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

 


'''펜실베이니아 주 행정위원회 위원장'''
[image]
5대

6대

7대
존 디킨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미플린
'''미국 스웨덴 주재 대사'''
[image]
미국 독립전쟁

초대

2대
미합중국 건국

'''벤저민 프랭클린'''

조나단 러셀
'''미국 프랑스 주재 대사'''
[image]
미국 독립전쟁

초대

2대
미합중국 건국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출생'''
1706년 1월 17일
매사추세츠 식민주 보스턴
'''사망'''
1790년 4월 17일 (84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국적'''
잉글랜드 왕국 [image]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image]
미국 [image]
1. 개요
2. 생애
2.1. 인쇄공 프랭클린
2.2. 발명가 프랭클린
2.3. 정치인 프랭클린
2.4. 말년
2.5. 기타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image]
100달러 지폐 속 초상화
[clearfix]

1. 개요


'''Any society that would give up a little liberty to gain a little security will deserve neither and lose both.'''

약간의 안전을 얻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자유도 안전도 가질 자격이 없으며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모토[1]

미국정치인.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 인쇄공으로 시작해 외교관, 과학자, 발명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 정치 철학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스파이 등 온갖 직업들을 다 겸해, "'''보잘 것 없는 집안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미국인(Rise From Humble Beginnings)'''"의 원조격 되는 사람이다.
비록 대통령으로 지내진 못했지만, 미국에서 지금도 대통령급 이상으로 인지도 있는 인물이며 미국 달러화 중 100달러에 도안으로 채택된 인물이기도 하다. 10달러의 알렉산더 해밀턴(미국 초대 재무장관)과 함께 달러화 도안 인물 중 단 둘뿐인 대통령이 아닌 위인. 그래서인지 미국인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대통령 출신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2. 생애



2.1. 인쇄공 프랭클린


1706년 1월 보스턴에서 태어나 가난한 양초장이인 청교도 조슈아 프랭클린(Josiah Franklin)의 아들로 17자녀 중 15남(!!)으로 태어났다. 글을 일찍 배웠지만 돈이 없어 학교는 2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형 제임스 프랭클린의 인쇄공 도제로 5년을 지낸다. 이때 시에 빠져 시쓰기에 열심이었던 벤저민에게 아버지가 했던 '시인되면 평생 거지로 산다'라는 말을 듣고 시 공부를 접는다.
1721년 형이 주간지 <뉴잉글랜드 커런트>를 창간하자 다음해에 16살의 프랭클린은 신문에 기고문으로 14편의 사회평론을 작성하다가, 형 제임스가 쓴 글로 출간금지를 당하자 형은 벤저민에게 바지사장 격으로 신문 발행인을 맡겼지만 서로 트러블이 끊이지 않으며 곧 일을 때려치웠는데, 사이가 아주 안좋아진 형 제임스가 모든 동네 인쇄소에서 벤저민을 욕하고 일을 못하게 해서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된 이상 필라델피아로 가서 한동안을 거지꼴로 지낸다.
이후 정착해 인쇄업을 하던 프랭클린은 영국 런던에서 인쇄사업을 벌려서 실패하고 미국에 돌아와 1728년 인쇄소를 차리면서 그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사업이 커지면서 펜실베이니아 지폐 인쇄권까지 얻게 되고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창간한다. 프랭클린은 이 신문에 세계 최초로 만화를 삽입하고 도서관에 비치했다고. 이후에도 여러 인쇄사업이나 사회사업을 벌리고 청교도적인 근면함과 저축으로 급기야는 부동산 투자를 할 정도로 큰 돈을 벌게된다.
서점 주인이자 인쇄소 주인이자 출판사 사장으로서 미국의 초창기 문학을 이끌었던 미국 초기의 유명 문인. 그의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1732년부터 1757년까지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펴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달력, 일기예보, 명언, 시, 심지어는 수학문제 등 잡다하게 많은 내용을 실은 연보였다. 특히 당시 해당 시장을 쥐고 있던 경쟁자 타이탄 리즈의 사망 소식을 허구로 꾸며낸 뒤 여론을 선동해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경쟁자를 제거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프랭클린이 직접 쓴 속담이나 명언들도 많아서 당시 식민지 미국의 언어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 발명가 프랭클린


