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라 보스

 


<colbgcolor=#000034>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
인도 국민 회의의 55대 당수
인도 국민군의 최고 사령관
'''
'''본명'''
সুভাষ চন্দ্র বসু[1]
सुभाष चन्द्र बोस[2]
Subhas Chandra Bose
수바스 찬드라 보스[3]
'''국적'''
인도 제국 [image]자유 인도 임시정부 [image]
'''출생'''
1897년 1월 23일
[image] 영국인도 제국 쿠탁
'''사망'''
1945년 8월 18일 (48세)
[image] 일본령 대만 타이호쿠[4]
'''학력'''
캘커타 대학교
피츠윌리엄 대학교
'''직업'''
정치인, 독립운동가, 군인
'''정당'''
인도 국민 회의
'''경력'''
인도 국민 회의 의장 (1938~1939)
자유 인도 임시정부 수반 (1943~1945)
'''배우자'''
에밀리 솅클(Emilie Schenkl)[5]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음모론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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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인도독립운동가이다. 인도 국민 회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경칭이자 통칭은 '네타지(지도자라는 뜻)'.
한국에서는 인도를 영국에게서 독립시키고자 영국의 적이었던 추축국, 특히 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일본의 괴뢰국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국가 주석 겸 인도 국민군 최고 사령관을 지낸 걸로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찬드라 보스는 1897년 1월 23일, 대영제국인도 제국 쿠탁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 비폭력 투쟁에 의문을 제기하고 폭력투쟁을 주장하였다. 물론 견해 차는 있었지만 인도의 독립을 염원하는 것은 같았기에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 등의 다른 독립운동가와 친하게 지내 영국의 감시대상에 올랐다. 이 와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평소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위해서 영국의 감시망을 뚫고 소련(러시아)을 통해 독일에 들어갔다. 이때는 아직 독소 불가침조약이 깨지지 않은 상황인지라 보스는 소련과 독일이 연합해 북쪽에서 인도를 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미 바르바로사 작전을 구상 중인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과의 연합을 묵살하고 그를 대영방송에 동원한다. 한편 영국 역시 이 방송에 대항해 BBC를 중심으로 다른 방송국을 만들었는데 조지 오웰이 잠시 참여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역 등의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인도군 병사들을 설득해 독일 내부에 인도인 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3,500여명의 부대원이 모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의 점령 지역이 축소되면서 자꾸만 인도와 거리가 광속으로 멀어지는 통에 해당 부대는 독일과 점령지 내부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패전을 맞고 전원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일부는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래서 해당 부대에 있던 인도인 중에서 전투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사람은 에르빈 롬멜 휘하에서 북아프리카 전투에 참가한 수백 명 수준에 불과하였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일본군이 인도를 향해 접근하자, 찬드라 보스는 도조 히데키아돌프 히틀러의 동의를 얻어 U보트를 타고 일본 측에 가서 이들과 함께 인도를 해방시키려 했다. 물론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인도인 부대를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훗날 오스트리아의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image]
(1943년 11월 일본의 영향 하에 있던 아시아의 국정 최고 책임자들을 초청하여 열린 '대동아회의'의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찬드라 보스이다. 왼쪽에서 첫번째는 버마국 수상 바 마우, 만주국 수상 장징후이, 왕징웨이 정권 주석 왕징웨이, 일본 제국 총리 도조 히데키, 타이 왕국 왕자 완 와이타야콘,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호세 P. 라우렐.[6])

私ハ日本ノ新自由亜細亜創建ノ使命ガ十二分ニ完遂セラレンコトヲ所ル次第デアリマス

나는 일본의 신자유아세아 창건에 대한 사명이 십이분 완수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찬드라 보스, 대동아회의

