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환

 


서정환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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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91
1993


1986 KBO 리그 도루왕



서정환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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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
팀 창단

서정환(1982)

정진호(1983~198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6번
차정득(1982)

서정환(1983~1989)

백인호(1990~199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2번
김동섭(1994~1997)

서정환(1998~1999)

김성근(2000)
KIA 타이거즈 등번호 89번
결번

서정환(2006~2007)

히라노 켄(2011)


[image]
삼성 라이온즈 감독 취임 당시.
[image]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이름
서정환(徐定煥 / Jung-hwan Seo)
생년월일
1955년 7월 5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구광역시 동구
학력
대구신암초[1] - 경상중 - 경북고 - 건국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 (1978~1981[2])
삼성 라이온즈 (1982)
해태 타이거즈 (1983~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1990~1994)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1996~1997)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8~1999)
해태-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1~2002)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수비코치 (200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4~2005)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5)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 (2005)
KIA 타이거즈 감독 (2006~2007)
1. 소개
2. 선수 시절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3.4. 평가
4. 이후
5. 여담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내야수,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 감독. 현재는 KBO의 경기 감독관.
1998년~1999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을 맡았고, 이는 삼성 라이온즈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2005년 7월~2007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있던 인물. 선수 시절의 포지션은 유격수2루수. 등번호는 삼성과 해태에서 6번을 계속 달았다. 코치로써는 1994시즌까지 33번을 달고 1루에서 주루코치 역할을 하였다.
대구 출신임에도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 특이한 케이스다. 초창기 해태의 구멍 포지션이었던 내야를 맡으며 해태가 강팀으로 도약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감독이 되고 나서 이미지를 왕창 까먹었다. 삼성에서는 당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찍던 이승엽임창용을 앞세우고도 1999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경기가 삼성쪽으로 기울었는데도 역전을 허용에 결국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우승하지 못했으며, KIA에서는 한기주, 신용운 등의 투수들을 혹사시키며 부상을 입게 만들어 KIA의 고질적인 불펜 불안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였다.

2. 선수 시절


1977년에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실업야구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포철에서 뛰었다.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탄생한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창단 멤버로, 개막전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당시 사이클링 히트를 치기도 했던 유격수 오대석에 밀려 주전 확보가 힘들게 되었다.
[image]
이에 트레이드를 자청하여 원년 시즌을 마치고 그 해 말 해태 타이거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3] 이후 5번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당시 선수 대부분이 군산상고-광주일고 동문으로 이루어져서 호남 지역색이 강했던 팀인 해태에서 대구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봐서는[4] 친화력이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던 듯하다.[5]
해태 내야진의 한 축이었으며, 호수비와 주루센스로 1980년대 해태의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해태는 내야수가 부족하여 원년 시즌을 시작하고 몇 달 후 실업 농협에 있던 임정면이라는 선수를 급히 스카웃하여 내야로 돌릴 정도였다. 1986년에는 도루왕을 하기도 했다. 이때 즈음 해태의 1번타자였다[6]. 그리고 몇년 더 뛰었으면서 88년 .323을 찍기도 했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 선수 시절에는 차영화와 함께 나름대로 안정적인 키스톤 콤비를 꾸몄고, 1987년 백인호가 입단하자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 주로 2루수로 출전하였다. 굉장히 마른 체형으로 김응용 감독 이하 당대의 해태 선수 출신치고는 왜소한 체형으로 전 경기 출전을 할 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고생했다고.

