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로

 


롤로(Rollo, 846년/854년경 ~ 93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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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의 동상
1. 개요
2. 생애
2.1. 약탈자의 삶
2.2. 생클레르 조약과 프랑스 정착
2.3. 죽음과 사후
2.4. 기타
3. 대중문화에서


1. 개요


고대 노르드어: Hrólfr (흐롤프)
노르만어: Rou (루)
프랑스어: Rollon (롤롱)
9세기~10세기 활동한 바이킹 출신의 모험가이자 약탈자, 정복자이다. 노르망디 공국의 시조이며 프랑스 센 강 어귀에 정착한 프랑스화한 노르드인노르만족의 시초이기도 하다. 또한 노르만 정복으로 유명한 윌리엄 1세의 현조(5대조) 할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멀리보면 현대 영국 왕조의 시조이기도하다.[1]

2. 생애



2.1. 약탈자의 삶


부모는 확실하지 않으나 스칸디나비아 서부에서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Rǫgnvald Eysteinsson)의 아들(외손자라는 설도 있다)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유년시절은 알려진 바 없으나 노르웨이의 왕 하랄 1세 미발왕의 아들을 살해한 뒤 도주하여 (혹은 하랄1세의 노여움을 사 추방된 뒤) 고향을 떠나 북해 연안 해안가를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네우스토리아(현재 북프랑스 지역)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는데 885년 파리 약탈을 감행했고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당시 서프랑크의 왕인 카를 3세 뚱보왕[2]은 상당한 금을 주어 물러나도록 했지만 금만 받아 챙긴 후 파리에서 물러나 다른 지역을 약탈했다. 이 파리 약탈로 인해 신망을 잃은 카를 3세는 귀족들의 쿠데타로 축출되고 방어에 공적이 컸던 파리 백작 외드가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은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를 야기되는 계기가 되었다.[3]
890년에는 바이외에 상륙하여 바이외 백작을 살해하고 그의 딸 포파를 납치해 부인으로 삼는다. 기수를 돌려 브르타뉴를 침략했으나 브르타뉴의 대공 알랭에게 크게 패하였다. 891년에는 리지외를 약탈하고 892년에는 다시 한번 파리를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898년에는 센 강 하구의 루앙을 점령하고 무리들과 정착을 하였다. 911년 샤르트르를 습격했고 로베르 1세와 왕위쟁탈전을 벌이던 와중 앞뒤로 적을 맞게된 샤를 3세 단순왕[4]은 롤로를 회유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2.2. 생클레르 조약과 프랑스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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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식 세례를 받는 롤로.
911년 7월 20일 샤를 3세 단순왕과 롤로는 생클레르-쉬르-엡도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샤를 3세는 롤로와 그 무리에게 점령된 네우스트리아 일부인 센 강 하구 양편을 양도하고 루앙 백작으로 봉하고 샤를 3세의 서녀인 기셀라를 롤로의 부인으로 내주는 대신 롤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샤를 3세를 주군으로 받들며 다른 약탈자로부터 싸운다는 조건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롤로는 로베르란 세례명을 받았으며 흐롤프였던 본명은 프랑스어로 불리면서 롤로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롤로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켰으며 몇 차례 다른 약탈자를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샤를 3세가 로베르 1세에 의해 폐위를 당하자 다시 파리를 습격하고 다른 여러 곳을 약탈하였다.
한편 롤로가 센 강 하구에 자리잡자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북부에 정착하였다. 후에 이 지역을 북부인의 땅이란 뜻에서 노르망디(Normandie)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거칠고 무지몽매하였으나 프랑크왕국의 언어와 풍습, 종교를 받아들이고 약탈을 자제하였다. 또 프랑스어 쓰고 가톨릭을 믿는 이 금발벽안의 거인들을 노르만족(Normand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윽고 922년 로베르 1세가 결국 샤를 3세에게 암살당하면서 왕위쟁탈전은 샤를 3세의 승리로 끝나자 롤로는 약탈을 중지했지만 923년 로베르 1세의 사위 라울에 의해 샤를 3세가 다시 한번 폐위되자 이를 구실로 다시 서프랑크의 여러 곳을 침공, 약탈했다. 중부 노르망디를 빼앗고 925년 플랑드르까지 진출하여 일부를 할양받았다. 933년에는 콩탕탱 반도까지 확장하여 오늘날의 노르망디 지방 영역 대부분을 자치했다.

