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1]
'''이름'''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거리트 보우스라이언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출생'''
1900년 8월 4일
영국 히친 또는 런던
'''사망'''
2002년 3월 30일 (101세)[2]
버크셔 윈저 로열 로지
'''장례식'''
2002년 4월 9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신장'''
157cm
'''배우자'''
조지 6세 (1923년 결혼 / 1952년 사망)
'''자녀'''
엘리자베스 2세, 마거릿
'''아버지'''
제14대 스트래스모킹혼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어머니'''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
'''형제'''
바이올렛, 메리, 패트릭, 존, 알렉산더, 퍼거스, 로즈, 마이클, 데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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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에 결혼해 51세에 남편과 사별한 왕비는...
이후 50년을 더 살아서 101세가 된다.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결혼
3.2. 자녀
4. 왕비
4.1. 한 해에 세 왕
4.2. 제2차 세계대전
5. 왕대비
5.1. 퀸메이커
5.2. 이혼녀에 대한 반감
6. 사망
7. 여담


1. 개요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 생몰년: 1900년 8월 4일 ~ 2002년 3월 30일 (101세 264일)[3]
  • 재위기간
  • 대관식: 1937년 5월 12일
  • 장례식: 2002년 4월 9일
조지 6세의 아내이자 엘리자베스 2세마거릿 공주의 어머니[4]
일반적으로 이름보다는 '퀸 마더(Queen Mother)', 즉 왕대비로 잘 알려져 있다. 남편인 조지 6세의 서거 후 선왕의 왕비인 그녀에게 올려질 칭호는 Queen Dowager였으나 본인은 이 칭호가 너무 격식에 얽매여 있다면서 보다 친숙한 명칭인 Queen Mother를 스스로 선택했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최후의 왕실 인물로 영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보여준, 폭격 속에서도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하며 강하게 독려한 모습으로 영국인의 귀감이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마거릿 공주캐나다로 피신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윈스턴 처칠의 조언에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폐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폐하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5]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하지만 그녀가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영국이 제국을 칭할 수 있게 한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후였던 점도 한몫을 거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기준, 역대 영국 왕족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인물.[6] 연도상으로만 따져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무려 '''3세기'''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2.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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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3. 생애


1900년 8월 4일 제14대 스트래스모어 킹호른 백작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1855.3.14~1944.11.7)과 스트래스모어 킹호른 백작부인 '''세실리아 니나 캐번디시밴틱'''(1862.9.11~1938.6.23)사이의 10남매 중 아홉째이자 넷째 딸로 태어났다.[7]

3.1. 결혼


어엿한 귀족 가문의 영애로 성장한 엘리자베스는 1921년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 앨버트(훗날의 조지 6세)에게 첫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런데 여느 왕자들의 청혼과는 달리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왕실의 일원이 되면 자유롭게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지 6세가 "엘리자베스 이외의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도대체 어떤 처자이길래 버티[8]가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나'라며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관심을 보였고, 조지 5세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으며 그녀를 만난 메리 왕비는 "버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라며 적극 지지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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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클로드, 어머니 세실리아, 엘리자베스, 남편 조지 6세, 시어머니 메리, 시아버지 조지 5세
왕실에서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그녀도 요크 공작의 세 번째 청혼을 승낙해 1923년 4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 후 부부는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군중들을 향해 발코니 키스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영국 왕실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해 엘리자베스 2세필립 공, 찰스 왕세자다이애나 비, 윌리엄 왕세손캐서린 미들턴 등 주요 왕실 인물들의 로열웨딩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벤트가 되었다. 또 엘리자베스는 결혼식에서 입장하는 도중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오빠 퍼거스를 추모하며 무명 용사의 무덤에 부케를 올려놓았는데, 이후 로열 웨딩이 있을 때마다 신부의 부케를 무명 용사의 무덤 위에 올려놓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사실 서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이라 하여 왕족은 같은 왕족 출신 인사와 결혼하여야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본인 및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는 등의 불이익을 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귀천상혼이 엄격하지 않아서 엘리자베스도 왕족인 조지 6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 당장 시어머니인 메리 왕비 본인도 왕실 후손이기는 했지만(어머니가 왕의 손녀 프린세스 메리, 아버지는 독일계 왕실 후손) 왕족은 아니었음에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한 대모 빅토리아 여왕의 주선으로 조지 5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

