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역사

 



1. 원조 LA 에인절스
2. 안습했던 시절
3. 도약과 좌절
4. 신흥 강호
5. 2010~2011년: 먹튀와의 전쟁, 침체기
5.1. 2010 시즌
5.2. 2011 시즌
6. 2012~2018년: 마이크 트라웃의 등장
6.1. 2012 시즌
6.2. 2013 시즌
6.3. 2014 시즌
6.4. 2015 시즌
6.5. 2016 시즌
6.6. 2017 시즌
6.7. 2018 시즌: 소시아와의 작별
7. 2019년: 소시아 이후 시기
7.1. 2019 시즌: 포스트 소시아 첫 해
7.2. 2020 시즌: 조 매든과의 재회
7.3. 2021 시즌


에인절스의 25년 역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1986)

1. 원조 LA 에인절스


동부 중심으로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가 생겨나 흥행하던 야구판에서 미국의 제2 대도시인 LA에는 퍼시픽 코스트 리그 등을 비롯한 여러 야구리그가 존재했고, 1892년에 창단한 Los Angeles Angels는 PCL에 참가한 팀이었다.
그런데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가 인기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하면서 브랜치 리키의 주장을 통해 그 외의 작은 야구리그를 마이너 리그로 통합하면서 이 PCL 소속 LA 에인절스는 시카고 컵스의 마이너리그팀으로 계약을 맺었다. 홈구장 네이밍 권리까지 사서 "리글리 필드"(현재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과는 다른 구장)라는 이름을 붙였고 컵스의 마이너리그로 활동하던 도중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의 월터 오말리가 다저스의 LA 이전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컵스에게서 이 구단을 매입하면서 팀 이름 사용권까지 샀고, 이후 다저스가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이 팀은 워싱턴의 스포케인으로 연고를 옮긴다.

2. 안습했던 시절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이전이 예상이상의 큰 경제효과를 가져온 것에 자극받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아예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의 전국 확장을 노렸고 이에 미국 제2의 시장인 LA를 노리던 아메리칸리그와 진 오트리를 비롯한 원주민 야구팬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1961년의 메이저리그 확장 당시 워싱턴 세네터스(현재 텍사스 레인저스)와 함께 최초로 생겨난 팀이다. 그리고 당시 월터 오말리가 가지고 있던 팀 이름 사용권은 진 오트리가 35만 달러를 주고 매입했다.
당연히 내셔널리그의 LA 다저스 입장에서는 후발주자가 들어왔으니 견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첫해 LA 에인절스가 쓰던 홈 구장 리글리 필드 개축문제 때문에 이듬해에 새로 개장한 "차베스 래빈"(Chavez Ravine, 지금의 다저 스타디움)"을 브루클린에서 이사온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함께 사용했다.[1] 1965년에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1966년 애너하임 스타디움(現 에인절 스타디움)이 개장하자, 연고지를 현재의 애너하임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불과 3년 전에 온 LA 다저스의 텃세를 제대로 당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다저스는 유서깊은 내셔날리그의 명문이고, 에인절스는 아메리칸리그의 초짜라서 그런 면도 있다. 그렇게 연고지도 밀려나고, 좋은 선수도 나타나지 않아 창단 이래 1970년대 중반까진 신생팀이 늘 그렇듯 안습의 동네북팀이었다.
창단을 주도하고, 구단주가 된 영화배우 출신의 진 오트리는 팀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애정이 있다고 다 잘되면, 모든 팀들은 전부 우승했을 것이다. 그만큼 초기 에인절스는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구단주의 애정 속에서 꾸준한 투자로 야금야금 전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3. 도약과 좌절