2.3. 죽음과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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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대성당 롤로의 석관
927년 바이외 백작의 딸 포파 사이에서 얻은 아들 기욤 1세에게 작위를 물려주었고 933년 사망하였는데 가톨릭 세례를 받았지만 비밀리에 북구의 전통신을 믿었으며 이교도로써 죽었다고 한다. 시신은 루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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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와 그 후계에 의해 완성된 노르망디의 강역
그의 후계자들은 가톨릭교도로 성장하였고 전쟁을 통해 주변지역을 병합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공작으로 승작하였으며 형식적으로는 프랑스의 신하임을 자청하였으나 사실상 독립세력이었다. 후에 그의 5대손인 기욤 2세는 잉글랜드가 혼란한 틈을 타 교황의 승인을 얻어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벌여 승리, 잉글랜드왕 윌리엄 1세가 되었다.

2.4. 기타


부인들을 얻은 경위와 부인들의 혈통이 좀 후덜덜한데 첫째 부인 포파는 위에 언급했듯 약탈로 납치해서 얻은 부인이다. 포파의 아버지는 바이외 백작 베르망두아의 피핀 2세로 카롤루스 대제현손자다. 또 둘째 부인 기셀라는 평화조약의 증표로 얻은 경우인데 기셀라의 아버지 샤를 3세 역시 카롤루스 대제의 현손자다. 즉 롤로의 자손들은 로마 제국 이후 최고로 명망있는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인 것이다.[5]
롤로의 직계 후계는 6대 만에 단절됐지만 혼인관계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귀족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덩치가 컸던 그는 동료 노르만인들이 '걷는 자 흐롤프'라 불렀는데 그가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말(馬)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이름을 흐롤프라 했고, 그의 세례명이 로베르였기 때문에 일설에는 로베르 1세로도 부르는데 이는 롤로를 롤로 또는 로베르(그의 세례명)라 부른 것은 프랑스인들이었다고.
17세기의 어떤 연극과 작품들에서는 그를 까다로운 성품의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3. 대중문화에서


  • 바이킹스에서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는 형제 사이로 각색되었으며,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왔다. 물론 실제로는 활동시기가 한 세기 정도 차이나고, 본거지도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당시 기준으론 동족도 무엇도 아닌 그냥 먼 타지인들이다.
  • 중세 대전략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등장한다. 구현 자체는 게임 발매부터 있었지만 노르망디 가문의 시조로 가계도상에만 구현되었던 것이 유료 DLC 고대의 신 발매 후 처음 플레이 가능한 인물로 등장했는데 이때만 해도 바이킹의 시대 시나리오에서 니달로스 족장 로근발드의 영지가 없는 가신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이름은 흐롤프 드 노르망디. 무력 20에 뛰어난 전략가, 강인함, 바이킹, 용감함 트레잇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로 나오는데 대신 영지가 없어서 철인모드 플레이는 불가능했다. 그랬던 것이 가장 최신 DLC이자 무료 DLC인 철의 세기 이후에는 나이가 20살 정도 어려지면서 전설대로 니달로스 족장 로근발드의 7살 아들로 등장하는걸로 바뀌었다. 즉, 철인모드 플레이가 가능해진 것이다. 대신 노르망디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아쉬운 부분.[6]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는 바이킹 관련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자 발견물인 '로로[7]의 투구'가 있다.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에 롤로라는 이름의 청년이 등장한다. 본명은 흐롤프이며 롤로는 에스트리드 부인이 프랑크어로 지은 애칭이라고 한다. 이후 이 청년은 에스트리드의 요청으로 에이보르와 함께 그녀를 위장납치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향하는데, 시기와 본명을 보면 이 청년이 후일 노르망디의 시조가 되는 롤로로 보인다.

