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역사
1. 개요
네덜란드는 중심이 되는 중앙 국가 또는 특정 거점이 주변을 병합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다른 국가의 역사보다는 특정 지역의 처지와 정서가 비슷한 도시들이 따로 살았다가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자 도시들끼리 뭉쳐서 국가를 만든 것에 가깝다. 네덜란드의 이명은 'Holland' 지만 홀란트 지방만 중심이 되지는 않았고 실제로는 위트레흐트나 다른 주들도 대등한 위치로 참여한 것이다.
마그나카르타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명예 혁명 이후의 영국이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보다 더 빠르게 민주적인 사회에 다가간 국가기도 했는데 공화제와 민주제가 혼합된 정치 체제였고 정부와 주 대표와 통치자들도 상업 가문 출신이었고 실질적인 권력도 상인들과 지식인이 장악했다. 그래서 종파주의가 강한 당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는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고[1] 정치가 경제보다 우선적으로 설명되는 다른 국가들보다는 경제가 정치를 많이 결정해서 최초의 주식회사였던 동인도 회사를 세웠고 17세기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세울 수 있었다.
2. 역대 지도자
국왕 빌럼 1세 이전에는 오라녀 공작이 실질적인 국왕이었으므로 오라녀 공작도 기재한다.
3. 고대
본래 켈트인과 게르만인이 살던 땅이었지만 BC 5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바타비아족[7] 을 정벌한 것을 계기로 로마인이 들어와 자기네 땅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이 당시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후 로마 말기에 가톨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프랑크인과 색슨-프리스인들이 들어와 지배를 시작했다. 8세기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홀랜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4. 중세
카롤루스 대제 사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3분되었을 때 베네룩스는 장손 로타르가 차지해 '로타링기아'(중프랑크)가 되었다. 로타르 사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로타링기아를 두고 경합을 벌여 몇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880년 최종적으로 동프랑크에 귀속되며 '로트링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땅을 노리는 서프랑크(프랑스)와 연합해 변란이 몇 차례 일어났으나 955년 독일 왕국의 오토 대제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후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이루는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
레히펠트 전쟁 이후 959년 오토 대제는 로트링겐이 상하로 매우 길쭉한 지형이었기에 북부의 하로트링겐(저지 로트링겐)과 남부의 상로트링겐(고지 로트링겐)으로 분리하였는데 하로트링겐이 베네룩스로, 상로트링겐이 현재의 로렌으로 이어진다.
베네룩스 지역의 기원이 된 하로트링겐은 가장 변방에 있는데다가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몇몇 유력 세력가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분할되어 브라반트 공국(브뤼셀 백국), 림부르크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플란데런 백국 등으로 분열되었다. 특히 브라반트 공국(브뤼셀 백국)은 베네룩스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로 지금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고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등 베네룩스 역사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로트링겐은 12세기에 이미 10여개의 영주들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분열되었고 때마침 제국의 5대 공국 체제를 해체하여 황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1190년 하로트링겐 공국의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다만 상로트링겐 공국은 계속 존속하였는데 상로트링겐 공국이 그냥 로트링겐 공국으로 불리게 되면서 로트링겐이라는 지명이 현재의 로렌 지역으로 국한되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 베네룩스에 해당하는 구(舊) 하로트링겐 지역은 현재 독일의 라인강 이서 지역의 상당 부분을 포함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한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세습할 정도로 막강했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중세 후기에 단절되면서 룩셈부르크의 영역이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어차피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들은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한 후 아예 그쪽으로 이주를 해서 본가인 룩셈부르크를 월경지 취급했었다.
언어적으로 네덜란드어는 저지 독일어의 방언으로 분류되고 특히 중세 시대 동부 네덜란드 방언은 독일 북부의 저지 독일어와 서로 방언 취급할 정도로 유사했다. 다만 근대 이후 고지독일어가 독일어의 표준이 되고 수백년을 거치며 저지독일어가 독일에서 사실상 사멸하면서 현재와 같이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의 차이가 심해지게 되었다.
4.1. 상업의 발달
네덜란드의 상권 장악의 시작은 북해의 청어잡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웃 국가들도 청어잡이에 나서 쉽지 않았으나 1358년에 빌럼 뵈컬스존(Willem Beukelszoon)[8] 이라는 어부가 갓 잡은 청어의 이리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단칼에 베어낼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물에 절여[9]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해 경쟁 국가들의 청어 상품들을 밀어내고 네덜란드가 많은 부를 얻게 된다. 선상에서 바로 염장된 청어는 1년간 보관이 가능해졌는데 냉장고가 없었던 당시엔 획기적인 물품이었다.[10]
청어잡이 산업이 자금원이 된 이유는 당대 유럽인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곡물 생산력과 목축 관련 기술이 열악했던 중근세 유럽의 현실상 양질의 단백질을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는 것은 바다에서 나는 생선, 그것도 어획량이 가장 많았던 청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당시의 가톨릭은 육고기를 먹는 행위에 제약을 많이 뒀기 때문에 수도원 내에 양식장을 두고 생선을 키울 정도였다. 결국, 청어잡이 산업이 네덜란드 국가 경제의 캐시카우가 된 건 자연환경의 변화와 당대의 사회상, 인간의 식욕에 기반한 노력이 더해져서 시너지를 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북서유럽, 남유럽, 아프리카에 화물 무역을 하면서 상업 규모가 확대되었을 때 중앙유럽에 있는 라인강 하구의 지리적 이점과 간척 사업을 해서 해상 경로를 구축한 교통과 순수하게 운송을 위한 새로운 선박 개발과[11]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운송 물자에는 손을 대지 않는 철저한 상도덕으로 유럽 각국의 신뢰를 받아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 규모가 성장해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보유했다. 네덜란드 국적의 상선대는 최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당시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모든 상선의 절반 가까이나 되어 ''''네덜란드=바다의 마부''''로 통할 정도였다.
