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몬드 도스
'''Please, Lord help me get one more.'''
'''(주님, 제발 한 명만 더 구하게 해 주시옵소서.)'''
1. 개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1] 로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써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이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있고 여러모로 미국내에선 의무병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단순히 부상당한 동료들 뿐만아니라 숨을 거둔 동료들도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의 중대를 모두 살린 사나이로도 불린다.
2. 입대 이전
1919년 미국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세계 대공황기였고, 그로 인한 어려운 생활 환경 탓에 9학년(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수준) 이후의 학업을 포기하고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에 위치한 조선소에서 선박에 페인트를 칠하는 도장공으로 일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먼저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한 동생 해럴드 도스에 이어, 조선소에서 대체복무가 가능한 연장근무 요청도 거절하고 1942년 4월 미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동생 해럴드 도스는 구축함 USS 린지(USS Lindsey) 함에서 근무했으며, 이 구축함은 카미카제 공격으로 파손되었으나 구축함과 해럴드 본인은 무사히 귀환했다.
3. 입대 이후
1942년 4월 1일 미 육군에 입대한 데스몬드 도스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로서 살인을 금지한 계명과 안식일에는 일상적인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집총을 거부[2] 하고 의무 병과에 자원한다. 당시 미 육해군의 야전 의무병은 개인 호신을 위해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비록 군의관, 의무부사관, 의무병 등은 "비무장" 의무가 있지만, 상대가 먼저 오인 혹은 고의로 공격할 경우 방어 수단인 권총, 대검 정도는 소지할 수 있으며, 교전 상대가 먼저 의무 인원을 무장시켜 전투에 투입하거나 자신들의 의무 인원들을 공격할 경우 이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카빈 소총은 분류상 비보병 병과 인원의 개인 방어용 병기로 본류됐기 때문에 의무 인원들에게도 지급됐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선 일본군이 조약에 비준한 적 없다는 이유로 의무 인원들을 마구잡이로 살상했기에, 미군도 그에 대응해 의무 인원들이 병기를 갖추고 일본군을 살상하고 다녔다. 영화 핵소 고지 속 데스몬드 도스의 동료 의무병인 어브 셱터가 카빈 소총으로 일본군 장병을 쏴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의무병이 전투 전면에 나서 총을 쏠 일이 많이 없으니 비무장 상태의 의무병으로 복무하길 원한 것이다.
그는 첫 훈련소에서 토요일(안식일)에 있던 지휘검열을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순식간에 부대 내 최고의 문제덩어리로 떠올랐다. 전투병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지휘관들의 말도 끝까지 거부했고,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훈련도, 지휘검열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응급 환자를 돌보는 일은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안식일에도 수행했다. 안식일에 응급 환자를 돌본 도스의 행동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의 측면에서 볼 때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교리 차원에서도 권장할 만한 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에 대해 당시에 예수가 병을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니냐며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낳았고, 그에 맞서 안식일에 병자를 돌보는 것이 옳다는 가르침을 전한 것이 마찬가지로 복음서 여러 곳에 등장한다. 이후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였을 정도. 그러니 기독교적 교리의 측면에서 볼 때 안식일에 환자를 돌보는 일은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육군은 설득을 포기하고 도스를 의무병으로 유지시킨다. 당연하지만 '''군대가 병사에 대한 설득을 포기했다'''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정말 수많은 고난과 역경과 빡침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인권 문제에서 훨씬 선진화된 미군이지만, 2차대전 당시는 미국 역시 인권 의식이 21세기보다 낮았다는 점을 유념해 두자[3] . 어쨌든 연방대법원[4] 에서 '''집총 안 하고도 참전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아 부대 내 유일한 비무장 의무병이 된 도스는 육군 제7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태평양에 배치된다. 괌을 비롯한 각지의 태평양 전쟁의 전투들을 차례차례 거치며 수많은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그는 신앙에 의지하며 '''자신을 지켜줄 소총 대신 들것과 붕대 그리고 밧줄만을 들고 누빈다.'''