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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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마거릿 로즈 공주
엘리자베스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는 1926년에 낳은, '릴리벳'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엘리자베스 공주였고 둘째는 1930년에 낳은 마거릿 로즈 공주였다. 조지 5세는 손녀딸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베스를 귀여워해 '큰 아들 놈이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면 버티릴리벳이 왕이 될텐데'라고 말하곤 했는데 뒷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9]
요크 공작과 두 딸을 데리고 화목하게 생활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국인의 호감을 샀으며, 당시의 왕세자가 미혼인 점을 감안해 언젠가 남편에게 왕위가 넘어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을 예상하면서 여러 공식석상에 활발하게 드나들어 시민들이 ''''미소짓는 공작부인(Smiling Duchess)''''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산업 현장을 시찰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남편 요크 공작이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과도 상통한다.

4. 왕비



4.1. 한 해에 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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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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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시절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결혼 이후 그녀의 호칭은 '요크 공작부인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가 되었다. 남편이 왕위 계승 서열 2위였기 때문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녀도 보통의 왕자비들처럼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1936년 1월 20일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에드워드 8세는 즉위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하자 그는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을 왕비로 세우려 했다. 이 소식에 왕실은 물론이고, 내각과 의회까지 발칵 뒤집혔고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결혼 당시 파격적인 일이라고 평가받았던 요크 공작과 엘리자베스의 결혼과 비교하면 영국 국민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결혼할 당시 요크 공작은 왕세자가 아닌 일개 왕자(그것도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갖게 되면 왕위와는 완전히 멀어질)였기에 배우자 선택에 대한 국민들의 기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또한 엘리자베스가 비록 타국의 통치가문은 아니었지만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왕가의 후예인 고위 귀족이었고 무엇보다 영국인이었기에 국민들도 둘의 결혼 소식에 깜짝 놀라기는 했을지언정 받아들이고 축복해주었다.
반면 에드워드 8세는 현직 왕이므로 배우자인 왕비는 당연히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국민들의 기준이 훨씬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자리에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 그것도 영국인이 경멸해 마지않던 미국인인 심프슨 부인[10]을 앉히겠다는 것에 국민들이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왕세자 시절부터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에드워드 8세였으니 심프슨 부인이 여자친구 정도의 지위로 머물렀더라면 구설수에 오르내릴지언정 적당히 눈 감아 줬겠지만 왕비로 앉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내각 수상인 스탠리 볼드윈이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랑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심프슨 부인과 연을 끊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최후통첩을 보냈고, 그러자 에드워드 8세는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다"며 '''왕위를 포기해버렸다.'''
요크 공작은 형의 왕위 포기 소식을 접한 날, 어머니 메리 왕대비에게 매달려 엉엉 울 정도로 즉위하기를 주저했다. 엘리자베스 역시 이 소식에 놀랐으나, 남편 곁에서 '분명히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응원했다. 대관식에 사용된 엘리자베스의 왕관은 백금으로 골조를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했는데, 왕관의 정면 가운데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이누르였다.
한편 영국의 왕비가 되려던 심프슨 부인은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때문에 엘리자베스에게 왕비 자리를 뺏기게 되자 이를 매우 분하게 여겨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역시 이혼녀 주제에 왕비 자리를 넘본 심프슨 부인을 싫어했다. 에드워드 8세는 양위 후에 윈저 공의 직함을 받으면서 '전하'라는 경칭을 받았지만 그의 배우자인 심프슨 부인은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을 받지 못했는데, 이것도 엘리자베스가 심프슨 부인을 견제해 극렬히 반대한 결과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남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어 엘리자베스는 심프슨 부인을 ''''그 여자(that woman)''''라고만 불렀고 심프슨 부인도 엘리자베스를 ''''쿠키(cookie)[11]''''라고 불렀다.

4.2.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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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 루스벨트, 조지 6세, 사라 루스벨트[12], 엘리자베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에드워드 8세가 무책임하게 떠넘긴 왕위를 이어받은 조지 6세가 고군분투하고 모후인 메리 왕대비와 아내인 엘리자베스가 곁에서 내조하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군이 유럽 전역을 침공하는 가운데 윈스턴 처칠 수상의 영도 아래 있던 영국이 끝까지 히틀러에게 굴복하지 않자 독일군은 영국을 향해 대공습을 시작했다. 이 때 런던이 집중 포화를 맞았고, 각료들은 왕실이 교외로 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녀와 조지 6세는 단호하게 거부, 버킹엄 궁전에 체재하는 목숨을 건 모범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겁을 먹기는 커녕 공습 와중에 궁전의 담장이 무너지자 '''"이제야 런던 시내가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등 강인한 의지를 보이며 영국인을 독려해 히틀러로 하여금 그녀를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지 6세와 함께 공습으로 파괴된 런던 시내를 시찰하며 시민들을 위문해 정신적 지주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후 주변국의 동참을 촉구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해외를 국빈방문하는데 이때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캐나다[13]를 방문하기도 했다.

