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로만 리켈메

 

'''후안 로만 리켈메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
'''이름'''
'''후안 로만 리켈메
Juan Román Riquelme'''
'''출생'''
1978년 6월 24일 (45세)
아르헨티나 산 페르난도
'''국적'''
아르헨티나 [image]
'''신체'''
183cm, 75kg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 소속 '''
''' 선수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92~1995 / 유스)
CA 보카 주니어스 (1995~1996 / 유스)
'''CA 보카 주니어스 (1996~2002)'''
FC 바르셀로나 (2002~2005)
→ '''비야레알 CF (2003~2005 / 임대)
비야레알 CF (2005~2007)'''
CA 보카 주니어스 (2007 / 임대)
CA 보카 주니어스 (2008~2014)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014)
'''국가대표'''
51경기 17골 (아르헨티나 / 1997~2008)
1. 소개
2. 상세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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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나는 항상 베론이 최고가 될 것이라고 말해왔으나, 가스파르트를 만나서 바르셀로나에서 리켈메가 앞으로 최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2. 상세


출신지인 동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 남쪽에 있는 빈민가 지역 출신에 외모가 약간 컨츄리틱 한 외모를 가져서 농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딴에는 또래이면서 동안인 파블로 아이마르와 비교돼서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풍문도 있다.[1] 실제로 아이마르는 일찍이 유럽에 진출했지만, 리켈메는 약간 늦게 진출하여 일찍 돌아온 케이스. 아이마르는 발렌시아 CF, 레알 사라고사, SL 벤피카를 거쳤고, 리켈메는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FC 바르셀로나비야레알 CF를 거쳐 다시 CA 보카 주니어스로 리턴한 케이스이다.[2]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리켈메는 아르헨티나의 명문팀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드러낸 리켈메는 등번호 10번을 달고 보카 주니어스를 2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2000년, 200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달성하였다. 특히 2000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의 승리를 이끈다.
이후 특급 유망주로 각광을 받으며 바르셀로나로 이적을 했지만, 측면 윙포워드로 기용이 되어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같이 쓰리톱으로 뛰었다. 이 시절은 리켈메나 FC 바르셀로나에게나 시련의 시절로 나쁜 팀 성적의 바르셀로나 속의 리켈메는 실패한 유망주 취급을 받았었다. 호나우지뉴가 영입되자 비야레알 CF로 임대를 떠나게 되고 거기서 본격적인 축구 실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리켈메는 비야레알 CF에서 2004-05 시즌 15골을 득점하여 리그 3위로 이끌며 2005-06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냈다. 2005-0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SL 벤피카, LOSC 릴을 상대로 2승 4무를 기록하며 조 1위를 이끌며, 16강에 진출했고, 16강에서 레인저스 FC에게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승리를 거두었고, 8강에서 인터 밀란을 상대로도 그렇게 승리하며 4강까지 이끌었다.[3]
아스날 FC와의 4강전에서 1차전에서 0-1로 패해, 2차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했지만, 리켈메는 페널티 킥 실축을 해버리며,[4] 합산 스코어 0-1로 아쉽게 탈락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는 리켈메의 폼이 급격히 떨어졌고,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은 리켈메를 팔아버리며 팀을 리빌딩 하게 된다.[5][6]
리켈메는 CA 보카 주니어스로 복귀했고, 200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3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MVP까지 차지하며 화려하게 복귀를 알렸다.[7]
이후 2014년에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로 이적한 뒤 한국 시간으로 2015년 1월 26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2. 국가대표


