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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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곽태진은 1917년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하여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중등과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중퇴하였고#, 8.15 광복 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3월 성일영·도종표(都鍾杓) 등 동지 100여 명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현풍신사(玄風神社)에 방화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고령군·청도군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45년 5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야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같은 날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할 수 있었다.#
광복 직후 양조업 및 농업에 종사하다가 고령군 우곡면장에 임명되었으며,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경상북도당 청년부장 겸 사무총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족통일본부 김상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당적을 옮겨 경상북도당 사무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상덕#s-1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고, 민주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2대 국회 기간인 1951년 2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의 면전에서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으며, 그 해 3월 29일에는 서민호·엄상섭·고영완 등의 동료 국회의원들과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홍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중앙상무위원에 임명되었고, 계보상으로는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정남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정남택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으나[1] ,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1년이 채 되지 않아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5대 국회 기간 동안에는 교원노조 설립을 격하게 반대하다가 시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3년 민정당이 창당되자 당적을 옮겨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지구당 위원장 및 전당대회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성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신민당이 창당되자 당적을 옮겨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경산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상조와 신민당 복수공천으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경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박준규 후보와 친여 무소속 박주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신민당 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권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민권당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이후 건국대학교 기성회 이사, 독립운동가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2006년 4월 12일 별세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