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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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생활의 전성기이던 인천 대우 제우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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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생활 말년인 대구 오리온스 시절.
'''이름'''
이은호(李銀鎬)
'''생년월일'''
1975년 11월 20일 (48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상주남부초등학교 - 상주중학교- 상산전자고등학교 - 중앙대학교
'''포지션'''
센터
'''신체조건'''
197cm, 98kg
'''프로입단'''
1998년 인천 대우 제우스
'''소속팀'''
인천 대우 제우스/인천 신세기/SK 빅스(1998~2003)
대구 오리온스(2003~2008)
부산 KTF 매직윙스(2008~2009)
'''등번호'''
13[1], 12[2], 14[3], 41[4]
'''국가대표 경력'''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1999 후쿠오카 ABC
'''지도자 경력'''
상산전자고 농구부 코치 (2014~2017)
충주중학교 농구부 코치 (2017~2018)
중앙대학교 농구부 코치 (2021~)
'''수상내역'''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FIBA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1회 (1999)
1. 개요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시절
2.2. 프로 시절
2.3. 국가대표
3. 은퇴 후
4. 플레이스타일
5.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의 농구선수. 포지션은 센터.
1990~2000년대 대부분 마른 체형이었던 토종 센터들과 달리 대학 시절부터 근육질의 몸매에 흑형급 탄력을 자랑했던 센터. 센터치곤 작은 신장에도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대학무대 및 초창기 KBL에서 맹활약 했으나, 2000년대 들어 외인 빅맨들의 수준 인플레로 인해 존재감이 급격히 사라져버렸던 비운의 센터.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시절


멀리뛰기 선수를 하다 중 3때 처음 농구공을 잡으며 뒤늦게 농구에 입문했다. 체격조건은 좋았으나 팀이 강호가 아닌데다[5] 같은 94학번 동갑내기로 휘문고 현주엽(195cm), 윤영필(193cm), 부산중앙고 박도경(202cm), 대전고 구본근(197cm), 대경상고 변청운(192cm) 등 빅맨 유망주들이 워낙 많아 크게 주목받지 못한채 중앙대에 입학한다. 중앙대 입학후 강정수 감독의 지도하에 본인의 운동능력을 100% 살리며 리바운드와 블록에 두각을 내기 시작, 2학년때부터 팀의 주전센터이자 대학 No.3 급[6] 수준의 센터로 급 성장하였고, 이은호의 활약 덕분에 중앙대는 김영만- -안병익 트리오가 졸업했음에도 불구, 1995-96 농구대잔치 6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둔다.[7] 특히 흑형급 탄력으로 혼자 골밑에서 튀어올라 낚아채는 리바운드 능력이 뛰어났고, 속공찬스마다 가끔씩 터뜨리는 파워넘치는 원핸드 슬램덩크가 일품이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이은호는 대학선발팀 단골멤버로 뽑히곤 했고, 1996년 제 1회 아시아 22세 이하 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은호의 골밑파트너로 기대를 모았던 장신센터 박도경, 정훈종이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하면서 이은호는 4학년때까지 홀로 골밑을 지키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이 바람에 중앙대는 이은호의 대학 시절 내내 연세대, 고려대는 물론 강혁-김성철-윤영필 트리오의 경희대, 변청운의 건국대에도 밀리면서 3학년때 전국체전 우승 외에는 한개의 타이틀도 따내지 못한다.[8] 이은호 개인적으로도 '''"탄력과 힘은 좋지만 기본기와 농구센스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4학년들어 주가가 다소 떨어지게 되고, 토종빅맨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순위로 선택받았던[9] 1998년 KBL 신인드래프트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전체 5위의 순위로 인천 대우 제우스에 뽑히게 된다.