자금이 많아진 상인들은 도시의 기존 관리자였던 귀족들에게서 자치권을 사들인 다음 법을 제정해 귀족의 간섭을 막고 도시의 정치 체제를 시민 자치제로 전환시켰다. 이때까지의 네덜란드는 사업에 충실한 도시 국가들이 어쩌다 보니 그 지역에 여럿 모인 것에 가까웠다.
5.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5세기 전까지는 국가라기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 치하의 여러 제후국과 주교령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14세기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이 이 중 홀란트·질란트·에노 백작을 겸했다. 그런데 14세기 프랑스의 왕 장 2세의 아들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은 대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플랑드르 땅을 획득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에 의한 저지대 통일 사업이 시작된다. 15세기에는 대담공의 손자인 선량공 필리프[12] 가 이 지역의 제후국을 결혼 상속이나 정복으로 획득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재클린을 무찔러 그의 영지를 모두 빼앗았고 필리프의 손자 용담공 샤를도 정복을 계속해 지금의 베네룩스 일대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아우르는 큰 국가로 만들었다. 이 부르고뉴 공국령의 일부로서의 저지대를 부르고뉴 네덜란드라 하고 베네룩스가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이 발루아-부르고뉴 공작들의 공로가 컸다.
샤를은 명목상 존재했던 프랑스와의 주종 관계도 청산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왕국의 국왕으로[13] 임명받는 대관식을 열기로 했으나 황제가 대관식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부르고뉴 본토와 저지대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샤를 본인이 로렌 공략 도중 전사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문제는 샤를이 워낙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적법한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샤를의 유일한 자식은 딸 마리 하나뿐이었는데 마리의 결혼 상태도 아직 정하지 못한 터라 샤를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즉각 부르고뉴를 침공해 마리를 헨트 성에 유폐시킨 후 자신의 아들인 샤를 8세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했지만 마리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막시밀리안은 자금을 빌리고 사비까지 털어서 부르고뉴 원정에 참여하고 헨트에 입성해 마리와 결혼하였다. 분노한 루이 11세는 막시밀리안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해 결국 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과 저지대의 피카르디는 프랑스가 차지하고 프랑슈콩테와 저지대 지역은 딸 마리가 물려받게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저지대는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장남인 펠리페 1세(필립)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필립이 카스티야의 왕 자리를 물려받고 필립의 아들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왕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카를 5세의 경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자가 스페인의 왕을 겸했다고 볼 수도 있다. 카를은 이후 물려받은 저지대 영지의 확장에 나서 추가로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헬러 등을 확보해 저지대 지역의 17개 작위를 보유했고 1549년에는 황제 조칙을 발표해 저지대의 17개 작위를 사실상 단일 작위로서 한 명에게 상속할 것을 선언했다. 이 때부터 저지대의 17개 영지를 하나로 통합한 영토가 공식적으로 생겨났고 카를이 이렇게 만들어진 저지대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대상은 카를의 장남 펠리페 2세였다.
6.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네덜란드 공화국
1556년 카를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고 은퇴를 선언한 이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카를의 장남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얻은 펠리페 2세는 중앙 집권화에 대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지역 사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으면서 마침내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Parma, 1522~1586)를 네덜란드 섭정에 임명했고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리는 등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한다. 문제는 이것이 도시 시민들 입장에서는 고유한 자치권에 대한 침해고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사제에게 높은 자질이 요구되는 등 '왕의 폭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해결하려고 높은 세금을 거두었고 거기에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18] 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빌럼 판오라녀를 위시로 한 귀족들은 처우 개선과 세금 감면 등을 요구했으나 펠리페 2세는 거부했다.
