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곤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2. 생애
1932년 4월 17일,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박두병과 어머니 명계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으로는 박용언[1] ,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박용욱이 있다.
경동고등학교 졸업반 때 6.25 전쟁이 터지자 졸업 후 해군에 입대했다가 의병전역했다.[2]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고 워싱턴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이후 바로 귀국해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하였고[3] 1963년 아버지 박두병의 부름을 받아 동양맥주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게 되는데 입사 당시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닦기였다고 한다.[4] 이후 한양식품 대표이사, 동양맥주 대표이사 부사장을 지내게 된다. 이후 두산산업 사장 및 회장, 합동통신[5] 사장을 지내면서 경영수업을 쌓는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자리에 오르게 되었다.[6] 1991년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으로 인해 2년 간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1993년 복귀했고, 1995년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주력이었던 식, 음료 비중을 낮추고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해 33개에 이르는 계열사 수를 20개로 재편했다. 그룹 창업 100주년이 되는 1996년에 동생 박용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2019년 3월 3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7세. 장지는 경기도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3. 경력
- 1960. 한국산업은행 입행
- 1966. 한양식품 대표이사 사장
- 1973. 동양맥주 대표이사 부사장
- 1974. 두산산업 및 ㈜합동통신 대표이사 사장
- 1978. 두산산업 대표이사 회장
- 1993. 두산그룹 회장
- 1996. 두산그룹 명예회장
- 2008. 중앙대학교 이사
4. 가족 관계
5. 여담
상당한 야빠다. OB 베어스의 초대 구단주이기도 했고 두산 베어스 홈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잠실 야구장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잠실 야구장 중앙 출입구 한쪽에 박용곤을 위한 전용 주차공간이 있다고 할 정도다. 게다가 두산그룹이 망해도 야구단은 남겨두겠다고 말했을 정도니 말 다 한셈. 이 때문인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야구계에서 애도를 표했다. 참고로 외부에 드러난 5세 중에서 박용곤의 세 자녀에게만 각 아들이 있다고 하니 두산가의 형제상속 전통이 후사로 육촌, 팔촌대까지 계승될수 있을지 아직까지 먼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주목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1] 여동생, 김세권 전 대검찰청 차장의 부인.[2] 6.25 당시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취급 부서에 배치돼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한 바 있어 참전의 유공이 인정돼 2014년 국가유공자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3] 유학 이후 두산그룹에 바로 입사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 박두병의 지론 때문이었다. 박두병은 아들 박용곤에게 "남의 직장에서 남의 밥을 먹으며 지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수 있고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4] 비슷한 사례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다. LG를 창업한 구인회 회장은 교사로 일하던 아들 구자경을 락희화학에 입사시켰는데 첫 업무가 공장 잡일 처리였다고 한다.[5]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통신사. 이 통신사의 후신이 바로 연합뉴스의 전신인 연합통신이다.[6] 원래는 1973년 박두병 회장의 사망 때 회장직을 승계하리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두산그룹 창업공신인 정수창에게 양보하고 1.5인자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