5. 왕대비



5.1. 퀸메이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 8월 14일부로 인도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조지 6세는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이래로 영국 국왕이 겸임하던 인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녀 역시 인도 황후의 직함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영제국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쇠락하는 가운데 전후 재건 등 각종 현안들을 돌보느라 과로에 시달리고 심신이 쇠약해진 조지 6세는 국정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시가를 줄담배로 피웠는데 이로 인해 폐암에 걸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다가 1952년 2월 6일 5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스는 사랑타령 때문에 왕위를 동생에게 무작정 떠넘긴 시숙과 그 원인을 제공한 심프슨 부인을 더욱 더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에드워드 8세의 장례식 날 심프슨 부인이 슬퍼하는 것을 봤을 때는 남편이 막 죽었을 무렵의 자신을 떠올린 건지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왕대비가 되어 시어머니인 메리 대왕대비와 함께 왕실의 어른으로서 맏딸 엘리자베스 2세가 다음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는데 메리 대왕대비마저 1년 뒤인 1953년 3월 24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최고 어른으로 남아 왕실의 버팀목이 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경칭은 'Her Majesty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인데, 딸이 국왕으로서의 존호를 미들네임인 알렉산드라와 메이가 아닌 엘리자베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대비의 경칭을 따라 'Queen Elizabeth'로 정하면 딸의 존호와 너무나 유사해져서 대중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5.2. 이혼녀에 대한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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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한 왕대비와 여왕
왕대비, 다이애나, 윌리엄
남편 사후 50년간 왕대비로 지내면서 왕실이 과거 대영제국 시절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엘리자베스는 그 일환으로 쳇바퀴 돌듯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복잡다단한 각종 의전과 의례, 엄격한 왕실 생활을 고령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97년 손자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다음날 당시 왕실 휴양지에서 함께 머무르던 증손자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면 큰 충격을 받을 테니 알리지 말고 그날 아침도 계획된 일정대로 진행할 것을 의전관에게 명령할 정도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이애나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으로부터 '너무나 냉정하다'고 비난받았다. 여기엔 평소에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다이애나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의 험악했던 관계 탓에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후의 다이애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 다이애나를 이용한 가해자인 자기 손자를 책망하고 미워해야지 피해자인 다이애나에게 이런 짓을 하니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비판점이다.[14]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딸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왕족이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명령할 것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왕실을 향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찰스와 윌리엄, 해리 부자가 반발한데다[15] 토니 블레어 총리까지 여론을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한다는 요청을 하자 엘리자베스 2세는 결정을 번복해 장례식에 참석함으로써 모후의 뜻을 어쩔 수 없이 거슬렀다. 이 당시의 상황은 영화 <더 퀸>에 잘 드러나 있다.[16]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대비는 '''이혼녀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찰스 왕세자는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카밀라와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이혼녀에 대한 극심한 반감은 영국 국민들에게 큰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으로 남았다. 전 세계의 이혼녀들은 엘리자베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는 건 당연한 것이고 찰스 왕세자는 할머니와 달리 이혼녀를 상당히 선호하는 인물이었고, 이혼이나 여러 결혼 과정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 왕대비였던 보우스 라이언이 이혼녀를 워낙 싫어하던 탓에 찰스 왕세자는 왕대비의 살아생전 카밀라와의 결혼을 꿈도 꿀 수 없었다.[17] 이런 쪽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혼녀에 대한 지나친 반감으로 왕실 전체가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이는 왕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영국 국민들에게 또 다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위에 서술했듯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가 여왕을 설득했고, 여왕이 왕대비를 설득하여 결국 왕실 전체가 참석하기는 했지만. 만약 왕실이 다이애나의 죽음에 무관심했다면 왕실이 폐지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6.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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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결단력 있는 의지, 강인한 정신, 그리고 대영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마지막 인물로 영국인들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많은 인기를 누렸고 그녀의 100번째 생일은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둘째 딸이자 여왕의 동생인 마거릿 공주가 2002년 2월 9일 71세를 일기로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충격을 받아 쇠약해지더니 넉 달 동안 앓던 감기가 악화되어 같은해 3월 30일 오후 3시 15분 엘리자베스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관은 영국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홀에 사흘간 안치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2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영국인의 애도 속에 장례는 4월 9일 국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해는 남편 조지 6세와 딸 마가렛이 잠든 윈저 성 내부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향년 '''101세'''로 영국 왕실 역사상 최장수 기록을 세웠으나, 2004년 10월 29일 여왕의 숙모인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18]가 102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깨졌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왕비의 딸인 엘리자베스 2세 역시 2020년 기준 97세로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재위기간이 긴 군주이며 현재까지 여왕으로 정정하게 살아있다. 여왕의 장수 비결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듯하다. 영국 황실 관계자 말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2세가 2016년 90세가 됐을 당시에 왕대비가 90세를 맞이했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강인한 모습이였다고 한다.

