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넬 메시/유망주 시절 ~ 2009-10 시즌
1. 유망주 시절
유망주 시절부터 매우 주목받던 선수였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월등히 빠른 월반을 통해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입단 후 놀라운 재능으로 코치진에게 인정을 받았으나, 외국인이라는 제약 때문에 전국 대회나 클럽 A매치는 나가지 못하고 유스 A팀이 아닌 B팀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1] 현 바르셀로나 동료 피케가 건드리면 부서질까봐 무서울 정도로 가냘픈 체구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당시의 메시는 특히나 작고 약한 체형에 속했지만 빼어난 재능 덕에 점차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 당시 87년생 황금 라인이라 불리는 제라르 피케, 세스크 파브레가스와 함께 뛰었다.[2]
2002년 스페인 축구 협회에서 선수 등록을 허가하면서 뉴웰스에서의 이적 문제가 해결되었고[3] 이후 16세 145일이라는 어린 나이에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FC 포르투와의 친선 경기에 교체 투입되어 15분 동안 출전하며 '비공식'적으로 1군 데뷔 경기를 가졌다. 빠른 시기에 갑작스런 1군 데뷔 경기를 치르게 되어 본인도 많이 놀랐었다고.
과연 될성 부른 떡잎이었는지, 1군 성인팀과 첫 훈련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재능으로 많은 선배 1군 선수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챠비 에르난데스가 메시의 발롱도르 수상 당시 축하의 의미로 기고한 글을 보면 겨우 16살이었음에도 푸욜, 튀랑을 단신으로 가볍게 제치는 등의 미친 재능을 선보여서 그당시 1군이었던 선수들 모두 첫 훈련에서부터 메시가 남다른 재목임을 알아봤다고한다. 이후 메시와 포지션 경쟁을 벌이게 되는 루도빅 지울리도 첫 훈련 당시 메시가 모든 수비수들을 말그대로 개박살내고 충격과 공포급의 활약을 펼쳤다고 인증했는데, 이런 그의 모습에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그 호나우딩요조차 놀라워했고 선수들에게는 물론 자신이 친하게 지내던 기자인 크리스 쿠베로에게도 "아직 16살일 뿐이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될 것이다"는 말을 하며 칭찬했다고 한다.[4] 유스 시절부터 이미 클럽 내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했는지, 챠비와 호나우지뉴 모두 첫 훈련에서 메시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라 마시아에 거물급 유망주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를 알고 있었다고 하며 당시 회장 후안 라포르타 등 클럽의 높으신 분들도 직접 경기를 관람하러 자주 갔었다고 한다. 한국인 최초의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인 정인성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타 구단과의 링크나 헛바람이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언론 및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자제시킬 정도로 특별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5][6]
이후 후베닐 A팀으로 승급, 30경기 36득점에 한 경기에 4골을 넣기도 하는 등의 활약으로 코치진 내에서도 기대를 한몸에 받았었다고 한다. 이 당시 바르셀로나 유스팀이 에스파뇰과 대결한 코파 카탈루냐 결승에서의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경기가 있기 1주일전 바로 전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광대뼈에 금이 가서 15일 휴식 판정을 받아 결승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때 평소에는 유순하기만 하던 메시가 평소와는 다르게 반드시 나가겠다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고 한다. 결국 코치진과 가족이 메시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고 잘 보이고 문제없다면서 기어이 출전 허락을 받았지만 경기 시작과 동시에 마스크를 벗어던졌다고 한다. 사실 마스크가 흘러내려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놀란 코치진과 가족들은 패닉 상태가 됐으나 본인은 태연하게 괜찮다고 하며 2골을 득점, 이 경기는 3:0으로 바르셀로나의 완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04-05시즌 바르셀로나 B팀에서 발전 없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2004년 10월 16일 RCD 에스파뇰과의 홈 경기에 출전함으로써 처음으로 프리메라리가 및 1군에 공식으로 데뷔했다. 이 당시 17세로 팀의 막내이자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역사상 세 번째로 어린 선수가 되었고, 프리메라 리가에 출전한 가장 어린 선수였다.[7] 최초의 1군 경기 득점은 2005년 5월 1일 알바세테와의 홈 경기에서 호나우지뉴의 패스를 받아넣은 골이었고 그 당시 17세로 라리가에서 득점한 바르셀로나 선수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8] 해당 시즌에는 당시 바르셀로나는 메시가 유망주였지만 그가 나중에 '신계'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시즌 중반에 루도빅 지울리가 부상을 당하면서 그의 대체자를 다른 팀 선수들 사이에서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박지성(!)도 포함되어 있었다.[9] 하지만 2005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박지성은 맨유로 가게 되고 다른 팀 선수들도 다른 곳에 이적하면서 바르사는 유망주 메시를 1군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방법을 택했고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역시 이에 반응하여 메시에게 출전 기회를 주고 1군으로 끌어 올려주게 된다. 현역 바르셀로나 1군 선수들의 지지도 한 몫 했는데 선수들이 메시를 1군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감독에게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메시를 많이 아끼던 호나우지뉴는 그를 든든하게 조력해주었다.
