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
1. 개요
범죄자에 대한 5가지 형벌. 삼황오제 시기 전설상의 법관인 고요가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2. 고대 중국의 형벌
대개 부분적으로 시행했지만 이사처럼 대벽을 제외하고 오형의 모든 형벌을 종합선물세트로 시행한 뒤 요참형으로 죽은 사례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집행자의 의지에 따라 여러가지 형을 복합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주로 역적죄 같은 중형의 경우에 적용되었다. 한 건국 이후 숙청당한 한신, 팽월 등의 삼족이 이런 오형 종합세트 및 채찍형까지 당한 후 참수되었는데 이후에 이들을 숙청한 장본인인 여태후가 집권한 후에 처형시에 오형을 부가하는 형벌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사형 집행 전에 형벌을 더 부가하는 관습은 여전히 남아 사형 집행전에 장형이나 채찍형을 시행하는 경우가 근대까지 공공연히 시행되었다.
중화에서 배제하는 묵형[1] < 인간다운 모습을 박탈하는 의형 < 발 달린 동물에서 배제하는 월형 < 동물의 기본적인 생식 능력을 박탈하는 궁형 < 목숨을 박탈하는 대벽
2.1. 묵형(墨刑)
먹글씨로 죄명을 신체에 새기는 문신형이다. 가장 가벼운 형벌이지만 보통 얼굴 같이 가릴 수 없는 부위에 새기는 일이 많아서 이 형벌을 받으면 24시간 내내 ''''나는 범죄자다!\''''라고 광고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연히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이마를 가리는 등 문신을 가리기 위해 남들과 다른 복장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사시 추적당하기 딱 좋다. 한 문제 연간에 월형과 비형이 폐지되었음에도 묵형은 여전히 남아 노역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에게 시행하기도 했으며 본래 여자에게도 시행을 했는데 원나라때 여자에게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는 몽골의 풍습이 들어와 원의 법전은 물론이고 대명률에도 여자에게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생겼다. 조선 영조 연간에는 아예 남자에 대한 자자형도 폐지하였다. 손빈이 빈형과 함께 묵형을 동시에 받았다.
이 형벌은 다른말로 경형(黥刑)이라고도 불린다. 경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초한쟁패기의 군웅 영포가 있다. 영포는 원래 평민이었는데 소년 시절에 누군가가 그의 관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후에 왕이 될 상이라고 말했으며 이후 법을 위반하여 경형을 받았는데 이 벌을 받은 뒤 영포는 "옛날에 내 얼굴을 보고 누군가가 형벌을 받은 후 왕이 될 관상이라고 했는데 이거구나!"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 말을 주위 사람들은 이뭐병 취급했지만 어쨌든 구강왕이 되긴 했다. 이후 영포는 경형을 받은 전력 때문에 '경포(黥布)'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2.2. 의형(劓刑)
코를 베어내는 절단형이다. 한자 모양도 깔끔하게 코(鼻)+칼(刀). 비형(鼻刑)이라고도 부른다. 코를 벤다고 죽는 일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지만, 용모에 엄청난 손상이 가해지므로 심적 충격이 크다. 원래 코를 베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명예형의 의미도 크다.
이 형벌은 동로마 제국에도 있었는데, 황위계승전에서 패배하거나 역적질을 한 권력가를 실각시킬 때 이런 형벌을 썼다고 한다. 나름대로 이유도 붙였는데 '''타국은 그냥 죽이지만 우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코를 베는 것 정도로 형벌을 줄였답니다.''' 물론 강력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 같이 이런 형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는 재범자의 경우에는 그냥 죽여서 영원히 복귀를 못하도록 했으며, 초범자의 경우에는 좀더 사망확률이 높고 자신의 능력을 복구하기 힘든 눈을 뽑는 형벌로 대체하였다.
인도에서도 이 형벌은 간통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행해졌다. 이 잘려진 코를 복구하기 위해 고안된 이마의 살을 돌려 붙이는 절편술은 최초의 성형수술로 기록된 바 있다.