1977년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단장 버지 버베이시[2]를 모셔오며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전력이 안정되면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1979년, 1982년, 1986년 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당시는 지구가 2개뿐이었고 1위만 진출). 이 시기를 상징하는 선수가 바로 전설적인 투수 놀란 라이언. 올스타 유격수인 짐 프레고시뉴욕 메츠로 보내는 대가로 넘어온 이 투수는 에인절스의 간판으로 성장하면서 팀을 여러 차례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러나 세 번 모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퇴했다.
1979년에는 1970년대를 주름잡은 강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험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패했다. 한 점차 승부가 두 차례 있었을 정도로 선전했지만, 1970년대를 지배한 이 강호와 대적하기에는 역시 경험의 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1982년에는 레지 잭슨, 로드 커류, 바비 그리치 같은 베테랑 강타자들을 앞세워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밀워키 브루어스에게 밀렸는데, 이 때부터 본격적인 흑역사개막. 5전 3선승제인 리그 챔피언십에서 먼저 2승을 따내고도 내리 3연패하면서 탈락한 것.
흑역사의 백미는 1986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7전 4선승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차전까지 3승 1패로 앞서있는데다 5차전도 9회까지 5:2로 앞서고 있어 1이닝만 막으면 사상 첫 월드시리즈 진출을 할 수 있었던 그 순간, 레드삭스의 돈 베일러의 2점 홈런, 그리고 1점을 지키러 나온 에인절스의 구원투수 도니 무어가 9회 초 투아웃에서 데이브 헨더슨에게 통한의 2점 홈런을 허용한 것이 화근이 되어 연장 11회 접전 끝에 6:7로 역전패, 그리고 남은 2게임까지 연패당하며 3승 4패로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3] 이 시리즈 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악연이 시작 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존재감 없는 팀이 된다. 중하위권에 맴돌면서 지구 최하위도 했지만 겨우 5할을 넘겨보면 와일드카드는 실패하는 식으로 90년대 내내 플레이오프에 발을 들여보지 못했다. 이런 안습팀의 이미지를 얻어서인지 에인절스를 주제로 한 영화 외야의 천사들에서는 천사님들이 안습의 팀을 도와주시어 에인절스가 우승하는 코믹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 개봉 다음해인 1995시즌에는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1위를 달리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는 듯 했으나... 2위팀 시애틀 매리너스에게 9월 한달동안 무려 12경기차의 리드를 뒤집히며 정규시즌 1위에 실패하는 팀 두번째 흑역사를 쓰기도 했다. 참고로 이 때의 단장이 전임인 버지 버베이시의 아들 빌 버베이시였다.
그 사이 팀을 위해 헌신했던 진 오트리 구단주는 1998년 타계했고, 소유권은 1996년부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로 넘어갔으며 1997년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팀 명칭을 바꾼다. 하지만 디즈니 사가 딱히 야구단에 돈을 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를 세웠던 디즈니는 에인절스를 자기네 마케팅 상품으로 이용해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전통의 에인절스 유니폼을 갖다버리고는 새로운 디자인을 채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 시기 투자를 안 한 건 아니어서 1998 시즌이 끝나고 FA로 당시 역대 최고계약인 6년 80M에 특급 타자를 데려오는데 그게 먹튀 모 본.[4]
이 시기에 주요 선수들로 타자인 팀 새먼, 개럿 앤더슨, 마무리투수 트로이 퍼시발 등이 꾸준히 활약했고, 에이스 척 핀리와 중견수 짐 에드몬즈는 1999 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난다. 이 시기에 향후 활약하게 될 대린 어스테드(Darin Erstad), 트로이 글로스, 재러드 워시번등의 유망주들이 드래프트를 통해서 충원되었다.