7. 여담



  • 킹스 스피치에선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엘리자베스 왕비 역할을 연기했다. 다만 실제 인물과 배우의 풍채 차이가 좀 크다는 의견이 있었다. 실제 엘리자베스 왕비는 전반적으로 살집이 있고 수더분한 인상에 가까운데, 헬레나 본햄 카터는 호리호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이기 때문이다.

[1] 아래의 사진에서 착용하고 있는 티아라는 영국의 여성 부호 마가렛 그레빌의 것으로, 그녀가 죽은 후 당시 왕비였던 퀸 마더에게 헌사한 것이다. 그레빌 여사가 이 티아라를 최초로 구매한 후 부쉐론 사에서 현재의 모습과 유사하게 재디자인했고, 퀸 마더가 한 번 더 보석 브랜드인 카르티에에게 재디자인을 의뢰해 현재에 이르렀다. 마가렛 그레빌은 영국 왕실과 교분이 깊은 인사로 에드워드 7세와 교제하던 앨리스 케펠에게 밀회 자리로 자신의 저택을 주선하고, 그 손녀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모친의 대모이기도 했다. 현재 이 티아라와 다수의 보석은 카밀라가 대외적으로 착용하고 있다.[2] 세는나이 103세.[3] 동시대의 인물이자 일본 역사상의 황후들 중 가장 장수한 고준 황후보다 오래 살았다. 고준 황후는 2000년에 사망했는데 그때 나이는 97세였고, 엘리자베스 왕대비보다 3살 어렸다. 2000년 당시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정정하셨다.[4]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마 이런 어머니 덕분에 장수하는 것 같다.[5] The children won't go without me. I won't leave the King. And the King will never leave.[6] 가장 장수한 인물은 조지 5세의 며느리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이다. 1901년 12월 25일부터 2004년 10월 29일까지 만 102세로 사망하였다.[7] 밑으로는 남동생이 한명 있다.[8] 조지 6세의 본명인 앨버트의 애칭.[9]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10] 첫 번째 결혼은 남편이 알코올 중독자에다 별거 생활이 잦았기 때문에 이혼한 것이지만, 두 번째 결혼은 남자가 이미 유부남에 딸까지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그와 밀애를 벌이다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차버리면서 결혼했는데 몇 년만에 에드워드 8세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였다.[11]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통통한데다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 이유였다.[12]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어머니이다.[13] 이때 엘리자베스 왕비의 방문을 기념해 만든 공원이 밴쿠버에 있는 퀸 엘리자베스 파크(Queen Elizabeth Park). 언덕 위에 올라가면 밴쿠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으로 유명하다.[14] 이게 얼마나 내로남불이냐면 왕대비의 둘째 딸 마거릿 로즈 공주와 손녀 프린세스 로열 앤 역시 이혼녀다.[15] 자신들만이라도 참석하겠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16] 만약 엘리자베스 2세가 모후의 뜻대로 왕실에 다이애나 장례식 불참 명령을 내렸다면, '''왕실은 끝장이었다.''' 당시 공화제 전환 지지율은 50%가 넘었고, 찰스 왕세자의 불륜과 그에 힘들어하는 다이애나를 엘리자베스 2세가 방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국과 영연방 왕국 국민들은 찰스 왕세자와 영국 왕실을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고 있었다.[17] 영국 왕실은 서열관계가 피 말리도록 엄격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은 윗 사람의 성격, 관례를 그대로 따라가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18] 조지 5세의 3남 헨리 왕자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