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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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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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로 유명하며, 미국 인디 음악의 대부이자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있는 록 뮤지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 생애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본인은 신에 대해 냉소적이었다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두왑 장르의 팬이었던 그는 라디오를 즐겨 듣고 기타 연습을 하면서 성장해 고등학교 시절 학교의 두왑 그룹인 "Jades"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시라큐스 대학교 재학 시절에도 두왑과 로큰롤, 리듬앤블루스 등을 좋아했지만 한때는 오넷 콜먼의 프리재즈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레이먼드 챈들러에 매료되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작가를 꿈꾸기도 했다. 나중엔 밥 딜런의 포크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웨일즈에서 온 음악 학도인 존 케일을 만나서 그를 통해 라 몬테 영의 미니멀리즘 음악과 드론 음악 등 전위적인 현대음악을 접하게 됐다. 둘은 서로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같이 연주도 하는 음악 동료가 됐다. 둘은 베이스에 스털링 모리슨, 드럼에 모린 터커를 영입하여 1965년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결성하고 1967년에 일명 바나나 앨범을 통해 데뷰하게 된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관해서는 항목 참조.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뛰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론 계속 실패하자 음악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해서 좌절하였고 결국 1970년에 밴드에서 탈퇴한 뒤 뮤지션의 꿈을 포기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거기서 회계사였던 아버지의 회계사무소에서 1년간 타이피스트로 일했다. 팩토리 시절을 비롯한 벨벳 시절엔 온갖 변태/난교파티와 마약 등 퇴폐적인 쾌락주의의 극한을 맛보며 하고 싶은거 맘대로 다 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엄격한 아버지 사무실에서 성질 죽이고 가만히 앉아서 타이핑만 치느라 얼마나 근질거리고 힘들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루 리드의 괴팍한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런 사무직 자체가 원체 루 리드에게는 전혀 맞지 않다.
그러다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데이빗 보위의 설득과 도움에 힘입어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첫 앨범의 다소간 삽질 끝에 두번째 앨범인 Transformer를 발포한다. 두왑과 로큰롤을 기조로 벨벳에서 선보였던 퇴폐적이면서 쓸쓸한 멜로디 감각을 되살려낸데다가, 이 앨범에서 프로듀서와 편곡, 백킹 보컬 등을 맡으며 큰 영향력을 행사한 데이빗 보위의 글램 록적인 세련미까지 어우러져서 뛰어난 명반으로 호평을 받게된다. 특히 나른하면서 감미로운 발라드인 "Perfect Day"와 도회적인 퇴폐미가 느껴지는 "Walk On The Wild Side"[2] [3][4] 가 큰 사랑을 받았고, 이 두 곡은 오늘날까지도 루 리드의 대표곡으로 남아있다.
이 앨범은 차트 성적과 판매고로 보자면 벨벳보다 훨씬 좋았다. 특히 글램록이 큰 인기였던 당시 유럽에선 적지 않은 인기를 누렸고, 티렉스와 데이빗 보위에 이은 또 하나의 글램록 스타 탄생이라는 식으로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루 리드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Berlin"이나 "Metal Machine Music"같은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세계로 나아갔고, 히트 앨범인 트랜스포머같은 글램 록을 계속 원했던 팬들이 떨어져 나가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컬트적인 인지도로 돌아가 조용히 작업을 이어나간다. 중간에 "Coney Island Baby"나 "Street Hassle, The Blue Mask"같은 수작들을 발표하면서 평단의 지지를 얻고 펑크 록 뮤지션들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잘 팔리는 뮤지션은 아니었다.