법치주의자 상앙은 엄격한 법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진의 태자였던 영사도(훗날의 혜문왕) 예외는 아니어서, 영사가 법을 어기자 대신 스승이었던 공자(公子) 영건(태자의 큰아버지로 다시 말해 진의 공족)과 공손가를 잡아 그들의 코를 베고 시종을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 이 이후로 영건은 영원히 은둔했으며 영사는 상앙에 대한 증오를 품었고, 결국 상앙은 이 일로 미움을 사 영사가 군주가 된 후 탄핵을 당했고 거열형에 처해진다.
2.3. 월형(刖刑)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절단형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킬레스건과 그 주변을 통째로 날리는 것으로, 이 형벌을 받으면 제대로 걷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멀쩡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어준다. 손빈병법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손빈이 이 형벌을 받았다고 알려져있는데 실제로는 무릎 슬개골을 뜯어내는 빈형을 받았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잘렸다는 판본도 있고 또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2.4. 궁형(宮刑)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거세형이다. 단, 여자는 유폐형을 시켰는데 평생 감옥에 유폐시키는 방법과 생식기 부분을 망가뜨려 성생활을 못하게 막는 방법이 있었다. 이 외에도 사적인 형벌로 여자의 생식기 부분에 자물쇠를 채우거나(...) 실로 꿰매는 형벌도 있었다고 한다.
월형보다 중형인 이유는 궁형받다가 죽는 확률이 더 높은데다가, 월형은 본인의 신체피해로 끝나지만, 궁형은 자손의 대를 끊어놓는다는 의미가 있고, 사람취급을 못받는 명예형의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형벌을 받는 대상자의 죄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무거운 형벌이다. '''죄인에게 대벽(大辟)과 이 형벌 중 선택권이 있었다.''' 때문에 대벽을 선택하면 아무리 죄질이 나쁘더라도 죽을때 박수갈채를 받으며 죽었고 장례식도 매우 융숭하게 치러줬다. 하지만 궁형을 선택하면 보는 사람들마다 멸시하고 침을 뱉어가면서 조롱했다. 이래서 궁형이 명예형으로서 파급효과가 큰 것이었다. 한마디로 죽을 죄를 지은 주제에 궁형으로 대신 받고 뻔뻔하게 살아있다는 이유로 평생동안 조롱을 당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경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악전고투끝에 흉노에 잡힌 일이 있었는데 다른 문무백관들이 모두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다가 죄를 뒤집어써서 대벽형을 선고받았다. 당시에는 살기 위해 50만전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나는 것과 궁형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형편 상 거금을 낼 수 없던[2] 사마천은 자신이 집필해야 할 사기(史記)를 완결할 때까지 죽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궁형을 택했는데 그 이후로 사마천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굴욕을 당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2.5. 대벽(大辟)
가장 무거운 사형을 말한다. 목을 베는 참수형의 방식으로 죽인 후 시신을 거리에 내다거는 기시, 작두로 허리를 베는 요참형, 사지를 수레로 묶어 분리시키는 거열형 등이 있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데 이거 대신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형을 당하면 그 이후부터는 인간 미만의 취급을 당하게 된다. 고대 중국에는 교수형은 비공식으로 대상자가 지체가 높아 공개처형을 하지 않고 비밀리에 처형하는 특수한 경우에만 행해졌을 뿐 정식 형벌로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가 북위 연간이 되어서야 법전에 규정되기 시작하였다.
3. 당률의 5형
중국 당(唐)의 법전인 《당률(唐律)》에서 체계화된 5가지 형벌집행 방식으로 명(明)나라의 기본법전 《대명률(大明律)》과 청(淸)나라의 기본법전 《대청률례(大淸律例)》로 계속 이어진다. 고려 때 도입되어 조선에도 이어진다. 사형(死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笞刑)으로 구분된다.