이윽고 1945년, 꺼져가는 제국의 불씨를 붙잡고 발악하던 일본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가던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에 앞서 일본 남부의 섬 오키나와에 상륙 작전을 펼친다.
3.1. 마에다 고지 전투
1945년 5월 5일[5] 미 육군 제 77보병사단 제 307보병연대는 오키나와의 마에다 절벽 반대편에 숨어있는 일본 육군 지휘소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고, 도스가 소속된 제1대대 [6] 200여 명은 벼랑을 향해 진격한다. 하지만 1대대가 비탈면에 도착하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치열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대포와 기관총의 집중 포화에 맞은 100여 명은 순식간에 쓰러지고 살아남은 55명만이 긴급히 후퇴하게 된다.
1대대의 유일한 의무병이던 도스는 아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후퇴하는 상황이 오자, 위험천만한 적진 한복판에서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비처럼 쏟아지는 적 기관총의 포화 속에서도 도스는 굴하지 않고 쓰러진 동료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였고, 만약 살아있는 동료가 있으면 '''들쳐업거나 둘러메는 식으로 치료가 가능한 안전한 곳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명씩 차례대로 들것에 싣거나, 밧줄에 묶어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한지도 한참 뒤, 심지어 '''일본군이 숨어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참호의, 거의 10미터 앞까지 달려가 쓰러져 있는 동료 7명을 구해낸다.'''
때문에 그가 입고 있던 국방색의 군복은 이미 부상자들의 피로 흠뻑 젖어 검붉은 색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본인의 생사도 오락가락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필사의 구조 작업을 하던 중, 결국 그도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 파편에 맞아 다리에 부상[8] 을 입는다. '''그렇게 75명[9] 의 생명을 구한 도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본진으로 귀환한다.''' 심지어 데스몬드가 구해낸 인원 중에는 적군인 일본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국은 데스몬드 도스 상병에게 최고 훈장 중 하나인 명예 훈장[10] 을 수여하며 그의 영웅적인 공적을 기린다. 그는 당시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다"'''라고 회고한다.이 때 그의 계급은 상등병이었다.
4. 전역 이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6년, 도스는 필리핀 레이테 섬[11] 에 주둔하던 중 결핵 진단을 받는다.
이로 인해 1951년 8월 명예전역을 하기 전 5년 반 동안 치료를 받았다.[12] 전역 이후에도 계속된 치료를 받았지만, 과도한 항생제 복용으로 인해 1976년 청력을 잃었다가[13] 1988년 인공 달팽이관 이식 수술 이후에야 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42년 도로시 슈트(Dorothy Schutte)와 결혼했지만 1991년에 교통사고로 사별하게 되고, 몇 년 후 프란시스 듀만(Frances Duman)과 재혼한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데스몬드 토미 도스(Desmond "Tommy" Doss) 1명을 두었다.
2006년 3월 23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은 명예훈장 수여자답게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진행되었고, 시신은 채터누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5. 여담
- 영화가 끝나면 도스를 비롯한 영화 속 실존 모델들의 인터뷰를 비롯해 이후 도스의 인생을 간단히 요약해 주는 실제 사진들이 나온다.
- 2018년 11월 1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대법원의 첫 무죄 판결이 떨어지고 얼마 후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람의 일화를 방송했다.