2.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성 라이온즈
47
124
.202
25
1
1
2
19
18
9
6
.274
.23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해태 타이거즈
98
319
.257
82
11
3
3
34
33
13
31
.339
.320
1984
94
324
.250
81
11
0
5
27
38
9
33
.330
.318
1985
104
371
.275
102
13
0
3
21
46
17
40
.334
.346
1986
108
(1위)
375
.256
96
12
1
3
24
55
43
(1위)
45
.317
.335
1987
102
335
.278
93
12
3
3
28
38
19
42
.358
.358
1988
95
297
.323
(4위)
96
11
1
0
29
45
22
30
.367
.384
1989
64
132
.258
34
4
0
3
17
16
4
19
.356
.351
<color=#373a3c> KBO 통산
(8시즌)
<color=#373a3c> 712
<color=#373a3c> 2277
<color=#373a3c> .267
<color=#373a3c> 609
<color=#373a3c> 75
<color=#373a3c> 9
<color=#373a3c> 22
<color=#373a3c> 199
<color=#373a3c> 289
<color=#373a3c> 136
<color=#373a3c> 246
<color=#373a3c> .337
<color=#373a3c> .338

3. 지도자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8
삼성 라이온즈
126
66
58
2
2위
3위[7]
1999
132
73
57
2
3위[8]
3위[9]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58
<color=#373a3c> 139
<color=#373a3c> 115
<color=#373a3c> 4
<color=#373a3c>
<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5[10]
KIA 타이거즈
42
15
27
0


2006
126
64
59
3
4위
4위[11]
2007
125[12]
51
73
1
8위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93
<color=#373a3c> 130
<color=#373a3c> 159
<color=#373a3c> 4
<color=#373a3c>
<color=#373a3c>
<color=#373a3c> 총계
<color=#373a3c> 551
<color=#373a3c> 269
<color=#373a3c> 274
<color=#373a3c> 8
<color=#373a3c>
<color=#373a3c>

3.1. 코치 시절


해태에서 은퇴하고 코치로 있다가 199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귀국한 후 삼성의 수비코치로 1996년에 부임한다. 당시 해태에서 허락없이 빼갔다고 항의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던 코치였다. 이 사람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사람이 해태 시절에 후배였던 이순철. 참고로 이순철이 코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을 때가 삼성 감독으로 서정환이 재임하던 시기였다(...).[13] 삼성에서도 백인천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내야 체제인 이승엽-정경배-김태균-김한수를 구축하는데 이바지했고,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최익성을 홀대했고, 결국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의 시작이었다.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삼성 라이온즈 No.72
서정환(徐定煥)
이후 1998년, 이전 시즌을 무난하게 잘 소화했던 조창수 감독대행 대신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조창수 대행이 백인천의 자리를 메꾸며 괜찮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굳이 그가 감독 자리에 오른 것은 당시 삼성의 우승을 향한 갈망 때문이었다. 매번 한국시리즈에서 물을 먹던 삼성으로서는 경북고 출신이라 연고 지역 선수이기도 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많았던 그를 통해 한국시리즈에서의 한을 풀고자 했던 것. 일단 부임 첫 해에는 정규 시즌 2위로 무난한 데뷔를 한다.[14] 단, PO에서는 LG 트윈스에게 1승 3패로 업셋당한다.