3.1. 태형(笞刑)
- 형벌의 강도: 10~50
'대명률'에서 제시하는 이 "가느다란 매"의 규격은 이렇다. 작은 가시나무 가지로 만들며, 반드시 옹이나 눈을 깎아 상부관서에서 내린 교판에 맞추어 길이 3자 5치(약 105cm), 대두의 지름 2푼7리(약 0.8cm), 소두의 지름 1푼 7리로 하여 소두 쪽으로 볼기를 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속형이 가능하였는데, 조선 초기의 경우 태 10~50에 따라 각각 오승포 3~15필(한 등급당 3필씩 증가)을 내면 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대명률'에서는 동전 600문~3관(한 등급당 600문씩 증가)을 내면 면할 수 있었다.
3.2. 장형(杖刑)
- 형벌의 강도: 60~100
본래 북조 연간에는 장형 10번~50번, 채찍형 60~100번 체계로 나갔는데[4] 수 문제가 채찍형의 잔인함을 문제삼이 채찍형을 폐지하고 채찍형은 장형으로 대체하고 장형은 장형때 사용하는 형장보다 가는 형장을 사용하는 태형으로 대체하여 이와같은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이 형벌은 가장 그 폐단이 심했다. 본래대로라면 '대명률'의 규정을 기준으로 형구는 큰 가시나무 가지로 만들며 반드시 옹이나 눈을 깎아 상부관서에서 내린 교판에 맞추어 길이 석자 다섯 치(약 105cm), 대두의 지름 3푼 2리, 소두의 지름 2푼 2리로 하여 소두 쪽으로 볼기를 치도록 되어 있지만, 점차 형이 가혹해지고 교판에 맞지 않는 규격을 사용하는 등의 폐단이 심해져서 정종 2년(1400년) 흠휼전칙을 제정해 형구의 규격과 집행방법을 엄격히 규제했다.
역시 속형이 가능했는데, 조선의 경우 가장 낮은 장 60을 기준으로 오승포 18필을 내면 면할 수 있었고, 70부터 한 등급당 3필씩 증가하여 장 100일 경우에는 오승포 30필을 내면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에서는 가장 낮은 장 60이 3관 600문, 그때부터 한 등급당 600문씩 증가해서 장 100일 때는 무려 6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반 음모와 역적을 빼고는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부인이나 첩이 남편을, 노비가 상전을 고발할 수 없었는데 만약 이를 어기면 '''범인도 벌을 받는 것은 물론 고발한 사람도 장형 100번과 유형에 처해졌다.'''
3.3. 도형(徒刑)
- 형벌의 강도: 1년+60번~3년+100번
하지만 강도면에서는 징역따위는 저리가라 할정도로 세다. 일단 위에 언급했듯이 장형을 먼저 받아서 '''곤장 시작'''하는데다가, 불결한 시설인 감옥에 가둔다음, 날이 밝으면 끌어내서 채석장같은 힘든 일을 하는 곳까지 끌어낸다음에 노예처럼 일하게 된다. 따라서 도형을 받고 1년이상 살아남으면 기적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따라서 현대의 징역형이 도입된 다음에도 금고라는 형량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했는데, 금고의 경우 감옥에 가두는 것은 동일하나 '''노역을 시키지 않으므로 자비로운 형벌'''이라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징역형은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으며 일을 하게 되지만,[5] 인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서양에서도 징역형은 강제노동을 매우 가혹하게 시켰고, 심한 매질을 동원하는 경우도 매우 흔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남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형을 면하려면 중국의 경우 1년+60번은 12관, 그때부터는 한 등씩 3관이 증가하여 3년짜리는 무려 24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3.4. 유형(流刑)
- 형벌의 강도: 2천리(800km)+100번~3천리(1,200km)+100번
강도 설명에서 보면 알겠지만 곤장 뒤 유배를 보내는 것이라 유배를 가는 죄수 입장에서는 장난아니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유배를 가는 길에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 거기다가 유배지까지 거리가 형장에서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리저리 길을 빙빙 돌아 가면서 거리를 늘리는데, 국토를 끝에서 끝까지 가야 3천리를 겨우 맞추는(...) 조선에서는 아예 유배 '''전용 코스'''를 만들어서 거기를 도는 방식으로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직선거리로는 안되니까 빙빙 돌아서 가는 것이다.
