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르 렌둘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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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Lothar Rendulic'''
로타르[1] 렌둘릭
생몰년도
1887. 8. 23. ~ 1971. 1. 17.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 오스트리아군
독일국방군 육군
{{{-1 14보병사단장
50보병사단장
35군 사령관
20산악군 및 북부전선 사령관
북부집단군 사령관
오스트마르크 집단군 사령관}}}
최종계급
상급대장
주요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 쿠르스크 전투
이탈리아 전선
라플란드 전쟁
서훈
곡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1. 개요
2. 생애
2.2. 동남부전선
2.2.1. 이탈리아군과의 마찰
2.4. 항복과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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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 오스트리아 연방군의 군인으로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여 상급대장에까지 오른다.[2]
1943년 8월 말경에 2기갑군의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6월부터는 20산악군의 사령관 및 북부전선 사령관의 직을 겸직하였다가 1945년 1월에는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의 후임으로 북부집단군 사령관 직을 수행하였다.
종전 이후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에서 전쟁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이후 석방된다.

2. 생애


렌둘릭은 18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크로아티아 출신의 군인 집안이었다. 그는 빈과 로잔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1907년에는 테레지안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1910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입대한다. 1914년부터 1918년 동안 1차대전에 종군하였다. 1차대전 동안 이탈리아 전선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행정직으로 빠지게 된다. 전후 빈 대학교로 돌아와서 법학 박사 학위를 수료하였다.[3]
1932년에는 새로 창설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였으며 당시 금지되었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군에 있는 동안 전술 및 조직에 대해 교육하는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주재무관으로 근무하였으며 2년뒤 오스트리아 나치당 활동 전력이 적발되면서 전역 조치를 받게 된다. 전역 조치 이후에 렌둘릭은 법학과 정치학 연구를 잠시나마 이어갔다.
하지만...

2.1. 안슐루스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부대 중에서 산악지역에서 활약하는 최고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장군이오. 많은 동향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일세."

''아돌프 히틀러. 1944년, 로타르 렌둘릭에 대한 평가.''

1938년 오스트리아 연방국나치 독일병합되면서 렌둘릭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고 1939년부터 1940년까지 14보병사단장, 1942년까지는 50보병사단장을 역임하였다. 41년에는 바르바로사 작전 아래에 중부집단군에 편제되어 로가체프에서 3개 소련군 사단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렌둘릭은 이후 진급하여 35군 사령관으로 1943년까지 재직한다. 35군 사령관 재직 시절에는 소련군 반격의 전초였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조공 담당 및 전선 유지의 작전을 수행하였다. 5월 17일, 대규모 소련군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던 오렐 돌출부를 담당하였고 반격 전략을 선택하여 대전차 무기 및 지뢰를 통해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러쉬를 막고 전선을 사수하였다. 대규모 기갑 웨이브를 막은 그 주에 또 연이은 소련군의 2차 공습이 이어졌지만 다시 오렐 지역을 사수하하는 데 성공하였다.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피해도 극심했지만 소련군의 피해는 더 극심하였으며 대략 2400여대의 전차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 중 35군단이 800여 대의 전차를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독소전쟁 기간 동안 히틀러에 의해서 동부전선에 내려진 소련군 정치장교 무조건 처형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도 하였다.[4]

2.2. 동남부전선


1943년부터 1944년 동안 2기갑군 사령관으로 재직하였으며 무수한 사상자만 내고 실패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 토벌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사령관으로 있을 때 군 지휘본부가 자리했던 크로아티아의 주요 기간시설 및 주요 점령지역을 경비하는 임무를 지시하게 된다.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동유럽은 파르티잔 활동이 격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1941년에 히틀러는 이미 살해, 부상당한 독일군 1명당 포로 100명을 죽일 것을 명령해 두었던 상태였으며 렌둘릭이 2기갑군 사령관에 보임받기 이전부터 이러한 지시사항은 동부전선 전체에 하달되어져 있었다.
렌둘릭은 이러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부대에 전파한 바 있다. 독일 국방군에 대한 공격 및 중요한 시설에 대한 피해는 (가능하다면)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을 사로잡아 총살, 교수형 및 주변 민가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며, 그러한 본보기가 있은 다음에야 파르티잔들이 보복조치를 두려워하여 피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 바로 히틀러의 명령이었다.
보복조치는 구체적으로 1명의 독일군이 사망하면 50명의 인질, 1명의 독일군이 부상당하면 25명의 인질에 상응한다고 명시하였다. 또 독일군이 인질로 잡히면 반대로 포로가 된 독일군이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일정 기간 내로 송환하지 않으면 살해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군사시설 및 주요 기간시설에 파르티잔 활동을 하는 경우 그 정도에 따라서 해당 범인이 40시간 내에 잡히지 않는다면 인질들은 100명씩 총살, 교수형당할 것임을 휘하 부대로 하달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활동들은 기갑군 소속의 173, 187 예비사단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보고가 남아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은 오로지 독일 국방군 내에서만 전파된 것으로 실제로 2기갑군 주둔 지역 내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민간인, 파르티잔 인질 및 포로에 대한 재판도 불법적 법률절차를 거쳐 사형을 선고하였다.

