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쇠르너
[image]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국방군 육군 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산악엽병(Gebirgsjäger) 병과 출신답게 독소전쟁에서도 노르웨이, 핀란드 등 극지에서 활약했으며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27인 중 한 명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 직전 남긴 유서에서 육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될 만큼 히틀러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실력을 높이 평가받은 것보다는 쇠르너가 나치당 황금 배지 수훈자일 정도로 열렬한 나치당 인물이라는 점, 그나마 방어전에서의 전공조차도 부하 장병들을 군사 재판도 거치지 않고 사살해 가면서 얻어낸 거라는 점에서 당대, 그리고 후대의 비판을 받게 된다.
형식상으로는 산악 병과 최초로 원수로 진급했지만 정식 원수봉도 받지 못했을 만큼 임시방편의 원수 진급이라는 점, 산악병과 출신 장군으로는 1944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에두아르트 디틀 육군 상급대장이 실력과 명성, 인망 등에서 쇠르너를 한참 앞서고 있었다는 점에서 별로 두드러지는 사실도 아니다.
2. 생애
2.1. 출신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image]
▲ 푸르 르 메리테 훈장을 수여받을 당시의 쇠르너
1892년 6월 12일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태어났다. 18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바이에른 군에 지원한 후, 부사관으로 복무 기간을 채우고 뮌헨으로 돌아와 로잔 대학, 그르노블 대학에서 철학, 어학을 전공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쇠르너는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종군, 독일 산악군단 소속 산악소대장으로 참전하였고, 베르됭 전투 등 네임드 전투에도 참가했다. 대전 기간 도중 프랑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을 돌며 종군하다가 1917년의 카포레토 전투에서 쇠르너는 고지를 점령하는 공훈을 세웠고, 육군 보병소위가 되어 푸르 르 메리테 훈장을 수여받았다.[1] 이는 바이에른군 출신 소위로서는 최초로 수여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격전을 치른 나머지 3번의 중상을 입었고 대전 말미에는 참모장교로 활동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2.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 쇠르너는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그랬던 것처럼 우익 사상에 경도되었고, 자유군단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두들겨 패고 다녔다. 그후 독일 제국이 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는데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의 군비 확장이 크게 제약받는 상황에도 쇠르너는 1차 대전 당시의 활약 덕분에 육군에 남을 수 있었고, 1918년 중위로 진급했다. 군 복무도 뮌헨에 주둔한 산악연대에서 하고 있었다. 1923년 쇠르너는 오토 폰 로소프[2] 휘하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맥주홀 폭동이 일어나자 로소프의 명령으로 폭동 진압에 출동하였다. 그런데 이후 나치즘에 경도된 나머지 아돌프 히틀러가 출소하자마자 쇠르너는 나치당에 가입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멸망 후 제3제국이 성립되자 쇠르너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 뺨치는 히틀러의 충견이 된다. 참 사람 일은 모르는 듯.
1934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독일군 참모본부로 배속되고, 1937년 중령으로 진급해 제98산악연대장이 되었다. 이후 슈츠슈타펠 소속 무장친위대를 독일 국방군과 비슷한 전투 집단으로 개편하는 데에 파울 하우서와 같이 큰 공헌을 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폴란드부터 유고슬라비아까지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임시 대령이었던 쇠르너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의 남부집단군 휘하 예비대의 제1산악사단 소속 제98산악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이때 1차 대전에서처럼 고지 점령을 선보였고 폴란드 침공 이후 정식 대령이 되었다. 1940년의 프랑스 침공에도 동일한 산악연대를 지휘하여 활동했다. 이후 동년 8월 소장으로 승진하였다.[3]
소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제6산악사단장으로 부임하여 1941년 4월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전하였다. 쇠르너의 부대는 7천 피트에 달하는 고지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리스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리스군의 방어선인 메타자스 선을 돌파한 후 아테네까지 이르는 공을 세워 쇠르너는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부대는 당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하켄크로이츠기를 걸었다고 한다.
유고슬라비아 침공전 이후에는 부대 재편을 위해 잠시 발칸 반도에 머물다가, 1941년 말 제6산악사단의 핀란드 배치가 결정됨에 따라 핀란드로 이동하였다.
2.3.2. 독소전쟁
[image]
▲ 1941년 불가리아에서 찍은 사진.
쇠르너는 핀란드 주둔 독일군 소속으로 1941년 6월의 바르바로사 작전에도 참전하였다. 이후 제19산악군단을 이끌고, 연합국의 지원 물자가 도착하던 소련의 항구인 무르만스크 공략에 참가하였으나 패퇴하였다. 그는 북극권 작전의 어려움을 일축하면서,
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차 대전 때부터 산악전만 파 온 달인인 만큼 저런 말이 나올 만하다."북극은 아무것도 아니다(Arktis ist nichts)"
이후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제40기갑군단을 지휘했다. 제40기갑군단은 드네프르 강 동쪽의 니코폴 교두보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당시는 소련군의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가 진행되는 시기였고, 니코폴 교두보에는 바실리 추이코프가 이끄는 제8근위군, 제4우크라이나전선군을 위시한 소련군 대부대의 맹공이 가해졌다.