2005년 5월 1일 알바세테를 상대로 넣은 데뷔골. 어시스트해준 호나우지뉴의 등에 업혀서 손을 흔드는 일명 어부바 세리머니로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이 당시 호나우지뉴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고 지뉴가 당시 어린 막내였던 메시를 아껴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데뷔골도 경기가 끝나갈 즈음에 메시가 사무엘 에투와 교체돼서 들어오자 지뉴가 "어이쿠, 내 동생한테 데뷔골 챙겨줘야지?" 하는 식으로 팍팍 밀어준 덕이 컸다. 저 데뷔골이 들어가기 2분 전에도 지뉴의 로빙 어시-메시 로빙 슛 골의 똑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그 골은 오프사이드로 오심판정을 받았다.
제대로 매스컴을 타고 세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던 건 청소년 월드컵에서의 활약 이후.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으로서 데뷔경기는 2004년 파라과이와의 친선 경기였다. 메시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위해 3: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투입하였으나, 괜한 우려였다는걸 증명하듯 파라과이는 물론 동료선수들마저 압도하며 휘젓고 다녔으며, 결국 최종 스코어는 8:0으로 아르헨티나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네덜란드에서 열린 2005 FIFA U-20 월드컵[10] 에 아르헨티나 선수 중 두 번째로 어린 선수로 참가,[11] 골든볼(대회 MVP)와 골든슈(대회 득점왕)를 석권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메시의 나이는 18세 8일로 마라도나 이후 최초의 18세 수상자이면서[12] 역대 최연소 골든볼 수상자였는 데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결승전 당시 네덜란드의 출신 첼시 스카우터였던 피트 더 비서르(Piet de Visser)가 경기를 보고 '저 아이는 마라도나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이후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 연속 FIFPro와 월드 사커 매거진 최우수 유망주로도 뽑히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유망주로 인정받았다.
'''2004/05시즌: 9경기(선발 2경기) 1골'''
라리가: 7경기(0) 1골
챔피언스리그: 1경기
코파델레이: 1경기
2. 2005-06 시즌
- 라리가 우승
-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 골든보이 상 수상
하지만 16강 2차전 홈경기에서 불의의 부상을 당하고 시즌 아웃이 되면서 2005-06 시즌을 마감했다...이때 메시는 고작 18살이었고 시즌 중 아웃되었으나 이미 어마어마한 찬사들을 듣고 있었다. 호나우두는 메시가 브라질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신세대 선수들 중 단연 으뜸이다라고 인터뷰 하기도 했으며, 프란체스코 토티 역시 메시가 저렇게 잘하는데 고작 18살이라니 기가 막힌다고 했다. 에드미우손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려운 18살이라고 했고, 에투도 메시가 기대되는 유망주가 아니라 이미 축구계의 새 리더라고도 했다.