문제는 1999년. 애니콜 임창용을 미친 듯이 부려먹으며 삼성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임창용이 5차전과 7차전에서 혹사 후유증이 몰려오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결국 2000년에 김용희 수석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준 다음[15] 잔여연봉을 챙겨주기 위해 사장 보좌역으로 1년을 보내고 해임된다.
당시 막강한 타격에 비해 투수진이 시원찮았던 삼성은 이를 메우기 위해 간판 스타였던 양준혁해태 타이거즈에 내주는 대신 임창용을 데려오고, 쌍방울 레이더스로부터는 김기태[16]김현욱을, 두산 베어스에서는 김상진을, 한화 이글스에서 노장진까지 데려왔다. 여기에 1999 시즌 중에는 진갑용도 돈 주고 영입했다.[17] 한 마디로 우승 못하면 모든 게 감독 탓이 될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정규시즌 성과[18]에도 중도 해임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19]
사실 위의 글들은 그나마 상당히 후하게 쓰여진 것일 뿐, 실제 삼성빠들에게는 김성근, 선동열 등과 함께 3대 암흑군주 취급을 하면 그나마 좋게 평가받는 것이고, 올드 삼빠들에게는 김성근과 같이 역대 최악의 감독 2순위 자리를 다투는 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20] 자세한 이유는 하단에서 서술.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 No.89
서정환(徐定煥)
2001 시즌 다시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2004년 김성한 전 감독이 불미스러운 일로 해임되고 유남호 코치가 감독대행 → 감독으로 1년 동안 생활하다가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임하자 다시 감독대행으로 2005 시즌을 소화한 후, 2006년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 뒤에는 처절한 안습의 팀 배경이 존재한다.
타이거즈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불리며 일명 돌정환, 서토라레[21], 서백정이라 불리며 남에게 모두 읽히는 작전 구사능력의 소유자라 불리며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다. 그래도 2006년 기아가 4강까지 올라가서 4위의 성적으로 마감하게 되고 내년에 기대를 걸었지만 2007년 최하위인 8위로 팀 성적이 폭락하며[22] 그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사실 서정환이 2006년에 기아를 4강까지 끌어올린 것도 신용운, 한기주 등을 필두로 한 불펜진과[23] 어깨 통증을 안고 있던 김진우를 엄청나게 굴려먹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차정민, 이상화, 정원 등이 서정환 체제하에서 굴려졌고 한기주가 불펜의 핵이 되기 전엔 윤석민도 호되게 당했다. 결국 그 혹사 여파로 2007년 시즌을 시작하자마자 투수진이 줄부상당하고 꼴찌로 추락한 것. 거기에 보너스로 서머리그 우승 드립을 치면서 무릎 부상 상태의 장성호까지 날려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정환이 혹사시킨 투수들이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감독으로써의 평가는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히게 되었다. 결국 2007 시즌을 한 경기 남기고 사퇴하는 걸로 기아에서의 감독 커리어가 끝났다.[24]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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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에 막장테크를 탄 이순철, 강병철 감독과 셋이서 싸잡아서 까였으며, 공교롭게도 이 세 팀이 바로 엘롯기다. 아무튼 이 세 분들이 얻어먹은 욕만 해도 불로불사가 가능할 정도니 말 다했다.[25] 하지만 당시 서정환이 무능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패를 끊으면서 팬들에게 절하는 모습을 회상하면서 조범현 감독 지휘하에 16연패를 당했던 KIA 타이거즈의 팬들로부터 조금이나마 재조명을 받았다.[26]

