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지은
1. 개요
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 '거의 망하게 된 걸 구해준 은혜'라는 뜻이다. 한국사에서 재조지은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조선 파병을 주로 일컫는다.
2.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조선
만력제가 조선에 원군을 보낸 것은 사실이고, 조선으로서는 원래의 사대성향에 부채감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피해가 심각했었기 때문에 조선이 대륙에 할 수 있는 건 딱히 많지 않았다. 단지 모문룡 일파의 횡포를 눈감아주거나 사르후 전투에 1만 3천 명의 원군을 보내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최대였다.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명 자체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안전했다. 물론 조선의 후대 임금들은 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와중에도 대보단을 지어 망한 명의 황제들 제사를 지내주고, 특히 만력제의 휘(諱)를 피해 공신 이름이나 왕자들 이름을 정하는 등 예우를 다했다. 조선의 마지막 정공신 지정인 영조 임금때의 분무 공신을 양무 공신으로 바꾼 것이 좋은 예다. 만력제의 휘에 떨칠 분(奮)자가 들어간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가면서까지 명과의 의리를 지키려는 미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성리학 탈레반이란 욕을 먹는 송시열조차 '시세를 헤아리지 않다가 패배하면 선왕(인조)이 수치를 참고 종사(조선)를 연장시킨 보람이 없을 것이다'라며 기다리라고 주문한 바 있고, 명나라 잔존 세력 토벌도 했다.[1] 사대부 정치가들은 경세가로서 사직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청국에는 사대까지는 아니어도 상국으로서 조공하고 사신도 맞이했다.
북벌론으로 유명한 효종 대에 김집,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들이 북벌을 제창하고 대동법 확대도 전비 확보를 이유로 막아서는 등 청에 반기를 드는 듯했다. 그러나 도중에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새 나가면서 청국에서 힐문 사신이 왔다. 그러자 산당들이 죄다 쫓겨나고 영의정 이경석과 남인 당수 예판 조경 등이 스스로 백마산성에 들어가는 등 청나라를 달래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후 권세를 잡은 김육 등은 친청 노선을 걷는다. 러시아의 만주, 연해주 공략 때 청나라에 원군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구한말 무렵엔 청나라의 힘을 빌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을 축출하는 등, 국내 정치에 청나라의 개입을 용인했다. 아울러 청나라식 개혁을 단행해 정부 기구의 이름들도 `~아문'같이 청나라식으로 바꾸고 묄렌도르프 등 개혁 고문을 직수입하기도 한다. 청나라가 화폐 개혁을 조언하자 그대로 하다가 경제 위기를 겪고 나라가 더 곤핍에 빠지거나, 영약삼단같은 자주 외교권 포기(조선은 청을 통해서만 대외 교류를 한다는 내용) 등을 용인하는 등 청에 대해 사대한다. 결국 명나라 신종에 대한 의리나 명분론은 거의 희미해진다.
3. 대중적 인식과 반박
대중적으로는 사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나 병자호란 전쟁 과정에서 조선이 보여준 추태 등으로 인해, '사대부 병신들이 같잖은 사대 하겠다고 망해가던 명나라나 빨아대고 청나라는 무시하더니 또 전쟁 내서 나라 말아먹었다'는 부정적 인식을 대변하는 용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대에도 반미 진영이나 강경 민족주의 세력에서 숭미의식을 비꼬려고 가끔 재조지은을 언급하기도 한다.[2]
그러나 재조지은에 관한 당대의 논의는 의리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임은 물론이고, 현대인의 기준에서 봐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나 그들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대한 비전문가나 대중의 인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은 조선의 지배층이 공리공론에나 치중하는 쓰레기였다는 것과, 조선이 전쟁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참패를 당했다, 재조지은이 실체 없는 사대주의 사상이라는 것인데 모두 부당하다.
임진왜란은 실제로도 명이 만력 3대정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준의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어 전폭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쟁이었고, 만력제가 자국에서는 '고려 천자'라는 비웃음을 받아 가면서까지 조선을 적극 지원해서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 낸 전쟁이기 때문에,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국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자기 나라의 힘을 짜내서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건져 준 동맹국에 대해서 인간적인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이건 명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마찬가지다. 비단 감정적인 문제를 떠나 실리적으로도 이런 도움을 받아놓고 아예 나몰라라 해버리면 국가 신뢰도가 팍 떨어져버리니 외교 무대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3]
4. 기타
- 최충헌의 자기 묘지명에 기록된 공신호엔 재조가 들어가 있다. 최충헌이 고려를 재조했다는 뜻인데... 맞기는 맞다. 나쁜 방향으로 재조해놓았으니.
5. 같이보기
[1] 차라리 청나라가 주도했다면 덜 잔혹했겠다고 여길 정도로 철저히 학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는 건 아닌게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해 있던 시절의 패악질이 매우 대단해 심지어 정묘호란때는 청군의 목이랍시고 청군에게 변발당한 조선인들을 죽여 그 수급을 명나라 조정에 공로로 바쳤는데 그 숫자가 1만이었다. 조선은 모문룡이 명 실세들과 줄이 대져 있고 인조반정의 명분이 약해 모문룡에게 약점까지 잡혀 모문룡이 조선에 대해서 명나라에 나쁘게 얘기하면 좋지 않았기에 참고 있었을 뿐 패악질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2] 한홍구 교수는 저서인 대한민국史에서 한국전쟁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기려 동상을 세웠던 일을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에 빗대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한홍구, 한겨레출판, 대한민국史(2003년) 1, p201~211 '맥아더가 은인이라고?'[3] 그래서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복하기 전에는 광해군 때 강홍립과 군대를 보내서 도와 줬고, 이때 깃발을 바꿔단 것도 명이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청에 저항할 수 없게 됐다는 점과 명나라가 모문룡의 횡포를 방치했다는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마저도 명의 멸망에 협조했을지언정 이후 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명조 유민들의 망명을 받아줌으로써 최소한의 신의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