4. 신흥 강호


1990년대 암흑기를 보냈던 에인절스는 1999년 항명사건으로 불명예를 쓴 테리 콜린스를 경질하고 2000 시즌 LA 다저스의 감독 경쟁에서 밀려난 마이크 소시아를 영입하면서 팀을 개편했다. 소시아의 첫 시즌은 풀타임 2년차 트로이 글로스가 47홈런을 쳐내고 모 본과 앤더슨, 새먼이 30홈런을 넘겼으며 공수겸장 대린 어스테드는 .355의 타율에 25홈런 28도루 100타점의 역대급 1번 타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홈런은 많았으나 득점력은 그에 못미쳤고 선발진이 막장 of 막장이어서 승률은 5할을 간신히 넘긴다. 이후 소시아는 現 콜로라도 로키스의 감독인 버드 블랙을 투수코치로 영입하여 제로드 워시번, 존 래키, 라몬 오티즈 등 선발 투수를 키워내고, 브렌던 도넬리,벤 웨버,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등의 신예 불펜진을 끌어올려서 트로이 퍼시발 앞에 깔았다. 타선에도 데이비드 엑스타인과 아담 케네디의 키스톤 콤비를 비롯한 스몰볼 요원들을 보강했다.
2002 시즌을 앞두고 옛날 캘리포니아 시절 유니폼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 계통의 유니폼으로 복귀하고, 99승의 호성적을 냈다. 다만 20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던 빌리 빈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밀려 서부지구 2위. 그래도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3승 1패,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4승 1패로 물리치고, 창단 후, 41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처음 진출하였다. 상대는 같은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월드시리즈에서의 13년 만에 '캘리포니아 시리즈'로 관심[5]을 받기도 했던 이 월드시리즈에서 에인절스는 1차전을 내주었지만, 2, 3차전을 내리 이겼다. 그러나 4, 5차전을 다시 내주고, 2승 3패로 벼랑에 몰렸다. 6차전도 7회초까지는 0:5 로 지고 있었는데, 7회말 에인절스의 1루수 스캇 스피지오가 당시 특급 셋업맨이었던 펠릭스 로드리게스[6]에게 쓰리런 홈런을 뽑아내고, 8회말 대린 어스태드의 선두타자 홈런, 자이언츠의 마무리 투수였던 롭 넨에게 때린 트로이 글로스의 2타점 좌전적시타로 6:5로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이때 배리 본즈는 글로스의 좌전안타 타구를 더듬어 주자 2명이 모두 홈에 들어오는 실책을 범해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이렇게 극적인 역전승으로 치러진 7차전에서도 2회초에 선취점을 내주었지만, 존 랙키가 추가점을 내주지 않고 5.2이닝을 잘 막아냈으며 바로 2회말에 동점을 만들고, 3회말에 3점을 뽑아낸 뒤 4:1로 승리. 월드시리즈 챔피언을 차지한다. 정리하면, X○○XX○○. 당시, 7차전 선발이자 몇 안되는 월시 7차전 승리투수는 존 랙키. 월드시리즈 MVP는 트로이 글로스. 글로스 뿐만 아니라 에인절스의 뒷문을 단단히 잠갔던 셋업맨 'K-Rod'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와 마무리 트로이 퍼시벌도 거의 시리즈 MVP급의 활약을 보여줬다.
2003 시즌에는 2002 시즌 우승의 주역들 상당수가 부상과 부진을 겪으면서 의외로 5할에 못미치는 77승에 그쳤다. 하지만 이 해에 팀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니 새로운 구단주,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 히스패닉계 구단주인 모레노가 등장하면서 적극적인 투자를 천명한 것이다. 오프시즌에 애너하임은 투타 탑 FA인 블라디미르 게레로바톨로 콜론켈빔 에스코바, 호세 기옌까지 싹쓸이한다. 그리하여 2004년에는 드디어 지구 1위에 오르고, 2005 시즌을 앞두고 LA 전체 마켓을 겨냥하기 위해 팀 이름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으로 개칭한다. 이 과정에서 애너하임시는 자신들이 지원한 것도 있는데 이름에서 애너하임이 빠진다며 소송도 가겠다 했고 이 과정에서 뒤에 애너하임이 붙게 되는 결과가 생긴것이다.
2005년에도 서부지구 1위를 했고, 2007년부터 3년연속 서부지구 1위를 했다. 이 시기에 에이스 존 래키 외에 제러드 위버, 어빈 산타나, 조 선더스 등 꾸준히 선발투수들이 성장했고 불펜은 계속 강했으며 타선에서는 게레로와 앤더슨의 중심 타선에 숀 피긴스, 하위 켄드릭 같은 스몰볼 요원들도 팜에서 계속 등장했다. 사실 타자 유망주는 그 외에도 풍부했지만 브랜든 우드, 댈러스 맥퍼슨, 케이시 카치맨 같은 선수들은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정도로 팜도 좋았다. 게다가 올랜도 카브레라바비 아브레이유 등 부족한 선수들은 계속 FA로 영입하니 팀이 잘 굴러갈 수밖에. 다만 중견수 포지션에는 흑역사가 있어서 FA로 거금을 주고 영입한 노장 스티브 핀리, 플루크 게리 매튜스 주니어 등 영입하는 족족 말아먹었고[7], 이것은 2008년 토리 헌터를 영입하면서 일단 해결된다.
하지만 매번 월드시리즈까지 가지 못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지고 만다. 2005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1승 후 2차전에서 화이트삭스 포수 A.J. 피어진스키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사기에 휘말리며 그대로 4연패했고, 2004년, 2007년, 2008년은 모두 보스턴에게 패배. 3시리즈에서 1승 9패로 발리면서 호구 이미지로 각인된다. 2009년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천적인 보스턴 레드삭스를 드디어 3연승으로 꺾고 복수하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지만 챔피언쉽 시리즈에서는 뉴욕 양키스에게 2승 4패로 밀리면서 디비전 시리즈 진출까지만 만족해야만 했다.
어쨌든 호성적을 계속 올리면서, 반대로 구단주 잘못 만나 이 시기에 빌빌대던 LA 다저스를 제치고 LA 지역의 인기 구단으로 급성장했고, 작았던 시장 규모도 애너하임이라는 지역명 대신에 다소 무리수를 둬 가면서까지 LA를 집어넣은 결과 상당히 커졌다.
'''그리고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마이크 트라웃을 지명하였다.'''[8] 이 때만 해도 지긋지긋한 양말 징크스를 청산하고, 새로운 왕조가 열릴 줄 알았는데...