1566년 결국 참다 못한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등 북부 주들에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지역의 성당과 성상 등을 파괴하는 성상 파괴 운동을 벌였고 반역으로 간주한 스페인은 대군을 파견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강경 진압에 항의하는 에흐몬트, 호르너 같은 네덜란드의 유명 귀족들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하자 빌럼 판오라녀[19] 는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도망쳤다가 1568년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귀환했다. 스페인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은 빌럼의 지휘 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헤일리허를레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군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빌럼은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홀란트와 제일란트 일대는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가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1572년 네덜란드에서는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났고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의 4개 주는 연합해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여러 방면의 전선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데다 1575년 파산으로 인해 전쟁을 수행할 돈이 없던 스페인은 진압군에게 지불할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네덜란드 각지를 약탈하면서 스페인에게 충성하던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쌓이게 되자 1576년 양측은 헨트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주민들은 펠리페 2세에게 충성하는 조건으로 종교적인 관용을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으로 곧바로 재정을 확충한 펠리페 2세는 이것을 취소하고 독실한 가톨릭 교도이자 강경 진압파였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으로 파견했고 에노, 아르투아 등 남부의 가톨릭 주들은 1579년 헨트 평화 조약을 파기한 후 아라스 동맹을 결성해 스페인에 충성할 것을 결의했다. 아라스 동맹에 대항해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흐로닝언의 4개 주는 위트레흐트에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해 스페인과 아라스 동맹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반트, 플란데런 등 6개 주가 추가로 동맹에 참가해 총 10개 주가 스페인에 대항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어느 국가든 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위트레흐트 동맹의 네덜란드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나라를 맡기고자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회의적이었고[20] 엘리자베스의 대안으로 네덜란드는 앙주 공작 프랑수아[21] 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프랑수아는 국왕 추대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에게서 완전 독립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고 어차피 스페인에 충성할 생각이 없던 네덜란드는 1581년 7월 26일 헤이그에서 국가 원수(Stadtholder) 빌럼 판오라녀[22] 가 주축이 되어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적 자유를 선언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에 반대의 움직임이 거셌던 데다가 스페인군 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맹공으로 인해 네덜란드 측이 크게 밀려서 플란데런과 브라반트 절반을 빼앗기고 수도였던 안트베르펜까지 함락당하자 국왕 프랑수아는 네덜란드를 떠났고 지도자였던 빌럼은 1584년 가톨릭 신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측을 지원만 해줬을 뿐 거절했다.[23] 결국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는 국왕이 존재하는 왕국이 아니라 국가 원수가 다스리는 공화국 체제가 되었다. 1587년 빌럼의 둘째 아들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20세의 나이로 군사령관 직책에 올라 네덜란드의 지도자가 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7개주 연방 공화국, 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이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말로만 공화국이지 빌럼 가문이 지속적으로 국가 원수직을 겸하고 주마다 세습직 관리자가 존재했다.
마우리츠가 지도자가 될 당시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군의 공세로 고작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의 4개 주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우리츠는 스페인이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네덜란드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차근차근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마우리츠의 노력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 빼앗긴 헬러, 흐로닝언, 오버레이설의 3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24] 을 되찾았다.
이 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한 플란데런 일대에 비해서,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한 홀란트 지역의 산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남아 있는 남부 지역을 되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1600년 플란데런을 마지막으로 공격해 본 후 남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림뷔르흐 일대를 제외하면 현재의 국경과 대략 일치하는 국경을 가지게 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에 스페인은 자금 부담이 막중했고 네덜란드 역시 전쟁에 지쳤기는 마찬가지라 1609년 안트베르펜에서 양국은 12년 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네덜란드 지역은 스페인령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나서 이 당시였던 1609년에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1,500,000명이었고 스페인령 지역의 인구는 1,600,000명으로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같은 시기였던 1609년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70,000명으로 크게 증가해서 저지대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가 되었다.
12년의 평화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빠르게 발전했다. 12년의 휴전이 끝난 1621년 양국은 다시 전쟁을 재개했으나 스페인과 대조적으로 네덜란드의 산업은 발전하고 있었고 스페인은 30년 전쟁으로 인해 위그노 전쟁의 혼란을 끝내고 부활을 선언한 프랑스와도 전쟁을 치뤄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북부 7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합쳐서 80년 동안 강력한 국가였던 스페인 제국과의 전쟁 끝에 얻어낸 독립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했고 이것을 계기로 독립국을 세운 북부(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가 유지된 남부(벨기에 + 룩셈부르크)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었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이 종교 재판소 등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자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했는데[25] 이들에게는 네덜란드인들이 종파주의를 한 발 물러나게 할 정도의 기술과 역량이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대부업을 해 귀금속 가공 기술과 금융업에 대한 역량이 높았고 이것이 네덜란드의 해운업 발전과 맞물려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다만 이런 네덜란드도 독립 이후에는 종교적으로 굉장히 억압적이었다.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26] 가톨릭 신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가톨릭은 15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848년에서야 네덜란드 헌법에는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어 가톨릭이 해금된 것은 1853년부터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이던 시절에도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비교적 관대한 지역이였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개신교화가 진행된 이후에도[27] 비록 완벽하게 개인 단위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사회에는 '가톨릭 공동체'와 '유대교 공동체' 등의 존재가 사회적으로는 묵인되어 있어 당대 유럽의 종파주의 국가들보다는 그나마 관대한 지역이었다고는 할 수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압도적으로 가톨릭 교세가 강했다. 다만 네덜란드를 비롯한 저지대와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종교에 관대한 편이여서 타 유럽 지역에 비해서는 개신교의 교세가 그나마 강한 편이였다. 그래도 개신교 신자들은 '허용 받는 소수'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중세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되는 '군주와 코뮌(도시 공동체)의 갈등'으로 일어난 것이다. 네덜란드 코뮌들의 입장에서는 펠리페 2세가 지역의 종교 문제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폭정의 표출이었고 이것은 가톨릭이냐 개신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상 파괴 운동도 독립과는 거리가 멀다. 칼뱅파는 성상을 파괴해도 합스부르크 통치의 상징물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한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이고 성상 파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던 루터파 신자 등 대다수의 네덜란드인들은 성상 파괴에 분노했고 오히려 합스부르크에 대한 지지만 강해지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시민들이 단결해 봉기에 나선 것은 알바 공의 가혹한 통치와 스페인군의 약탈 이후에 생긴 일이다.
1570년대부터 네덜란드 봉기의 지도자가 된 오라녀 공 빌럼은 이 전쟁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라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하는 네덜란드인 모두의 투쟁'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빌럼은 본래 루터파 신자였고 개인적으로는 칼뱅파식 성상 파괴를 매우 혐오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한 것은 칼뱅파였고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가장 전투적이면서도 단결도 잘 되어 있어서 네덜란드 독립 운동에서 칼뱅파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구 다수를 차지하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에 반발해 독립을 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가 개신교화된 것은 독립 이후 장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어 온 결과다.