그는 한 번도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2] 연구욕과 탐구심이 왕성해 미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1737년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기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사회에 전기를 알리는 장본인이 되었다.
1748년에는 이미 성숙기에 들어선 출판사업을 아예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이나 과학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초점 렌즈, 소방차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목재를 연료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때문에 운송비용과 목재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염려해서 기존의 벽난로보다 열효율이 좋고 안전한 펜실베이니아 화로를 발명했다. 그 이후 펜실베이니아 화로의 문제점을 개선한 개방형 난로를 발명했는데, 개방형 난로는 지금도 프랭클린 난로라는 이름으로 땔감이 아닌 가스 등을 사용해 쓰이고 있다.
이렇게 여유롭게 연구를 이어오다 1752년에는 비 오는 벌판에서 을 날려가며 실험한 끝에 그 유명한 피뢰침을 발명해냈다. 연줄 끝에 금속열쇠를 묶고 그 열쇠를 관찰하여 번개가 전기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3]
방귀 냄새가 지독하다고 방귀 냄새를 맡기 좋게 만드는 실험까지 했다! 아무래도 자기 홀로만 연구하는 건 어렵다고 여겨서인지 상금까지 걸고 방귀냄새 좋게 만들기 공모전까지 열었으며 물론 상금의 주인공은 없었다.
화재 사고에 대해 관심도 많아서 필라델피아 소방회사라는 미국 최초의 소방서를 만들었으며, 피뢰침도 낙뢰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요도카테터 발명자이기도 하며 물리학, 기상학, 해양학, 경제학 등에도 어느 정도의 발자취를 남겼으며 음악에도 능해 하프, 바이올린, 기타를 다룰 줄 알았으며 글라스하모니카를 발명했고, 직접 작곡한 현악 4중주 곡도 있을 정도. 체스를 무척 좋아했다. 1775년에는 미국 우체국의 초대 우정공사 총재를 지냈으며, 그가 만든 시스템은 아직도 사용 중이다.
참고로 단순히 발명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대인적인 면모가 돋보이는데 그는 펜실베이니아 화로나 피뢰침 같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했다. 물론 뒤끝쩌는 영국인들은 왕의 반역자라 칭하면서 그가 발명한 끝이 뾰족한 표준 피뢰침 대신 끝이 둥근 피뢰침을 사용했지만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지 영국에서도 결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받아주고 메달까지 주는 등 사실상 업적을 인정해 주었다.

2.3. 정치인 프랭클린


1757년 정치에 입문해 영국에 파견되어 과세권을 땄고, 1764년에는 또 영국에 파견되어 인지조례를 철폐하며 일약 유명인사로 등극한다. 여기서 했던 말이 그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도 없다.'''" 물론 프랭클린이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이미 반 영국 기조가 돌던 당시에 흔히 돌던 슬로건이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2차 대륙회의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나가서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한다. 이후 프랑스로 외교를 하러가 참전을 요청했다. 라파예트 등의 많은 프랑스 귀족이 미국을 지원하러 대서양을 건너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루이 16세가 참전을 결의했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사치스럽게 행동해서 일행에게는 욕을 얻어먹었지만, 이게 프랑스 사람들의 호감을 사 제대로 성공했다는 말이 있다. 다만 문제는 당시 프랑스 측 외교관이 그 유명한 탈레랑. 그러다보니 프랭클린이 사실은 이 능수능란한 외교관 손아귀에서 휘둘렸을 뿐이고 실제로는 그닥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전쟁 중 영국에 붙잡힌 미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사략선들,즉 해적을 교환하는 기행도 저질렀고.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같이 독립 전쟁 때 첩보 활동을 한 미국 최초의 스파이다. 난수 암호표와 해독 체계 역시 이 시기에 워싱턴과 같이 고안했다고.
독립 후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또한 그의 연설과 간행물, 책은 북미 식민지인들이 미국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해주었으며 미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75년에 설립한 미국우정공사의 창립에 기여했으며, 초대 우정장관을 지냈다.
'전열함 다섯 척보다 2인승 기구 5천 개 운용비가 쌀 거다'라는 말과 함께 기록상으로 공수부대의 개념을 최초로 언급한 인물로 꼽힌다. 물론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여러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실험이 이어진 후에야 가능해졌다.
미국이 독립을 이룬 1785년에서 1788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재임한다.

