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로즈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이름'''
마거릿 로즈
(Margaret Rose)
'''출생'''
1930년 8월 21일
스코틀랜드 앵거스 글래미스 성
'''사망'''
2002년 2월 9일 (71세)
잉글랜드 런던 에드워드 7세 병원
'''배우자'''
제1대 스노든 백작 안토니 암스트롱존스 (1960년 결혼 / 1978년 이혼)
'''자녀'''
데이비드, 사라
'''아버지'''
조지 6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형제'''
엘리자베스 2세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자녀
5. 창작물


1. 개요


영국의 공주. 영국 국왕 조지 6세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차녀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이다.
퍼스트 네임인 마거릿의 뜻은 ‘진주’이며[1] 미들네임인 로즈는 알다시피 ‘장미’란 뜻이다. 마거릿 공주라는 칭호가 보편적이지만 전남편 스노든 백작 안토니 암스트롱-존스와 이혼하기 전에는 스노든 백작부인으로도 불렸다.[2]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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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월 21일,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차녀로 태어났다. 요크 공작 부부는 딸의 이름을 ‘앤 마거릿’으로 짓고 싶어했으나,[3] 앤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던 조지 5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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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은 언니 엘리자베스 2세와 마찬가지로 요크 공녀로써 비교적 평범하게 지냈다. 하지만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의 퇴위로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거릿 공주도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공주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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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언니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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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아버지 조지 6세의 즉위 후 촬영한 가족사진.
조지 6세는 예쁘고 활달하며 애교많은 막내딸 마거릿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언니인 엘리자베스보다 더 예쁨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로도 조지 6세가 마거릿을 너무 오냐오냐해 왕실 직원들은 공주가 응석받이로 자랄까 걱정했다고. 조지 6세는 생전에 "릴리벳은[4] 나의 자랑이요, 마거릿은 나의 기쁨이다" 라고 말한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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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의 마거릿 공주. 가족들과의 티타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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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비교적 어머니의 비중이 더 큰 언니와는 다르게, 마거릿은 아버지 조지 6세의 여자버전이라 봐도 될 정도로 붕어빵이였으며 굉장한 미녀였다. 때문에 영국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고 칭송받았으며, 이름처럼 장미진주같은 외모를 가졌다고도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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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9번째 생일을 맞이한 마거릿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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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1번째 생일을 맞이한 마거릿 공주. 사진 속 드레스는 크리스챤 디올에서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선물로 특별제작한 드레스다. 금으로 수놓아진 벨라인 드레스가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원숄더형태로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마거릿 공주의 아이코닉한 드레스로 평가된다.
이후 조지 6세의 시종무관이던 피터 타운센드 영국 공군 대령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피터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마거릿의 재정을 책임지는 감사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더욱 가까워졌고, 1953년 청혼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어느 정도였나면,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두 사람의 결혼 발표 예정을 보도할 정도였다.[5] 그가 16세 연상의 이혼남이라는 이유로 왕실과 교회(성공회)의 반대에 부딪혀 결혼하지 못했다. 대중은 마거릿에게 동정적인 편이었고, 실제로 여론조사 결과도 마거릿을 지지했었다.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아예 벨기에 무관으로 피터를 보내버리기도 했다.[6]
이혼과 재혼 경력을 가진 앤서니 이든영국 총리가 되자 상황은 급변하여 마거릿과 피터의 결혼이 성사되는 듯했지만, 결국 결혼을 포기했다. 1955년 당시 경향신문은 "나는 의무를 택했다"는 제목 아래에 세기의 로맨스가 끝을 맺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앤서니 이든 총리는 마거릿의 왕족 신분을 유지한 채 계승 서열을 박탈하고 결혼을 할 수 있게하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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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가 벨기에에서 다른 여자와 재혼하자[7] 마거릿은 왕실 사진사였던 안토니 암스트롱-존스와 1960년에 결혼하게 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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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결혼식날 웨딩드레스를 입고있는 마거릿 공주.[9]
이 결혼식은 최초로 TV 방영된 왕실 결혼식이었으며, 결혼 후 안토니는 "스노든 백작(Earl of Snowdon)"이라는 작위를 수여 받게 되었고,[10][11]마거릿은 "스노든 백작부인(Countess of Snowdon)"이 되었다. 1961년 아들 데이비드를, 1964년 딸 사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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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신혼 초의 마거릿 공주. 남편 스노든 경이 직접 촬영하였으며,[12]공식적인 저녁 외출을 앞두고 미리 완성된 머리모양을 한 채 목욕을 하고 있다. 참고로 사진에서 쓰고 있는 티아라는 2년 전 결혼식에서 썼던 티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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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이자 장남인 제2대 스노든 백작(당시 린리 자작)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와 함께
그러나 마거릿이 17세 연하의 정원사 로디 루엘린과 만나게 되면서, 결혼 생활은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76년 카리브의 무스티크 섬에서 마거릿과 로디 루엘린이 노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어 보도되었다. 이를 두고 다이애나 스펜서보다 앞선 공격적 파파라치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보도 이후 마거릿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결혼 18년만인 1978년에 이혼하고 만다.[13] 이 이혼은 헨리 8세 이후 왕실에선 처음이다.[14]
이외에도 이혼 전후로 숱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면서 문제의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배우 피터 오툴, 데이비드 니븐, 피터 셀러스 등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심지어 갱단 두목 존 빈든과의 염문 의혹이 폭로되기도 했고[15], 캐리 피셔가 자신의 아버지 에디 피셔와 연인이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3. 사망