6.1.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
독립은 했지만 국토, 인구, 자원 모두 상대적으로 열세였고[28] 세금 문제 이외의 문제는 합의하지 못해서 구조가 허술한데다 스페인과의 관계도 악화되어서 네덜란드 선박의 스페인 입항이 금지당해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없어 네덜란드의 산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로 세계 최초의 주식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발행해서 자금을 더 끌어모은 다음 대양으로 나섰다. 동인도 회사에 최초로 자본을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선주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다.
또한 동인도 주식 회사 이외에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를 설립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었고,[29]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30] 네덜란드의 금융업은 발전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네덜란드로 모여든 조선 기술자들은 제조 비용은 저렴하고 짐칸은 크면서 선원은 적게 필요한 플루이트 선을 개발해 네덜란드의 해운 산업 경쟁력이 높아진다. 플루이트선의 제조 비용은 영국의 배가 1300파운드일 때 800파운드에 불과했고 최종적인 운송 비용은 영국과 몇 배까지 벌어졌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플루이트 선은 네덜란드가 북해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해줬는데 덴마크가 셸란 해협을 지나는 상선에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이었던 상갑판 면적을 좁히는 대신 중갑판과 하갑판을 넓게 설계해서 건조하는 방법[31] 으로 다른 국가의 배보다 동일 수송량 대비 적은 세금을 부과받았다. 이렇게 엄청난 발전에 힘입어 1700년에는 해양 패권을 차지한 암스테르담의 인구도 200,000명으로 계속 증가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혁신적인 체계로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과의 상품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미에도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세우는 등 위세를 떨쳤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거대한 양의 물자를 수송했고 노예 무역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유럽,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거나 인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남미로 보내는 식으로 세계의 인종 분포까지 바꿔놨다. 전세계의 무역을 위해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 회사를 만들어 관리했는데 이 방식은 적국인 영국도 따라했다.
- 동인도 회사 관할
- 향신료 독점을 위해 60여만 그루의 나무를 1만 5천여 그루만 남기고 모조리 베어버리고
- 포르투갈 총독에게 자신들의 입주 조건으로 거액을 약속한 후 상륙하자마자 총독 저택으로 몰려가서 죽여버리고
- 8만여 명의 주민은 1만 8천여 명 남기고 모두 살해하는 등
조선에 표류했던 벨테브레(벨테브레이)와 헨드릭 하멜도 이 국가 출신으로 하멜은 탈출해 조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쓴다.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본토의 문화 덕분에 산업이 발전하자 사상도 크게 발전했고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도 나와 사상이나 신교 저작물을 퍼트리기 위한 출판 산업도 발전했다. 미술도 크게 발전했는데 자금은 많은데 땅이 좁아서 다른 투자 수단을 찾은 것이 미술품이었다. 칼뱅주의 풍토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미술품을 만들 수 없기에 당시 유럽 미술계의 큰 손인 교회에 파는 대신 전 유럽인들에게 파는 것으로 타겟을 바꿨다.[32] 또 기존의 교회가 주문한 대로 미술품을 만드는 것에서 미술가들이 직접 나와서 물건을 파는 것으로 판매 방식도 바꾸면서 미술품 거래가 활발해지자 작품의 양과 질도 같이 향상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거장 중 대표적인 인물이 렘브란트다.
미술품 외에도 벌어들인 자금의 대부분이 왕과 귀족의 호화스런 왕궁을 만드는 데 쓰이는 대신 중소 상인들을 위한 주택을 만드는데 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터키에서 들어온 튤립이 인기를 얻으면서 튤립 구근이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인식되어 투기가 벌어졌고 결국은 튤립 공황을 맞게 되었다.
7. 무역 경쟁과 쇠퇴
하지만, 네덜란드의 자체 생산품은 많지 않고 중개무역 유통-물류업으로 중간 수익을 주로 얻던, '''중개 무역 중심의 산업 구조'''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타는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1651년)로, 이는 잉글랜드로 수입되는 물품은 그 물품의 원산지 국적의 선박이나 잉글랜드 선박만 허용한다라는 법률로, 당시 운송업과 무역업이 활발하던 네덜란드에게 선전 포고를 한 셈이었다.
결국 17세기 중반이후부터는 영국과 지속적인 해전을 치룬다. 1차 영란전쟁에서 부분적으로 패한 이후(전쟁은 대략 무승부였다.) 곧바로 해군을 재건해 2차, 3차에서는 잉글랜드 해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3차 영란전쟁에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어 공격했을 때도 승전하기도 했다. 미힐 드 로이테르, 마르텐 트롬프 같은 인물들이 활약한 것도 이 시절이다.
이후 잉글랜드에서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그 남편인 네덜란드 오라녀 공 빌럼 3세(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되며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멈추게 된다.[33]
하지만 17세기 말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와의 장기전[34] 으로 타격을 입었고, 잉글랜드는 이 공백을 틈타 4차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에게 승전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에 기존의 상권을 잃기 시작했다.