2.4. 말년


중년부터 비만통풍으로 고생하던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흉막염으로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공인으로서, 특히 거의 평생을 살아온 도시 필라델피아에 워낙 기여를 한 면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굉장히 장수하면서 식민지에서 공화국까지 미국 초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존경을 받아 장례식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 전체 인구가 3만이 안 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파를 끌어 모았던 것이다.
사후에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미국적인 정신을 담아서 뭇 미국인들의 귀감이 되어 현재까지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로 남아있는 미국 수필문학의 고전이다.

2.5. 기타


  • 원래 벤자민 프랭클린은 오른손잡이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인 20대 후반에, 프랭클린은 3년여 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왼손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왜 후천적 왼손잡이를 그토록 연습했는지는 불명. 글씨 연습을 2년 정도 해서 왼손글씨를 만들고, 1년여 간 식사연습도 해서 기어이 양손잡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원래라면 왼손잡이가 오른손을 배우는데, 프랭클린은 거꾸로 오른손잡이가 후천적으로 왼손잡이를 배워서 써먹은 양손잡이의 드문 케이스이다.

프랭클린은 이후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도 왼손으로 서명했고, 프랭클린의 각종 논문신문 기고문 등은 왼손으로 집필한 것과 오른손으로 집필한 것이 모두 남아 있다. 그런데 또 프랭클린이 쓴 일기는 오른손으로 쓴 것이다. 아무래도 공적인 부분은 왼손, 사적인 부분은 오른손을 쓰기로 한 거 같은데 매우 특이한 케이스.
  • 13가지 덕목과 규율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하나같이 좋은 말들이지만 본인도 안 지킨 모양이다. 항목에는 "술은 즐기되 취하지 마라"라고 써 놓고, 본인도 생전에 주정으로 비판을 많이 받은 주당이었으며, 또 다른 곳에는 '맥주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라든가, ‘술은 사람을 해하는 몹쓸 것이니 몽땅 마셔 없애야 한다' 등의 센스있는 음주를 찬양하는 글귀도 많이 남겼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쓴 자서전에는 도수가 높은 술인 럼이 북미 원주민(인디언)들한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을 적었다.
>"럼주는 인디언들을 전멸시켜, 백인 이주민들이 살아갈 땅을 주려고 한 신의 선물이었다. 동부 해안가에 살았던 인디언들도 럼주 때문에 모두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술이 인디언들을 망쳤다. 그러나 인디언들에게 술을 빼앗으면 그들은 죽으려 할 것이다.[4]"
>
>바이러스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202~207쪽
사실 북미 원주민들은 선천적으로 간에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적고 술을 아예 몰랐던 부족들도 많아서 유럽인들보다 알콜 중독에 취약했다. 이런 원주민들이 유럽인들로부터 모피를 팔고 나서 그 대가로[5] 받은 도수가 높은 럼을 마시게 되자, 얼마 못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알콜 중독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알콜 중독자가 된 원주민들은 손이 자주 떨리거나 뇌에 이상이 생기고 눈이 침침해지다가 갑자기 심장 마비 등의 증세로 죽어갔다.
한편 맥주를 찬양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Beer is proof that god loves us and wants us to be happy.
> 맥주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것의 증명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들 중 대중매체에서 많이 등장하는 말이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https://sites.suffolk.edu/franklin/2016/03/24/beer-is-proof-that-god-loves-us-and-wants-us-to-be-happy/
  • 90년대 중순 중앙일보에서 미국에서 프랭클린이나 여러 유명 위인, 정치인 자손으로 나오던 인물을 다룬 바 있는데 프랭클린의 증손은 현재 흑인이다. 프랭클린의 후손들이 흑인과 결혼하면서 그 후손이 흑인이라고. 증손으로 나온 흑인은 그걸 자부한다고 나오기도 했다.
  • 이휘소의 미국 이름인 벤저민은 이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땄다.
  • "잠과 휴식은 무덤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고 말을 남겼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선 잠 덜자고 공부, 일하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그런데 벤자민 프랭클린은 재능, 환경이 맞아서 성공했는데 정작 사회에선.. 문서 참조.
  • 교회보다 등대학교부터 짓는게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말을 하였고 영화 신은 없다에서도 이 말과 프랭클린 그림이 나온 바 있다. 다만 벤자민 프랭클린 본인은 기독교인이다. 평소에는 꽤 종교적이었다고. 사실 울지마 톤즈로 유명한 고 이태석 신부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고[6] 유대인의 탈무드에서도 종교 시설보다 먼저 학교를 우선하는걸 보면 이상한건 아니다.
  • 상당한 호색한이었다. 그의 초상화를 그린 당대의 유명 화가 찰스 워슨 필은 호텔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자신의 손녀뻘 되는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혀둔 것을 목격했다고 했으며 , 다른 사람들도 그가 호텔에서 하녀 등 어떤 매끈한 몸과 얽혀 있던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자서전에 '결혼 전에 성욕을 주체할 수 없어 매춘부를 찾아간 일이 몇 번 있으나, 돈도 아깝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듯하여 그만두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을 정도이다. 사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말들은 대부분은 후대에 윤색된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협상이 반쯤 진행된 후까지 남아있는 멀쩡한 성벽이나 처녀막은 없다"라고.
  • 또한 그는 어떤 여자의 단점을 알고 싶다면 그녀와 친한 다른 여자들에게 그녀의 장점을 칭찬하면 된다는 발언을 남겼다.
  • 한 일화에 따르면 그는 가로등을 고안해 낸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밤길을 잘 다니기 위해서 집 밖에 등을 매달아 사람들이 이 불을 보고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머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등을 자기 집 앞에 내놓기 시작한 게 가로등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 밖에도 소년 시절에 물건을 팔면서 가격을 깎고자 하는 손님에게 가격을 계속 올리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미국 위인전 작가인 퍼슨 윔스(1759~1825. 본명은 메이슨 로크 윔스.)가 위인전으로 지어낸 얘기이다 이 사람은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이야기도 지어낸 바 있다. 그런데 '시간은 금이라는 말도 있고, 이자가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라는 말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해당 말들을 그가 정말 했는지 불명.
  •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6번 본험 리차드는 그가 프랑스에서 활동할 시절 쓴 이름을 오늘날에는 영어식으로 읽는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에서 활동했을 당시에는 프랑스식인 보놈 리샤르로 읽어야 한다. 여담이지만, 그 이전에도 함명으로 써서, 에식스급과 그 이전 창군기 당시 함명에도 쓰였다.