얼터너티브 록 열풍이 분 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었다. 1989년 "New York" 앨범을 발표하면서 호평과 골드 레코드를 수상하며 분위기가 달라지더니 1992년 "Magic And Loss"로 영국 차트 6위를 차지한데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잠시나마 재결성 공연을 가져 열화같은 지지를 받으면서 기나긴 비인기의 설움을 털어냈다. 그 후 타계할 때까지는 원로로써 꾸준히 활동해왔다. 고릴라즈나 메탈리카 등 후배들 작업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오랜 마약 복용과 과음 등으로 인해서인지 말년에는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고 결국 간 질환으로 2013년 10월 27일 타계하게 된다.[5]
3. 음악적 특징
기본적으로 비트 세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뮤지션이며 특히 작사 스타일에서는 전설적인 비트 시인인 앨런 긴즈버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 스포큰워드와 요설, 금기 파괴를 추구했다.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 등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열광적인 팬이기도 했다.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아방가르드와 로큰롤, 포크, 블루스를 1930년대의 퇴폐주의 감성과 섞었고 (루 리드 자신을 포함한) 뉴욕 지하세계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솔직하게 노래했다. 그리하여 당시 미국 대중음악시장의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미 서부지역의 록음악과는 차별화된 뉴욕 언더그라운드 세계의 독특한 정서를 담은 록음악을 만들었다.
보컬은 성량이 그렇게 좋지 않고 기교가 특출나진 않지만[6] 음침하고 낮은 톤으로 중얼거리다가 위악적으로 쏘아붙이는 특유의 분위기가 매력이다. 단순히 기교적으로 잘 부르는게 능사가 아니라는걸 보여주는 좋은 예.
로큰롤, 두왑, 모타운 등의 알앤비, 프리재즈, 그리고 상기한 스포큰워드와 밥 딜런[7] 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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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벨벳 언더그라운드 활동 당시[8] . 오른쪽의 여성은 독일 출신 배우.가수 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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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4.1. 괴팍한 성격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개인적 성격은 안 좋은 사례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루 리드는 특히 심한 경우에 속한다. 루 리드를 직접 접해본 지인들 치고 인성 면에서 그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학창시절 때부터 극심한 조울증을 평생 앓아와서, 자기가 기분이 좋을 땐 유쾌하다가도 자기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지면 이유 없이 주변 사람에게 불같이 화내고 종종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특히 여자에 대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친하거나 예술적으로 흠모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기분 좋을 땐 물론 칭찬을 했다가도, 뭔가 자기 심사가 뒤틀리면 전에 한 말과는 정반대되는 악담을 퍼붓곤 했다. 존 케일 등 벨벳 동료들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리드에게 가장 영향을 준 뮤지션 중 하나인 밥 딜런에 대해서도 악담을 한 인터뷰가 여러번이다.
1973년에 결혼한 첫번째 아내인 베티 크론스타드(Bettye Kronstad)는 짧은 결혼생활이 루 리드의 폭력과 학대로만 가득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친구이자 루의 커리어가 살아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 은인격인 데이빗 보위에게도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1979년에 레스토랑에서 보위를 비롯한 지인들과 식사 중에 루 리드가 보위에게 자신의 다음 앨범을 프로듀싱해줄 것을 부탁하자 보위는 마약중독 등 나쁜 습관 먼저 끊고 좋은 컨디션으로 음악에 임해야만 도와주겠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9] 이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다혈질의 루 리드가 보위의 얼굴을 기습적으로 몇 대 가격했고 갑자기 맞은 보위가 반격하려 했지만 지인들이 말리는 바람에 더 이상의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고 헤어졌다. 이 사건은 목격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소문이 퍼졌을 뿐 아니라 현장에 같이 있었던 멜로디메이커 지의 기자에 의해 기사화까지 되어 유명해진다. 이 뒤로 둘은 수년간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사실상 절교한 상태였으나 나중에 화해하게 된다.
한마디로, 무슨 이유로 언제 폭발할지 종잡을 수 없는 심히 불안정한 성격.