이에 쇠르너는 작전을 구상하는데, 그 작전의 이름하야 "아가씨, 실례합니다 작전(Operation Ladies Excuse Me)". 현재의 거점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작전으로, 히틀러가 후퇴, 철수라면 환장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건지기 위해 임의적인 철수를 감행한 것이다. 쇠르너는 직접 88mm 대공포를 쏘면서까지 분투했고 병력 손실을 줄여 나가면서 1월까지 크림 반도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44년 2월에 신설된 국방군 참모본부의 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나, 마르틴 보어만과의 의견 충돌로 한 달만에 사임하고 다시 야전에 복귀했다.
동년 3월, 쇠르너는 히틀러에게 후퇴를 청원했다가 파면당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를 이어 A집단군(이후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개칭)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크림 반도를 재점령했으나 크림 반도로 밀려오는 소련군의 반격 공세를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쇠르너는 히틀러에게 현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에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구라를 쳤다. 하지만 A집단군 휘하 독일 제17군이나 루마니아군은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고, 소련군의 공세에 계속해서 개박살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17군의 패잔병은 세바스토폴로 후퇴했고 쇠르너는 히틀러에게 후퇴를 요구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쇠르너는 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도망치는 자는 바로 총살에 처하겠다"고 엄포했지만 5월 5일 소련군이 세바스토폴에 대공세를 가하자 4만 3천 명이 넘는 독일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세바스토폴에서 도망치기 위해 배를 기다리던 독일군, 루마니아군은 배가 늦어지는 바람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6월부터 시작된 중부집단군을 박살내기 위한 소련군의 대공세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7월 23일 쇠르너는 북부집단군(이후 쿠를란드 집단군으로 개칭) 사령관이 되어 발트 해 인근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소련군의 수는 너무 많았고 북부집단군만으로 수비는 역부족이었다. 쇠르너는 에스토니아를 버리고 후퇴할 것을 청했으나 히틀러는 당연히 씹었는데, 9월 14일부터 소련군이 '''130개 사단'''으로 대공세를 가해 오니 히틀러도 후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1월 쇠르너는 중부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오데르 강 상류의 방위를 담당했다. 이때 쇠르너는 인근 지역 독일 민간인의 피난을 지원했으나 동시에 휘하 장병, 국민돌격대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전투를 강요했다. 탈영병이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바로 교수형에 처해 버린 후,
라고 쓰여 있는 명패를 시신의 목에 걸게 했던 것. 이런 미친 방법을 써서 군 기강을 잡는 데는 성공하긴 하는데, 당연히 휘하 장병들에게는 '''히틀러보다 더 못된 놈'''이라는 욕을 들어야 했다. 근데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이걸 보고 또 좋다고 3월에 쓴 자기 일기에다가 기록해 놓고서는 히틀러에게 군 기강을 바로잡은 훌륭한 사례로 소개했다.'''저는 배반자입니다. 독일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키지 않았기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I am a deserter. I have declined to defend German women and children and therefore I have been hanged.)
또한 괴벨스는 자기 일기에다가 쇠르너를 칭찬한답시고 쓴 말이
이거였다.이런 방법은 당연히 효과가 좋다. 쇠르너 밑에 있는 부하들은 앞에 있으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뒤로 도망치면 '''확실히 죽는다'''는 것을 알 테니까.
(Naturally such methods are effective. Every man in Schörner's area knows that he '''may die''' at the front but ''' will inevitably die''' in the rear.)
그러나 이런 정신 나간 극약 처방으로도 이미 기울어져 버린 동부전선의 판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고[4] 결국 1945년 4월 중순부터 베를린 전투가 개시되었다. 히틀러는 4월 30일 자살하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그 유서에는 쇠르너를 원수를 승진시키고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5] 그렇지만 빈껍데기에 불과한 처지라 쇠르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쇠르너는 중부집단군을 서쪽으로 후퇴시켜 미군에게 항복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쇠르너는 개인적으로 소련군에게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중부집단군의 사령관직을 부하에게 위임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오스트리아로 비행기를 타고 도망쳤는데 이때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상태였다.''' 이는 2차대전 말기 일본군 수뇌부에서도 드러난 것으로도, 최고지휘관이 휘하 장교들에게 할복자살을 강요한 후 자기 혼자만 도망치거나 비굴하게 개처럼 기며 항복한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가 불시착해 버리는 바람에 쇠르너는 티롤에서 미군에 체포되었고, 남겨진 중부집단군은 소련군의 프라하 공세에 저항하였으나, 1945년 5월 11일 항복하였다.이로써 독소전쟁은 끝났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150만의 대병력을 보유했던 중부집단군은 소모되어 사단 규모까지 부대가 축소되어 있었고, 이 부대는 최후로 항복한 독일군 부대였다.