  • 가짜뉴스의 선구자다. 1722년에는 사일러스 두굿이라는 가상의 중년 여성을 만들어 사람들의 청혼을 이끌어냈고, 1730년에는 가짜 마녀사냥 이야기를 지어내어 실어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로는 타이탄 리즈 사망사건을 지어내 살아있는 사람을 매장시켜버렸다. 1755년에는 영국인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세기 51장을 가짜로 만들어내 성경에 실어 넣었다. 무엇보다도 폴리 베이커라는 5명의 사생아를 낳은 가상의 여성이 사회의 불합리함에 저항하여 끝내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를 실화처럼 써내 영국 신문에 실었고, 이는 훗날 프랑스 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image]
  • 문명 5에서 과학 기술 '전기'를 연구 완료하면 나오는 이미지에 연날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존 애덤스를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에도 등장. 애덤스의 좋은 조언자이긴 하지만 드라마에 묘사되는 전체적인 캐릭터성은 기괴한 노인. 그러나 훌륭한 발명가이자 외교관으로서의 노련한 외교관으로서의 모습도 많이 묘사되며 특히 강직하기만 한 풋내기에게 국제외교의 냉혹함을 알려주는 면모도 보여준다.
[image]
왼쪽의 얼굴이 안 보이는 인물. 오른쪽의 여성은 후손인 엘리시아 웬트워스.
  • 자영의 소나닐의 주인공 엘리시아 웬트워스의 할머니의 오빠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엘리시아의 조상님이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으며 엘리시아가 뉴욕을 여행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사람의 힘이 크다. 엘리시아는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듯.[7] 한때 뇌전공이라 불리던 석학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8] 오래전 제자인 테슬라를 피험자로서 비밀리에 프랭클린 뇌전 실험[9]을 감행해《선더버드》의 힘의 일부를 담은 기계대를 만들어 낸 적도 있지만, 현재는 결별하고 제자인 테슬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생활 중. 테슬라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불 같은 성격인 것 같다.
  • 딜버트에선 프리메이슨 중 하나로 나오며 바닥 청소재를 먹고 현대에서 부활해서 "민주주의? 그거 다 헛소리여 ㅎㅎ 지금쯤 알 만할 때 되지 않았나?"라고 말을 하다 자신이 만든 우체국이 E-mail에 밀려 쓸모가 없어져 가는 것을 보고 심장마비로 다시 숨졌다.
[image]
  • 어쌔신 크리드 3에서도 가장 비중 높은 건국의 아버지들로 등장하며, 자신이 작성하던 연감이 죄다 도둑맞아 되찾아줄 것을 의뢰하며 되찾아줄때마다 자신의 발명품[10] 설계도를 제공해 복제품을 만들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본편에서는 나이많은 누님 취향의 변태로(...) 워싱턴 왕의 폭정에서는 워싱턴에게 세뇌당해 건국의 아버지들을 살해하고 영국군이 벌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보스턴 학살사건을 저지른 인물로 고인드립당한다. 근데 어쌔신 크리드: 로그에서는 템플러셰이 패트릭 코맥의 조력자로도 등장한다. 도대체 이사람이 누구 편인지 헷갈리겠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단지 각 진영에서 온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지...
  •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선 배경설정을 소개하는 '를르슈의 브리타니아 역사강좌' 중 C.C.를 통해 언급되었다. 현실 역사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외교로 갔으나 여기선 루이 16세를 만나기 전에 당시의 브리타니아 공작과 만나 백작 작위를 받고 변절했다. C.C.는 너무나 상냥한 남자였던 탓에 변절한 것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얻지 못함으로서 워싱턴의 반란이 실패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평했다. 즉 나폴레옹과 더불어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건국의 숨은 공로자.
  • 티미의 못말리는 수호천사에서는 티미가 역사 숙제를 하기 위해 소원으로 불러낸 3명의 위인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피뢰침 일화를 반영해 연을 들다가 시도때도 없이 벼락을 맞거나 전구나 TV 같은 전기제품을 신기해한다. 나중에 재등장했을때는 아예 연을 들고 폭풍과 벼락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 화씨 451에서 최초의 방화수로 나온다. 영국의 불온책자를 태웠다고 왜곡돼서 나온다.