5. 2010~2011년: 먹튀와의 전쟁, 침체기



5.1. 2010 시즌


얼마 쓰지도 못한 마크 테셰이라는 모랄레스로 메꿨지만, 존 래키도 보스턴 가버리고 만능 유틸맨인 숀 피긴스도 지구 라이벌 시애틀 매리너스로 가버렸다. 빠따의 핵심이었던 게레로는 골골 대더니 결국, 텍사스로 갔는데 다시 '''게선생님'''으로 복귀했다. 시애틀이 타선 보강을 안해서 망정이지 시애틀도 터졌으면 에인절스는 꼼짝없이 꼴등할 뻔했다.
2010 시즌 시작과 동시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선발은 안습.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데려온 호엘 피녜이로는 기대 이하이며, 스캇 카즈미어는 부진에 빠졌다. 조 선더스는 작년의 성적은 타선 덕분이었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성적... 그나마 어빈 산타나제러드 위버가 외롭게 마운드를 지켰지만 브라이언 푸엔테스는 마무리 자리에서 신나게 방화를 했다.
타선은 더욱 심각한데, 팀 득점이 AL 14팀 중에서 10위를 했다. 모랄레스, 나폴리, 어브레이유를 제외하고는 타격이 전혀 안되는 모습. 그나마 잘 되었던 주루 플레이도 팀내 최다도루가 24도루의 바비 어브레이유. 토리 헌터도 타격이 작년만하지 못하며, FA로 데려온 마쓰이 히데키는 그냥 안습. 헌터나 어브레이유, 마쓰이, 나폴리 모두 20홈런 80타점 정도는 했는데 중심타선에 믿을 만한 선수가 부족했다.
더 문제는, '''켄드리 모랄레스가 부상을 당했다.''' 이유가 더 황당한데, 만루 홈런치고 너무 기분좋아서 홈에 크게 뛰어 올라 홈플레이트를 밟다가 발목이 부러졌댄다. 망했어요 대략 10~12주 부상이라니...
하지만 카즈미어가 점차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구 1위 자리를 놓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텍사스 레인저스와 치열한 경쟁을 하며 선발투수 댄 해런까지 트레이드해왔으나 시즌 중반부터 뒷심 부족으로 인하여 사실상 시즌 포기. 결국 타자 보강을 숙제로 안게 되었다.

5.2. 2011 시즌


오프시즌 과제는 무조건 타선 보강이었다. 당시 타자 FA로 랜스 버크만이나 아담 던은 지명타자로 생각되어 자리가 마땅치 않았고 제이슨 워스는 2년 반짝인데다가 노리는 팀도 많았다. 그래서 에인절스와 강하게 링크된 선수는 칼 크로포드아드리안 벨트레였다. 그런데 보스턴 계약설이 돌던 워스를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웃돈을 주고 낚아챘고, 이에 보스턴이 방향을 돌려 칼 크로포드에게 지른다. 그리고 아드리안 벨트레는 멀쩡한 3루수 마이클 영을 지명타자로 옮기면서 텍사스 레인저스가 가져간다. 이에 단장 리긴스는 2010 시즌 31홈런과 장타율 .515를 기록한 외야수를 지목했다. 당시 FA 계약으로 선수들의 몸값이 상승하면서 연봉보조를 많이 받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대신 자리는 애매한데 몸값은 500만불은 족히 되는 백업 선수 두 명을 넘기기로 했다. 트레이드 내용은 버논 웰스+5M <=> 마이크 나폴리 + 후안 리베라. 여러분 최고의 슬러거를 영입했습니다!!
단장 토니 리긴스는 만족했지만 팬 포럼은 망했어요를 외쳤다. 앤젤스가 부담해야 할 웰스의 잔여계약은 '''무려 8400만 달러'''. 뭐 버논 웰스도 2007년부터 망가지기 시작했지만 당장 2010년에는 부활하는 기미를 보였고, 완전 나쁜 선수는 아니다. 단지 버논 웰스+4M이면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쓸 수 있고, 저 돈이면 '''알버트 푸홀스'''랑도 계약할 수 있다는 거만 신경쓰지 않는다면.[9]
그리고 2011 시즌 내내 타선 때문에 고생했다. 그나마 막판까지 서부지구 및 와일드카드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은 사이영급 퍼포먼스를 펼친 제러드 위버를 필두로 한 선발 투수진의 활약 덕분. 그러나 예상대로 웰스는 '''출루율''' .248의 공갈포에 25홈런을 치긴 했지만 수비력 부족으로 그것마저도 까먹은 사상 최악의 먹튀였고, 그를 대신해 팀을 떠난 마이크 나폴리텍사스 레인저스에서 30홈런을 쳤다. 결국 PO 진출에 실패. 당연히 리긴스는 짤렸다.