이후 보스는 싱가포르에서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세우고, 주로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전향한 인도인들을 모아 4만 5천 명의 인도 국민군을 조직했다. 다만 전후 기록에 의하면 위장 전향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적어도 3명 이상의 인도군 장교가 영국군 진지로 탈출했다. 사실 인도 국민군은 2차 대전 전부터 일본 제국에 의해서 구상된 바 있어 실제로도 보스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군 조직을 갖추었다. 하지만 내부 사정으로 탄압받게 되고 수장이 수마트라섬으로 유배를 가는 지경에 이르자 일본 측에서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유명한 반영 운동가 찬드라 보스가 재규합한 것. 그리고 일본군과 함께 공동 전선을 폈는데... '''하필 그것이 임팔 작전이라''' 작은 땅이나마 자국민으로 인도를 해방시키려던 그의 꿈은 좌절되고 작전에 실패한 인도 국민군들도 철수 과정에서 와해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타이완에 머물던 보스는 1945년 독일에 이어 일본까지 항복하게 되자 연합군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고자 타이완 쑹산공항을 출발했으나 비행기가 추락하여 숨지게 된다. 
그가 조직한 인도 국민군은 어쨌든 연합국에 맞서서 추축국 편에 붙었으므로 전후 영국에 의해 포로로 생포되었으며, 반역, 고문, 살인죄로 재판장에 서게된다.(인도 국민군 재판) 그러나 당사자인 대영제국이 머잖아 인도에서 손을 떼려고 했기에 재판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보스의 동지인 자와할랄 네루가 INA 변호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을 변호했기 때문에 거의 불기소무죄 처분을 받는다.

3. 평가


인도 학교에 흔히 걸려 있는 초상 중 하나.

None of those who have written on Bose's Indian national army has investigated whether, while they were trained by the Japanese army, they were permitted to share in the "comfort" provided by thousands of kidnapped Korean young women held as sex slaves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 at its camps. This might have provided them with some insight into the nature of Japanese, as opposed to British, colonial rule, as well what might be in store for their sisters and daughters.

Gerhard Weinberg, A World at Arms

일본군에게 훈련받던 보스의 인도 국민군이 일본군에게 납치당해 병영에 성노예로 끌려왔던 수천명의 어린 한국인 위안부들의 "위안"도 제공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이들에 대해서 다룬 연구자들 그 누구도 다루지 않았다. 이[7]

는 아마 인도 국민군들이 일본의 식민통치와 영국의 식민통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들 자신의 누이와 딸들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될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제러드 와인버그, 2차세계대전사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추앙받는 독립 영웅이다. 당장 캘커타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딴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공항(Netaji Subhas Chandra Bose International Airport)이고 안에 보스의 대형 초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콜카타 시내에도 곳곳에 보스의 초상과 조각상이 산재하여 쉽게 볼 수 있다. 인도 학교에도 이 사람의 초상이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함께 꼭 걸려 있다.
이 사람이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아 당시 많은 인도인들이 일본을 형제의 나라마냥 옹호하고 지지서명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도쿄 전범 재판 당시 무죄 판결로 일관한 라다비노드 팔 판사. 지팡구에서도 꽤나 간지나게 등장하고, 2007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보스의 후손과 만나기도 했을 정도.
그래서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손을 잡았다는 것 하나로 찬드라 보스를 인도의 매국노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인도는 연합국 소속인 영국 식민지였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영국과 대립하고 있었고 이들을 몰아낼 만한 힘이 있는 일본에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도 이를 이용하여 대동아공영권이 정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하였지만 같은 친일파라도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거나 회유에 넘어가 핍박받는 동포들을 배반한 게 아니었기에 인도에서는 독립 영웅으로 숭상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치 독일과 손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에서 국부로 숭앙받는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 같다.[8] 그래서 종종 임팔 작전이 성공한 후에 일본군인도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다면 어찌되었겠냐는 예상도 있는데, 십중팔구는 '찬드라 보스가 반일로 전향해서 일본군과 싸운다'는 시나리오로 이어지는 편이다. 실제로 자국을 해방자로 여겼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이 행한 각종 만행들을 보면, 충분히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현지인에 대한 약탈이나 학살, 강간을 수도 없이 행해왔다. 심지어는 같은 추축국이나 그 협력국[9]의 사람들을 학살한 전적도 있으므로, 인도인들을 상대로 학살극을 못 벌일 것도 없었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동맹과 영원한 적이란 존재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외교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선택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음모론