[1] 벤저민 프랭클린이 1755년 11월 11일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에서 쓴 '주지사에게 보내는 답신(Reply to the Governor)' 안에 처음으로 "일시적 안전을 얻기 위해 근본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가질 자격이 없다(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라는 문장을 사용한 이래, 1759년과 1775년 등 수 차례에 걸쳐 재인용되면서 그의 좌우명으로 자리잡은 문장이다. 그는 저서 《Poor Richard's Almanack》에서 이를 "Sell not virtue to purchase wealth, nor Liberty to purchase power."로 변형하여 사용하기도 했다.[2] 물론 이 시대에는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쓴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역학과 천문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학주제는 아마추어가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상황이었다.[3] 이게 단순히 이야기로 끝나서 다행인 게 프랭클린은 이 실험을 하다가 벼락을 맞을 뻔 했다. 아들과 함께 실험을 하였는데, 맨발인 아들의 손을 잡고 있어서 감전되지 않았다. 실제로 러시아의 과학자 리히만과 다른 프랑스 과학자는 동일한 실험을 하다가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4] 인디언, 즉 북미 원주민들이 이미 럼 같은 도수가 높은 술에 중독이 되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5] 왜 돈이 아니라 술인 럼을 받았느냐 하면, 원주민들은 화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 그들한테 유럽인들이 돈을 줘봐야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6]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7]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제자인 테슬라에게도 걸린 선더버드의 어떤 저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8] 다른 건국의 아버지로는 에디슨경이 있다.[9] 테슬라가 현재의 뇌전마인이 된 실험.[10] 프랭클린 화로, 정전기 발생장치, 글라스하모니카, 열쇠를 매단 연, 라이덴병 둥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