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골란트
1. 독일의 섬
북해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행정적으로는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속해 있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었다.[3] 나폴레옹 전쟁 때는 전쟁 수행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이후에는 영국 상류층의 휴양지로도 이용됐다. 이후 독일 제국은 코 앞에 영국령인 섬이 존재하는 것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 섬을 영국으로부터 양도 받기 위해 교섭을 벌이게 되는데 그 결과 1890년 영국과 독일이 각자가 지배하던 헬골란트와 잔지바르[4] 를 교환하게 돼 이때부터 독일 땅이 되었다.
이후 영국과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39년에 각각 헬골란트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1914년의 해전에서는 영국군이 승리했고 1939년의 해전에서는 독일군이 승리했지만 영국군이 이후 집요하게 공습을 했다고 한다.
현재 헬골란트는 휴양지가 되었고 면세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 문서의 다른 항목들은 전부 이 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 안톤 브루크너의 합창곡
2.1. 개요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의 남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합창곡.(독일어로는 Helgoland. 영어로는 Heligoland라고 표기하기도 함)
브루크너는 종교음악 외에도 세속음악으로서 합창곡을 상당수 작곡했는데, 대부분 초짜 교사 시절에 쓴 것들이라 음악적인 중요도는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브루크너 작품들 중 최초로 출판된 곡이 '게르만의 행렬(Germanenzug)'이라는 관악 합주 붙은 남성합창곡이었고, 개중에는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애국주의 경향이 반영된 가사를 택한 것도 있어서 음악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곡의 경우 창작 활동 후반기에 쓴 곡이자, 브루크너가 남긴 최후의 완성 작품이라는 점에서 꽤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작곡 시기는 1893년 4월부터 8월 7일까지였고, 가사는 위 문단에 언급한 '게르만의 행렬'의 작사자였던 아우구스트 질버슈타인이 썼다. 브루크너의 세속합창곡 중 가장 큰 규모와 길이, 난이도를 보유하고 있다.
2.2. 곡의 형태
질버슈타인의 가사는 크게 네 대목으로 나뉘며, 브루크너도 거기에 맞춰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눠 작곡했다. 하지만 각 섹션이 개별 악장처럼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데 이어져 13~16분 가량의 '발라드'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발라드는 대중음악의 그것과는 의미가 많이 다른데, 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 위주의 담시나 그 시로 작곡된 가곡이나 합창곡을 칭한다.
가사는 크게 요약하자면 로마 제국의 해군이 헬골란트를 기습했다가, 악천후와 헬골란트 게르만 전사들의 악착같은 저항을 만나 쳐발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게르만 혈통의 국가들에서는 분명히 애국주의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졌을 텍스트였는데, 그것에 관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9번 교향곡이라는 최후의 대작을 쓰던 시기의 작품인 만큼, 이 곡도 가볍게 넘기지 못할 정도의 완성도와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테 데움이나 시편 150 같은 후기 종교음악에서 보여준 고도의 합창 기교 뿐 아니라 9번 교향곡에서도 나오는 복잡한 화성/음계 진행,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해전 장면에 나오는 묘사풍 악구, 교향곡에 맞먹는 관현악의 큰 비중 등이 어우러져 브루크너 작품 치고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곡이 되었다.
연주 편성은 남성 4부합창(테너 1&2-베이스 1&2)에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의 2관 편성 관현악이 가세하는데, 예전 교향곡들에서 클라이맥스에 첨가해 효과를 본 심벌즈가 후반부에 두 차례 쓰이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심벌즈를 추가하는 아이디어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보급에 크게 기여했던 지휘자 페르디난트 뢰베가 냈다고 한다.
2.3. 초연과 출판
당시 빈에서 활동하던 유명 남성합창단인 빈 남성합창 협회의 의뢰로 작곡되었는데, 1893년에 창단 50주년을 맞은 유서깊은 합창단이었다.[5] 그리고 당시 합창단 지휘는 에두아르트 크렘저가 맡고 있었는데, 크렘저는 브루크너가 린츠에서 교사 임용을 위한 수업을 받던 청년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였다.
초연은 예정대로 창단 50주년 기념 특별 공연을 통해 행해졌고, 오스트리아 황제도 참석한 자리였던 만큼 언론에서도 특필되었다.
'''최초 공연''': 1893년 10월 8일에 빈 황실 겨울승마학교의 특설무대에서 크렘저 지휘의 빈 남성합창 협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됨.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힌 후반기에 초연된 작품인 만큼 크게 성공했고, 브루크너는 황제의 좌석까지 불려가서 칭찬받을 정도로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합창단을 너무 혹사시켰다는 비판 여론도 제기되었고, 브루크너의 지인들이나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언론에서도 합창부의 난이도 문제에 대한 엇갈린 견해가 나왔다.
초판은 1893년에 처음 나왔는데, 원본 그대로는 아니었고 관현악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형태로 간행되었다.
'''1893년 편곡 초판''': ''브루크너의 제자인 시릴 히나이스의 편집으로 간행된 악보. 관현악의 피아노 편곡도 히나이스가 맡았고, 합창단의 성부별 파트 악보와 함께 간행됨.''
'''1899년 완전판 초판''': ''역시 히나이스 편집으로 간행된 악보. 원곡 그대로의 관현악 총보와 관현악단 악기별 파트보가 묶여 간행됨.''