1997년 FIFA 세계 청소년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고 그해 11월 16일, 다니엘 파사렐라 당시 감독이 리켈메를 성인 국가대표팀으로 발탁시켜 콜롬비아와의 1998 프랑스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 출장하면서 데뷔하였다. 이후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고, 2003년 4월 30일 리비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넣었으며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출전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플레이메이커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미하엘 발락이 뛰던 독일에 의해 아쉽게도 8강에서 아르헨티나가 탈락해 더 이상 뛰지는 못했다.[8] 하지만 4도움으로 대회 도움왕 차지하며 클래스를 입증했다.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도 출전해 5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치며 팀을 결승까지 끌어올렸다. 리켈메가 중심이 된 아르헨티나는 피파 랭킹 1위에 온갖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우승후보 1순위였고 예상대로 결승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그러나 정작 결승에서 주전 대부분이 빠진 브라질에게 3-0으로 참패하며 준우승에 그친다.[9] 당시 대표팀 주장인 로베르토 아얄라의 자책골로 안그래도 분위기도 안좋았는데, 리켈메 본인은 어이없게도 밥장군에게 털렸다.[10] 안습.
2007년 칠레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에 프리킥으로 2골을 꽂아넣으며 팀의 2-0 승리를 견인하기도 한 리켈메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리오넬 메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와 함께 와일드카드로 출전하여 아르헨티나 주장을 맡아 아르헨티나의 올림픽 축구 2연패에 공헌했다.
그러나, 디에고 마라도나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리켈메의 역할을 축소시켰고, 그의 경기력을 대놓고 질타하는 발언을 쏟아냈는데 이를 계기로 마라도나와 리켈메 간에 불화가 생겨나면서 리켈메는 2009년 3월, 마라도나가 있는 한 대표팀 복귀는 없을 것이라는 발표와 함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명단에도 제외되었다.
2011년 8월, 알레한드로 사베야가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리켈메의 국가대표팀 복귀를 설득하여 브라질과의 2연전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선발했으나 부상으로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순간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컨디션 좋은날엔 아무도 공을 뺏을 엄두조차 내지못했던 압도적인 볼키핑 능력과 개인기, 데이비드 베컴만큼은 아니지만 유럽 최고급의 크로스와 환상적인 프리킥 등의 시즌 15골도 기록한적이 있는 데드볼리스트로서의 능력, 마라도나 이후 최고로 평가받는 온더볼 창의성,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후이 코스타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까지 평가받는 찔러주는 킬패스 능력까지...플레이메이커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대부분의 능력을 사기적인 퀄리티로 지니고 있었다. 비야 레알의 리즈시절을 이끌었던 주역이었으며 당시 챔피언스리그에서 인테르, 레알 마드리드를 비야 레알[11], 보카 주니어스[12]를 데리고 털어버린 경기를 보면 컨디션이 되는 날의 이 선수는 유럽 대륙간 레벨에서도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은 분명하다.
신체능력이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이는 속도에서만 국한된 이야기로, 사실 이마저도 작정하고 뛰는 경우는 그렇게 느리지 않다. 다만 본인이 빨리 뛰는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활동량도 적은데다 템포 자체를 느리게 플레이 하다보니 완전히 거북이 이미지로 인식이 박혀버린 것이다. 대신 183cm의 준척과 기본적인 떡대에서도 옅보이듯이 이를 보완하고도 남을 만큼 역대급의 탈압박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당시 비야레알 경기를 살펴보면 리켈메가 상대팀 수비 둘 정도를 등진 상태에서 어깨싸움만으로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말 그대로 '''탑클래스'''로 손을 잘 사용했다. 몸싸움에 들어갔을 때 딱 반칙이 불리지 않을 정도로 손으로 밀어내고 유니폼 살짝살짝 당기는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 특유의 발기술과 어깨빨, 거기에 손까지 교묘하게 사용하니 말 그대로 버틸수가 없는 수준.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리켈메가 뛰는 팀은 그에게 플레이 스타일 및 볼 소유권 대부분을 위임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를 기용하려면 압박으로 대변되는 현대 축구의 흐름에 역행해 팀을 그 한명에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리켈메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시에는 팀 전체가 죽어버리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수비력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를 보조해줄 수비형 미드필더나 풀백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런 단점들은 압박 위주의 경기를 선보이는 현대의 축구 감독들 입장에서는 온더볼 상황에서 거의 리오넬 메시급의 실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면 아예 써먹을 생각 자체를 하기 힘들고, 그 정도가 되더라도 사용가능한 전술이 극히 제한적이라 결과적으로 강팀간 대결에서는 성적 내기가 힘들어진다.
왜 비야레알보다 더 높은 수준의 클럽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현대 축구에서 고전적 플레이메이커들이 다 그렇다. 상위권 팀이라면 3개 대회 이상에서 총력을 기울이는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맞춤형 팀에 플레이메이커 본인이 없으면 팀이 죽어버리니 무작정 쉬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 경기 굴리다 보면 컨디션이 떨어지든 부상이 생기든 경고누적으로 빠지든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팀 자체가 느려지면 결국 역습에 취약해지고 점유율을 내세워 천천히 승부를 보는 축구를 할 수밖에 없는데, 약팀에게는 저승사자 같지만 강팀 상대로는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털리는 게 이런 방식이다. 실제로 비슷한 유망주들 대부분이 리켈메만큼도 성공하지 못하고 묻혀버린 점을 보면 고전적 플메들이 현대 축구에서 설 자리는 없으며, 리켈메는 정말 극단적으로 사기적인 능력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13][14] 여러모로 ''''현대 축구의 반역자''''라는 별명이 그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별명이기도 하다.
2020년 현재도 리켈메와 같은 메디아푼타는 현대 축구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그나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는 리오넬 메시 정도다. 그러나 메시 역시 실제 임무는 메디아푼타가 아니라 공격수이므로 현존하는 메디아푼타 대부분은 공격수로 역할을 전환했다고 보면 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CA 보카 주니어스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98 A, 2000 A, 2008 A, 2011 A[15]
    • 코파 아르헨티나: 2011-12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00, 2001, 2007
    • 인터컨티넨탈컵: 2000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008

