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독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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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일'''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20세기
2.2. 21세기
3. 관련 문서


1. 개요


네덜란드독일의 관계. 양국은 유럽 연합, 나토회원국들이자 교류가 많은 편이고 언어, 문화, 종교에서 공통점이 많이 있다. 다만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갈등 자체는 남아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네덜란드인들도 게르만계고 독일인들과 언어, 문화, 생활의 유사성도 큰 편이다.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독일어를 할 줄 안다. 언어적으로도 무척 가까워서 서로 배우기 쉽다. 겨울왕국에서도 빌레메인 페르카이크(Willemijn Verkaik)라는 네덜란드 가수가 네덜란드어판과 독일어판 둘 다 맡았다. (독일어를 완벽히 소화하지는 못했는지 독일어 버전은 노래만 담당했지만.) 또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이 돈을 쓰고 가는 관광객은 독일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패전하자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였던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네덜란드는 망명한 독일 황제를 비호했다. 이 정도로 네덜란드와 독일의 사이는 아주 좋았으나... 나치 독일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선언하던 네덜란드를 침공해서 스스로 그 사이를 깨뜨렸다. 게다가 당시 국가판무관부 총독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굉장히 악랄한 인물이었다. 안네 프랑크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희생당한 것은 물론이고[1] 네덜란드인들조차 약속과 다르게 공공연히 차별 대우를 당한데다[2] 독일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무려 20만 명[3]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거기에 전세가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1944년 겨울에는 독일 국방군이 네덜란드 전역을 포위하고 식량을 죄다 공출해가는 바람에 대다수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거의 2년 동안 굶주리는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오드리 헵번이 생전 자선 활동에 열심이었던 이유도 바로 어렸을 적의 굶주렸던 기억 때문이라고 할 정도. 하여튼 2차 대전 당시의 처절했던 경험 때문에 이후로 지금까지도 독일에 대한 감정은 미묘하게 좋지 않은 편. 얼마나 처절했냐면, 얼어죽지 않으려고 장작을 태울 땔감을 구하기 위해 시내에서 기르던 나무들을 전부 베어버리고 그것마저 모자라자 유대인들이 끌려가서 주인 없이 남겨진 집들마저 아작내서 거기에서 나온 목재들을 불에 태웠다고 했다. 그래서 박살이 나버린 옛 유대인 주거지를 본 연합군 병사들은 폭격 한 번 받지 않은 도시의 한 구역이 초토화된 걸 보고 어리둥절했다고 한다...[5]
베아트릭스(네덜란드) 前 여왕의 부군 클라우스 대공(Jhr. Claus van Amsberg, 1926–2002)이 독일 출신이기도 하다. 당연하지만 1966년 결혼식 당시 네덜란드 여론이 좀 시끌시끌했었다. 사실 오라녜 왕가 자체가 독일 왕공가들과 혼사를 많이 맺었다. 게다가 당장 네덜란드의 국부이자 네덜란드 공화국 초대 세습 총독인 침묵공 빌럼 1세부터가 본래 독일인이었다.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 이래 7명의 국왕들 중 비독일인과 결혼한 국왕은 빌럼 2세[6]와 현 국왕 빌럼알렉산더르 국왕뿐이다.

2.2. 21세기


2차대전 당시의 어두운 과거 때문에 네덜란드는 독일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승격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 불가리아, 그리스 등과 연대해서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참고로, 이탈리아는 한국,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과 함께 소위 G4(독일, 일본, 브라질, 인도)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승격을 저지하기 위한 커피 클럽의 멤버다. 그것 외에도 1943년 항복 이후로는 엄연히 연합국의 일원으로 활동한 일이 있고 그 때문에 독일군의 학살도 겪었기 때문에 구 피해국들과의 연대에도 충실한 편.
2017년 네덜란드와 EU 회원국이 터키의 개헌 지지 집회를 불허한 것에 대해 터키와 EU 회원국들과 갈등이 생기고 거기에다 터키와 네덜란드가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자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네덜란드에 지지와 연대의사를 밝혔다.[7]
그러나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지배했던 독일 엘텐 지방의 다위벨스베르크 숲을 현재까지 독일 정부에 반환하지 않고 있으며, 돌라르트만 분쟁도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영토 갈등이 있다. #

3. 관련 문서


[1] 또한 유대인을 숨겨주면 숨겨준 네덜란드인들까지 같이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다. 코리 텐 봄이라는 사람은 유대인을 숨겨주다가 들켜서 숨겨준 유대인은 물론이고 본인과 그녀의 가족들까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중간에 가족들이 죽고 코리 본인만 살아 돌아왔다. 다만 한국에서는 개신교 쪽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지라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2] 안톤 뮈세르트같이 독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사람들이 아니면 거의 2등 국민 취급을 받아야 했다. 거기에 수시로 징용까지 당하여 저 멀리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3] 직접적으로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가 그렇다는 것이고, 잉크바르트의 통치 기간 중 PTSD나 학대로 인해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30만 명이 넘어간다는 말도 있다.[4] 해리 뮐리스(Harry Mulisch)의 1982년 소설이 원작이다. #[5] 현재까지도 몇 나이 드신 분은 이 때의 트라우마로 지하실에 무기와 비상 식량을 수시로 비축해 둔다고. 1986년 영화인 《De aanslag》[4]가 바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독일군에게 레지스탕스로 오인되어(정확히 말하면 레지스탕스가 친독 부역자를 쏴죽인 뒤 그 시체를 주인공의 집 문앞에 끌어놓고 도망쳤다) 집과 가족을 잃은 주인공이 어른이 된 뒤에도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이야기다.[6] 러시아 파벨 1세의 딸 안나와 결혼. 그러나 러시아의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가 첫 황제인 표트르 3세가 본래 독일인이었을 뿐더러 이후에도 대대로 독일 왕공가들과 혼사를 많이 맺은 관계로 독일인의 혈통이 강했기 때문에, 비독일'''계'''와 결혼한 경우에 한하면 사실상 빌럼알렉산더르가 유일하다.[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