루 리드의 전기인 'Notes From The Velvet Underground'을 쓴 전기작가 하워드 자운스는 집필 과정에서 루 리드의 친구, 음악계 동료, 학창시절 동창, 친척 등 리드를 가장 잘 아는 지인 140여명을 직접 인터뷰 취재했는데, 그들 모두가 루가 인성, 성격 면에선 끔찍한 사람이었다며 이구동성으로 최악의 평가를 내렸다. 원문 기사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 루 리드의 '음악'에 대해선 열렬한 팬이었던 작가 하워드 자운스는 이런 지인들의 한결같은 인터뷰 취재 결과에 대해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위대한 뮤지션의 생생한 전기를 쓰려고 많은 지인들을 취재했는데 결과는 책주인공에 대한 지인들의 악담만으로 채워지게 생겼으니 말이다.[10]
위 기사에서 앤디 워홀의 동료이자 팩토리 시절부터 루와 아는 사이였던 폴 모리세이는 전기 집필을 위해 루 리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루 리드의 전기 제목은 "혐오스런 암캐" 혹은 "지구상에 살았던 최악의 인간" (The Hateful Bitch [or] The Worst Person Who Ever Lived) 정도가 알맞다고 쏘아붙였을 정도이다. 생전엔 아무리 싫었더라도 사람이 죽은 후라면 그래도 좋은 말을 해주는게 일반적인데, 오죽했으면 다들 저럴까 싶다.
이렇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성격이 안 좋았던 루 리드도 나이를 먹은 1990년대 이후부터는 과거보단 유해졌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고, 특히 로리 앤더슨과 동거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2000년대엔 옛날보단 성격이 훨씬 나아졌다는 얘기가 종종 나온다.[11]
기자들에겐 록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인터뷰 대상자로 꼽힌다. 인터뷰 전에 되도록 최근 작품에 대해서만 질문을 하도록 사전 약속을 받고, 인터뷰 도중 이에서 벗어나는 질문(자신의 옛날 작품에 대한 질문이나 사적인 질문, 다른 뮤지션에 대한 질문 등)이 들어올 경우 그때부터 Yes, No 등의 성의 없는 답변만 퉁명스레 늘어놓거나 서로 모순되는 엉터리 답변들을 짓궂게 하며 질문자를 혼란스럽게 괴롭히고 가지고 노는 식이다.
사후에 루의 여동생이 오빠에 대한 회고에서 오빠 루 리드는 10대 시절부터 평생을 조현병과 조울증에 시달려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즉 단지 성격이 이상하기 때문만이라기 보다는,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정신병의 탓도 컸다고 볼 수 있다.
4.2. 양성애자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양성애자였다.
일찌감치 여동생 등의 여자옷을 몰래 입다가 부모에게 들켜서 혼나기도 하는 등 여자옷 입는걸 좋아하는 복장도착증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생 때 남자친구와 동성애를 벌이다 발각되기도 했다. 아들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됐으며 당시에 성행하던 전기쇼크 치료[12] 를 반복해서 받았다.[13] 그것도 매주 3번씩 무려 8주 동안이나! 이 혹독한 전기충격 요법은 루 리드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겼는데, 퇴원한 후 상당 기간 동안 단기 기억 상실증이란 부작용이 생겨서 책을 한 페이지 읽고 넘기면 바로 다 까먹어서 전 페이지로 돌아와 다시 읽는 걸 반복해야 했고, 한동안 마치 식물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이때 당한 고통에 대한 분노로 인해 성격도 더욱 삐뚤어지고 부모를 비롯한 모든 것에 증오심과 반항심을 가지게 됐다.
시라큐스 대학 재학 시절엔 여자친구도 사귀는 등 동성애 성향이 잠시 없어지는 듯 했으나 앤디 워홀 팩토리 시절부터 다시 동성애와 이성애를 모두 즐기는 양성애자 라이프 스타일로 굳어진다. 73년에 배트 크론스타드와 결혼했으나 루 리드의 남/녀 편력은 계속됐고 결혼생활은 파탄이 나서 결국 이혼했다. 70년대 중반엔 레이첼(Rachel)이란 여자 가명으로 유명했던 남성 동성애자와 상당 기간 동거하며 '공개 연애'까지 한다. 레이첼은 성전환 수술을 하진 않아서 생물학적으론 여전히 남성이었지만 여장을 하고 다니는 복장도착자(transvestite)였다. 루 리드와 사귈 당시의 레이첼의 사진들.[14] 이 레이첼이란 남자(!)에게 바치는 루 리드의 연가가 바로 Coney Island Baby와 Crazy Feel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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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리드와 레이첼 커플
루 리드는 'Ninth Circle' 등 뉴욕의 유명 게이 바(gay bar)들의 오랜 단골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공연 중에 관객들한테 말을 하다가 "진짜배기 루 리드를 알고 싶나? 뒤로 돌아. 이제 허리 숙여." ("You wanna know the real Lou Reed? Turn around. Now bend over.")라는 유머러스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80년대 들어선 뉴욕의 은밀한 S&M 동호회그룹에서 만난 실비아[15] 란 여성과 두번째 결혼했지만 역시 이혼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은 아방가르드 뮤지션이자 행위예술가로 유명한 로리 앤더슨이다. 로리 앤더슨과는 1980년대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였는데 나중엔 연인관계가 되어 상당한 기간동안 동거해왔고, 결국 2008년에 법적으로 결혼했다.