감페르컵 당시 유벤투스를 맞아 선발출장 했는데 이 당시 유벤투스의 감독이던 파비오 카펠로는 어린 나이에도 비범한 활약을 펼친 메시의 잠재력을 알아 보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에게 찾아가 1시즌 임대를 허락해달라고 졸랐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영입을 시도했지만 바르셀로나는 거절했다.# 당시 카펠로는 18살의 어린 선수가 아닌, 완벽하게 다 자란 성인팀 선수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평생 동안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저 정도로 뛰어난 자질과 인격을 보유한 선수는 처음 본다. 특히 세계 최고 클럽의 선수라는 무거운 옷을 입고 있음에도 말이다'''.
'''2005/06시즌: 25경기(선발 16경기) 8골 3도움''''''"나는 그 때를 잘 기억하고 있다. 나는 메시가 막 데뷔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를 막을 수 없었고,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경합에도 주눅들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그가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라리가: 17경기(11) 6골 2도움
챔피언스리그: 6경기(4) 1골 1도움
코파델레이: 2경기(2) 1골
슈퍼컵: –
3. 2006-07 시즌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이전 시즌과는 달리, 선수들의 단체 삽질 및 부상크리로 망한 시즌이라며 자포자기했던 바르셀로나 팬들에게는 경기를 챙겨볼 기쁨을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희망이자 바르셀로나의 소년가장이었던 시절. 일명 '메시야 이런 팀에서 뛰게해서 미안해' 시절이었다. 결국 팀은 리그 2위, 챔스 16강 탈락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으나 메시는 졸지에 팀을 자기 혼자 떠받쳐야하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맡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며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바르사의 에이스로서의 자리를 굳힘과 동시에 바르셀로나 팬들의 인정을 받아냈다.
2007 발롱도르 3위, 2007 피파 올해의 선수상에서는 2위를 기록한 것이 이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헤타페전 메시의 디에고 마라도나 재림골과 엘 클라시코 해트트릭 및 기립박수가 나온 것도 이때였다. 또한 이 시즌 라이벌 RCD 에스파뇰을 상대로 신의 손 골을 터뜨리면서, 안 좋은 의미로도 마라도나의 후계자가 확실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물론 메시는 마라도나와 달리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였지만. 엘클라시코 해트트릭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면, 세 골 모두 동점골이었으며 엘클라시코 역사상 최연소 해트트릭이었다. 2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의 메시였지만 단순히 유망주 레벨로 비교하기엔 자신의 실력과 잠재력이 넘사벽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2006/07시즌: 36경기(선발 31경기) 17골 2도움'''
라리가: 26경기(23) 14골 2도움
챔피언스리그: 5경기(4) 1골
코파델레이: 2경기 2골
클럽 월드컵: –
UEFA 슈퍼컵: 1경기
슈퍼컵: 2경기(1)
4. 2007-08 시즌
요약하면 '''무관.'''[14]
2007-08 시즌은 바르셀로나에게 작년 시즌과 더불어 악몽같은 시즌이었다. 호나우지뉴가 훈련 불참 등 태업을 일삼았고 사무엘 에투는 같이 뛰기 싫다며 으르렁대는 등 선수단 분위기도 개판 5분 전이었다. 레이카르트 당시 감독은 팀 내 상황을 수습하기보다는 자연치유를 바라고 있었던 듯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당시 회장이던 후안 라포르타가 직접 데리고 온 선수라 감독조차 건드리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도 사실 시즌 중반까지는 성적이 괜찮았다. 어쨌건 챔스 조별 토너먼트도 돌파했고, 코파 델 레이는 준결승까지 간 상태였으며, 리그에서도 2위를 달리고 있었다. 25라운드까지 바르셀로나의 승점은 55점이었고, 이 정도면 당연히 우승을 노림직했다. 팀이 개판이라도 셋 중 하나는 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심심치 않게 나올 찰나...메시가 셀틱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부상을 당했다.
