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은(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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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5대 국방부 장관
김성은
金聖恩 | Kim Sung-eun
'''
<colbgcolor=#dd0000><colcolor=#fff> '''출생'''
1924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가음정리
(現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가음정동)[1]
'''사망'''
2007년 5월 15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38호
'''본관'''
김해 김씨
'''재임기간'''
제15대 국방부 장관
1963년 3월 16일 ~ 1968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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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0000><colcolor=#FFFFFF> '''형제자매'''
동생 김효은
'''학력'''
하얼빈 농업학교 (중퇴)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국방대학교 대학원 (행정학사 / 1기)
'''종교'''
개신교(예장통합)[5]
'''경력'''
국방부 장관
초대 해병대전우회 총재
'''군사 경력'''
'''임관'''
해군사관학교 (1기)
'''복무'''
대한민국 해군
1946년 ~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
1949년 ~ 1962년
'''최종 계급'''
중령 (대한민국 해군)
중장 (대한민국 해병대)
'''주요 보직'''
해병대사령관
'''참전'''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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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2. 생애


1924년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가음정리(現 창원시 성산구 가음정동)에서 태어났다.
해사 1기 출신으로 1946년조선해안경비대에 입대해 소위임관했고 1949년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후, 초대 사령관 신현준의 권유를 받아들여 해병대의 창설 멤버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초기 대대급 규모에 불과했던 대한민국 해병대를 야전에서 진두지휘했으며, 마산 진동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 등 여러 초기 전투에서 해병대의 승리를 이끌었다.
1960~1962년 제4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는데, 그의 재임 중인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2] 이후 1963~1968년 5년 동안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의 실행을 맡았다. 그러나 1.21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 직후 퇴임했다. 현재로서는 유일한 해병대 출신 국방장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월남전 파병전 미국 국방부 장관과 회담을 통해 한국군 파병기간동안 군원물자이관 중지, 한국 경제개발지원금 원조(KIST 설립) 등의 회담결과를 얻어냈다.[3]
1987년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되면서[4] 창립된 해병대 전우회의 초대 총재로 추대되었다. 6.25 전쟁 당시 해병대를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한 전쟁 영웅이자, 해병대 출신 최초의 국방장관으로서의 위상 등을 반영한 결과였다. 만년에는 일부 진보성향 단체의 더글러스 맥아더 동상 철거 요구에 맞서기 위한 해병대 예비역 차원의 대응을 선도하고, 노무현 정부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한 반대 운동에도 참가했다.
2007년, 향년 84세로 사망했다. 같은 해에는 초대 해병대사령관신현준 장군도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회고록으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가 있다.
일부 그의 유품들은 통영시 원문고개에 위치한 통영상륙작전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하고 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성은관이 있다. 보통 이 곳에서 실무 배치,입영행사,신병교육 등이 이루어진다.
[1] 인근의 불모산동과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2] 당시 해병대에서도 대대급 부대가 한강 대교에서 헌병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가담했지만, 김성은 본인은 5.16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군인으로서 중립을 지켜 쿠데타 군부에게 살해당할뻔 하기도 했다.[3] 출처 : KBS 역사스페셜 '월남파병 박정희의 승부수'였다.[4] 1973년 사령부가 해체되어 제2참모부(상륙병과)로 격하되었다가 1987년 원상회복된 것이다. 참고로 국군 조직법 상 대한민국 해병대의 군종은 대한민국 해군이며 해병대는 한번도 해군에서 독립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