4.3. 마약
6,70년대의 록뮤지션 치고 마약 안 해본 이가 있겠냐만은 루 리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마약을 했던 걸로 정평이 나있다.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즈와 함께 록계의 양대 마약왕. 그 둘은 그렇게 마약을 많이 하고도 살아남은게 신기할 정도라고 록계의 지인들이 놀랄 정도다. 이미 시라큐스대학 대학생 시절 때부터 헤로인 등 다양한 마약을 사용해왔다. 아무리 마약왕이라고 해도 워낙 오랫동안 많은 양의 마약을 해왔기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는 천하의 루 리드도 건강악화와 위기 의식으로 인해 마약을 끊게 된다. 마약을 끊기 위해 대신 술을 엄청 많이 마셨고, 나중엔 망가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복싱과 태극권(T'ai chi)을 수련하고 오토바이 바이크 라이딩을 취미생활로 즐기기도 했다. 중국인 출신인 태극권 스승의 영향으로 동양 명상 등에 심취하기도 했다. 심지어 루 리드의 라이브 공연 무대에 그 태극권 스승을 등장시켜서 루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스승이 옆에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무술시범을 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5. 디스코그래피
솔로 데뷔작으로 예스의 릭 웨이크먼과 스티브 하우가 세션으로 참여했지만 리드의 미니멀한 스타일과 세션의 화려한 연주 테크닉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은 범작.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미발표곡 모음 VU와 수록곡이 상당수 겹치는데, 비교해 들어 보면 확연하게 이러한 부조화가 드러난다
명실상부 루 리드의 대표작 Transformer(앨범) 문서 참고.
밥 에즈린(프로듀서. 앨리스 쿠퍼의 앨범들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등으로 유명)이 참여한 컨셉트 앨범. 지나치게 느리고 우울한 분위기 탓에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루 리드의 팬층에서는 컬트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앨범
글램 록 스타일로 회귀.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으나 마약중독 탓인지 음악적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짐
보컬이나 다른 악기 없이 기타 노이즈가 여러 겹의 레이어로 뒤덮인 4곡(한 면에 1곡씩)이 담긴 더블 앨범. 일반적인 귀로는 반복되는 소음만이 들릴 뿐이다. 발매당시의 엄청난 비판과 처참한 상업적 실패로 루 리드 개인뿐만 아니라 음반사(RCA)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갖가지 음악 평론가로부터 별점테러를 받고 '최악의 앨범' 2위에 랭크될 정도.[16]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글렌 브랑카, 소닉 유스 등의 노이즈록 뮤지션들의 등장과 함께 재평가되었고, 노이즈/슈게이징 계열 음악의 시초로까지 평가가 상승되었다.[17] 피치포크는 이 앨범에 무려 8.7점을 주며 고평가했다. 참고로, 루 리드 솔로 커리어 최고로 꼽히는 Transformer가 8.4이다. 물론 여전히 논쟁 속에 있는, 걸작보다는 '''괴작'''에 가까운 앨범이다.
1976 Coney Island Baby
1978 Street Hassle
역대 최초로 바이노럴 효과를 사용해 녹음한 상업 음반이다. 음악적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82 The Blue Mask기타리스트 로버트 퀸이 참여하면서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 사운드로 회귀했다는 평가를 들은 수작
1989 New York스트레이트한 로큰롤을 선보이며 오랜만에 비평적/대중적 성공을 거둔 앨범
1990 Songs for Drella (with John Cale)벨벳 시절의 동료 존 케일과 오랜만에 함께 작업한 앤디 워홀 트리뷰트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의 음악적 정체성을 만들었던 핵심 멤버 둘이 뭉친 만큼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을 받았다.
