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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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 후 모습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2017년 8월부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이다.
대한민국 육군 대장이며, 학군사관후보생 최초로 대한민국 국군 서열 1위인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취임했다. 합참의장 시절인 1999년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제1 연평해전 승리에 공헌했다.
퇴역 후인 2001~2004년에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서 개성공단 사업을 주도하였다.
2. 생애
2.1. 초기
1941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전농동에서 김삼봉과 심학실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울 전농동에서 살아온, 평범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유복한 가문이었으나, 1950년에 6.25를 맞이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작은 형님이 국군을 죽이는 인민군이 싫다며 따발총의 실탄을 빼서 땅에 파묻어버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54년에 전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가출을 한 적도 있었고, 고교 시절에는 우열반을 나눠서 편성했는데, 열반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기과목 위주로 노력했다. 잠을 쫓는 약인 ‘카페나’라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새벽 2시, 3시까지 공부하였다. 그 덕분에 1960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럭비선수로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사학과 과대표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낙마하였다.
2.2. 군인 초기
그 후 리더십과 순발력을 배우기 위해 ROTC에 지원하여 1964년에 2기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군의 제2보병사단 전방의 어느 소대였다. 소대장의 임무를 다 하면서도 군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징계를 면하기 위해 권투 선수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의무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할 무렵에 당시 지휘관에게 "네가 제대하면 선수로 출전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전역명령을 취소시키며 그냥 군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대령까지 진급하는 게 목표였다.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군사장교로 참전하였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친이 별세했지만,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군대에서 성실히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라이터를 보며 통곡했다.
제5보병사단 대대장과 수경사 제30경비단 부단장을 거쳐, 자신의 목표였던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대령에 진급하고도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 당시 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 부여단장이었다. 이것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벽 일찍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에게 직접 전화로 따졌다.[1] 하나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당시 장세동이 도와준 덕분에 전방 지오피(GOP) 담당 연대장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지오피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무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전방 근무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뽑는 한편 병영부조리 척결 및 선진병영문화에 온 힘을 쏟았다.관련 기사
2.3. 장군으로
그 뒤에는 계속 승승장구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뒤,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7사단장의 자리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2] 으로 승진했고, 1993년에는 제11군단장을 역임했다. 1996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2군사령관[3] 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제28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통합방위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학군 출신으로는 전례 없는 승진이었다. 학군 1기인 박세환이 4성 장군으로 제2 작전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합참의장은 김진호가 처음이었다.
배재고등학교에서 배출한 2명의 4성 장군 중 한 명이다. 나머지 1명은 남재준 장군으로 육군사관학교(25기)를 졸업했다.
2.4. 합참의장 시절
합참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여수 반잠수정 격침, 제1차 연평해전 등 다수의 북한 군사도발에 맞섰다. 그때 유난히도 북한 측의 공세가 더 거셌던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북한이 화전양면전술을 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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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과의 회동 모습
다행히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우리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압승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김진호는 북한 경비정의 NLL 도발 시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4]
2.5. 전역 이후
1999년 10월에 명예로운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예편 후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와 김정일 정권 간의 남북경제협력 합의에 따라 개성공단 사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3년 4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한 뒤 북측에서 당초 80억원에 약속한 50년치 임차료를 갑자기 1200억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근거도 없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분양가가 3.3㎡당 10만원에서 40만원으로 급증, 조성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통일부는 북한과의 다른 사업까지 막혔다며 모든 책임을 미뤘고, 김진호는 계약내용을 바꿀 수 없다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1200억원이 무슨 큰돈이냐. 군 출신의 고집”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진호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김진호는 리언 J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개성공단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사업”이란 평가를 받아 미국 측 협조를 이끌어낸 뒤 북한과 협상하여 보상비 120억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 건축비 40억원 등 160억 원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는 자신과 같은 대학교 동창인 이명박을 지지하고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리고 18대 대선에서는 박근혜를 지지했지만, 최순실 사건이 터진 이후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을 지지하였고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적하였다.
2017년 8월 재향군인회장에 선출되었다.
3. 기타
- 고려대학교에 입학할 당시 집안 사정상 등록금 마련이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가 동분서주하며 돈을 구하러 다녔고, 김진호는 풀이 죽어 혼자 어디를 갔다 오는데 저 멀리서 어머니가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입학금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는데도 군대에 말뚝을 박겠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당연히 엄청나게 반대하셨다. “내가 너를 고려대학 보낼 때 군인이 되라고 보낸 게 아니다”라고 하신 것. 하지만 그 후 그가 장군이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께서 아주 좋아하셨다. 어머님이 위독해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가느라 그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허둥지둥 달리자,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장군 아들 등에 업히니 너무 기분이 좋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 보병 제5사단 대대장 시절에는 실수를 연발하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대대장급 이상 부부 동반 회식을 할 때, 무대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다가 앞에 있는 사단장을 동료인 줄 알고 머리를 뒤에서 받는 장난을 쳐서 헌병대에 끌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공관까지 따라가서 사죄를 한 끝에 사단장에게서 용서를 받아내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 원래는 김대중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5] 그런데 2군 사령관 시절이던 1997년에 모교인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자랑스런 배재인상' 행사에 갔다가, 배재중 출신인 김홍일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김홍일이 "충성![6] 안녕하십니까! 김진호 장군님! 저는 공군 예비역 중위 출신 김홍일입니다!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안부 전해달라고 부탁받고 나왔습니다!"라고 씩씩하게 인사를 하자 깜짝 놀랐고, 오랜 편견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아내는 고려대 사학과 출신 동갑내기이다. 캠퍼스 커플이라고 한다.
- 대한민국국군예비역총연합(국군총연합)은 재향군인회 김진호 회장이 정치 활동 금지와 호국정신 함양 및 고취 조항 등을 위반했다며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김진호 회장의 정체성과 영혼 없는 행위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법 제3조 정치활동의 금지와 제4조의 2에서 5항 호국정신의 함양 및 고취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국가발전과 사회공익의 증진, 자유민주주의 수호 등의 조항 역시 위반했다며 김진호 회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아울러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대한민국 예비역 군인들은 총 단결하여 김진호 회장을 끌어내리는데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 소령에서 대령까지 그와 세차례 같이 근무한 장세동은 그 즉시 하나회 핵심 관계자에게 “차라리 김진호를 전역시켜 버려라”고 강경한 어조로 항의했고, 그 덕분에 인사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 육본 소장 보직 중 요직으로 많은 중장, 대장들이 이 보직을 거쳐갔다.[3] 주로 비육사 출신 대장에게 돌아가는 T/O다.[4] 그 후 김진호는 자서전에서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측 피해 규모에 대해 "우리의 통신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교신 내용을 파악한 바로는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종전에는 북한군 사상자가 수십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5] ‘김대중은 곧 빨갱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저런 공산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면 큰일인데’라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6] 자신이 아무리 필승이라고 경례하는 공군 출신이라 해도 상급자가 육군 출신이라면 무조건 충성으로 인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