫린 수세식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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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숭의야구장 화장실. 오른쪽은 무등 야구장 화장실이다.
작은 규모라서 그런지 구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소위 '개구멍'이 있었으며, 심지어 구장 벽을 타고 올라가 구장에 출입했다는 도시전설이 있기도 하다. 거기에 우측 펜스 뒷편 광성고교 쪽 언덕배기와 중앙여상 건물과 그 옆에 교회가 있는데 이 곳에서 야구장을 바라보는 조망이 좋은지 여기서 공짜로 경기관람을 하던 야구팬들이 있었다.
1.2. SK 와이번스 시절(2000~2002)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하고 야반도주한 뒤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SK 와이번스는 이 구장에서 2000년 4월 8일 한화 이글스 전을 시작으로 홈 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이후 한화 이글스가 막장 투수진을 가지고도 깨지 못한 기록이 있는게, 그게 피홈런 기록이다. 2000년 195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때 인천에서 115피홈런을 기록했다.(원정80) 홈경기 115피홈런도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 얼마나 친 타자 구장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 그러나 광주의 234홈런[9] 을 깨지는 못했다. 당시 SK 타자들이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를 제외하면 모두 막장이었으니..
2002년 초 문학 야구장이 완공되어 그 해부터는 문학 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쓰게 되었으나, 월드컵과 일정이 겹치는 관계로 문학경기장에서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에는 SK가 숭의야구장을 쓰기로 하여 정규리그 홈경기 중 6경기를 숭의야구장에서 치렀다. 2002년 6월 9일 현대전을 끝으로 더이상 1군 경기는 열리지 않았지만 시범경기로 폭을 넓히면 2004년 3월 14일에 열린 롯데와의 시범경기가 마지막 경기였다. 그 뒤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와 SK 와이번스 2군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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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 야구장처럼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이 경기장에 들어 올 수 있게 하였다.
1.3. SK 와이번스 2군 구장 시절(2000, 2006~2008)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한 시즌 동안 1군 경기가 없을 경우 2군 홈 구장으로도 사용되었다. 2001년 용현동 드림파크가 완공된 후에는 2군을 용현동으로 이전했다가, 2006년 용현동 일대 재개발로 드림파크가 철거된 뒤에는 다시 숭의야구장을 철거 직전까지 2군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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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당시 전광판인데, SK가 도원을 떠나고 나서 개 보수가 잘 없었기 때문에 전광판에 적힌 이름이 밝기가 낮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CH 아래 II는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심재학, 송산, 조동화, 이재원, 김재현(1987), 임훈, 김성현(1987)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철거 후에는 한동안 송도 LNG 야구장을 이용했다.
1.4. 숭의야구장이 남긴 기록들
초창기 숭의야구장의 홈팀인 삼미, 청보, 태평양은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경기장에서 안습의 기록을 적지 않게 양산했다. 물론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특급 기록도 간혹 탄생했다. 예를 들어 밑에서 후술할 임호균의 최소투구 완봉승 등의 기록이 그렇다. 더불어 KBO 리그 최초의 기록이 숱하게 탄생한 기록의 산실이기도 하다.
- 1982년 7월 17일: 숭의야구장에서 열렸던 첫 번째 KBO 리그 경기. 상대팀은 MBC 청룡이었다. 물론 예상했겠다시피 이날 경기도 삼미 슈퍼스타즈가 어김없이 패배를 적립하면서 후기리그 개막 6연패를 이어갔다.[11] 삼미는 5일 뒤인 7월 22일 인천 해태전에서 7-4로 승리를 거두면서 창단 이후 첫 번째로 인천 홈경기에서 승리를 기록했다.
- 그 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숭의야구장이 보조경기장으로 지정된 탓에 조명탑 설치 등의 공사를 해야 했고, 공사가 끝난 후기리그부터 인천에서 홈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제2홈구장인 구 춘천야구장(온의동 소재)에서 홈경기를 7경기 치렀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서울 동대문야구장, 부산 구덕야구장, 대구 시민야구장 등 다른 팀 홈구장을 빌려서 '특별 홈 경기'라는 이름으로 홈 경기 같지 않은 홈 경기를 11경기(더블헤더 포함)나 치러야 했다.[10] 물론 다들 알다시피 이 당시 삼미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패배했다. 그래도 MBC에게는 우세. 당시의 '특별 홈 경기' 일정은 다음과 같다.
- 1983년 9월 26일: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삼미 장명부가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면서 한 시즌 개인 최다승인 30승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2018년 7월 29일 기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투수 개인 시즌 최다승 기록이며 장명부가 기록한 28선발승 또한 KBO 최다 선발승 기록이다.
- 1985년 4월 30일: 무려 18연패에 빠졌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최계훈의 완봉 역투와 8회말 양승관의 싹쓸이 3루타에 힘입어 MBC 청룡을 상대로 4:0 승리를 거두며 길고 긴 연패를 끊어냈다. 그러나 이날 승리 다음날 삼미그룹은 야구단 매각을 발표했다.
- 1986년 7월 15일: KBO 리그 최초로 두 명의 투수가 합작해 매 이닝 삼진아웃을 잡아낸 경기. 주인공은 최계훈과 조병천.
- 1986년 7월 27일: 해태 타이거즈와 청보 핀토스의 경기에서 KBO 리그 최초로 15이닝 0-0 무승부가 나왔다. 더 무서운 것은 이날 양팀에서 등판한 두수는 총 2명. 해태 선발 차동철[12] 과 청보 선발 김신부[13] 는 서로 15이닝동안 혼자 피칭을 했다.[14] 토미넌트 스타트에 퀄리티 스터트 플러스를 합친 것을 한경기에 두 투수가 보여준 것.