메시가 부상당한 이후 바르셀로나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발렌시아에게[15] 2-3으로 패해 탈락했고,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7패나 기록하며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리그 승점 경쟁에서 자멸해버리며 완전히 뒤쳐졌다. 메시가 부상으로 빠진 리그 7경기에서 바르사는 1승 4무 2패라는 안습한 성적을 기록하며 고작 7점 밖에 승점을 추가하지 못했고, 이로써 우승은 물 건너갔다. 2위를 달리던 팀이 비야레알에도 밀린 3위로 떨어졌으며, 리그 어웨이 성적은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으며, 목숨 걸어야 할 엘 클라시코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처발리는 등 막장 행보를 걸었다.
챔스 16강 2차전에서 부상당했던 메시는 챔스 4강전에 날짜를 맞춰 복귀했다. 그러나 이 때의 바르셀로나는 순전히 메시 원맨팀이었다. 준결승에서 박지성에게 데코와 잠브로타가 완전히 봉쇄당한 상태에서도 메시는 맹활약했지만[16] 결국 폴 스콜스에게 중거리슛을 얻어맞고 0:0, 1:0으로 패배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 리그 최종순위는 '''3위'''. 당연히 레이카르트는 성적부진을 이유로 시즌 종료 후 즉시 경질당했고,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호나우지뉴와 데쿠가 역시 방출당하는 등 여러모로 안타까운 시즌이었다.
'''2007/08시즌: 40경기(선발 35경기) 16골 12도움'''
라리가: 28경기(23) 10골 12도움
챔피언스리그: 9경기 6골
코파델레이: 3경기
5. 2008-09 시즌
[image]
- 라리가 우승[17]
-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 코파 델 레이 우승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 클럽과 스페인 첫 트레블 달성.
- 2008-09 UEFA 유럽 최우수 선수상
2008-2009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맞붙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세계 최고 선수 맞대결을 펼쳐 판정승을 거두었다. 맨유의 장신 수비수인 퍼디치 사이에서 샤비에 완벽한 크로스로 인해 방해받지 않고 헤딩으로 연결해 골을 넣었다. 맨유 수비진은 그날 욕 좀 많이 먹었다. 또한 이날 박지성 특유의 지우개 능력에 눌려 뚜렷한 활약이 없다가 박지성이 교체되어 나간 뒤부터 박지성 라인에 있던 카를레스 푸욜과 메시가 살아나면서 결국 골을 만들어내었는데, 이 때문에 반사효과로 박지성의 수비 능력이 부각되었다.
펩 과르디올라 시대의 시작이자 메시의 '''진짜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시즌이 바로 이 시즌이다'''. 엘 클라시코에서 대활약과 리그에서만 23골이나 넣으며[19]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몇몇 축구팬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훌륭하지만 아마 이게 메시의 하이 커리어일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2008/09시즌: 51경기(선발 41경기) 38골 17도움'''
라리가: 31경기(27) 23골 11도움
챔피언스리그: 12경기(10) 9골 5도움 '''(득점왕)'''
코파델레이: 8경기(4) 6골 1도움 '''(공동 득점왕)'''
6. 2009-10 시즌
- 라리가 우승[20]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 UEFA 슈퍼컵 우승
- 2009년 개최된 6개 대회(라 리가, 코파 델 레이, 수페르 코파, 챔피언스 리그, UEFA 슈퍼컵, 클럽 월드컵) 전관왕 달성[21]
- 2009년 FIFA 올해의 선수 및 발롱도르 수상
- 2009~2010 시즌 라 리가 득점왕 피치치
- 2009~20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2년 연속 수상
시즌 첫 엘 클라시코에서는 골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날카로운 돌파를 선보이며 레알 마드리드 수비진을 털었다. 결국 레알 수비진이 돌아가면서 반칙으로 공격을 끊는 바람에 공격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6장의 옐로 카드를 얻어냈다. 초반 강한 기세로 나왔던 레알 마드리드가 부스케츠의 퇴장으로 후반부 사람숫자도 하나 부족한[22] 바르셀로나에게 통한의 역습을 받게 된 것은 수비수들이 경고 누적으로 인해 움추러든 플레이 때문이라고 봐도 될듯. 덕분에 카드딜러 메시, 카드캡터 메시 등의 별명을 얻었다.