8. 근대
이후로도 계속 국가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1793년에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되어 1795년 프랑스의 자매 공화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했다. 1806년에는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네덜란드의 왕으로 임명해 홀란트 왕국이 수립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임명한 여러 친인척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와중에도 그나마 친네덜란드적인 왕이어서 네덜란드인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대륙 봉쇄령을 거부했다는 빌미로 나폴레옹에 의해 1810년 홀란트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의 아들 나폴레옹 루이가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 10일 만에 프랑스 제국에게 합병당하고 말았다.
나중에 연합 네덜란드 주권공국이 생겨났다가 1815년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퇴하자 네덜란드는 빈 회의에 따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와 한 국가로 연합 왕국을 이루어 독립했다. 이 시기까지 네덜란드 지역은 스페인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거의 늘어나지 않아서 네덜란드가 연합 왕국이 된 1815년에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2,400,000명이었고 벨기에 지역의 인구는 3,400,000명으로 네덜란드가 100만명정도 더 적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1584년)는 7개의 주들이 연합한 공화국으로 시작했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다시 독립하면서 이 때까지 네덜란드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부 오라녀 공 빌럼의 가문이었던 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왕가로 추대하면서 왕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원래 오라녀 공 빌럼은 독립 전쟁의 지도자로 신망이 높았기 때문에 독립 후 공화국 시대에도 국가 수반인 스탓하우더르(네덜란드어: Stadhouder, 영어: Stadtholder) 직을 오라녀 공의 후손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35]
새로이 네덜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 빌럼 1세는 계몽 절대 군주로서 법 앞의 평등 등의 프랑스 혁명기에 도입된 근대적 혁신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중세적 계급 제도를 정치 제도로 재도입해 많은 고위직 네덜란드인을 귀족으로 임명하는 중도적 성향을 보였고, 칼뱅파로서 남부 네덜란드의 가톨릭 세력을 견제해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가 포함된 헌법을 반포했다.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 의회(스타턴헤네랄Staten-Generaal)는 존재했으나 선거권은 제한되어서 귀족 만이 상원 의원 후보가 될 수 있었고, 하원 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지 않고 지방 의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빌럼 1세의 치세 전반에는 남부(벨기에) 지역의 산업이 더 빠른 성장세를 보여 직물 제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남부 지역의 석탄 광산이 동력원이 되었다. 반면 북부 지역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도 전통적인 교역 중심의 상업과 농업에 집중했고 북부의 제조업 발달은 비교적 늦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정치와 군사 방면에서 북부의 개신교도가 득세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지역이고 산업적으로도 우세한 남부 지역은 빌럼 1세의 중앙 정권에 지속적으로 반발했고 결국 남부는 1830–1831년의 벨기에 혁명으로 분열되어 벨기에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벨기에 독립 이후에도 네덜란드는 높은 농업 생산성과 고도화된 무역 체계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나 제조업의 발전은 늦었다. 노르트브라반트와 오버레이설 지방의 주도로 시작된 네덜란드의 산업 발전은 처음에는 초기의 벨기에처럼 직물 제조업 위주였다. 점차 네덜란드의 산업 발전이 심화되면서 네덜란드의 타 지방으로도 퍼져나가서 예를 들어 1872년에 선박용 신운하(Nieuwe Waterweg)가 완공된 로테르담은 19세기 후반 중요 제조업 지역이자 북해 해운의 요충지로서 급속한 산업 발전과 번영을 누렸다. 19세기 후반에는 인구 가운데 농업 종사자 비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산업 발전에 힘입어 빈곤층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1891년에 설립된 필립스(Philips)가 전자 제품 제조업을 시작하는 등 네덜란드는 당대의 첨단 산업을 도입하는 데도 열성적이었다. 시작은 늦었지만 네덜란드의 제조업은 이웃한 벨기에보다 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들이었다. 1840년에 빌럼 1세가 퇴위하고, 빌럼 2세가 통치하던 네덜란드는 1848년의 유럽 혁명에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유럽의 정세를 불안하게 관망하던 빌럼 2세에게 저명한 자유주의자 정치인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Johan Rudolph Thorbecke)가 같은 해 거의 혼자서 작성한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출한다.
빌럼 2세는 토르베커의 헌법을 1848년 11월 3일에 반포하였다. 토르베커의 헌법은 왕권을 대폭 축소하고 의회에 종래보다 훨씬 큰 권한을 부여하고 종전보다 더욱 광범위한 자유권을 보장했다. 이 시점부터 네덜란드 의회의 하원 의원이 네덜란드 남성 시민의 직접 선거[36] 로 선출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하원 총선거가 1848년 11월 30일과 12월 4일에 치러졌고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압승을 거두었다. 하원 68석 가운데 19석이 레이던에서 당선된 토르베커 본인을 포함하여 토르베커 주의자가 되었고 37석은 보다 중도적인 자유주의자가 차지했다. 1849년 즉위한 빌럼 3세는 불만이 없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토르베커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평화적으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정이 되었다.