3.4. 평가


대구 출신임에도 감독 재직 당시 지역적인 팬심을 이해하는 말을 여러 번 했으며, 스스로도 "난 전라도사람이여..."라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해태 프랜차이즈로서 혁혁한 활약을 했기 때문에 KIA 팬들 중에는 그를 호남 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적어도 감독으로서의 서정환만 아니면 KIA 팬들로부터 그다지 반감을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KIA 감독으로서는 투수 혹사 하나만으로 타이거즈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악명 높다. 2005 시즌 유남호가 시즌 도중에 경질이 되면서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른 뒤에 2006 시즌에는 상기의 신용운과 한기주, 김진우 등을 앞세워서 페넌트레이스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한화에게 패했고 오히려 다음 시즌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2007년 시즌의 서정환 감독은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이다. 비록 조범현 감독도 대구 출신에 해태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던데다가 2010년의 16연패와 2011년 후반기의 DTD로 많은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적어도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무엇보다도 김선빈-안치홍으로 이어지는 젊은 키스톤 콤비와 윤석민, 양현종 등의 투수를 발굴하여 강팀의 기반을 닦아놓은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다. 반면에 서정환 감독은 우승 강박증으로 신용운, 한기주 등의 유망주들을 쥐어 짜 수년간 재활 병동에서 세월을 보내게 만들어서[27] 조범현과 비교를 더 당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KIA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선동열과 함께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임에도 기대 이하의 모습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케이스. 차이점이라면 서정환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팔을 갉아먹고 미래를 망친 감독이라면 선동열은 대졸 성애자 답게 팀의 미래를 망쳤다는 것이 차이점. 더군다나 신용운의 팔이 아작나면서 수술대에 오르자 그 수술 자국이 들어간 사진을 보며 욕을 엄청나게 바가지로 먹은 건 덤. 사족으로, 삼성에서 방출당하고 경찰 야구단에서 화려한 성적을 찍은 최형우의 영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었지만 바로 경질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결정적으로 본인이 친정팀 복귀를 원했으니 무의미하다.
여튼 요약하자면 삼성 시절에는 최강의 리드오프가 될 수 있던 타자를 내쳤고 당시 리그 최고의 마무리무너질 때까지 신나게 굴렸다. 그리고 기아 시절에는 포스트 선동열, 리그 상급 계투, 신인 최대어 등을 기량을 만개하기도 전에 회복불능으로 망가뜨렸으며 김기아 타선의 단초[* 이 때 노쇠한 이종범의 기용, 장성호의 유리몸화, 최희섭의 부진 등 악재가 겹치고, 타선이 해태 말기에서 크게 변한 게 없는 등 리빌딩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신인지명을 투수 위주로 해서 발굴해낸 타자가 없었다. 결국은 이 시기에 신인 등용이 제때 이루어지지가 못했고 타선이 안습해지고 만다.]를 제공했고 그래놓고도 한 건 없다.[28]
삼성 감독 시절 성적과 관중몰이는 평타쳤으나[29] 삼성 팬들의 평가도 썩 좋지는 않다. 1997년 삼성 타선의 한 축이자 20-20까지 했던 최익성저니맨으로 만들어놓고[30], 임창용을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은 결과 플레이오프 7차전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최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31][32] 우승에 대한 압박으로 선수층을 쥐어짜며 어떻게든 성적을 내려 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고, 팀만 어수선해졌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삼성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다만 삼성은 기반 자체가 탄탄했던 강팀이었고 후임 김용희 감독이 뒷수습을 잘 해주었기 때문에 후임 2007년 KIA처럼 혹사 후 곧바로 암흑기로 굴러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33]
의외로 이승엽과는 케미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2007년 KIA 감독 재임 당시 타격 폼이 엉망이던 김주형의 타격 폼 개선을 하고자 요미우리 소속이었던 이승엽을 추천했을 정도.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감독으로서의 단기전인 포스트시즌의 성적이 안 좋은데 단적인 예로 1999년 플레이오프를 꼽을 수 있다.(삼성 시절 1998년 VS LG : 1승 3패, 1999년 VS 롯데 : 3승 4패, KIA 시절 2006년 VS 한화 : 1승 2패)
강병철, 김경문, 김성근, 김응룡, 김인식 등과 함께 혹사의 대마왕으로 악명 높은 감독이다. '애니콜' 소리까지 듣던 임창용이나 불펜투수로 한 시즌 140이닝이라는 전무후무한 등판기록[34]을 남긴 한기주, 신용운 등 여러 선수들이 서정환 감독 밑에서 혹사당하다 아작났다. 혹사 강도만 따지면 2015년 시즌의 김성근 감독과 비슷하다. 그나마 이쪽은 망가뜨린 선수가 김성근 감독보다 적은 편이기에 망정이지만.
KIA 타이거즈 같은 경우, 팀의 미래를 송두리째 좀먹었고 더 나아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기에, 감독 서정환에 대한 평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좋게 언급할 수가 없다. 신용운의 혹사는 김성한, 유남호 감독 시절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서정환이었고[35], KBO 최고 유망주 중 한명이었던 한기주의 조기은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36] 그 외에 자주 언급은 되지 않지만 이상화, 정원 등을 갈아마셨고 KIA의 간판 타자이던 장성호의 내구성에 결정타를 먹인 사람도 이 사람이다.[37] 선천적으로 내구성에 문제가 있어 선발로테이션을 돌던 윤석민에게 07년에 땡겨쓰던 것 또한 서정환이었다. 물론 야만없이겠지만, KIA 타이거즈에 최소한 신한카드중 한명만 남아있었고 장성호의 내구성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윤석민이 내구성이 양호했다면, 포스트시즌 단골손님으로 계속 남아있었을 것이다. 2010년대 KIA 타이거즈에 투수조 중간이 증발해버린게 바로 서정환의 업적 중 하나.[38] 또한 2007년 시즌 내내 모든 패배에 핑계를 대면서 도망다녔고, 언론에서 선수를 띄워줄때 항상 자신이 나서서 선수를 띄워주는 짓거리들을 해왔고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라인업들을 쓰고, 베테랑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2018 시즌 종료 후, 김기태를 보고 KIA 타이거즈의 상황에서 서정환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투수 혹사 부분을 서정환에 비빌 수준은 아니더라도, 다른 부분들은 서정환 시절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다. 물론 아무리 김기태가 비상식적이라고 욕을 먹어도 서정환에는 못 비빈다는게 KIA 팬들의 평가이다.