3.1. 바이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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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동생[8]으로 각색.
반골 그 자체. 예전에는 작중에 형인지 동생인지 불분명하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시즌 1 중반에 롤로가 라그나르를 향해 Little Brother라고 호칭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극 내내 롤로가 라그나르에게 컴플렉스 가지는 이유 중 하나가 본인이 라그나르의 형임에도 그에게 형 대접을 받기보단 부하 대접을 받는 것 같다는 자격지심이 크게 작용했다.

작중 무력 순위에서 1, 2위를 다투는 뛰어난 광전사다. 용맹만 뛰어난게 아니라 지략도 출중하여 후에 프랑크쪽에서 싸웠을 때는 센느강을 거슬러 오는 바이킹 함대를 쇠사슬로 강폭을 막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똘끼와 폭력 성향은 더 심한 데다가, 형인 라그나르의 활약에 자기가 묻힌다는 열등감 때문에 라그나르에 대한 애증이 겹치는 민폐 캐릭터이기도 하다. 작중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 시즌 1 내내 라그나르와 자잘한 대립을 이어가다, 시즌 2에서는 보르그의 회유에 넘어가 라그나르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 중 라그나르를 대면하고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항복한 뒤, 시즌 내내 라그나르의 충실한 심복으로 일한다. 이후 성급한 성격도 많이 죽었는지 라그나르가 카톨린신자들과 협력하는데도 불만이 없었으며 파리 약탈에도 참여해 맹활약했다. 라그나르의 파리 약탈 이후 재약탈을 위한 전초기지를 맡기로 자원한다. 이때 프랑크왕은 재침공 방지를 위해 그에게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의 영토 하사와 자기 딸과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시즌 3가 끝난다. 아마 결국은 라그나르와 대립하게 될 듯. 역사적으론 이후 잉글랜드를 정복한 정복왕 윌리엄의 직계 조상이며 라그나르보다 60년 정도 후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결국 후손은 라그나르가 못 이룬 잉글랜드 정복을 이룬다.

시즌 4에서 기슬라 공주와 결혼하여 프랑크 왕국의 부마이자 노르망디의 백작이 되어 으리으리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다만 마누라가 속을 엄청나게 썩여서 처음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물론 기슬라 공주의 입장에 롤로는 자신의 나라의 수도에 쳐들어와 백성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해간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짐승때거지들의 수장이건만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그와 결혼한 것이니...하지만 그만큼 본래의 똘끼가 넘쳐흐르는 바이킹이기를 포기한 그만의 대인배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기슬라 공주가 결혼 첫날밤에 침실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악을 하고[9] 침실에선 악을 쓰면서 잠자리를 거부하고 죽여버리겠다고 칼을 들이대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쳐도, 기껏 프랑크식 몸치장을 하고 프랑크식 예법으로 인사했더니 대놓고 안어울린다며 깔깔거리며 비웃고, 공식 왕실 연회에서 불경한 언사로 모욕을 주고 면상에 술을 쳐붓고 휙 가버리고 심지어는 로마 교황청까지 동원해 고자라는 누명[10]까지 씌웠음에도 롤로는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예 진짜 프랑크인으로 살기로 작심한 것인지 아니면 기슬라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 프랑크에 빌붙은 롤로를 비난하는 동족들을 프랑크 왕국의 군사들과 더불어 무참히 도륙했으며 어느새 말까지 배워서 결혼이 무효화되기 직전에 유창한 프랑크-로망어로 "이러시면 안된다. 내 숙명은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고 또한 목숨을 바쳐 이 나라와 백성(파리)을 지키는 것"이라고 호소하여 극적으로 기슬라 공주의 마음을 돌렸으며, 또한 "나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내 동포들조차도 주저없이 죽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팔찌[11]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당신이 싫다면 기꺼이 버릴 수있다."는 식으로 진심을 고백해 결국 사랑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이후 무식하게 닥돌만 하는 광전사 이미지에서 벗어나 바이킹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략을 구상하는 등 나름 머리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12] 실제로 다시 쳐들어온 바이킹 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결국 롤로가 라그나르를 몰락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 라그나르가 입안한 파리 원정을 프랑크군을 이끈 롤로가 저지하여 라그나르는 바이킹 사이에서 인망이 땅에 떨어졌고 그후 은거하다가 잉글랜드로 자살적인 원정을 떠났다가 앵글로색슨에게 잡혀 죽기 때문이다.

