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지아

 


'''로디지아'''
Rhodesia

[image]
국기
[image]
국장
Sit Nomine Digna
그 이름에 걸맞게 하소서
공용어
영어
수도
솔즈베리
존속기간
1965년 11월 11일 ~ 1979년 6월 1일
인구
5,469,000명
(1960년 추계치)
국가
로디지아의 목소리를 상승시키리
(영어: Rise O Voices of Rhodesia)
인구 구성
전체: 5,469,000명
백인: 299,000명 ('''5.47%''')[1]
흑인: 5,170,000명
면적
390,580 km²(1978)
정치 체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국[2](1965~70)
의원내각제 공화국(1965~79)
군주
엘리자베스 2세(1965-1970)[3]
대통령
클리퍼드 듀폰트[4](1970~75)
존 래솔[5](1976~78)
헨리 에버러드[6](권한 대행, 1979)
수상
이언 스미스(1965-1979)
통화
로디지아 파운드(1965~70)
로디지아 달러(1970~79)
설립 이전
남로디지아 식민지
멸망 이후
짐바브웨 로디지아
1. 개요
2. 역사
2.1.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령 로디지아
2.2.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2.3. 남로디지아 ~ 로디지아
2.4. 짐바브웨 로디지아 ~ 남로디지아 ~ 짐바브웨
3. 현대의 인식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존재했던 국가. 1965년 영국에서 독립했다. 냉전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국민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차별/배제하며 소수의 유럽계 백인들이 정치권력을 쥐었던 국가로도 악명이 높았다.
영국령 남로디지아 시대부터 농업으로 유명하였으며,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각종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각지로 수출하는 나라였다[7]. 농업이 주산업이었으나 백인 소유의 생산성 높은 대규모 농장은 현지인 소비를 위한 식량 작물보다 담배 등 수출을 위한 상품 작물 재배가 많았으며, 현지인 소비를 위한 식량은 상당량 수입하고 있었다.[8]

2. 역사



2.1.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령 로디지아


[image]
아프리카 전부 다 내 거다요를 외치고 있는 세실 로즈
1850년 전의 역사는 짐바브웨 역사 문서 참고.
1850년대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해당 지역을 조사하면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케이프 식민지 총리였던 세실 로즈보어인 정착민 국가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에 대한 압력 겸 북방 지역 개척을 목적으로 1889년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BSAC)을 설립. 이듬해에 이곳에 위치했던 마타벨레랜드 왕국과 마쇼나랜드 왕국으로부터 광산 개발권을 획득하여 광산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두 국가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가 끝내 영국령 식민지로 병합시켰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무장 항쟁이 있었지만, 영국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한편 1890년에는 북쪽으로 진출하여 현재 잠비아 남부인 파로체랜드 왕국의 광산개발권을 획득하고 이 지역도 결국 영국령 식민지로 병합시켰다.
1898년 세실 로즈는 남아프리카 회사 이름으로 병합한 이들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Rhodesia, 로즈의 땅)'라고 명명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잠비아는 '북로디지아'가 되었고, 지금의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가 되었다.
한편 말라위도 영국령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은 잠비아, 짐바브웨, 말라위 지역을 통틀어 '영국령 중앙아프리카'라고 통칭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초 목적이었던 광산 개발은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체되어 BSAC은 플랜테이션 위주의 식민지 방침으로 전환했다. 흑인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면서 남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를 중심으로 백인 정착민에 의한 식민화가 진행되었다. 1923년에는 백인만의 주민투표로 남로디지아 자치정부가 수립된다. 이듬해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는 영국령 직할 식민지가 된다.

2.2.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북로디지아 개발이 진행되면서 남로디지아 백인 정착민들은 남북의 로디지아에 니아살랜드(Nyasaland, 현재의 말라위)를 포함한 합병을 요구했다. 이에, 1953년에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중앙아프리카 연방)이라는 식민지 간의 연방이 성립했다. 당시 남로디지아는 기술과 자본이 충분하였고, 니아살랜드는 싼 값의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로디지아 일대를 개발할 계획이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 지역을 강타했던 독립의 열풍과 흑인 원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나름 흑인에 대해 전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흑인참정권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지속적으로 흑인 원주민의 항쟁이 일어났다. 결국 흑인 중심의 독립투쟁 끝에 1963년에는 연방은 해체되었으며, 이듬해인 1964년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가 각각 '잠비아'와 '말라위'로 독립했다.