4. 이후


자신보다 1년 빨리 퇴임한 이순철 전 감독과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이순철 전 감독이 2007년 MBC ESPN에 새 해설위원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비난해설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본좌칭호를 얻은 것처럼 2008년의 해설 트렌드는 서정환 전 감독이었다. 처음엔 예전 안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굴곡 심한 억양,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우물우물거린다며 사정없이 까였지만 곧 수정하여 특유의 구수한 해설과 더불어 불타는 친정사랑해설(=감정이입해설)로 2008년의 히트해설로 통하게 되었다. 타 해설위원들이 은근히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두둔하는 그런 편파해설이 아닌, 해설시엔 나름대로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기아 타이거즈가 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겨워 무의식중에 탄식을 내지르는 그런 인간적인 면이 현재 서정환 해설위원의 인기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39] 정도는 약하지만 삼성 경기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
서정환 해설위원 특유의 구수한 해설은 동네 할아버지같은 편안하지만 전문성은 적은,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는 임주완옹 캐스터하고 할때 싱크로율이 매우 좋다고 한다. 젊은 세대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프로야구 시청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년층, 노년층에게는 서정환&임주완의 인기가 제일 높다고 하며, 시청률 역시 둘이 할 때 제일 높다고 한다.
2009년에는 방송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2010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엑스포츠가 SBS에 먹히는 바람에 MBC Life에서도 프로야구 중계를 하게 되면서 해설자로 복귀하였다. 다만 2011 시즌부터 해설직에서 그만두었고, 현재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있다고 한다.#

서정환이 해설을 맡은 KIA 경기 중 각종 승부처에서.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3분 7~8초 쯤에 투수와 2루수가 연달아 포구에 실패했을 때 내뱉은 감탄사와 4분 15초쯤에서 1루 주자가 런다운에 걸렸을 때 지른 탄성 외에도 승부처마다 각종 탄성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실소하게 만든다. 위 동영상은 서정환의 어록 중 극히 일부로, 외에도 LG전에서 내뱉은 "분위기에 반전을... 아~ 아~ 뭐야 이거?" 등이 유명하나, 자료가 꽤 오래되어서인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5. 여담