클럽에서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비해 국대에서는 조금 부진한 편.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대개 후안 로만 리켈메가 디에고 마라도나와 갈등으로 국대에서 빠져버리면서 메시를 지원해줄 선수가 없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리켈메가 있을 당시에는 리켈메의 훌륭한 경기조율과 킬패스 덕분에 아르헨티나의 특유의 분위기로 게임을 이끌 수 있었지만[23] , 마라도나 감독과 불화로 인하여 리켈메가 빠져 나간 이후에는 그런거 없다. 국대 내에서 기댈 선수가 메시 혼자...는 훼이크고 다른 선수들도 다 뛰어나지만 문제는 이 훌륭한 선수들을 융화시킬 리켈메(또는 그를 대체할 자원)가 없다는 것.
사실 아르헨티나의 공격진과 미들진의 선수들은 전부 뛰어나지만, 이름값이나 선수들의 성향상 경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메시 혼자라고 봐도 무방할듯. 거기에 마라도나 감독의 선수운용과 전술 또한 메시의 부진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원래 바르셀로나에서 메시의 포지션은 4-3-3에서 측면 공격수를 담당한다면, 국대에서는 4-4-2의 최전방 공격수라 공간 창출에 문제가 생겼다. 여기에 아르헨티나 국대에도 베론, 아이마르같이 사비나 이니에스타를 대신해서 양질의 패스를 찔러줄 선수는 있지만 이분들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국 메시가 2선으로 내려와서 공을 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로 인해서 돌파, 조율, 플레이메이킹 등을 혼자서 부담하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24] 이로인한 심적 부담과 피로로 인해 월드컵 진출을 확정짓기 전까지의 메시의 플레이는 국대, 클럽을 가리지 않고 한동안 주춤하게까지 되었다. 물론 월드컵의 압박이 풀어진 후부터는 다시금 최정상의 포스를 뽐내며 발롱도르 포스를 뽐내는 중.
2009 클럽 월드컵에서는 부상을 딛고 출전, 4강에서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결승에서는 연장전에서 측면에서 올라온 볼을 가슴으로 집어 넣으며 또 역전골, 바르사의 6관왕을 완성했다. 결국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까지 수상, 이해 바르사는 모든 컵을 수집했고 메시는 주요 타이틀을 휩쓸었다. 여기까지 메시는 올림픽 금메달, 발롱도르, 챔스리그 우승 등 축구선수로서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대부분 다 받았으며 이로서 메시에게 남은 타이틀은 월드컵 우승 하나뿐이였다. 지단이나 펠레도 올림픽 금메달은 해보지 못한 영광인 것을 감안하면 이제 메시가 월드컵에서 우승만 한다면 축구선수로서 차지할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리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월드컵이 끝판왕이라는 점.
2010년 1월 17일 세비야와의 경기에서 통산 100호, 101호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1월 17일 현재 15경기 14골 6어시로 득점왕(단독)과 어시스트왕(공동)을 동시에 노리는 중.
2010년 5월 5일 리그 33경기 31골 9 어시, 컵/대륙대회 포함 50경기 44골 10어시 기록. 특히 발렌시아 C.F., 레알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2연속 해트트릭에 슈투트가르트와의 챔스 8강까지 합치면 3경기 8골이라는 무시무시한 골폭풍 행진을 이어가 허정무 감독의 근심을 깊게 하고 있다. 4월 11일 현재 리그에서 득점은 곤살로 이과인에게 3골 앞선 1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어시스트는 사비에게 따라잡혀 공동 1위가 되었다. 그 어시스트로 1골 넣은거지만.