6. 2012~2018년: 마이크 트라웃의 등장



6.1. 2012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2012년 문서 참조.

6.2. 2013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2013년 문서 참조.

6.3. 2014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2014년 문서 참조.

6.4. 2015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2015년 문서 참조.

6.5. 2016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2016년 문서 참조.

6.6. 2017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2017년 문서 참조.

6.7. 2018 시즌: 소시아와의 작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2018년 문서 참조.

7. 2019년: 소시아 이후 시기



7.1. 2019 시즌: 포스트 소시아 첫 해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2019년 문서 참조.

7.2. 2020 시즌: 조 매든과의 재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2020년 문서 참조.

7.3. 2021 시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2021년 문서 참조.

[1] 물론 이는, 현용 대규모 경기장 중 유일하게 지자체 투자지원 없이 월터 오말리의 사비로 지어진 다저 스타디움의 건축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세를 놓은'''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월터 오말리는 잠시 입주한 LA 에인절스에게 이런 저런 명목으로 관리비를 엄청나게 뜯어냈다. 다행이 사람은 좋은 진 오트리가 "허허"하고 넘어갔기에 망정이지..[2] 나중에 그의 아들 빌 버베이시도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단장이 되었다. 2000년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대인배'''가 된 그 분 맞다.[3] 무어는 이 날의 패배 이후 슬럼프에 빠져 1988년 야구를 접었고, 3년 뒤인 1989년 부부싸움 중 자살했다. 1986년의 포스트시즌은 어메이징 메츠의 V2, 빌 버크너의 알까기로 대변되는 밤비노의 저주로 회자되고 있지만, 이 도니 무어의 자살을 계기로 에인절스의 PO 잔혹사 역시 큰 이슈가 되었다.[4] 처음 2년간 30홈런 100타점은 했지만 보스턴 시절보다 정확성이 많이 떨어졌고, 부상이 많아지며 2001 시즌에는 한 경기도 못 나왔다. 결국 2001 시즌이 끝나고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트레이드로 받아온 케빈 에이피어는 선발투수로 2002 시즌 우승에 큰 역할을 한다. 2003년에는 망가지긴 했지만 모 본이 메츠에서 박살난 걸 생각하면 땡큐. 모 본은 두고두고 애너하임 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5] 물론 서부지역 팀들끼리 월드시리즈라 시청률은 역대 최악이었다. 메이저리그가 동부지역 인기가 높다보니 어쩔수 없었던 현상.[6] 나중에 KIA 타이거즈 용병으로 한국에 온다.[7] 한 해 반짝한 게리 매튜스 주니어는 에인절스와 5년 50M의 계약을 맺고 30홈런 30도루를 했다. '''3년 합쳐서'''. 2007년 첫 시즌을 말아먹자 프런트는 바로 이건 아니라고 직감하고 토리 헌터를 추가로 영입. 매튜스는 백업으로 밀린다. 3년뒤 매튜스는 뉴욕 메츠가 110만불만 부담하는 조건으로 연봉보조 트레이드된다. 에인절스가 48.9M을 써서 얻은 매튜스의 가치는 WAR로 0이 조금 못 된다. 뒤이어 나타난 다른 먹튀 때문에 빛이 가렸지만 대단한 쪽박 계약이었다.[8] 이 해 드래프트는, 특히 이후 드래프트를 하나같이 말아먹었다는 점에서도 상대적으로 빛났다. FA였던 마크 테세이라, K-로드, 존 갈랜드를 각각 양키스, 메츠, 디백스에서 영입한 덕분에 1라운드 픽만 다섯 장이 생겼고, 여기서 랜달 그리칙과 트라웃, 타일러 스캑스, 개럿 리처즈를 뽑았다.[9] 2010년 토론토 블루제이스로이 할러데이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을때 선수 한명 주지 않고 버논 웰스만 데려가서 토론토의 연봉부담만 줄여 주더라도 로이 할러데이를 데려올 수 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었다. 뭐 웰스가 2010년 어느정도 살아나긴 했지만 연봉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