2013년 1월 18일, 뜬금없이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후배 명의로 허위 전세자금 대출 기사에 따르면 사회인 야구장을 짓다가 돈이 부족해 이자가 싼 전세자금을 빌려서 들라는 전세는 안 들고 야구장 만드는 데에 쓴 모양.
[1] 통학 당시 북구가 아닌 동구였다.[2] 1979~1981년까지 군 복무.[3]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1호 선수 트레이드이자 1호 현금 트레이드 사례로 기록된다. 최초의 선수 간 트레이드는 1983년 6월 27일 차동열정영기 간에 이루어진다.[4] 특히나 서정환이 선수 생활을 했던 1980년대 중후반까지는 영호남 지역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5] 양준혁, 손혁 등은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갈 정도로 해태는 타 지역 출신 선수가 적응하기 어려운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6] 바로 전해까지 해태 1번타자이자 도루왕은 김일권이었다. 그런데 1986년과 1987년 김일권이 타율 2할도 못칠 정도로 부진하면서 1번자리가 서정환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김일권은 1987시즌이 종료되면서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해태의 1번타자 자리는 서정환의 은퇴 이후 이순철이 이어받게 된다.[7] 플레이오프에서 LG에 패배[8] 매직리그 1위[9]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10] 시즌 중도 경질된 유남호 감독대행[11]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패배[12] 정규시즌 1경기를 남겨놓고 경질되었는데 KBO의 막장 운영 때문에 벌어진 일. KBO 슈퍼 한국시리즈#s-2 참조.[13] 이순철과 비슷한 것이 수비코치로서는 정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주루 및 작전 코치로 호평을 받아 감독에 오른 이순철과 거의 유사하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다른데, 이순철은 데뷔 초창기를 제외하고 외야수로 뛰었기 때문이다.[14] 그런데 승률은 0.532로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2위를 할 수 있던 이유는 1위 현대의 양민학살 때문에 엄청난 승률 디플레가 일어났기 때문. 3위 LG도 0.504로 시즌 준우승팀인데도 매우 낮았던 역대 최악의 승률 디플레 시즌이었다.[15] 김용희도 김응룡 감독이 오기 전까지 땜빵으로 있었던 터라 감독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오자마자 자리에서 물러났다.[16] 양준혁을 내주고 빈 좌타 거포 자리를 메꾸기 위해 데려왔다. 재정난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쌍방울이라 삼성 입장에서는 별 무리 없이 쉽게 데려올 수 있었다.[17] 당시 삼성은 투수진뿐 아니라 이만수를 이을 주전 포수도 마땅치 않았다. 현대 유니콘스박경완을 데려가 199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던 모습을 본 삼성은, 이를 귀감으로 삼아 당시 두산 베어스에서 홍성흔의 등장으로 입지가 흔들리던 진갑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게 된다.[18] 이승엽이 54홈런으로 홈런왕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홈런타자의 반열에 들기 시작했으며, 김한수3루수 KBO 골든글러브를 2번이나 타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다만 이쪽은 백인천 감독의 공이라 보는 이들이 많다.[19] 이에 대해서는 우승에 대한 미련으로 김응용 감독을 데려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삼성은 꾸준한 성적에 비해 한번도 포스트시즌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물론 김응용을 데려온 것도 서정환이 우승을 못 해서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결국은 야만없.[20] 1순위는 당연히 양준혁, 김한수, 전병호 등등을 강제로 은퇴시키고 박한이, 임창용 등의 은퇴를 종용했으며, 2년 뒤 한일 통산 500홈런을 기록한 타자 보고 와도 자리없다고 했으며, 연속 가을야구 진출기록까지 중단시킨 4452의 그 인간.[21] 남에게 생각이 모두 들키는 사람을 다룬 드라마 '사토라레'에서 따왔다.[22] 해태와 KIA를 포함해 유일하게 7이 들어가는 해에 우승을 못했다. 참고로 1987, 1997, 2017년에는 우승했다.[23] 이른바 신한카드 카드깡.[24] 정확하게는 최하위 순위가 결정된 직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사실상 경질이었다.) 마침 한 경기 남아있으니 욕 덜 먹을 겸 알아서 나간 것. 남은 한 경기조범현이 정식 감독으로 부임해서 마무리했다.[25] 다만 2007년 당시 LG 감독은 김재박이었고 이 해에는 이순철의 깽판으로 초토화시킨 팀을 어떻게든 끌어올려 5위까진 했다.[26] 절을 하게 된 비화는 서정환 감독의 부인이 연패 중인데도 더운 날씨에 나와서 응원하는 팬들이 안쓰럽다고 말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27] 이 후유증은 조범현 감독 시절은 물론 선동열 감독 재임기까지 내려온다. 