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자격으로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헌정 사상 최초의 외국어고등학교 출신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다.[5][6]
그러나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16년 3월 민중연합당에 입당하였으며, 2020년 6월 20일, 개편된 진보당의 상임대표로 선출되었다.[7]
2. 생애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일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학 노어과에 입학했다.
2001년 매향리사격장 폐쇄운동의 몇 달 전인 2000년 11월 서양어대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듬해 한국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2002년 한총련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총련과 한총련 의장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 #2 학생운동시절 당시 '''서울지역의 학생조직이었던 "노동자학생연대선봉대" 소속이었다.'''
이적단체 한총련 대의원 활동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구성죄 위반 혐의로 수배 생활을 하다가, 2004년 11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국회 기습 시위를 주도해 기소되었으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6년부터는 민주노동당의 부대변인, 학생위원회 조직국장 등을 맡았다.[8]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서울 강남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5위의 성적으로 낙선했다.
2011년에는 7기 한대련의 집행위원장,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을 만드는 데 나름 일조를 한 듯하다. 한대련 집행위원장으로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1000인 원탁회의' 기획하였으며, 사회를 맡아서 진행했다. 전에는 한대련 산하조직인 서울지역대학생연합(서대련)의 집행간부로 지냈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로 당선됐다. 통진당은 자체 모집한 10만 명의 20·30세대 선거인단이 온라인 투표를 통해 청년비례대표 후보 1명을 선출하도록 했는데, 당시 대중적안 인지도면에서 거의 무명(無名)이었던 김재연은 제주해군기지 반대로 얼굴이 알려진 ‘고대녀’ 김지윤 씨를 가볍게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12년 5월 30일. 당시 한국 나이 33세로[9]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보라색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서 국회에 걸어 들어와 19대 국회 첫 일정을 시작했다. 보라색은 통합진보당의 상징색이다. 이때 그녀가 입고 온 ‘보라색 미니스커트’를 보고서 인터넷과 케이블방송 패션 프로 등에선 “미인이다” “패셔니스타”(fashionista)란 반응이 나왔다.
그러다가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래서 당분간 정치적 휴지기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트위터를 통해 “박근혜 독재정권이 저의 의원직은 빼앗아가도, (제) 가슴 속 진보정치의 꿈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정치권에선 “김 전 의원은 2016년 총선에 출마해 정치적 재기(再起)를 노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2.1. 경선비리 의혹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와 경쟁했던 청년비례대표 후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대리 투표 의혹이 있다”, “경선 투표 첫날 김재연 후보를 찍으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에 대한 중복 투표와 대리 투표 의혹 등 부정 경선에 대한 내부 증언이 계속 터져나오자 통진당 지도부는 그와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해 수차례 비례대표 사퇴를 요구했다. 진보·좌파 인사로 분류되는 공지영, 진중권 씨도 “한숨이 나온다”며 김 전 의원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때마다 김재연·이석기 전 의원은 “소명 기회가 충분치 않다” “우리가 물러나도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며 사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 등이 주축이 된 구당권파와 진보신당·국민참여당 출신 등으로 구성된 신당권파의 갈등이 격화됐고, 분당(分黨) 사태로 이어졌다. 김재연·이석기 등이 소속된 구당권파는 통진당을 ‘접수’했고, 신당권파 인사들은 2012년 10월 탈당해 지금의 ‘정의당’을 만들었다.
이후 김재연은 비리경선 사태에 대해서 "자신은 찬반투표였기 때문에 아무 관련 없고, 다 해명됐다." 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더 자세한 사항은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의원직 상실 이후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이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2015년 8월경부터 아프리카TV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통합진보당 해산결정 이후 딱 1년이 지난 2015년 12월 19일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효임골룸바이다.
민중연합당에 입당한 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정부시 을에 출마했으나 3810표(3.8%)를 얻어 당선되지는 못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
현재 의정부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 서점인 '인생서점'을 열고 운영 중이다. ##,#
이후 민중당 대변인을 맡다가, 제1차 당직선거를 통해 의정부시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대 총선에서도 의정부에 출마한 걸 보면 이곳을 자신의 지역구로 삼으려는 듯하다.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또다시 낙선하였다.
이후 이상규의 뒤를 이어 진보당 상임대표에 취임하였다.
3. 제2의 이정희
국회 입성 후 그에겐 ‘제2의 이정희’라는 수식어가 빈번히 따라붙었다.[10] 이정희 전 대표는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김재연 전 의원은 한국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이 전 대표는 2008년 39세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김 전 의원은 2012년 32세 나이에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둘 다 ‘비례대표 3번’이었다.
그런데 이정희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특유의 발랄한 패션감각이었다. 국회 첫 등원을 할 때 검은 재킷과 보라색 미니스커트의 세련된 매치가 눈길을 끌었다.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라면 절대 그렇게 입지 못했을 것이다. 87학번인 이 전 대표는 ‘진보의 붉은 장미’로 불렸지만 어딘지 1980년대 운동권 여학생 출신의 칙칙함이 남아있었다. 99학번인 김재연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귀여운 외모 덕에 2000년대 초반 대학가에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을 알리기 위해 뿌려졌던 스티커의 모델로 등장했었다.
한때 통합진보당 차세대 ‘유망주’로서, “통진당이 이정희 대표 이후를 위해 키우고 있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진보당 3기 당직선거에서 상임대표로 당선되었다.'''
4. 여담
- 통합진보당 홍보 영상에서 분홍색 가발을 쓰고 나온 적이 있었다.
- 21대 총선을 앞두고 틱톡으로 '아무노래 챌린지'를 한 적이 있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관련 문서
[1] 현 대구광역시. 1981년에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다.[2] 2010년 3월에 결혼했다. 자녀는 아직 없다.[3] 참고로 최호현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그 유명한 NL조직인 ‘자본주의연구회’를 조직하고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를 비롯한 이적표현물 90여 건을 소지한 혐의를 받아 처벌받은 전례가 있다. 현재 독일로 유학을 간 상태.[4] 2014.12.19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의원직 상실[5] #, #, #, #, #[6] 이후 당선된 외고 출신 국회의원으로는 박주민(대원외고 졸) 등이 있다.[7] #[8] 이때는 2004년 전당대회에서 범NL그룹이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싹쓸이한 다음이다. NL그룹은 기존 노회찬, 심상정 등이 이끌던 구PD계 당직자들을 모조리 내쫗고 당 중앙조직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물론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원래 민주노동당에 있었던 NL조직이다. 새로 들어온 NL조직은 현재 정의당에 있는 인천연합 계열이다.[9] 당시 6공화국 내 최연소 국회의원은 17대 국회에서의 이성권 전 의원으로, '''37세'''에 지역구에 입성했다. 이후 20대 총선에서는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31세'''의 나이로 비례대표 입성, 21대 총선에서는 류호정이 '''29세'''의 나이로 역시 비례대표로 입성했다.[10] 요즘으로 치면 이준석, 김수민이 상당히 주목을 받다는 것을 보면 된다.[11]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와 신설 합당[12] 새민중정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