- 1987년 8월 25일: 청보 핀토스의 임호균이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KBO 리그 역대 최소투구 완봉승(73구)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2018년 7월 29일 기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 1992년 8월 19일: 스위치 히터인 OB 베어스의 장원진이 KBO 리그 최초로 양쪽 타석에서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기록은 안타와 2루타.
- 1994년 10월 23일: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가 태평양 돌핀스를 4승 무패로 꺾고 두 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LG 트윈스의 마지막 우승.
- 1996년 10월 20일: 현대 유니콘스의 정명원이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 1998년 5월 14일: 해태 타이거즈의 이대진이 KBO 리그 역대 최다 연속타자 탈삼진(10개)를 뽑아냈다. 일명 '쿨바에서 쿨바까지'로 일컬어지는 기록.
- 1998년 10월 30일: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가 LG 트윈스를 4승 2패로 꺾고 인천야구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 2000년 10월 11일: 현대 유니콘스가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한 시즌 90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이 해 현대는 91승을 거뒀는데 이는 KBO 리그 사상 단일 구단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2016년 두산의 93승 으로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15]
- 2001년 9월 22일: SK 와이번스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가 KBO 리그 외국인 선수 사상 최초로 '200이닝-200탈삼진'의 기록을 달성했다.
1.5. 철거
2008년 인천광역시의 도시재생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 지역이 재개발 대상이 되자, 한국 야구사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숭의야구장은 옆의 숭의종합운동장과 함께 철거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숭의 아레나 파크라는 축구전용구장으로 변신해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으로 활용 중이다. 2013년 이후 건설경기 불황으로 주상복합 건설은 지지부진하다 도원서희스타힐스라는 지역 주택조합 아파트로 변경되어 2016년 8월 분양에 들어가 2017년 6월 조합 설립인가가 완료되었고 2020년까지 주상복합아파트 47층 7개 동 오피스텔 1동을 건설할 예정이다. 2017년 10월에 공사를 준비 중이다.
인천광역시는 숭의야구장 철거 과정에서 인천 지역 아마야구 대체 구장 마련을 약속했는데, 인천대공원 근처에 짓는다는 말만 있을 뿐이다. 대체구장이라고 지은 것이 바다 한가운데 LNG 기지에 지은 것이니... 거기다 2019년 12월 말까지 된 계약 기간이 지나면 철거하고 물류창고를 만든다고 한다. 물론 대체 야구장 10곳을 조성한다지만 2곳을 제외하곤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그 사이 SK 와이번스가 강화군 길상면에 SK 퓨처스 파크를 지었지만, 숭의야구장의 대체 경기장과는 무관하다.
야구장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숭의야구장의 흔적은 도원역에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앞 썬큰광장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건축 과정에서 철거된 야구장의 옛 의자와 덕아웃 등 일부를 보존해 별도 공간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역대 인천 연고 야구단의 역사도 기록하고 있다.
참고: 인천 도원구장 연고팀의 사건사고
2. 여담
[1] 펜스가 낮아 여기에 철망을 덧댄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참조.[2] 1989년 방어율 3위를 기록했음에도 승수는 단지 10승, 오버패...[3] 특히 좌중간 쪽의 관중석 외벽은 옛 공설운동장 주경기장과 벽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4] 김성근 감독은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에도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펜스를 비슷한 형태로 바꿨다.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도 숭의야구장과 마찬가지로 홈플레이트에서 중견수 쪽 담장까지의 거리가 110m에 불과할 정도로 작았고 콘크리트 펜스 높이가 2m 남짓에 불과했다.[5] 1999년 김재박 감독의 요청으로 홈에서 펜스까지의 거리를 5m씩 줄이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잠실 야구장과 동급 규모인 좌우 100m-중간 125m, 펜스 높이 4m의 초대형 야구장이었다.[6] 홈런성 공도 철망을 맞고 튕겨 인플레이가 되기도 했고 라이너성 타구가 높은 철망에 맞아 2루타, 단타로 처리되기도 했다.[7] 1996년 후반부터는 다시 천연색 광고판이 등장하긴 한다. 백스톱 광고판은 잠실에서 이미 녹색배경의 노란색 광고판을 운영했었다.[8] 1997년까지 사용한 기존 전광판은 수원야구장의 리모델링 전 전광판과 같았다.[9] 2017년 '''144경기 체제'''에서 SK 와이번스가 친 홈런 수와 동일하다. 참고로 당시에는 133경기였다.[10] 이는 삼미에게만 해당된 얘기는 아니어서 다른 팀들 역시 '특별 홈 경기' 명목으로 다른 지역에서 경기를 치렀다. 단적인 예로, 박철순이 연승 행진을 22연승에서 마감한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는 잠실구장에서 열렸는데, 이 경기의 홈 팀은 롯데였다. 참고로 당시 OB의 연고지는 서울이 아닌 충청도였다.[11] 참고로 1982년 후기리그에서 삼미가 거둔 성적은 40경기 5승 35패, 승률 0.125였다. 물론 KBO 리그 사상 기별 성적으로는 최악의 기록.[12] 현 건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SF볼의 마술사'로 불렸으며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13] 재일교포 출신의 언더핸드 투수.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를 거쳐 LG 트윈스에서 은퇴했다.[14] 참고로, 차동철과 김신부는 나중에 LG 트윈스에서 한팀으로 만나서, 1990년에 우승을 경험했다.[15] 현대의 91승은 16년간 독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었지만 두산 베어스가 2016년 9월 28일 대전 한화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91승을 기록해 타이기록이 됐다. 그 후 2승을 더 기록해 KBO 리그 한 시즌 팀 최다승리 기록은 두산 베어스가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