5.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도움왕: 2006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실버볼: 2007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MVP: 2001, 2007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16]: 2004-05
  • 툴롱 토너먼트 MVP: 1998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01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9, 2000, 2001, 2008, 2011
  •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2000, 2001, 2008, 2011


6. 여담


  • 실제 경기를 보면 느릿느릿한 스피드와 개인기, 거기에 동반한 치열한 몸싸움을 통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스루패스 각을 재며 볼을 키핑하는 모습이 인상깊은데, 마치 땅을 일구는(…) 듯한 모습이라는 비유가 많이 보여서 농부, 농켈메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리오넬 메시가 등장하기 이전에 기술적으로 아르헨티나의 10번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는 리켈메였다보니 남미지단이라는 별명은 이것 때문에 붙은 것이다.
  • 남미지네딘 지단으로 불린 별명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지단의 마지막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경기에서 지단과 레알 마드리드 CF를 신나게 털어버린 전적이 있다.[17] 그리고 경기 후 지단에게 유니폼을 받기도 하였다.
  • 메시의 국대 은퇴 파동에 대해 메시를 지지했다. 메시의 기여도를 생각할 때 그가 국대 감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피파 온라인 3에서는 후 로만 리켈메(...)로 나왔다.[18]
  • 2019년 12월 보카 주니어스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곧 회장 선거에 도전한다고 한다.
  • 디에고 마라도나와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런건 아니고 마라도나가 손수 자기의 등번호를 넘겨줬고 리켈메가 바르셀로나로 이적 해 푸대접 받자 마라도나는 바르셀로나를 세계 최악의 클럽 이라고 말 하면서 리켈메의 뒤를 받쳐줬다. 하지만 마라도나가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팀 리빌딩을 시도 했을 때 리켈메의 역할과 포지션을 바꾸려 들자 리켈메는 대차게 욕하며 국가대표를 은퇴해 버렸다. 그러자 상대도 너 따위 없어도 우린 잘 할수 있다며 메시에게 10번의 번호와 역할을 부여, 그리고 결과는 처음엔 좀 괜찮은 듯 했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미운정 고운정은 있었는지 마라도나가 세상을 떠난 후 인스타그램에 애도의 글을 남겼다.
[1] 아이마르는 CA 리버 플레이트의 10번이었고 리켈메는 CA 보카 주니어스의 10번이어서 라이벌 의식이 있을만했으나 실제로는 절친한 사이이다.[2] 아이마르는 2000년대 초반 발렌시아에서의 대활약으로 제2의 멘디에타라 불리며 호나우지뉴, 제바스티안 다이슬러와 함께 세계 최고의 유망주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오히려 리켈메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유망주 시절 유럽에서는 아이마르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들의 전성기 나이에는 리켈메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아르헨티나 내에서 에이스 자리는 리켈메가 받게되었다.[3] 당시 8강전의 인터 밀란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리켈메 커리어상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장면. 