수준급 롱 릴리프와 든든한 마무리(구단의 철저한 관리를 받았다면 한기주는 선발 투수로도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로 자리잡았을 두 선수가 나가 떨어졌으니...[28] 나중에 윤석민이 무너져버린 것도 이 당시의 아킬레스건 부상과 혹사 누적 때문이라 볼 수 있다.[29] 1998년 2위, 1999년 매직리그 1위였다.[30] 최익성 본인에 의하면 2군 코치시절부터 서정환과의 궁합이 잘 안 맞았으며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서정환은 최익성의 타격폼에 대놓고 디스를 하고 마찰을 빚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익성은 스승인 백인천 감독이 전수 받은 타격폼으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자신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이 떠나고 서정환 감독이 하라는대로 타격폼을 바꿨는데 그 타격폼이 생각보다 잘 안나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신인이었던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기회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부터 최익성 본인의 야구인생이 꼬이면서 저니맨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최익성이 사사방과 자서전에서 서정환을 대놓고 강도 높게 깠을 정도였으니 자기 야구 인생에서 서정환을 최악의 인물로 꼽고 있다. 백인천 감독과 조창수 감독대행에게는 최익성의 야구열정에 대한 이해도를 열었지만 서정환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고, 성실한 선수와 비정한 지도자의 이면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자 삼성 시절 서정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31] 이 때문에 삼성 역사상 최악의 감독을 언급하려면 김성근, 선동열과 같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32] 임창용 혹사는 해태시절 김응용 감독때 2년 동안 혹사당하고 삼성 이적 이후 서정환 감독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달했다는 변론이라도 있지만 최익성은 서정환 감독이 2군 감독 시절에 최익성의 타격 폼을 보고 대놓고 태클을 먼저 걸었고 두 사람간의 마찰이 빚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한 서정환의 잘못이다. 실제로 최익성은 최고의 인물과 최악의 인물을 놓고 대답했을 때 최고의 감독은 백인천 감독을 꼽았고 가장 꼴사나운 최악의 인물로 서정환 감독을 꼽았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을 정도다. 최익성은 서정환 감독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이 원망하고 있다고[33] 사실 팀 타선을 리빌딩한 백인천 감독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초 삼성은 임창용, 배영수, 김현욱, 김진웅, 노장진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투수가 별로 없었지만 대신 이승엽을 위시한 강타선으로 성적을 냈던 팀이었다.[34]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2달동안 70이닝을 던지게했다. MLB에서 어지간한 불펜이 한 시즌에 소화하는 이닝수가 약 70이닝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그냥 대놓고 굴렸다는 소리다.[35] 이미 김성한-유남호 감독 재임 시절부터 엄청나게 혹사당해 2005년 시즌 막판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아웃된 선수를 2006년 4강에 들겠다고 한창 재활 중이던 신용운을 8개월만에(보통 토미 존 서저리는 재활 기간을 최소 1년을 본다.) 1군에 급히 올려 당겨 썼고, 2006년 8월 말부터 10월까지 한달 반 동안 40이닝을 던지게 하는 등, 제대로 망가뜨리고 말았다. 덕분에 신용운은 그뒤로 투수로써 전혀 재기불능일 것으로 보였다가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 잠시 부활하는 듯 싶다가 다시 부상이 재발했고, 결국 은퇴했다.[36] 물론 한기주의 혹사는 후임인 조범현 감독도 책임이 있지만, 그 단초를 제기한 사람은 엄연히 서정환 감독이다.[37] 실제로 장성호는 2006년까지 3할은 기본에 전 경기 출장도 무난하게 달성하는 등 내구성이 좋은 편이었지만 2007년 시즌 가벼운 무릎 부상을 달고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무리하게 경기에 출장시키는 바람에 부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부상 덕분에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버리면서 타격감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후 풀타임을 치르지 못하고 백업을 전전하는 등 저니맨 신세가 되어버린다.[38] 이 영향으로 2020년 기준으로 기아는 88년생인 양현종이 투수조 최고참이 될 정도로 30대 후반을 넘어가는 투수가 한 명도 없다.[39] 쉬는 날에 직접 경기장을 찾아 관람하고 있는 모습이 타 방송사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