15살부터 담배를 피웠던터라 건강이 좋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언니 엘리자베스 2세보다 먼저 2002년 2월 9일[16] 우리 나이 73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크게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17] 마거릿의 장례식을 공식 석상의 마지막으로 하고, 쇠약해지더니 4달 동안 앓던 감기가 악화되어 같은 해 3월 30일 오후 3시 15분 딸의 뒤를 따라갔다. 안타깝게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재위 50주년이 되는 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연달아 떠나보냈다.
마거릿은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내 조지 6세 기념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매장을 해온 왕실에서 처음 있는 일로, 어쩌면 그녀의 반항적인 일생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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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승리의 날 기념식.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마거릿 로즈

4. 자녀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1남
제2대 스노든 백작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David Armstrong-Jones, 2nd Earl of Snowdon)
1961년 11월 3일(62세)
[18]
슬하 1남 1녀
1녀
레이디 사라 샤토[19]
(Lady Sarah Chatto)
1964년 5월 1일(60세)
다니엘 샤토
슬하 2남

5. 창작물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묘사된 그녀의 화려한 사생활로 대중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더 크라운에선 시즌1~2까지 배우 바네사 커비가 배역을 맡았고 시즌 3~4는 헬레나 본햄 카터가 배역을 맡았다.[20]
2015년 영국에서 제작한 영화 로열 나이트 아웃(A Royal Night Out)에서는 10대 시절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45년 5월 유럽 전승기념일 당시 두 공주는 허락을 받아서 궁궐 밖으로 외출을 하였는데 이 때 마거릿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한 병사와 어울리다가 나이트 클럽, 술집 등에 가보게 되고 이를 엘리자베스가 뒤쫒아 찾는 모험을 다룬 코미디 영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을 각색한 내용으로, 실제로 두 공주는 전승기념일 때 길거리로 외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엄한(?) 일들은 없었고 보호자들과 함께 통금 시간에 무사히 귀가했다고.

[1] 당연히 영어 단어의 뜻은 아니며,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진주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단어 Marguerite, 라틴어 단어 Margarita, 그리스어 단어 Margarites에서 나온 이름이다. 라틴어 단어인 ‘Margarita’는 마거릿 공주의 유일한 손녀딸 ‘마가리타 엘리자베스 로즈 알라나 암스트롱-존스’(장남 2대 스노든 백작 데이비드 장녀)의 퍼스트 네임이기도 하다. 마가리타 암스트롱-존스 백작영애의 이름을 보면 할머니이모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느낌이 강하다.[2] 다만 마거릿 공주 본인은 스노든 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정말 싫어했다고 한다. 마거릿 공주는 자존심이 높고 충동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되는데, 마거릿 입장에선 일개 귀족신분인 백작부인 칭호보단 공주 칭호가 더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3] 당시 요크 공작이였던 조지 6세의 작위를 따서 받을 ‘요크의 앤 공녀(princess Anne of york)’ 라는 작위의 어감이 예뻐서 그랬다고.[4] 엘리자베스 2세의 애칭.[5]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고.[6] 피터 타운센드는 1978년, 전쟁 관련 서적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 수집차 부산을 방문한 바 있다. 당시에도 마거릿 공주의 옛 연인으로 보도되었는데, 그 만큼 한국에서도 관심이 컸었음을 방증한다.[7] 마거릿과 닮았다고 한다.[8] 그러나 결혼 직전, 안토니 암스트롱-존스에게 숨겨진 사생아 딸이 있으며, 딸의 생모가 친자확인을 요구해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결과는 친자로 판명났다. 그런데도 마거릿이 왜 결혼을 감행했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이 많다.[9]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서거한 뒤에 올린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신부 입장을 할때 형부인 필립 마운트배튼과 함께 입장했다.[10] 보통 스노든 경(Lord Snowdon)이라고 칭해졌다.[11] 계승 가능한 귀족작위를 수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마거릿은 선왕 조지 6세차녀이자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하나뿐인 동생인 공주였기 때문에, 아무 작위 없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모양이 별로 좋지 않았던것 같다. 훗날 조카 앤 공주도 평민 마크 필립스와 결혼할때 사람들은 마크가 백작위를 받을 것으라고 생각했으나, 이들은 작위와 호칭을 거절했다. 두 사람의 자녀도 아이들을 평범하게 키우고 싶다는 부부의 의향에 따라 작위를 받지 않았지만,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며 왕족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12] 왼쪽 부분을 보면 사진을 찍고있는 스노든 경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고 있다.[13] 스노든 백작은 마거릿 공주와 이혼한 후에도 작위와 호칭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곧 재혼했으나 또 이혼한다. 이후에도 왕실의 결혼식과 아기.가족 사진 등을 찍으며 왕실 사진사로서 계속 인연을 이어왔고, 전처 마거릿이 2002년에 사망한 후에도 무려 15년을 더 살다가 2017년 1월 세상을 떠났다.[14] 이를 시작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자녀 3남 1녀 중 2남 1녀는 이혼했다. 어찌보면 이혼에 대해 관대해진 계기를 제공한 셈.[15] 이에 대해서 영국 왕실은 "공주가 저질 인간과는 관계가 없었을 것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반박했다.[16] 여담으로 이날은 언니가 즉위한 지, 즉 아버지 조지 6세가 사망한 지 50주기가 되는 날에서 겨우 사흘이 지난 날이었다.[17] 당시 나이가 100세를 넘었다.[18] 결혼 27년만인 2020년 2월 18일부로 별거에 들어갔다. 이혼할 예정.[19] 아버지와 판박이인 오빠 데이비드와는 달리 조금은 어머니의 외모가 보인다. 특히 눈매를 어느정도 닮았다. 장남인 새뮤얼도 외할머니와 어머니랑 붕어빵인 외모를 물려받았다. [20] 재밌는것은 헬레나는 조지 6세의 이야기인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즉, 엄마와 막내딸을 연기하게되는 배우개그가 성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