1992 Magic and Loss2011 Lulu (with Metallica)
메탈리카와의 협연 자체가 처음엔 상당한 화제가 되었으나 결과는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면서 리드와 메탈리카 모두에게 흑역사가 된 앨범. 루 리드 특유의 뒤틀린 멜로디를 중얼거리는 보컬과 메탈리카의 무지막지한 음량은 어울리기 힘들었다는 게 세간의 평가.[19] (아이러니하게도 솔로 데뷔작과 마지막 앨범 모두 세션 혹은 참여 뮤지션과의 부조화로 아쉬운 결과를 내었다...)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그의 상당수 곡들이 그러하듯 이 곡 역시 워홀의 팩토리에서 겪었던 실존 인물들을 소재로 했다.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워홀 팩토리에 드나들었던 실제 트랜스젠더나 게이, 복장도착자들이고, 가사 속에서 실제 이름이나 별명으로 등장한다.[3] 곡의 제목은 소설가 넬슨 알그렌이 1956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 제목에서 그대로 따왔다. 루 리드는 이 곡의 의도에 대해 "일반적인 대중들이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고 만나길 원하지도 않는 기이한 변태인간들을 한 명씩 차례로 대중들에게 소개하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다." 라고 밝힌 바 있다.[4] 힙합 그룹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가 이 곡을 샘플링한 'Can I Kick It'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는 데, 정작 이들은 이 곡의 음원 저작권료를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루 리드가 자신이 로열티 100%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발표를 허락했기 때문. 그래서 ATCQ의 멤버 파이프 독이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다.[5] 사망하기 얼마 전에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 한동안 건강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증상이 급격히 나빠진 뒤에 결국 사망했다.[6] 그래도 딜런보다는 조금 더 기교가 낫다. 가성을 많이 쓰는 쪽.[7] 딜런의 음악 뿐 아니라 그의 외모 스타일이나 냉소적인 언행, 매스컴과 거리 두는 신비주의 경향 등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8] 썬글라스 쓴 패션은 밥 딜런을 따라 한 것이다.[9] 물론 보위도 마약에 쩔어 살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 시기엔 마약을 끊은 상태였다.[10] 이런 경우엔 예술작품을 창작자와 떨어트려 놓고 오직 작품만 볼 것이냐 아니냐 등의 문제도 대두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를 감동시킨 위대한 예술작품이 알고 보니 중범죄, 흉악범죄를 저지르거나 범세계적인 악행에 가담한 인간이 만든 것이었다면 그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레니 리펜슈탈, 필 스펙터, 로만 폴란스키, 버줌이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될 듯.[11]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립 서비스인지도 모르지만, 모리세이는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루리드의 성격이 그렇게 나쁘고 까탈스럽냐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질문에 자신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굉장히 친절했다고 답한 바 있다.[12]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도 나오는 그 치료법이다. 저 치료법의 부작용이 의료계에서 많이 드러난 후인 현재는 횟수와 방식, 강도 등을 훨씬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하지만, 저 당시만 해도 초창기라서 무식하게 마구 해댔던 시절이다.[13] 사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로 루 리드는 10대 시절에 조현병과 조울증 판정을 받았고 평생 그런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단지 동성애 하나 때문에 정신병원 입원 및 강제 치료를 받았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14] 루 리드보다 훨씬 키가 크고 거구다.[15] 전직 스트리퍼였고, SM계에선 SM플레이의 지배자(dominatrix)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16] 참고로 1위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Having Fun with Elvis on Stage'로 무대의 토킹 사운드만 수록되고 음악은 일절 삽입되지 않는 앨범이다.[17] 노이즈 씬의 거장인 Merzbow는 이 앨범을 본인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앨범 중 하나로 꼽았다. 이 앨범의 제목에서 따온 'Metal Acoustic Music'이라는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18] 여자 이름이지만 가명이고 실제론 남자다.[19] 앨범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마지막 곡도 각자의 개성이 살아있기 보다는 메탈리카가 루 리드에 맞춘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