2.3. 남로디지아 ~ 로디지아


백인 정착민의 집권 의지가 강한 남로디지아에서 흑인 저항 운동이 격화되면서, 1961년 12월 7일 소련 지원을 받는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동맹(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ZAPU)'이, 1963년 8월 8일 중국 지원을 받는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이 각각 결성되었다[9]. 한편 흑인 저항 운동에 반대하여 백인 정착민, 특히 플랜테이션 농장주를 골간으로 여러 백인 우익 정당이 통합되어 1962년 3월 1일 '로디지아전선(Rhodesian Front, RF)'이 결성되었으며, 1962년 12월 14일 총선 결과로 로디지아전선이 집권했다. 총선 직후 윈스턴 필드가 총리를 맡다가 1964년 4월 이언 스미스가 남로디지아 식민지 정부 총리에 취임하면서 흑인의 저항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흑인 저항 조직들은 전국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식민지 원주민의 독립 요구로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가 독립하였다. 남로디지아도 흑인의 참정권 보장 형태의 독립을 요구했으나, 스미스 정권(백인 정권)은 이를 거부했으며, 결국 1965년 11월 11일 일방적으로 '로디지아'[10]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포 시간이 영국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몰자 추모 시각이었는데, 이는 당시 로디지아 독립을 선포한 이언 스미스가 의도한 것으로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싸울 때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할 거냐?'라는 의미라고 한다.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은 독립 선언 당시 자국을 일종의 자치령(dominion)[11]으로 간주하여 일방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를 로디지아의 여왕으로 취급하였다가 1970년 공화국으로 전환한다. 물론 자치령이든 공화국이든 영국, 영국 왕실 그리고 국제 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당연히 독립 선포에 인정하지 않겠다고 분노했다. 독립 직전 이미 영국 노동당 정부 총리가 (아프리카 흑인 통치)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고 발언하며 차후 있을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표명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독립 후 그에 따른 제재는 실질적이기보다는 솜방망이에 가까웠다. 한편 UN 차원에서 이를 비난하고[12] 1966년 부분 경제 제재, 1968년 전면 경제 제재를 결의 및 시행했지만, 로디지아 정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로디지아 정부는 로디지아와 똑같이 소수 유럽계 백인에 의한 백인통치와 인종 차별 정책을 펼치던 이웃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13]과 포르투갈령 식민지 모잠비크 등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10여년 간 큰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었다.
한편 로디지아 정부는 백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기존 반인종차별주의와 다수결 원칙의 헌법을 개정할 것을 추진했다.
그리고 1969년 신헌법 초안을 거의 백인만이 참여할 수 있는 국민투표에 부쳐 투표자 중 73% 지지도를 얻는데 성공했으며, 의회가 헌법 개정을 인준하여 1970년 3월 2일 로디지아는 공화제[14]로 전환했다[15].
이에 따라 흑인 저항 운동도 더 격렬해졌다. 로디지아 정부는 포르투갈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원조와 더불어 용병을 적극적 고용하여 흑인 게릴라와 내전에 돌입했다. 도심에서는 흑인 시위와 폭동이 빈발하여 종종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여파로 모잠비크가 독립함으로써, 신생 모잠비크 정부는 흑인 게릴라 지원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제재의 장기화로 점차 피폐해지던 로디지아과 경제는 점차 더 피폐해져갔으며, 마찬가지로 고립의 확대와 오랜 제재의 여파로 피로가 누적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정권도 원조를 삭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은 같은 백인 정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의 존재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지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었는데, 방패 역할의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이 사라지자 부담이 가중된 데다가 이미 남서아프리카 등 다른 문제로 국력이 계속 소진되는 상황이라 지원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2.4. 짐바브웨 로디지아 ~ 남로디지아 ~ 짐바브웨


결국 미국과 영국 중재로, 1979년 국명을 '짐바브웨 로디지아(Zimbabwe Rhodesia)'로 개칭하여 흑인 참정권을 인정한다[16]. 그러나 정부 각료의 상당수가 백인[17]이고 군권 또한 백인이 장악하고 있는 등, 백인 특권이 보장된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한 평등을 기대하던 흑인 대중과 흑인 저항 세력은 반발을 지속했고, 오히려 전투가 격화된다. 또한 미국 카터 민주당 정부도 이 중재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미영은 다시 중재에 나서, 동년 '랭커스터 하우스 협정'으로 신헌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한다. 일단, 1979년 12월 12일 영국령 남로디지아로 잠시 돌아간 후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로 공식 독립했다.