이어진 1850년의 선거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재차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티칸의 네덜란드 가톨릭 교구 재설치를 둘러싼 문제로 개신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중도파가 이탈함으로써 1853년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승리하고 토르베커 내각은 실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어 집권한 보수주의자들도 유연한 태도를 취해 전 정권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취소하지 않고 헌정을 인정했다. 이로써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평화적 대립이라는 기본적인 19세기 후반의 정치적 구도가 정착되었다. 토르베커는 1849–1853년, 1862–1866년, 1871–1872년 세 차례에 걸쳐 총리로 봉직했고, 총리가 아닐 때는 하원 의원으로 의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가 1872년 6월 4일 총리직 수행 중에 사망했다.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에서는 자유주의자가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온건 자유주의자(보수적 자유주의자)로 나뉘고 보수주의자가 전통적 보수파, 가톨릭 세력, 개신교 온건 보수파(반혁명파Anti-Revolutionaire)로 나뉘어 연대를 거듭하는 의회 정치가 이어졌는데, 1850년대를 제외하면 대체로 자유주의 세력이 득세했다. 특히 1868–1901년의 약 30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1874–1877년(4년), 1888–1891년(4년)의 짧은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주의 세력이 연속해서 집권하는 '자유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1890년에는 빌럼 3세가 사망하고 딸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했는데 빌헬미나 여왕은 살리카법에 따라 빌럼 3세까지 네덜란드 국왕이 겸하던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상속받지 못해 이때부터 네덜란드–룩셈부르크 연합 왕국이 해소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정치 안정과 지속적인 산업 성장에 힘입어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는 문화적으로도 번성했다. 미술에서는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영향을 받은 덴하흐 화파(Haagse School)가 등장해 사실주의 회화가 시대를 풍미했다. 빈센트 반고흐도 덴하흐 화파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이 시대의 인물이고, 덴하흐의 미술적 풍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에서는 암스테르담에서 80년대 세대(Tachtigers)가 등장했고, 과학에서는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당대의 선도적인 학자 요하네스 디데릭 판 데르 발스(Johannes Diderik van der Waals), 헨드릭 로런츠(Hendrik Lorentz), 휘호 더 프리스(Hugo de Vries) 등이 배출되었다.
9. 현대
20세기 초의 네덜란드 정치에서는 종래의 자유주의–보수주의 대립이 이어지는 듯 보였으나 1894년부터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의회 정치에서 새로운 변수가 되기 시작했다. 1909년의 선거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의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Sociaal-Democratische Arbeiderspartij, 이하 '사민당')이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 기반을 대거 잠식해 개신교 온건 보수파들의 반혁명당(Anti-Revolutionaire Partij)이 제1당이 되었고 이어진 1913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가톨릭당(25석)–자유연합당(20석) 다음의 제3당(17석, 득표율 기준으로는 제2당)이 되어 제4당인 반혁명당(11석), 제5당인 자유당(Bond van Vrije Liberalen, 10석,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정당)과 나란히 본격적인 다당제 구도를 형성했다. 네덜란드가 이랬을 당시였던 1913년에 네덜란드의 인구는 6,200,000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이 구도는 1917년의 총선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이 시기에 자유주의–사회주의–기독교 보수주의 세력 간에 '1917년의 타협'(Pacificatie van 1917)이 이루어졌다. 1917년의 타협으로 네덜란드 의회 정치는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우선 남성 시민의 완전한 보통 선거권이 보장되었고 여성의 피선거권도 보장되어 1917년에 최초의 여성 하원 의원 쉬저 흐루네베흐(Suze Groeneweg, 사민당)가 선출되었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모든 의석에 적용되었고 의무투표제도 시행되었다. 또한 70여년간 지속적인 정치 논쟁의 대상이 된 종교계 학교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원 문제도 1917년의 타협으로 공립과 사립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학교에 국가가 재정 지원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여성의 보통 선거권은 1919년에 의회 승인을 거쳐 보장되었다.
남성 보통 선거와 의무투표제로 인해 다음 해 시행된 1918년 총선부터는 선거 참여자 수가 6배 가까이 급증했는데 이 시기부터 역사적 자유주의자들의 몰락과 보수파의 득세가 일어났다. 자유연합당과 자유당의 의석은 1917년 총선의 도합 31석에서 1918년 총선의 도합 10석으로 격감했고 제2당 사민당의 의석(22석)도 대폭 늘기는 했지만 보수파 거대 양당인 제1당 가톨릭당(30석)과 제3당 반혁명당(13석)을 합치면 사민당 의석의 두 배에 근접했다. 여기에 역시 개신교계 중도 보수파 정당인 기독역사연합(Christelijk-Historische Unie)이 제4당(7석)을 차지했고 자유연합은 제5당(6석)으로 주저앉게 되었다. 이렇게 가톨릭당–사민당–반혁명당–기독역사연합이 각각 1, 2, 3, 4당을 차지하고 자유주의계 정당이 제5당을 차지하는 구도는 거의 변화 없이 1937년 총선까지 반복되어 전간기 네덜란드에는 보수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1930년대 다른 유럽 지역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파시즘과 나치즘 계열 정당이 생겨났는데 파시스트당은 0.5% 미만의 득표로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고 나치 계열의 네덜란드국가사회주의운동은 1937년 총선에서 4.2%를 득표해 4석을 획득하고 제6당이 되었지만 기존의 중도 보수 주도 다당제에 균열을 일으킬 수준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네덜란드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본토는 나치 독일에, 동인도 식민지는 일본 제국에 점령되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20만명 이상의 네덜란드인들을 학살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 상황이 끝난 시기였던 1949년에 네덜란드의 인구는 10,100,000명으로 여전히 많이 증가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역시 점령한 인도네시아인들을 탄압했으나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본 점령기를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일본이 물러난 뒤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37] 을 벌이자 군대를 보내 막으려 했고 군사적으로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했으나 악화되어가는 국제 여론을 의식해 마지못해 독립을 인정했다. 이 당시 네덜란드가 벌인 학살과 인권 침해는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현재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네덜란드령 안틸레스(퀴라소, 신트마르턴, 아루바, 카리브 네덜란드)만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네덜란드 본국으로 편입되거나 폭넓은 자치권을 얻었다.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 의해 폭격으로 인한 불발탄, 지뢰가 엄청나게 많이 매설되어있었다. 해방 직후에도 이러한 불발탄과 지뢰로 인해 사고가 많이 났으나 네덜란드군의 해체작업으로 인해 그 수는 매우 많이 줄었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된것이 아니라 현재도 간간히 발견되는 수준. 여담으로 이러한게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은 스키폴 공항. 현재의 신공항을 건설하면서 95%이상 매설량이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건설인부가 희생되는 일도 있었다고.