4월 7일 누캄프에서 벌어진 아스날 FC와 2010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 경기에서는 말 그대로 '''This man is just unstoppable'''이라 할 정도의 활약을 펼쳤다. 그야말로 마라도나의 재림이라고 해도 될 경기력을 보이면서 아스날 수비진을 농락, '''혼자서 4골'''을 기록, 4:1로 바르셀로나의 승리를 이끌어 팀의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25] 이건 뭐...바르사와 경기를 하는 건지 메시 한 사람과 1:11로 경기를 하는 건지...한 마디로 아스날 전체가 메시 한 사람에게 농락당한 꼴.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역시 "아낰 이거 뭐냐고ㅋㅋㅋ 왜 위닝 캐릭터가 경기 뛰냐겈ㅋ"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보고 있던 해설진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당시 MBC ESPN 이상윤 해설은 경기 끝나기 직전에는 하라는 해설은 안 하고 실소만 흘려대면서 정신줄 놓은 게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이상윤 해설이야 아스날 팬으로 유명하니 그럴 만도 하다. 결국 메시를 제치고 네이버 검색순위 1위 먹었다. 모 웹툰에서는 '''"허정무 감독이 경기 관전을 위해 TV를 틀었는데 하라는 축구 경기는 안 하고 공포 영화를 틀고 있었다고..."'''
4월 11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벌어진 엘 클라시코에서는 1골을 뽑아내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전체적으로 레알의 수비진들이 메시를 집중마크해서 특유의 현란한 드리블 돌파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생긴 공간을 사비가 돌아다니면서 킬패스를 찔러주고 메시가 공간침투하는 방식으로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냈다. 이케르 카시야스의 멋진 선방이 아니었다면 멀티골도 나올 뻔했다. 반면 라이벌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바르사의 측면을 파고들며 멋진 돌파력을 보여주었지만, 이기적인 플레이로 끝내 바르사 수비진을 뚫지 못한 것과 비교되는 플레이였다. 결국 두 선수의 대결은 2009/10 시즌에도 메시의 우위로 마무리 되었다.
09/10 시즌은 리그 34골 10 어시스트, 컵/챔스 도합 47골 13 어시스트로 마무리했다. 저 무시무시한 골 수는 호나우두가 바르셀로나 시절 기록했던 골과 동률이다. 2010년 3월 이후 이니에스타가 부상당한 이후에는 전형적인 윙포워드 역할보다는 제로톱을 맡거나 2선에서 공배급을 담당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와 유사한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보통 다른 선수라면 커리어 하이급의 대활약을 펼친 지난 시즌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메시의 모습에 이번에도 축구팬들은 '''훌륭하지만 이번 시즌이 메시의 커리어 하이일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2009/10시즌: 53경기(선발 47경기) 47골 10도움'''
라리가: 35경기(30) 34골 10도움 '''(득점왕)'''
챔피언스리그: 11경기 8골 '''(득점왕)'''
코파델레이: 3경기 1골
클럽 월드컵: 2경기(1) 2골
UEFA 슈퍼컵: 1경기
슈퍼컵: 1경기 2골
[1] 바르셀로나가 끝까지 계약을 주저했던 까닭이기도 하다.[2] 이 당시 피케와 세스크는 메시가 벙어리인줄 알았다고 한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메시의 성격을 엿볼수 있는 일화. 원정경기를 가게 됐을 당시 셋이서 같이 비디오 게임을 하다가 드디어 메시가 말문을 열면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3] 해결되지 못했다면 최근 이승우, 백승호 등이 겪은 고생을 메시가 앞서 겪어야 했을 것이다.[4] 물론 당시 딩요의 실력과 위상을 알았던 주변 사람들은 그냥 팔불출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심지어 코비 브라이언트와 광고를 찍을 때도 메시를 대동하고 나가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녀석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코비가 속으로 '최고는 님이잖아여..'