2.2.1. 이탈리아군과의 마찰


이탈리아가 1943년 항복하면서 로마연합국의 우선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해안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잔존 이탈리아 왕국군을 무장해제하고 각 개별 제대를 항복시키는 임무가 최우선시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헤이그 조약에 따라서 정당하게 전쟁포로로서 처리받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독일군과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렌둘릭은 이러한 정황을 일찍이 우려하고 있었고 주둔지 인근의 디알마조 장군이 이끄는 베르가모 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베르가모 사단의 무장해제 및 항복 절차를 밟기 전에 포로가 되었던 일부 이탈리아 장교를 역시나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하기도 하였다.

2.3. 라플란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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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산악군 사령관 시절.
산악병과였으므로 산악모를 착용하였다.

1944년 렌둘릭은 20산악군 사령관으로 핀란드노르웨이에 파견되었다. 렌둘릭이 20산악군 사령관이자 북부전선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핀란드소련과의 정전협정을 추진하였다. 때문에 렌둘릭의 부대는 핀란드에서 퇴거명령을 받게 되는데 지도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렌둘릭이 노르웨이까지 빠져나가려면 약 1000km 가량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일만에 핀란드에서 나갈 것을 요구받았으며 소련 국경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휘하 제대 중의 일부는 소련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소련은 핀란드를 압박하여 독일 국방군을 추격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독일 국방군은 핀란드군과 소련군을 상대해야하는 상황에 맞닥들이게 된다.
하지만 퇴각하는 주요 간선 도로의 상태는 열악하였고 환경 또한 진군에 용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라플란드 전쟁 발발 이전에 동부전선으로 20산악군 예하 4개 산악사단이 재배치되어 군 전투력의 절반 가까이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서 렌둘릭은 이미 동부전선에서 써먹은 적이 있었던 소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여 민가는 물론 통신, 교통, 기타 주요시설을 모두 파괴하는 방법으로 퇴각을 진행하게 된다. 때문에 추격해오던 핀란드군은 로바니에미에서 독일군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하고 렌둘릭은 비교적 온전히 병력을 노르웨이까지 철수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나중에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에서 같이 기소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하였으나 핀란드 영토 내에서는 라플란드 전쟁을 제외하면 무력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총탄의 흔적과 파괴흔적을 통해서 그 사실이 증명되었고 은폐하려던 정황이 확인되었다.
다만 재판에서 이에 부분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핀란드와 소련의 통수작전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뉘앙스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분명 이는 완전한 전쟁, 군사적 직접적 위협이 없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렌둘릭은 핀란드에서의 전쟁범죄로는 죄를 치르지 않게 되었다.
한편, 온전히 부대 병력을 보존한 것에 대해서 히틀러가 독일 최고의 부대를 고스란히 구해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2.4. 항복과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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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인질 재판. 좌측부터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원수, 렌둘릭 상급대장, 에른스트 데너 보병대장, 에른스트 폰 라이저 보병대장.
쇠르너의 후임으로 북부집단군 사령관직을 1개월 남짓 수행하다가, 오스트마르크 집단군으로 재편성된 남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새롭게 배치받는다. 당시 렌둘릭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연합국과 평화협상을 맺고 난 뒤 소련과의 전쟁을 이어나가게 한다는 계획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연합국을 찾아서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결국 연합국에 항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이어진 7번째 재판인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에서 대량학살 및 포로에 대한 규정 위반 등의 이유로 기소되었다. 판결 기준 4가지 모두 기소되었으며 3가지 부문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20년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출신 군인 6000여명의 지속적인 탄원 끝에 나중에 감형되었다가 1951년에 석방된다.
전후에는 군사(軍史) 서적 등을 집필하였으며 독일 국방군이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군사적 고찰 등의 주제로 많은 서적을 출간하였다. 내용은 일반적으로 독일군이 갖고 있었던 항공전력의 보조적 활용이나 지나치게 힘러에게 많은 권한과 부대가 배치되어 보급이 소모된 점,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히틀러의 문제점 전부가 원인인 것으로 요약된다.
이후 1971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한다.

[1] 실제 발음은 '로타어'에 가깝다.[2] 안슐루스 이후 많은 오스트리아 출신 장교들이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였다. 로타르 렌둘릭은 알렉산더 뢰어, 에르하르트 라우스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인 출신 중에서는 상급대장까지 오른다. 시종 자신의 후임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던 같은 산악병과의 프란츠 뵈메 산악대장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3] 때문에 종종 로타르 렌둘릭 박사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4] 이 부분 또한 나중에 재판에서 기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