인터 밀란 선수들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 놀았으며 이 경기는 축구팬들에 의해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마지막 11대 1의 경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4] 리켈메가 시도한 PK를 아스날의 옌스 레만이 막아내는 장면은 리켈메와 레만의 교차편집을 통해 긴장감을 극도로 높혔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5]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리켈메의 컨디션이 급속도로 하락한 것이 당시 비야레알이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이에 구단 측에서는 리켈메의 컨디션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시즌 도중 리켈메를 고국인 아르헨티나로 휴가를 보내주는''' 결단까지 내렸다. 하지만 복귀 이후에도 리켈메의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고, 급기야 주전에서 제외된 것으로 인해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마누엘 펠레그리니와 불화가 생겨 시즌 종료 후 인터 밀란 등 여러 강팀으로의 이적설이 돌았다.[6] 리켈메를 전력 외로 뺀 이후 비야레알은 로베르 피레스, 산티 카솔라, 마티아스 페르난데스 등으로 메웠다.[7]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8] 여담으로 이 때 아르헨티나와 독일은 승부차기까지 돌입했는데, 공교롭게도 월드컵 직전 챔피언스 리그에서 PK 맞대결을 펼쳤던 옌스 레만을 다시 적으로 만났다...만 후반전에 체력 관리를 위해 크루즈와 교체된 리켈메 본인은 승부차기에 나서지 않았고 팀은 레만의 선방쇼로 인해 2-4 패배를 맞았다.[9] 이 대회를 계기로 둥가의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알려졌다.[10] 세비야에서의 폭발적인 득점력이 죽어버리고, 아스날에서 삽질을 해서 그렇지 당시엔 좋은 선수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엘클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라리가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로마에서 너무 어마어마한 삽질을 저지른 후 이미지가 대폭 하락.[11] 2005-06 챔피언스 리그 8강. 특히 홈경기였던 2차전에서 리켈메가 보여준 모습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재림##.[12] 2000 도요타컵. 하이라이트 영상.[13] 비야레알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리켈메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는 팀'''이라고 할 수 있다. 리켈메가 어찌됐건 10번 자리에서는 세계 최고 레벨이었는데 잘해봐야 유로파나 가고 정말 운이 따라야 챔스를 기대할 수 있는 비야레알 정도 되는 팀에서 어찌됐건 조건이 까다롭지만 일단 맞춰 주면 지네딘 지단, 리오넬 메시같은 포스를 보여주는 리켈메는 놓칠 수 없는 선수였다. 거기에 더해서 때마침 나이가 딱 전성기 모드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전술 맞춰만 주면 축신모드가 되었던 것이다.[14] 실제로 리켈메와 같은 선수가 아직 천재성이 검증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강인이 있다. 온더볼 상황에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고 개인기와 창의성, 킥력, 패스. 그에 반대되는 수비력 부족과 스피드 부재 등 여러 면에서 리켈메 스타일에 가장 근접한 선수인데, U-20에서 큰 성과를 올리는 등 자기 스타일에 맞춰주면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걸 증명했음에도 발렌시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15] A: 아페르투라[16] 돈 발론 어워드[17] 이래 봬도 CA 보카 주니어스시절 레알 마드리드 털기, 비야레알 CF 시절 인터 밀란 털기 등 한 팀 찍어서 탈탈 털기의 고수다...역시 농부.[18] 물론 지금은 현역 은퇴로 선수 자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