인도네시아는 독립 이후 벌어진 인도네시아 여러 도서 지역의 독립 요구에 대응해야 했다. 말루쿠 제도 같은 경우에는 개신교가 대부분인데 1950년대 독립을 요구하다가 인도네시아에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결국 말루쿠인이 수만명이나 네덜란드로 이주해야 했고 그 여파로 말루쿠 독립파들이 네덜란드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테러를 가하거나 인도네시아 정계 요인을 공격하고 1977년에는 네덜란드 열차를 납치해 말루쿠 독립 운동가 석방을 요구하는 등 네덜란드도 덩달아 당하는 것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구 사민당을 중심으로 좌파 자유주의자와 진보적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합세해 노동당(Partij van de Arbeid)이 창당되었다. 전후 재건기에 빌럼 드레이스(Willem Drees)가 이끄는 노동당은 기독역사연합, 가톨릭인민당(Katholieke Volkspartij), 보수적 자유주의(구 온건 자유주의, 중도 우파) 계열 신당인 자유민주인민당(Volkspartij voor Vrijheid en Democratie)과 연정을 이루어 집권(1948–1951)에 성공했다. 드레이스 내각은 노동당의 인기와 선거 선전(1952년과 1956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제1당이 됨)에 힘입어 연정 파트너에서 자유민주인민당을 빼고 반혁명당을 넣은 4자 연정으로 연이어 장기 집권에 성공해 드레이스 시대(1948–1958)가 이어졌다. 이후에는 가톨릭당–반혁명당–기독역사연합의 3당 합당으로 기독민주애원당(기독교민주당)이 창당(1973년 선거 연합, 1980년 합당)됨으로써 중도우파 기독교민주당, 중도좌파 노동당, 중도–중도우파 자유민주인민당 3자 구도가 정착되었다. 드레이스 시대 이후에 네덜란드 의회 정치는 기독교 보수파가 주도해 1973–1977년의 노동당 집권기를 제외하면 1958–1994년까지 기독교민주당(혹은 그 전신) 계열이 집권했다. 1994년 빌럼 콕(Willem Kok)이 이끄는 노동당이 오랜만에 집권에 성공했고 마침 유행하던 제3의 길에 편승해 2002년까지 드레이스 시대 이래 최초로 노동당 장기 집권을 이루어냈다. 이후 2002–2010년에 얀 페터르 발케넨더의 기독교민주당이 집권하고 나서는 마르크 뤼터의 자유민주인민당 정권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7년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9석으로 몰락에 가까운 참패를 겪은 반면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우익 대중주의 성향의 자유당은 20석을 얻어 33석의 자유민주인민당에 이은 원내 제2당으로 약진하는 등 의회 구성에 격변이 일어났다.
[1] 다만 개인 단위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기보다는 '공동체가 믿을 종교'의 자유를 의미했다. 또한 이러한 의미의 자유 역시도 독립 이후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고 역사가 진행되며 서서히 관용화된 것이다.[2] 독립전쟁의 지도자로선 1568년, 공화국의 영도자로선 1581년부터[3] 오라녀 공으로서는 1618년부터. 장남이자 이복형 필립스 빌럼이 아버지가 죽은 직후, 오라냐 공이었으나 그는 스페인의 신하로 남은 생을 보냈다.[4] 1830년까진 벨기에 땅의 왕, 이때부터 오라녀 공은 왕위계승자를 지칭함.[5]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한 마지막 왕[6]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마지막 국가원수[7] 1795년 ~ 1806년 사이 네덜란드에 존재했던 바타비아 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수도 바티비아(현 자카르타)가 이 부족명에서 따왔다.[8] 현대 기준으로 벨기에와의 국경 지대인 비르블릿(Biervliet)에 살았던 사람으로 현재에도 마을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동상이 있다.[9] 그 당시 기준에서는 소금으로만 절이는 것에 비해 원래의 형태와 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획기적이었다.[10] 15세기 초에도 청어의 산란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뀌는 통에 네덜란드는 포획에서 가공ㆍ수출까지 독점 체제를 갖췄다. 네덜란드는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와 그물코의 크기를 정하고 어획기를 한정해 청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11] 그동안 다른 유럽 각국의 배들은 해적의 습격을 대비해 상선에 무기를 달았고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좋은 재료로 배를 만들어야 해서 배의 단가가 높았고 운송 비용이 높아지기도 했는데, 네덜란드는 무기를 달지 않는 완전한 상선을 만들어 배의 단가를 절반 이하로 떨어뜨려 운송 비용을 낮췄다. 또 배의 상갑판을 좁게 만든 대신 중갑판이 넓은 플루이트 선을 개발해 상갑판의 넓이가 넓을수록 세금을 많이 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 특히 발트 해의 입구를 장악한 덴마크(유틀란드 반도는 그렇다 쳐도 셸란 섬은 도저히 방법이 없다.)의 세금 정책으로 인한 관세 비용을 최소화했다.[12] 선량공이라는 칭호처럼 자선 사업 등의 선행을 많이 했지만 잔 다르크를 영국에다가 팔아넘긴 사람이기도 하다.[13] 왕국의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부르고뉴 또는 아를 왕국으로 생각된다.[14] 릴/레이설(Lille/Rijsel), 두에/도바이(Douai/Dowaai), 오르시(Orchies/Oorschie) 성백령과 투르네투르네시/도르니크도르니크세(Tour et le Tournaisis/Doornik en het Doornikse) 영주령 포함.