3. 현대의 인식


당시 반인종주의와 탈식민주의라는 시대 흐름을 거슬러 블랙 아프리카의 백인 식민지 정착민 특권과 지배권 방어를 위하여 수립된 국가라 역사적 평가는 박하다.
짐바브웨 독립 직전에 총선에 승리하여 독립과 함께 이언 스미스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로버트 무가베가 나중에 타락하면서 나라를 크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로디지아 역시 15%도 아닌 5% 백인을 위한 나라였고 나머지 흑인은 무시하는 나라였다. 로버트 무가베가 독재를 펼치고 많은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정부도 집권 내내 1당 독재를 유지했으며 도시에 경찰 감시망을 촘촘히 조직했고 대(對) 흑인 게릴라 작전에서 수많은 흑인들을 죽임은 물론 화학무기까지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가난하게 만들었다지만 로디지아 시절의 흑인 주민은 가난에 시달리며 사회복지에 있어서도 차별받았다.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독립 당시(1965년) 경제 지표가 좋았다지만, 이는 영국 본토의 지원과 그 당시 전세계적 경기 호조로부터 기인한 면이 적지 않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유발되어 경제 발전과 민생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타격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포르투갈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원이 끊기거나 감소하면서 더욱 심해져 이언 스미스 정부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로디지아 시기는 내전으로 농업이든 공업이든 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18]
이언 스미스는 로디지아 멸망 이후 "나는 흑인 정권 수립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정권의 수립에 반대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그러나 이언 스미스는 로디지아 총리 재임 시기에는 '''"로디지아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로디지아의 주인은 백인이며 백인이 계속해서 로디지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표명한 바 있으며, 1966년 영국이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세기 말까지 연기하는 첫 번째 양보안을 제시하자 이를 거부하고, 1971년 영국이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2031년까지 연기하는 두 번째 양보안을 제시했음에도 이조차 무산시킨 바[19], 그와 로디지아 정권의 목적이 백인 독재나 백인 우위 독재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1976년 이언 스미스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붕괴와 그에 따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강한 타협 권고 등 정권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도 "나는 절대로 다수 지배(흑인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라는 말을 남겼다. 저 발언이 있은 뒤에 그는 "우리는 로디지아가 흑인백인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흑인과 백인이 대립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스미스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는 변호론도 있지만, 그의 이전 발언을 종합해보면 진실된 발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당시 한국 언론에 소개된 이언 스미스와 로디지아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그들에 대해 인종차별이라는 범주에서 설명하지 반공주의자였을 뿐이라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 #, #[21], #, #, #[22]
인구의 5%인 백인이 나머지 95%의 흑인을 지배하던 나라라 지금도 백인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 범인인 백인우월주의자가 인터넷에서 마지막 로디지아인이란 아이디로 활동한 바 있고 로디지아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있는 사진도 있다.

4. 기타


  • 만화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전 세계에서 모은 전설적인 용병들로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로망을 실현시킨 로디지아군이 유명하다.
  • 이곳에서 유래해서 사자 사냥에 쓰려고 만들어진 견종이 로디지안 리지백이다.
  • 네이딘 고디머의 소설 '로디지아 발 기차'의 배경이 이곳이다.
  • 로디지아는 1928년, 1960년, 1964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로서는 당연하지만 백인들만 출전했고, 1928년 '남로디지아'로서, 1960년과 1964년에는 '로디지아 니아살랜드(잠비아-짐바브웨)'로 출전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는 잠비아가 도중에 독립했다. 그러나 1965년 이언 스미스 총리가 로디지아 독립을 선언한 후로는 1968년 올림픽에서 영국의 압력에 의해 출전을 거부당했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선수촌까지 건설했으나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의해 거부당했다. 1975년 아예 영구히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퇴출됐다. 반면 이와는 별개로 1972년까지 패럴림픽에 출전했다.