게다가 코스의 목적지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유배지. 보통 원주민도 살기 힘들고 기후환경이 안좋은 산간오지나 절해고도같은 곳을 택하며, 국가에서 유형자에 대한 지원을 안하기 때문에 거지꼴로 살기 딱 좋다. 덤으로 '''언제 석방될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강제노역이 없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는데도 유형이 도형보다 형량이 높은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후한시대에는 유배지에 따라 형벌의 강도가 달라졌는데 어지간한 중형은 회계로 유배되는 것이었고 '''일남'''[6] 으로 유배되는 것은 '''준사형(準死刑)'''으로 취급되었다. 교통 사정도 있거니와 치안이나 의료수준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찍고 돌아오는 것만 해도 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3.5. 사형(死刑)
원칙적으로는 아래의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원나라 때 교수형이 폐지되고 사형방식을 능지처참과 참수형으로 규정했다가 명나라때 다시 교수형이 부활했다.
목숨을 박탈하는 만큼 형벌 중 가장 무거운 것이다. 둘 중 그나마 나은 것은 교수형. 참수형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유교적 관념에서 큰 치욕이었던 신체의 훼손이 가해지는 참수형이 더욱 중형이었다. 물론 죽이는 방법이야 능지처참이나 거열형 같이 신체가 토막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것은 원래 법전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았다. 사약을 내려 죽이는 사사(賜死)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는 신체를 온전히 함과 동시에 '''임금이 죽음을 하사하는''' 형식이므로 조선에서 시행한 사형 방식 중에서는 가장 죄인을 예우한 형태가 되었다. 죄인을 벗겨놓고 조리돌려 구경거리로 만들고 시작하고 심하면 집행전에 매질 등 고문까지 병행하기도 하는 참수형, 거열형, 능지처참과는 달리 사사는 대궐이나 죄인의 집 같은 비공개 장소에서 의관을 제대로 갖춘 상태에서 시행하기에 적어도 모욕은 당하지 않는다는 특혜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아무때나 내리는 게 절대 아니다. 조선에선 사자의 원혼이 천지의 조화를 해친다고 하여, 만물의 생장이 멈추는 추분 이후에 사형을 실시하는게 원칙이었는데, 이것을 대추(待秋)라고 하며 이 때문에 형벌을 담당하는 관리를 가리켜 '추관(秋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대역죄나 강상죄 같이 십악대죄(十惡大罪)를 저지른 죄인은 예외. 이 경우엔 즉각 사형을 집행하는데 이를 부대시(不待時)라 하여 참형과 교형에 한해 각각 참부대시, 교부대시라 불렀다.
이걸 면하려면 중국의 경우 무려 42관을 내야 면할 수 있었다.
4. 관련 문서
[1]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것이 오랑캐의 풍습으로 여겨졌다.[2] 당시 돈 50만전은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최소 한화 수천억원에서 1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당시에도 거부(巨富)가 아닌 사람들은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3] 흔히 장독 올라 죽었다고 하는 것이 장형이 집행될 때 죽었다는 뜻이다. 당시 위생관념상 형구를 깨끗하게 관리했을 가능성도 작거니와 상처를 제대로 소독하지 못했던 당시의 의료수준 때문에 패혈증 등으로 죽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왔다. 설령 감염은 어떻게든 피했다 하더라도 장형 자체가 워낙 가혹한 매질이었기 때문에 근육이 녹아 버리면서 횡문근융해증으로 죽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형벌로써 집행된 것 이외에 고문을 하기 위해서도 장을 치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도 많이 죽어나가서 일부러 사건을 묻어버리는 데에 동원되기도 했다.[4] 본래 사마씨의 진(晉)나라 시대까지는 장형과 채찍형을 섞어서 200번까지 집행이 가능했다. 때문에 100번까지로 최고대수를 줄인 북조와는 달리 남조에서는 여전히 200번까지 집행을 했다. 휼형 문제에 있어서는 북조가 남조보다 나았다.[5] 그래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도중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무료해서 견딜 수가 없다'''며 스스로 자원해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6] 오늘날의 베트남중부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