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시타 노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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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4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쇼와 시대 마지막, 헤이세이 시대 초대 총리이다. 지역구는 현재의 시마네현 제2구[1]
2. 생애
시마네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다케시타 유조는 시마네현 현의회 의원이었다. 1944년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입학해 육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아내가 자살했는데 '''다케시타가 아내를 구박해 그것에 못이긴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는 루머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후일 재혼하였다.
한동안 고향인 시마네 현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며 청년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훗날 미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중학교 선생이 총리가 되었다'''고 흠좀무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자민당에 입당한 뒤 사토 에이사쿠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다나카 가쿠에이 계파에 입성한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1964년 출범한 뒤 관방장관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의 추천을 받아 관방 부장관이 되었으며 훗날 제3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과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역임한다.
자민당 중역들과 두루 친분을 유지하여 정치가로서 상당한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지마 류조와도 관계가 있었다.
실제로 오랫동안 그의 비서를 역임한 아오키 이헤이[2] 역시 '''두루두루 사람들과 잘 사귀며 적을 만들지 않는 원만한 성격'''이라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극우 정치단체인 황민당에서 '''다음 총리에는 돈 잘받는 다케시타를!''' 이라고 공공연히 노보루를 비꼬듯 폄하하고 다녀서 총리 인선에서 낙마할 뻔하기도 했다.[3] 이때 자민당 중역들에게 상당한 정치자금을 뿌렸으며, 훗날 리쿠르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묘한 공통점이지만 다나카 가쿠에이 역시 관료들의 입성 연도까지 기억할 만큼 비상한 기억력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했지만 문어발식 인간관계로 인해 결국 돈문제로 정치생명이 날아가게 된다. 다케시타나 다나카나 자수성가형 정치인들의 공통적인 굴레인 듯하다.
또한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 76년 건설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에서 79~80년에는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이후 중의원의 주요 요직을 거치다 1985년 세칭 "창조정치회" 를 세워 독립하고, 이로 인해 자민당 최대 파벌이던 다나카 파벌은 하루하침에 군소 파벌로 전락해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파벌에서 후에 오부치 게이조가 나왔고, 오자와 이치로도 후에 독립했으나 그의 파벌 출신이다.
이후 1987년 총리에 취임[4] 하고, 미국 방문과 1988 서울 올림픽 등 80년대 후반 대한민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에 역점을 둔다. 실제로 노태우 정권기 때, 쇼와 장례식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공조에 일본이 소외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시절이라 불가피하기도 했다. 또 1989년 3월에는 국회발언을 통해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에 대한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사과한다"는 뜻을 밝혀, 남북한과의 수교협상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5]
최초로 부가가치세를 제정하기도 했는데, 당시 중의원내에 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켰다. 이는 훗날 다케시타파의 자민당 의원들의 리쿠르트 사건과 함께 엮여 공공연히 왕따를 당하는 고초를 겪게 되었고, 사실상 다케시타파 의원들은 정계에서 강제로 퇴갤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후임 총리인 우노 소스케 역시 소비세 법안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실각당한다.)
부가가치세는 과열 양상을 띠던 버블 경제를 잡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구매력 저하 요인이 되어 이후 소비 위축과 디플레이션 요인이 된다.''' 그래서 호경기였을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낮았고, 리쿠르트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한자릿수대로 떨어졌을정도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TPP격인 미일 FTA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가 죽고 아키히토가 천황에 즉위하여 연호를 '헤이세이'라고 하였다. 다케시타는 아키히토의 즉위 3개월 전 부터 쇼와 덴노가 각혈하자 좋아하던 골프를 끊고 근신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6월 중순에 리쿠르트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85년 다케시타파를 만들면서 다나카 가쿠에이 를 필두로 한 보수 자민당의 개혁을 주장했던 그의 정치 인생을 생각해 볼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플라자 합의에서 대장성 대신으로 엔고를 결정짓자 생긴 버블이 그의 부가가치세 정책 등으로 버블이 터져서 잃어버린 10년을 낳은 것도 역시 아이러니. # 흥미롭게도 그는 미국의 엔화절상 요구를 '''미국이 드디어 항복을 했다.'''라고 이해했다고 한다. 물론 뒤에 그의 실수를 인정했다.
총리 사임후 91년부터 자민당에서 고문직을 맡아 정치원으로 일했으며 99년부터 건강문제로 자주 용퇴의사를 밝히다 2000년 결국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해 변형성 척추증에 동반된 호흡부전으로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는 키타사토연구소병원에서 76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된다. 지역구 시마네현 제2구는 본인의 비서를 맡고 있던 동생 다케시타 와타루에게 세습한다.
3. 가족
외손자로는 가수인 DAIGO가 있으며[6] , 손녀로 BL업계의 큰 손인 에이키 에이키가 있다. DAIGO가 그러길 총리가 된 날 집에 돌아오며 "아임 소리 보쿠 소리"[7] 라 말하며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그 말을 했다고 한다.
[1] 현재는 이복 형제인 다케시타 와타루가 지역구 국회의원을 맡고 있다.[2] 리쿠르트 사건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3] 타케시타는 보스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민당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다.[4] 취임 당시에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쇼와 덴노의 대리청정을 하고 있어서 임명장에 덴노의 서명을 대리하고 옆에 황태자의 서명도 병기했으며 취임식에서 임명장 수여도 황태자가 대신했다.[5] 다만 한국에서는 해당 발언이 있기 1개월 전 국회에서 "침략전쟁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며, 총괄하여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가가 평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이 재조명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6] 가수로써는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그저 그런가수였는데 2007년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다케시다라는걸 공개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였고 예능감도 제법있었기에 2000년대 후반에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연예인 중 하나가 되었고(2010년대 중반 와서는 한물갔다.) 인기를 얻는 김에 연기활동도 병행하여 여러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국내 일드마니아들에게는 드라마 <러브셔플>의 출연으로 유명. 그렇지만 예능감은 있어도 연기력은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울트라맨 사가에 출연하기도했는데,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그리고 중학교 시절에 다케시다 노보루가 한창 소비세 신설과 리쿠르트 사건으로 욕먹었을때 학우들과 선생님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존재. 최근 키타가와 케이코와 결혼했다.[7] 총리(総理)의 일본식 발음인 そうり(소-리)와 Sorry의 발음 유사성을 이용한 말장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