5. 관련 문서


[1] 참고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했을 당시에 남아공 백인 인구비율이 최소 15%에서 최대 22%는 되었다. 아무리 1990년대 백인인구가 80만씩이나 빠져나가면서 비율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현대에도 백인 인구 비율은 당대 로디지아보다 높다.[2] 당사자인 엘리자베스 2세가 로디지아의 여왕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다.[3]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으로 엘리자베스 2세 본인과 영국 정부, 국제 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도 1970년 공화제로 전환하면서 더이상 엘리자베스 2세를 자신들의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4] Clifford Dupont.[5] John Wrathall.[6] Henry Everard.[7] '아프리카의 곡물창고'라는 별명은 내전이 끝나고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고 나서 1980년대 식량 작물 생산 증진으로 농업을 다변화시킬 때 붙던 별명이다. #[8] 현지인 소비를 위한 식량 작물은 오히려 농업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흑인 소농에 의해서 주로 생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9] 이 시기 소련과 중국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이들은 제3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영향력 확대에 열을 올렸다.[10] 이미 북로디지아가 잠비아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남로디지아 백인 정권은 굳이 '남'로디지아라고 부를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해 '남'을 삭제했다. 물론 영국과 국제 사회는 이들의 일방적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영국령 남로디지아로 간주했다.[11] 현재 널리 쓰이는 용어로는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에 해당한다.[12]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로디지아의 국가 승인을 거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13]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로디지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할 경우 인종차별 문제로 남아공과 로디지아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 더욱 심화될 것을 우려해 로디지아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거나 공식 수교조차 맺지 않았으나 둘 다 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과 백인통치의 역행으로 고립되있던 왕따 국가의 처지였기에 대표부를 두며 로디지아를 지원했다.[14] 이게 무슨 뜻이냐면 영국과는 아주 안녕~해버린다는 소리.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가 독립 이후에도 영국 국왕을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삼는것과는 반대. 참고로 남아프리카 연방도 1961년에 똑같이 국민투표로 영연방을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15] "1968년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면서 헌법 내용을, 총리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수 통치라는 개념에 종언을 고하고', '정부를 교양 있는 로디지아인의 수중에 영원히 놓아둘 수 있는'으로 작성했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16] 물론 짐바브웨 로디지아 역시 세계 각국이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고 계속 영국령 남로디지아로 취급되었다.[17] 이언 스미스 본인도 무임소장관으로 정부에 남아있었다.[18] "1978년 3월, 두 사람(이언 스미스와 아벨 무조레와)이 합의에 도달했을 때 고립된 수 많은 농촌 공동체가 처한 곤경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건 및 가축 보건 서비스가 마비되었고, 흑인이 이용하는 초등학교의 4분의 1가량이 문을 닫았다. 도로변 매복 공격이 일상화되어 전국 주요 도로의 야간 통행이 위험해졌다. 백인의 집단 탈출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19] "그러나 이 제안(영국 정부가 제시한 두 번째 양보안)에 대한 여론조사 임무를 맡은 영국인 판무관은 다수 흑인 주민들이 이 제안을 결코 용인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합의안은 무산되었다. 반대 여론을 주도한 감리교 감독 아벨 무조레와 목사(훗날 잠시 '짐바브웨 로디지아'의 총리로 재임한 인물.)는 흑인 주민들 사이에 '억눌린 공포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침묵, 강요된 인내와 감춰진 증오' 등의 깊은 원한이 서서히 커져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저항에 주의를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보복 조치로 응수했다. 그는 흑인 주민들에게 합의를 무산시킨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더욱 가혹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20] 1976년 망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이언 스미스는 우선 온건파 흑인 세력과 협상이라는 '내부' 해결책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 대상자 아벨 무조레와 목사조차도 "그러나 아벨 무조레와 주교는 스미스의 시도를 비웃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런 상황을 환영하는 듯이 꾸미게 하지 마라.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권력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내놓지 않으면 전 세계에 있는 우리 친구들(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로디지아를 버리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21] 로디지아 독립 시기 언론 기사들로 로디지아 국가의 인종차별성을 언급한다.[22] 로디지아가 해당 기사의 주제는 아니고 지나가며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로디지아를 인종 차별과 결부시켜 언급하고 있는 언론 기사들, 외에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