갑작스런 폭사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이 몇 가지 있다. 찬드라 보스가 사고를 당한 비행기에는 군자금으로 쓰던 막대한 금괴와 일본인 고문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찬드라 보스는 '''행방불명'''되고 금괴의 행방도 묘연한데, 왠지 그 고문들은 그 뒤에 '''어디서 얻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자금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이야기가 있다. 사실 찬드라 보스가 망명을 결심할 시기는 만주 작전으로 인해 소련과 일본 간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인이 소련에 자발적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굴라크로 가는 것과 동의어가 될 정도로 웃기는 일이 되었고, 전쟁도 패배하기 직전인 마당에 찬드라 보스가 더 이상 일본에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현실성이 높다. 당장 관동군소련군에게서 벗어나려고 현지 일본인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주하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스뿐 아니라 일본 관동군 총참모장으로 발령받은 시데이 츠나마사 중장도 이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어 결국 사망했다. 일본인 고문들이 보스뿐 아니라 관동군 총참모장도 살해한다? 때문에 이건 그냥 음모론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로는 보스는 사실 죽지 않았고 지금 타이완에 있는 유골은 DNA 검사 결과 가짜라는 것이다. 즉 무사히 일본 고문들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갔지만 아직 연합국과의 친교가 필요했던 스탈린이 보스를 시베리아로 보냈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 실제로 소-인 외교 관련 회의때 흐루쇼프가 인도에서 원한다면 48시간 내에 보스를 귀국시키겠다, 내지는 생존확인을 해 주겠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56년 이후에는 사라진다. 인도 정부에서 수차례 이 설을 조사했지만 아직도 명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또 다른 음모론에 따르면, 보스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자와할랄 네루가 손을 써서 보스를 암살(혹은 시베리아에 있는 걸 알고 모른 체)하여 경쟁자를 제거했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운동의 세 거두 중 마하트마 간디는 세속적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구름 위에 있는 사람이니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고, 최대 경쟁자였던 네루와 보스의 대립이 암살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단 이 설 역시 확증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서 은거하다가 1985년에 사망한 힌두교 승려가 사실 이때 탈출한 찬드라 보스라고도 한다. 조작설에 휩싸이긴 했지만 네루의 장례식을 촬영한 영상에 보스와 상당히 비슷한 승려 하나가 참배하는 장면이 찍혀 있다. 조사 위원회는 이 사실을 무시했지만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이 승려 사망 시 정부에서 긴급히 시체를 처분했고, 심지어 유골에 황산을 끼얹어 검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승려의 소지품은 모두 '''압류했다'''고 한다. 이 승려가 살던 곳에서는 지방에서 보스의 탄신일을 결부시켜서 기념한다고 한다. 하지만 보스와 같이 독일로 일본으로 날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움직인 정치가가 종전 이후 갑자기 은거했다는 것도 납득하기는 어렵다.

5. 둘러보기





[1] 벵골어, 외래어표기법 상 '수바스 촌드르 보수'. '바'의 'a' 모음은 역사적인 장모음이지만 벵골어 모음 장단 구별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aː/→/a/의 모음추이를 겪었고, '촌'(Chôn)의 'ô' 모음은 /a/→/ɔ/로의 모음추이를 겪었다.[2] 힌디어, 외래어표기법 상 '수바스 천드르 보스'. '바'의 'a' 모음은 장모음이므로 /aː/가 되고, '천'(Chan)의 'a' 모음은 중설모음화한 단모음이므로 어중에서 /ə/가 됨. 'Chandra'에서 마지막 'a' 모음은 어말 단모음 'a'이므로 힌디어 발음 규칙 상 탈락되지만, 산스크리트어 원음을 존중하여 /ə/ 모음을 넣어 '천드러'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 산스크리트 원음을 존중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인용함. Manjari Ohala, ''Aspects of Hindi Phonology''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3), 138.[3] 외래어표기법 용례집. 보스(O), 보세(X), 보우즈(X), 보우스(X)[4]타이완 타이베이시[5]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6] 조선의 대표가 없다. 조선은 이미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본토의 일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대동아공영권 선전 포스터 등에도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은 없는 등 일본은 외부적으로는 조선을 본토로 취급했다. 여러모로 영국의 아일랜드지배와 비슷한 면이 많은 편.[7] 그랬거나 또는 한국인 위안부의 존재를 목격한 것[8] 이 사람도 소련핀란드침공해왔기에 급한 대로 그냥 나치 독일과 손잡았을 뿐이고, 진짜로 나치의 전쟁 범죄에 협력하는 이들은 국외 추방해버렸다.[9] 필리핀마닐라에서 벌어진 마닐라 대학살 당시에 학살을 벌이던 일본군이 그곳에 있던 스페인 영사관을 점령하고 그 직원들을 학살한 전적도 있다. 당시 스페인은 파시즘 성향의 독재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하고 있었고, 추축국과는 공공연한 밀월 관계로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한동안 단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