시즌 4 하반기 예고편에서는 이제는 적이 된 비요른과 함께 아랍계 문화권으로 추정되는 도시를 공격하는 모습이 나왔다.[13][14]아마 후우마이야 왕조의 도시로 추정된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킹으로서 끓어오르는 모험심을 해소하기 위해 영지 통치는 뒤로 하고 비요른을 따라나선 것으로 드러났다.[15] 플로키가 귀환하는 롤로를 보고 비요른에게 훗날 우리 중 누구보다 뛰어난 명성을 얻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며 죽여버렸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롤로의 후손인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롤로의 후손들은 시칠리아 왕국과 안티오크 공국을 세우고, 1차 십자군 주력으로 참전하여 중세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훗날을 돌이켜보면 롤로는 러시아를 세운 류릭과 함께 바이킹으로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후대에 남겼다.

시즌 5 9화에서 직접 등장은 안했지만 비요른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이바르에게 원군을 보낸다 . 그 뒤 10화 마지막 장면에서 잠시 등장. 함대를 이끌고 자신의 몫을 찾으러 카테가트로 향하면서 파트1의 대미를 장식한다.

11화에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의 의미가 들어나는데 그것은 라게르사와 자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비요른을 프랑크 왕국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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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르만 왕조의 직계는 윌리엄 1세의 아들 헨리 1세에서 마감되지만 헨리 1세의 외손자인 헨리 2세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설하며 이어졌고 이후에도 차례 왕조의 변화는 있었지만 모계나 방계로 윈저 왕조까지 이어졌다. 즉, 이후 수많은 영국왕을 낳은 수많은 모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공식적으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피엔 롤로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2]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동프랑크의 왕 루드비히 경건왕의 아들로 본디 동프랑크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지만 일시적으로 서프랑크의 왕위를 획득했다.[3] 외드가 서프랑크의 왕이 되면서 그의 일족은 서프랑크 왕위를 주장 할 수 있게 되었다. 외드는 후에 카롤링거 가문의 추종세력에 의해 실각하지만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로베르 1세의 손자 위그 카페가 왕이 된 이후 서프랑크의 왕위를 세습하며 프랑스의 기초를 다진다.[4] 동프랑크의 왕 카를 3세 뚱보왕과는 다른 인물이다.[5] 다만 롤로 자체가 인생전반기가 베일에 싸여진 반전설적인 인물이고 기록은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며 작성을 주도한 세력의 입맛에 맞게 쓰여진다는 점을 고려하자.[6] 가문명은 인 게임 수정도구로 이용해 바꿀 수 있지만 문장은 고유문장이라 변경하려면 세이브 파일을 뜯어고쳐야 된다.[7] 롤로의 일본식 발음[8] 바이킹스 공식 설정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명시됨 "Ragnar's younger brother Rollo has always lived in Ragnar's shadow." -Michael Hirst(바이킹스 제작/각본)[9] 결국 왕의 가신인 롤랑이 짐짝처럼 들쳐메어 침실에 배달했다(...)[10] 물론 롤로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려고 벌인 공작이다.[11] 바이킹의 증표[12] 하지만 이전 시즌에서도 롤로가 지략을 구사하는 장면은 종종 나오긴 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워낙 지략이 월등했고, 롤로는 무력이 더 돋보였기에 롤로의 지략은 크게 주목받을 일이 없었다.[13] 비요른과의 임시 동맹에 대해 아내가 된 기슬라가 반대하며 따지자 롤로는 '나의 몸속에는 바이킹의 피가 흐르며, 번개가 칠 때 나는 토르가 망치를 휘두르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바이킹에 대한 정체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도 역사적으로 롤로는 끝까지 바이킹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14] 예고 영상에서도 과거 비요른과 다정했던 관계까진 아니지만, 다시 같이 전쟁을 함께하며 그때의 관계가 되살아나는 듯한 서로의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15] 기슬라가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참가했다 버젓이 돌아와서는 기슬라에게 욕먹으며 두들겨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