2.2. 프로 시절


데뷔 첫해인 1998-99 시즌, 이은호는 전시즌까지 주전이던 선배 정재헌(193cm)과 4번자리에서 출전시간을 나눠가지면서 뛰었고, 소속팀 인천 대우 제우스우지원의 공익근무 공백에도 불구, 외인 듀오 스테이시 보스먼(G, 190cm)-카를로스 윌리엄스(F/C, 198cm)와 슈터 김훈의 맹활약 속에 창단 최고성적인 정규리그 3위까지 오르지만, 6강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6위로 올라온 수원 삼성에 1승 3패로 업셋을 당하며 탈락하고 만다. 루키 이은호는 정규리그에서 6.7득점 5.2리바운드(1.1 턴오버;;), 플레이오프에선 8.8득점 3.0 리바운드의 쏠쏠한 활약을 거둔다.
두번째 시즌인 1999-00 시즌, 이은호는 여전히 주전급 식스맨으로 활약하면서 8.7득점, 4.2리바운드(1.1 턴오버;;)의 활약을 올리지만, IMF 외환위기로 인해 모기업 대우가 부도나면서 팀은 "인천 신세기 빅스"로 변경되었고, 전 시즌 양대 에이스였던 카를로스 윌리엄스(부상)와 김훈(군입대[10])가 나란히 빠지는 등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 전 시즌 3위였던 팀은 1999-00 시즌 꼴찌를 차지하게 된다.
2000-01 시즌, 이은호는 주전으로 올라서면서 장신센터 요나 에노사[11](204cm)와 함께 인천 신세기의 골밑을 단단히 지켰고, 팀은 외인 켄드릭 브룩스와 우지원의 활약속에 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른다. 이 시즌 이은호는 평균 출전시간 29분12초에 11.3득점 6.1리바 1.0어시 (1.7 턴오버;;;)[12]의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전성기에 오르나 싶었....지만..
이듬해 2001-02 시즌 유재학 감독은 외인 드래프트에서 KBL 레전드인 조니 맥도웰에다가 센터 얼 아이크(202cm)까지 뽑았고, 이은호는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02-03 시즌엔 팀이 7위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할 정도로 부진했음에도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이은호는 사인 앤 트레이드[13]를 통해 대구 오리온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김승현-김병철의 백코트를 중심으로 한 "달리는 농구"였던 오리온스에서 이은호의 자리는 없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KBL에 유입되는 외인들의 수준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서장훈, 김주성을 제외하곤 주전으로 뛰는 빅맨을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은호는 가뜩이나 기본기 부족으로 공격땐 폭풍 턴오버에 자기가 놓친 골밑슛을 공격 리바운드로 잡던 선수였던데다가 외인 센터들의 힘과 탄력이 더욱 좋아지면서 이젠 신체능력에서도 상대가 안 되었고 효용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2004-05 시즌을 앞두고 갑자기 3점슛을 장착하고 나타나는 등(경기당 0.5개, 성공률 36%) 새로운 팀에 적응하려고 부던히 노력했지만, 이후 KBL에는 "자유계약"으로 유로리그 출신 스타 플레이어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고, 오리온스 또한 피트 마이클, 리 벤슨, 아이라 클라크[14] 등 대괴수들을 뽑으면서 이은호[15]를 비롯한 토종 빅맨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16]
오리온스에서 악몽같은 5시즌을 보내고[17] 이미 33세의 노장이 되어버린 이은호는, 이후 부산 KTF 매직윙스으로 이적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 시즌 종료후 조용히 은퇴하고 만다.

2.3. 국가대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대표팀은 빅맨 수급 비상에 걸린다.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한 전희철은 규정상 대표팀 차출이 안되었고, 대체로 뽑으려던 박재헌은 무릎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불가, 이로 인해 대표팀 최부영 감독은 인천 대우 소속으로 출전한 1998 농구대잔치 프로부[18] 대회에서 맹활약했던 이은호를 긴급 합류시키면서, 이은호 본인의 첫 성인 국가대표팀 출전이 되었다. 이후 1999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에도 출전하였으나, 부동의 주전인 현주엽-서장훈과의 기량차가 커서 중용되진 못했다.

3. 은퇴 후


2014년 3월부터 모교 상산전자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여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2017년에는 충주중학교에 부임했다가 2018년 물러나고, 2021년 모교인 중앙대학교 코치에 부임하게 되었다.

4. 플레이스타일


근육, 탄력, 기본기 부족 세 단어로 요약 가능하다.
중앙대시절부터 다른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근육으로 유명했는데, 오세근처럼 탄탄하고 벌크업된 팔, 가슴 근육에 프로 보디빌더 같은 데피니션까지 살아있는 팔뚝이 유명했다. 출전 시간이 짧아 더욱 웨이트에 몰입한 듯한 대구 오리온스 시절엔 대구실내체육관 2층에서 이은호 팔근육의 근섬유가 보일 정도였다. 토종 센터치곤 탄력이 뛰어나, 박스아웃에서 자리를 빼앗겼음에도 상대선수 뒤에서 채가는 리바운드가 일품이었다. 덕분에 호쾌한 블록슛도 자주 나왔고, 속공에서의 원핸드 슬램은 이은호의 전매특허였다.
다만.... 이 모든 장점을 상쇄할 만큼 볼핸들링, 캐칭, 박스아웃 등 기본기가 부실했다. 중앙대 시절은 물론 주전급으로 뛰던 인천 신세기 시절, 이은호가 투입되면 일단 턴오버가 걱정될 정도였고, 노마크 골밑슛을 허무하게 놓치는 경우가 잦았다. 탄력은 좋았지만 블록 타이밍을 잡는 능력은 별로라 파울관리에 어려움을 가졌고, 탄탄한 상체근육에 비해 하체가 다소 부실(?)한지 상대팀 외국인 선수는 물론 자신보다 키가 작은 국내 빅맨(이현호, 백인선 등)을 상대로도 포스트업 수비에서 쭉쭉 밀려들어가는 굴욕을 자주 보여주곤 했다.[19]