[15] 프랑스어권으로 분류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어권이다. 독일어 이름은 룩셈부르크(Luxemburg).[16] 후에 영주령으로 전환된다.[17] 4개 백작령을 일괄적으로 1개 주로 취급한다.[18] 안트베르펜에서 일어난 '스페인의 분노'라는 사건으로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군의 봉급을 운반하던 배가 스페인과 적대적인 영국군에 의해 약탈당하자 스페인 군대가 현지인들을 다시 약탈한 사건이다.[19] 원래 합스부르크 충성파였고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3개 주의 총독을 동시에 맡을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빌럼은 반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알바 공같이 폭정을 저지르는 총독을 교체해 달라고만 할 계획이었으나 스페인은 빌럼까지 잡아다 죽이려 했고 결국 네덜란드에서 가장 세력이 큰 인물인 빌럼의 반역으로 이어지게 된다.[20] 즉위 초반 위그노 전쟁에 개입해 노르망디에 한번 상륙했다가 위그노들의 배신으로 쓴 맛을 본 적이 있었기에 재위 내내 위그노들을 불신했고 외국의 일에 간섭을 하게 되면 오히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21]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동생.[22] 원래 '국가 원수'라는 직함은 위트레흐트 동맹의 지도자이자 '왕국'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을 일종의 총리 격이었다. 이 직책은 네덜란드를 구성하는 주마다 하나씩 있었고 일반적으로는 한 명이 각 주의 국가 원수를 모두 겸임했다.[23] 이유는 네덜란드 측이 제의한 '7개 주 총독'이라는 직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24] 카를 5세 당시의 17개 주로 보면 되찾은 지역은 헬러, 흐로닝언, 오버레이설, 드렌터, 쥣펀 5개 주와 브라반트 주 절반이다.[25] 원래 스페인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세력들과 싸우던 레콩키스타 시기에는 비교적 관용적이었지만 이 싸움이 마무리되자마자 15세기의 알람브라 칙령을 통해 유대인 추방 등 뒤통수를 쳐버렸고 쫓겨난 유대인들은 포르투갈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스페인 세력에 들어가자 다시 네덜란드로 오게 되었다.[26] 이것조차 한참 뒤(도르트 총회 이후)로는 알미니안파, 루터파, 재세례파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27] 그나마 네덜란드 브라반트, 림뷔르흐 지역과 독일 접경 지대인 트벤터, 네이메헌에서는 개신교 선교가 실패했다. 이 지역들은 스페인 남부 네덜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지역과의 완충 지대 겸 정부 직할지여서 정부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28] 영토는 림뷔르흐가 네덜란드의 것이 아니었고 간척 사업이 완료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작았고 인구는 그나마 늘어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와 스페인 지역이 비슷한 정도였다.[29] 당시 암스테르담 시청에서 일하던 하녀까지 쌈짓돈을 털어서 증권 거래소에 뛰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30] 이 당시에는 신용 대출도 있었고 은행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은행에 간섭할 수 없도록 법도 제정했는데 네덜란드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는 적대국에게도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줬다.[31] 텀블홈 형태라고 한다. 세금 아끼려고 만들어진 함형이지만 꽤 장수해서 근대까지 등장했다. 1800년대 말~1900년대 초까지 굴러다니던 증기 전투함들은 경사장갑 효과를 노리고 많이 채용했다. 그러나 함의 균형을 잘못 맞추면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기도 하다.[32] 국왕, 신하, 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 위주로 표현을 했고 사람의 욕망이 잘 나타나 있는 유화가 대부분이었다.[33] 빌럼 3세 부부가 런던으로 올 때 네덜란드 함대가 호위하고 왔기 때문에 런던 시민들에게는 마치 네덜란드 해군이 런던을 점령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34] 네덜란드의 국력으로도 결국 유럽의 군사 강국인 프랑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해전은 물론이고 프랑스와는 엄청난 병력을 상대로 국경을 맞댄 육상전을 벌여야 했다.[35] 오라녀 공 빌럼 3세가 영국의 명예혁명 후 영국의 왕(윌리엄 3세)으로 추대되는 등 오라녀 공 가문은 정식 왕정 수립 이전부터 사실상 네덜란드의 왕가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요한 더빗처럼 완전한 공화제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독립 이후 배제당했다.[36] 여성 시민에게는 1917년 피선거권, 1919년 선거권이 부여되었다.[37] 인도네시아 독립군 무기는 매우 열악했기에 농기구나 정말 오래된 엽총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일본군이 쓰다 남긴 3년식 기관총 같은 저질 무기라도 첨단 무기 수준이어서 인도네시아 독립군들이 잘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