하고 황당해했다고..[5] 더불어 바르셀로나는 혹시 축구 선수로의 육성이 실패했을 때 어린 선수들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라 마시아 선수들에게 축구 말고도 다른 공부나 학업도 열심히 하도록 관리를 시켰는데 메시는 유일하게 공부를 못해도 허용되는 일명 스페셜 원이었다고 한다.[6] 특별하게 기대를 한 만큼 관리도 굉장히 빡세게 했기에 청소년기 시절에는 고생도 상당히 많이 한 것 같다. 애초에 메시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클럽 내부인사 중 한명이 선수들 사생활까지 일일이 다 통제하기로 유명한 그 과르디올라였으니 뭐.. 정인성 씨의 증언에 따르면 식단, 사생활, 외출 여부까지 간섭하고 관리했다고 한다.# 마치 칸테라에서 키워지는 로봇 같았는데 메시는 이에 대해 불평 한 마디 안 했다고 한다.[7] 이 기록은 보얀 크르키치에 의해 새로이 경신되었다.[8] 이 기록 역시 보얀이 경신했는데, 데뷔골은 메시가 어시스트한 골이었다.[9] 필립 코쿠가 바르셀로나와의 연관이 깊어서 박지성에게 해당 구단에 가보라는 제안도 했었다.[10] 당시 명칭은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11] 가장 어린 선수는 세르히오 아궤로였다. 여담이지만, 아궤로는 다음 대회인 2007년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2연패를 이끌며 골든볼과 골든슈를 수상한다.[12] 그리고 14년만에 또다른 18세 수상자가 대한민국에서 나오게 된다. 참고로 이때 이강인의 나이는 18세 3개월 27일이었다.[13] 초반에 찰지게 털리는 등번호 4번이 보일 텐데, 그가 비에이라다. 친선 컵대회긴 하지만, 팀에서 갓 자리를 잡아가는 꼬꼬마가 전성기를 지나는 중인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턴 것.[14] 독일월드컵 ~ 레이카르트 경질 전까지 한정으로 영원히 고통받은 메시였다.[15] 발렌시아 최악의 금지어 로날드 쿠만 시절이다.[16] 보통 이 때 박지성이 메시를 꽁꽁 묶었다는 알려져 있지만, 이 때 메시는 2경기에서 평점 7점, 8점대로 MOM에 선정된 박지성 다음으로 높은 평점을 받았고, 이미 이 때부터 라이벌 떡밥을 풍기던 호날두보다 좋은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더 높은 평점을 받았다. 메시가 소위 '팬텀 드리블'로 스콜스를 관광 태우는 장면도 이 때 나왔다. 박지성이 잠브로타와 데코를 완전히 봉쇄하며 맨유 승리의 1등 공신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메시를 털었다고 볼만큼은 아니었다.[17] 3년 만에 우승[18] 과르디올라 감독이 메시에게 폴스나인 롤을 처음 부여해 본 것으로 유명한 경기이기도 하다. 즉, 메시 중앙화의 시초격인 경기.[19] 이 시즌 메시는 '''윙포워드'''였다!! 현대 축구에서 중앙 공격수보다 측면 공격수가 골수가 많은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일단 어느 포지션에서건 20골 이상 퍼붓는 선수는 보통 월드클래스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20] 두 시즌 연속 우승[21] 라리가와 코파 델레이, 챔피언스 리그는 2008~2009 시즌의 우승 성적이며, 수페르 코파, UEFA 슈퍼컵, 클럽 월드컵은 2009~2010시즌의 우승 성적이다.[22] 레알도 90분에 디아라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긴 했다.[23] 베이징 올림픽 축구종목에서 아르헨티나가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는데 이 때 리켈메의 경기조율의 공로가 컸다.[24] 물론 이게 가능했던 사람이 있기는 있다. 마라도나라고. 어떤 사람은 마라도나가 메시를 후계자로 점찍고 자기랑 똑같은걸 시키려고 한다는 추측도 있다.[25] 이 경기 전까지 메시는 제2의 마라도나로 불렸지, 마라도나와 동격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22세 시즌을 보내고 있던 선수였으니까. 그러나 이 시즌 내내 보여주었고, 이 경기에서 대폭발시킨 퍼포먼스로 인해 전세계 유수의 전문가, 언론, 축구팬들이 이 경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메시가 본격적으로 메시가 낫냐, 마라도나가 낫냐 그는 GOAT가 될 것이냐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경기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