- 프랜시스 M. 도스가 집필한 <핵소 고지의 기적>(2017년 번역 발간)은 데스몬드 도스의 생애 전체를 잘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간증집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핵소 고지 전투 보다는 신앙생활을 하며 느낀 놀라운 기적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기도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는 것인데, 야간 초병근무중 일본어 소리가 나자 고민 끝에 수류탄 공격을 안하고 기도만 드렸다는 부분에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영화 핵소 고지의 마지막 부분에 데스몬드 도스 본인이 직접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는 여기서도 당시 상황에서 계속 기도했다고 말한다. 한명만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한명을 구하면 또 한명만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애초에 그가 총을 들지 않겠다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문제가 되었던 원인도 신앙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전지 한복판에서 75명이나 되는 아군을 구출한 미친 짓을 한 것도 신앙 때문이었을 정도니 그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과 뗄래야 뗄수가 없고, 책이 간증집처럼 나온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 어쨌거나 남들이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데스몬드 도스 본인이 이것이 기도 때문이었다고 말하니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같은 일을 누가 이뤄보고 기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던가.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일각에서는 데스몬드 도스가 집총만 거부했지, 군복무는 했으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국제적으로 집총거부 역시 엄연히 양심적 병역거부의 한 종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사법부도 데스몬드 도스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다루었다.[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집총 거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가 없다. 다만 안식일만큼은 교단 이름에 반영되어 있듯 매우 중요시한다.[3] 노예제가 폐지된지 백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백인부대와 흑인 부대를 따로 두었을 정도다.[4] 그렇다! 이 사건은 소송이 걸려서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다![5] 공교롭게도 이날은 안식일이었다.[6] 도스는 1대대 B중대 소속이었다 [7] 비전투 병과인 의무병임에도 도스 상병은 V기장(영웅적인 행동을 한 병사의 훈장에 붙는 부착물)이 달린 동성무공훈장을 2회나 복수 수훈하고 상이기장도 2회나 복수 수훈했다. 권총 한 자루 안들었음에도 도스 상병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수여식 이후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8] 이로 인해 들것에 실려가는 상태임에도 자신보다 부상이 더 심한 동료를 위해 양보하기까지 한다.[9] 사실 정확히 75명은 아니다. 당시 동료 전우들은 100명 이상이라고 증언하였는데, 이에 반해 도스 본인은 50명도 안될 것이라며 겸손을 보이자 트루먼 대통령이 75명으로 정했다고 한다. 사실 50명만 해도 전쟁영웅 대접은 충분히 받을 정도의 큰 공로이며 일단 몇명이든 간에 그 인원들을 도스 '''혼자서''' 모두 구했다는 것이 그의 용맹함과 의무병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한다.[10]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수여자의 대부분이 사망 후에 가족 대리 수령일 만큼 '''일개 군인이 살아서''' 수령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고, 수여자에게 주어지는 혜택과 각종 법적 대우가 국가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엄청나다.[11] 미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필리핀 탈환전 중 레이테 만 해전과 연관된 곳이다.[12] 그 당시 출연한 TV 프로그램 영상This Is Your Life - Desmond Doss 참조.[13] 당시에는 결핵약의 수준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결핵균은 느린 분열로 인하여 분열과정에 작용하는 다수의 항생제들은 크게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덕분에 당시에 주로 쓰였던 결핵약은 직접 침투해서 결핵균을 죽이는 약인 아미노글리코사이드 계열중 streptomycin. 문제는 이 계열의 항생제는 청각 신경에 무조건 손상을 준다. 항생제는 대부분 신장이나 간에서 해독되지만 어쩔수 없이 일부가 달팽이관 내의 림프액에 축적되고, 청각 신경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지금도 결핵은 걸리면 죽는 병은 아니지만 최소 6개월 그중에서 2개월은 항생제를 네개나 복용해야하는 중한 병이다. 다른 감염증들은 항생제를 네개나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당시 열악한 의료환경에선 결핵으로 5년정도 치료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 안되면 폐자체를 절제해버리는 수술까지 했을 정도로 결핵이라는 병은 당대에는 불치에 가까운 질병이었다. 목숨과 청력을 등가교환할 수 있다면 당연히 청력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청각을 상실할 위험성을 알면서도 쓸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현재는 대체 할 수 있는 신약들이 있어 정해진 regimen대로 치료하면 90%이상은 완치되는 질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