2.4. 전후
미군은 쇠르너를 소련에 넘겼고,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51년에는 전범 혐의로 기소되었다. 1952년 2월 소련 대법원은 쇠르너에게 25년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정치국 특사로 12년으로 감형되었고, 그나마도 더 감형되어 1954년 동독에 넘겨진 후 석방되어 1958년 서독으로 왔다. 당시 서독은 재무장 과정을 거치는 중이었고, 나치당에 충성을 바쳤던 구 독일 국방군 고위 장교들의 영향력이 은근 강했다. 이는 당연히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고 서독 의회에서는 나치당에 가담했던 군인에 대한 은사금, 연금의 지급을 중지하는 법을 제정하여 이를 <쇠르너 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6] 쇠르너는 중앙집단군 사령관 시절 즉결 처형을 남발한 것 때문에 재기소되어 또다시 옥살이를 해야 했고, 4년 간 복역하다가 만기로 출소하여 1963년에야 석방되었다. [7]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당시 서독 대통령 하인리히 뤼프케에 의해 약간의 은사금을 수여받아 곤궁한 말년을 버틸 수 있었고, 1973년 고향 뮌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해 미텐발트 묘지에 매장되었다.
3. 평가
빌헬름 카이텔, 헤르만 괴링과 더불어 독일군 장성 중 똥별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 적어도 카이텔은 자기 부하들에게는 '''정말로 최고의 상관이었고''' 심지어 그가 사형 선고를 받자 가장 먼저 항의한 사람들이 카이텔의 병사들이었다. 괴링은 공군 재건에 기여를 했고 초반때만 해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면 쇠르너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독소전쟁 전까지 유능한 산악 지휘관으로서 전공을 세우고 독소전쟁 중에도 니코폴 방어전에서 제법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등 군사적 재능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때 후방에 있던 병사들을 이유 불문하고 죄다 탈영으로 몰아 목 매달라고 명령하여 휘하 장병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8] 갈구고 욕하는 건 몹시 심하게 했으면서 칭찬은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보병장교 출신이자 쇠르너의 부관이었던 고틀롭 헤르베르트 비터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이 남긴 회고록 In Deadly Combat: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에 의하면 장성,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만인에게 진심어린 증오를 사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여기까지만 했으면 당시 각국 군대에 흔해빠졌던 부하들을 갈아넣는 지휘관 1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카이텔,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동급으로 나치당을 대놓고 추종하던 인간이었기에 정치 군인이라는 오명도 벗어날 수 없다.
베를린 전투 당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포병대장도 전후 심문에서 쇠르너는 장성들 사이에서 강렬한 나치빠, 병사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장성의 권위를 세워줘야 한다고 적당한 과오는 덮어주던 장성들끼리 이런 말 나올 정도면 그 아래의 장교들에게 평판이 얼마나 바닥이었을지는 짐작이 된다. 출처
게다가 그렇게 똥군기를 강요하던 인간이 종국에는 사복 차림으로 도망가다가 붙잡히니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 도중 도망을 가거나 군복을 벗는 행위는 쇠르너가 엄연히 적전도주로 간주하여 즉결 사형을 자주 집행하던 행위였는데, 정작 본인은 이러한 적전도주를 저지르고도 사형을 당하기는 커녕 수감생활 좀 하고 끝이었다. 그마저도 부하들을 잔인하게 다룬 죄는 잘해봐야 서독에서의 4년 형으로 끝이었으니, 언행일치도 제대로 하지 못한 막장, 모순덩어리.
그나마 반인륜 범죄와의 연관성은 적었기 때문에 소련의 전범재판 중에도 징역형을 다 살지 않고 중도 석방되었고, 서독 비나치화 재판에서도 수감생활을 오래 하지 않고 석방될 수 있었다. 사실 굳이 반인륜 범죄에 대해 논하자면 후방에 있던 부하들을 마구잡이로 즉결처형한 죄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독일 국방군에서 군법을 위반하여 처형당한 자들을 서독이라고 해서 구제한 것이 아니다. 쇠르너의 사례는 언제까지나 제대로 된 재판과 조사 없이 이뤄진 것과 사형당한 사람의 상당수가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국민돌격대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2007년 독일의 공영방송 ZDF에서 방영한 5부작 다큐멘터리 <Die Wehrmacht>의 최종화에서 페르디난트 쇠르너와 발터 모델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때 쇠르너와 모델 휘하에서 장교로 근무했던 생존자들이 직접 출연하여 인터뷰한 영상을 보면 두 사람이 굉장히 상반된 지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쇠르너의 부하 장교들은 '쇠르너는 정치 군인이나 다름 없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충성도를 입증하기 위해 부하들의 희생을 강요했다.'라고 비판적인 진술로 일관하였으나 발터 모델의 부하 장교들은 '모델은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였으며 휘하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 순수한 야전 군인으로 정치적인 견해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군사적인 문제로 히틀러와 고함을 지르며 언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으며 히틀러가 자신의 의견을 꺾은 경우도 많았다.'고 진술했다.[9]
4. 기타
- 쇠르너는 독일 육군 원수들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인물로, 국방군 원수 전체 중엔 1980년 12월 24일에 사망한 되니츠 제독이 마지막 사망자이다.
