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폰 카프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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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의 2대 수상으로 재임한 인물. 비스마르크 시기 번성하기 시작한 독일의 상공업을 더욱 더 진흥시켜 그의 재임 시기 독일은 세계 2대 경제국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무역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도 여러모로 노력했다.[2] 또한 독일군을 재정비시키면서 세계 최강의 군대로 발돋움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했지만, 외교적으로는 러시아 제국과의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군함 건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비스마르크 시기와 달리 독일을 국제 왕따로 만드는 실책을 저질렀다.[3]
2. 생애
1831년 프로이센 왕국의 샬로텐부르크(Charlottenburg)[4] 에서 프로이센 대법원의 판사이자 프로이센 상원 의원이었던 귀족 율리우스 레오폴트 폰카프리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에서 짐작가듯이 가계는 이탈리아 출신이다.[5] 프로이센의 귀족 자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카프리비도 군에서 경력을 시작한다. 18살의 나이에 입대하여 독일 제국의 성립 과정에 이르는 세 차례의 주요한 전쟁[6] 에 모두 참전하였고, 특히나 보불전쟁에서는 공적을 인정받아 푸르 드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 해군 장관을 지내면서 행정적 능력을 인정받은 카프리비는 1890년 빌헬름 2세에 의해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을 총리로 지명받는다.
총리가 된 카프리비는 황제가 구상한 새로운 정책(Neuer Kurs, New Course)에 기반한 각종 정책들을 펼쳐나간다. 비스마르크가 강하게 탄압하였던 사민당을 합법화했으며, 자유무역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러한 정책은 카프리비의 출신 배경인 융커들의 분노를 샀다. 융커들은 대지주였는데 자유무역을 시도하면 자기 농장에서 나온 농산품이 값싼 외국산 농산품과 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
외교적으로는 영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7] 1890년대 영국과 독일은 군사동맹을 추진하여 체결에 근접했었지만 독일이 이 동맹을 비밀동맹으로 할 것을 원했던 것과 달리, 대의민주주의 체제였던 영국이 의회의 재가를 받아야 할 것을 고수하는 문제 등이 생기면서 결렬되기도 했다. 그래도 영독협약을 통해 1890년 헬골란트와 잔지바르를 교환하기도 한다. 군사적인 입장에서 이러한 교환은 분명히 훌륭한 외교적 성과였지만, 당시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팽창주의를 염원하는 목소리가 드높았기에 여론은 이 협정에 대해 분노해서(...) 국내의 지지를 꽤나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덧붙여 러시아 제국과의 안전보장 조약을 갱신하지 않으면서 십 년도 더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러시아가 독일의 숙적 프랑스 제3공화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결과를 초래하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8]
이런 와중에 재야에서 머무르던 비스마르크는 자신을 영웅시하는 대중의 분위기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카프리비 정부를 흔들었고[9] 불리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카프리비는 가톨릭 중앙당과 손을 잡고 가톨릭 계열 학교에 국비를 지원하는 정책을 시도했지만 이는 오히려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사민당과 자유주의자들의 반발만 초래했을 뿐이다. 결국 1894년 카프리비는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그의 뒤는 호엔로헤실링스 후작이 계승했다. 이후 1899년 카프리비는 사망한다.
3. 업적
카프리비가 총리로 남긴 주요 업적은 대부분 사회보장 정책과 관련이 있다. 특히 노동자들의 근무조건 개선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의 재임 시기 13세 이하 아동들의 노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18세 이하의 아동들은 하루 10시간 이하의 노동이 허용됐으며, 성인 노동자들의 경우 일요일 휴식권이 보장됐다. 또한 각종 노동쟁의 및 산업재해로 인한 조사위원회에서 노조 대표들에게 발언권이 인정된 것도 카프리비 시기의 일.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누진세 개념도 카프리비의 재임 시기 처음으로 도입된 정책이다.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카프리비 데카프레라 데몬테쿠콜리'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다만 이 시기 워낙 보호무역이 전세계적인 트렌드여서 별로 성과는 없었다.[3] 다만 이건 애초에 비스마르크식 외교가 비스마르크 본인처럼 외교의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탓도 있을 뿐더러, 카프리비 본인의 의사라기보다는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Welt Politik)노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4] 오늘날의 베를린의 일부분이다.[5] 혹은 슬로베니아 출신이라는 말도 있다. 몬테쿠콜리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30년 전쟁(막판 추스미르하우젠 전투)과 대 튀르크 전쟁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원수 몬테쿠콜리와 친척이다.[6] 1866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놓고 벌어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1870년의 7주 전쟁, 1871년의 보불전쟁.[7] 이 시기 카프리비는 '우리 같은 튜튼족인데 친하게 지내요' 라는 식의 언플을 했고 이게 꽤나 영국 여론에 먹혀들었다. [8] 그런데 막상 군 내부에서 당시 대두하던 러시아와의 예방전쟁은 기를 쓰고 반대했다.[9] 비스마르크가 어찌나 기가 막히게 당시 정계 뒷얘기를 대중에게 흘려댔는지 빡친 빌헬름 2세가 기밀누설죄로 비스마르크를 체포하려고 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