'''1893년 미개정판''': 1987년에 음악학자 프란츠 부르크하르트, 루돌프 퓨러와 레오폴트 노바크의 공동 편집으로 간행된 악보.
초판들과 국제 브루크너 협회 공인 악보들 사이의 차이점은 극히 미미하고, 주로 인쇄상의 오류나 오식 등을 수정하는 선에서 개정되었다. 하지만 이 곡의 진정한 문제는 바로 매우 높은 난이도인데, 혼성 합창곡도 어려운 마당에 남성만의 합창에 이 정도의 힘과 기교를 요구한 것부터가 무섭다.
당시의 남성합창, 특히 '빈 식 남성합창' 은 제1테너 파트가 거의 여성의 알토 음역에까지 다다를 정도로 높은 음역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고음역은 진성으로 제대로 내기가 힘들거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성이나 두성으로 불렀고, 이런 독특한 발성이 합창곡의 서정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구한 전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곡에서는 교향곡에 어울릴 법한 강렬하고 묵직한 사운드의 관현악이 합창단 앞에 뻐팅기고 있기 때문에, 높은 음역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가는 관현악 사운드의 포스에 다 튕겨나가거나 가로막혀서 청중석에서 듣지도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합창단 규모를 100명 이상으로 크게 키우거나(특히 테너 파트를 보강), 발성에 다소 문제가 생기더라도 진성으로 고음역을 부르도록 주문하는 지휘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아직도 이 곡을 무대에 올리는 남성합창단의 수는 극히 적은 편이고, 심지어 초연 단체였던 빈 남성합창 협회의 공식 레퍼토리 목록에서도 빠져있는 상태다.[6] 음반도 2012년 현재까지 겨우 네 종류만 확인되고 있으며, 그 중에 두 개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도이체 그라모폰과 텔덱에서 각각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브루크너 교향곡 세트들을 녹음할 때 곁다리로 만든 것이다.
2.4. 정치적인 문제
연주 상의 문제 외에 곡의 가사와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도 이 곡의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우선 곡의 무대가 되는 헬골란트라는 섬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데, 독일 북부의 북해(Nordsee)에 있는 섬이지만 늘 독일 땅은 아니었다. 13세기에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나폴레옹 전쟁 때인 1807년에는 영국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섬을 점령해 대륙봉쇄령에 대항하는 밀수꾼들과 망명자들의 경유지로 쓰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캐관광당하고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된 뒤에도 헬골란트는 한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1890년에 영국과 독일이 헬골란트와 아프리카의 잔지바르를 맞바꾼다는 조건으로 체결한 '헬골란트-잔지바르 협정' 에 의해 다시 독일 땅이 되었다. 이 소식은 독일 뿐 아니라 게르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의 독일계 주민들에게도 거국적인 경사로 여겨졌다.
브루크너가 이 합창곡을 작곡한 시기는 약 3년 뒤였는데, 헬골란트의 반환과는 별개로 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큰 성과를 올리던 때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 지역의 지배권을 쥐고 있던 오스트리아도 이들에게 개털리면서 갖고 있던 땅의 상당 부분을 내줘야 했는데, 이 소식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렇게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작사되고 작곡된 곡이라 월척용 떡밥으로 종종 쓰이는데, 게다가 게르만 전사들에게 개발살나는 세력이 로마군이라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자타공인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로마가 발린다는 분명한 스토리를 가지고 곡을 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가톨릭으로서는 '이교'로 취급하는 게르만 신화를 암시하는 대목도 나온다. 게르만 전사들이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하는 대상은 'Allvater'로 되어 있는데, 어느 모로 보나 신화의 대빵인 보탄이다.
이 논쟁은 브루크너가 게르만 혈통의 오스트리아인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던지, 아니면 로마 가톨릭 신자라는 점을 중시하던지에 따라 그 방향이 확연히 엇갈린다는 점에서도 좋은 떡밥성을 자랑한다. 전자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브루크너는 쇼비니즘에 찬동한 인물로, 후자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가톨릭 신앙을 부정한 인물로까지 격하되니 말이다.(하지만 로마 제국과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오류 또한 지적된다. 브루크너가 양자를 별개로 생각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온다면, 그 때는 어떻게 반론할 수 있을까나?)
학계에서는 다소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은데, 브루크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동시에 게르만 혈통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자국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나 극복을 위한 노력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곡을 썼다는 식이다. 물론 리하르트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떡밥 만큼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대개 정치적인 사건과 연관성이 없는 브루크너의 작품들 중에 이렇게 파격적인 소재를 취한 곡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덥석덥석 무는 듯하다.
3. 독일 제국의 전함
헬골란트급 전함 항목으로.
4. 매시브 어택의 5번째 앨범
[1] Hel 뒤에 i가 있음에 주의.[2] 그 땅(영어로 직역하면 the Land)이라는 뜻.[3]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던 하노버가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이 강할 땐 하노버가 나폴레옹의 영향권 밑으로 떨어지긴 했었지만...[4] 탄자니아의 동쪽 해안에 있는 섬들이다. 애초에 Tanzania라는 국명부터가 이 나라를 이루는 Tanganyika(본토 지역)와 Zanzibar를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5] 참고로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www.wmgv.at.[6] 독일어가 되는 사람이라면, 윗 주석에 있는 홈페이지로 들어가 'Wir über uns' 항목의 'Repertoire'를 뒤져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