- 여담으로 페도어 폰 보크 육군원수와 무지하게 사이가 안 좋았다. 보크 장군의 병사를 처형하려고 하자 보크한테 "니가 뭔데 내 부하를 맘대로 죽이려고 해?"라고 욕 먹고 싸닥션을 맞았다.
- Hearts of Iron IV에서 독일의 고위지휘관 1명으로서 보병전문가로 나온다.
5. 진급 내역
- 1912.04.01 : 이등병(Gefreiter)
- 1912.08.01 : 하사(Unteroffizier)
- 1913.05.22 : 중사(Vizefeldwebel)
- 1917.12.26 : 소위(Leutnant)
- 1918.07.15 : 중위(Oberleutnant)
- 1926.08.01 : 대위(Hauptmann)
- 1934.08.14 : 소령(Major)
- 1937.03.16 : 중령(Oberstleutnant)
- 1940.01.30 : 대령(Oberst)
- 1941.12.17 : 소장(Generalmajor)
- 1942.02.28 : 중장(Generalleutnant)
- 1942.05.15 : 산악대장(General der Gebirgstruppe)
- 1944.05.20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5.04.05 : 원수(Generalfeldmarschall)
[1] 데니스 쇼월터의 《패튼과 롬멜》에 따르면, 쇠르너가 바로 '''에르빈 롬멜'''의 훈장을 뺏은 그 장교다![2] 당시 바이에른에서 알아주는 군 장성이자 맥주홀 폭동에서 히틀러에게 협박당한 3인방 중 한 명.[3] 영어 위키백과에는 소장 진급이 1941년 12월이라고 나와 있는데 41년 12월 전부터 이미 쇠르너는 사단장으로 활동 중이었던 것으로 보아 1940년 8월부터 받은 소장 계급은 임시 계급이고, 그 이후부터 정식 계급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4] 베를린 공방전에 나간 소련군 수만 '''250만이다.'''[5] 이때 그는 독일 국방군 육군에서 가장 늦게 원수로 임명된 사람이 되었다. 다만 육해공 3군을 통틀어서 가장 늦은 것은 아닌데 이는 공군 출신의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이 가장 마지막으로 임명되었기 때문.[6] 다만 전쟁 말기 징집된 무장친위대 장병들 중에는 강제로 나치당에 들어가야 했던 자들도 많고 독재국가 제1정당 일선 당원들이 흔히 그렇듯이 광신도가 아니라 사회적 혜택을 기대하고 가입한 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쟁범죄자나 어차피 연금박탈이 당연한 범법자들에 한해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쇠르너는 전쟁범죄자가 맞았으므로 연급 지급이 정지되는 게 당연했다.[7] 당연하지만 수감 당시에 부하들에게도 상당히 무시를 받았고 아예 대놓고 경례도 하지 않은 부하들도 많았다. 이건 굉장히 평판이 나빠야 가능한 일인데, 장교사회는 일반 사회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기수가 앞서는 장교는 계급에서 밀린다고 쳐도 절대 대놓고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독일은 70년대 전까지는 동서독 막론하고 매우 권위주의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하극상은 어지간히 예외적인 이유가 없이는 시전자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십상인 행위였는데, 쇠르너는 유감스럽게도 그 예외적인 이유에 해당하는 행위를 매우 당당하게 했고 자기 잘못을 죽는 날까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당한 것이다.[8] 게다가 이런 쇠르너 때문에 빡친 장성들이나 영관급 장교들은 아예 모른척 부하들을 풀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대대장 이하 장교들은 아예 대놓고 무시했다.[9] 애초에 둘의 최후도 전혀 달랐다. 쇠르너가 부하들에게는 싸우다 죽으라고 강요하고는 자기는 사복 입고 도망가다가 잡힌 반면, 모델은 부하들이 개죽음을 당할 게 분명해지자 국민돌격대나 히틀러 유겐트 등의 사실상 준 민간인들은 집단군사령관 직권으로 전부 전역시켜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정작 본인은 지휘관으로써 도망가지 않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