5. 관련 문서


[1] 인천 대우 시절[2] 인천 신세기/SK 빅스 시절, 07-08 시즌 대구 오리온스 시절[3] 대구 오리온스 시절[4] 부산 KTF 시절[5] 이은호가 1학년이던 1991년 3학년 조성훈(G,184cm)의 맹활약으로 협회장기에서 우승한게 최고 성적이다. 이후 이은호가 팀의 주축이 된 3학년 때 상산전공은 협회장기에서 또한번 4강까지 오른다. 이때 같이 활약한 동창생이 바로 명지대-오리온스의 포워드 박재일이다.[6] 주전만 따지면 독보적 1위 서장훈, 2위 현주엽에 3위를 두고 이은호-윤영필이 다투는 모양새였다[7] 당시 주전은 김희선-구병두-조우현-신종석-이은호 였다.[8] 심지어 이은호가 1학년이던 1994년 대학농구 1차연맹전 이후 단한번도 결승무대조차 밟지 못한다.[9] 이때만해도 대부분의 실업-프로팀들이 다들 자기팀 가드들은 괜찮은데 신장이 작은 게 약점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190cm의 이민형(광주 나산), 강양택(수원 삼성)이 주전으로 뛰던 시절이라;; 뭐, 현주엽이 1위인 건 당연했지만, 2위부터 5위까지도 모두 빅맨으로 뽑혔다.(2.윤영필-3.김택훈-4.변청운-5.이은호) 대학최강 고려대의 주전 포인트 가드였던 신기성이 무려 7위, 모래반지 빵야빵야가 8위로 밀렸다는 게 지금으로선 아이러니다.[10] 시즌 도중 병역비리가 밝혀지면서 13경기만 뛰고 재검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입대. 항목 참조[11] 2002-03 시즌 전주 KCC 시절의 바보 센터 에노사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겠지만, 2000-01 시즌만해도 에노사는 17.7득점 13.0리바를 올리던 나름 준수한 센터였다.[12] 이 기록이 어느정도인가 비교해보면, 2012-13 시즌 김동광 감독의 서울 삼성 썬더스가 오랜만에 6강에 갔던 시즌, 주전 파워포워드 이동준의 기록이 평균 27분38초 출전에 11.4득점 5.5리바 1.4어시였다.[13] 인천 전자랜드와 1억 2500만원에 사인한 뒤, 대구 오리온스 박훈근과 1:1 트레이드 되었다.[14] 30살로 한창 팔팔할 때[15] 피트 마이클이 뛰던 06-07 시즌, 이은호는 시즌 통틀어 달랑 8경기에 총 16분간 뛰었다.[16] 이 때 날아간 선수들은 비단 이은호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부동의 파워 포워드였던 전희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07-08 시즌 35세의 노장이긴 했지만 아직 쓸만한 4번이었던 전희철은, 자시 클라인허드-브랜든 로빈슨 같은 허접 빅맨들은 물론 신인 김재환(197cm)에게도 밀리며 시즌 종료후 반강제로 은퇴당하고 만다.(출장 시간에 비해 워낙 고액연봉이긴 했다.)[17] 하지만 악몽같지는 않은것이 2004년 12월 12일 원주 TG삼보와 홈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16득점을 기록하는 등 TG삼보전 8연패, 챔프전 포함 10연패 탈출에 1등공신이 된 선수가 이은호이다. 거기다가 2006년 3월 11일 원주 동부와의 경기에서도 2쿼터에만 11득점을 기록하는 등 13득점을 기록하여 105대 69로 승리하는데 공헌하였다. [18] 1998년 대회에 한해, 프로팀들이 외인들과 함께 출전하였으며, 대학부-프로부 별도로 우승팀을 가렸다. 인천대우는 결승전까지 올라 부산기아에 아쉽게 지며 준우승을 차지했다.[19] 수비할 때 중심이 낮아야 하는데, 힘만으로 막으려는 수비라 결국은 파울을 곧잘 적립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