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

 





'''소양강댐'''
1. 개요
2. 댐 방류 역사
3. 건설
3.1. 사업계획
3.2. 설계
3.3. 규모
3.4. 시공
3.5. 비화
4. 교통
5. 관광
6. 안보
7. 기타
8. 대중매체에서
9. 관련 문서


1. 개요


昭陽江댐/Soyanggang Dam
대한민국 강원도에 있는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에 위치한다.
다목적 으로 높이는 123 m, 만수위는 198 m, 제방 길이는 530 m, 총 가용 저수량은 29억 톤[1]이다. 완공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사력댐이었고 현재도 세계에서 5번째로 크다. 수도권지역의 홍수 방지와, 전기 공급, 상수도 공급을 위해 1967년 4월에 착공하여 1973년 10월에 완공하였고, 건설비용은 318억 7,000만 원이다. 홍수시에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는 시설인 여수로에는 총 9개의 수문이 장착되었다. 댐 건설 당시 만들어진 기존 여수로에는 5개, 그리고 2010년에 건설된 보조 여수로에는 4개의 수문이 각각 설치되었다.
수도권 지역 및 중부 지역에 12억 톤[2]수도를 공급한다. 연간 353 GWh의 전기를 생산하여 수도권 지역에 공급하고 홍수를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엄청 큰 댐이니 만큼이나 짓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 수몰되었는데, 춘천시 북산면과 동면, 양구군 양구읍과 남면, 인제군 남면 일대의 4,600세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약 2,700 ha[3]의 논밭이 수몰되었다고 한다.

2. 댐 방류 역사


국내 최대의 저수용량을 자랑하는 댐인 만큼 한강 홍수 방지의 최후의 보루로 인식되므로 다른 댐들과 달리 수문을 여는 빈도가 매우 적은 특징을 가진다. 소양강댐의 저수 용량이 엄청나므로 웬만한 상황이 아닌한 되도록 물을 가두어 버티는 편이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수문을 열게 되면 다른 댐의 수위 조절을 비롯해 한강 하류 지역의 수위 조절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며, 또 하상계수가 높은 대한민국의 기후 특성상 잦은 방류로 저수량이 부족해지면 가뭄 때 용수 부족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양강댐의 방류는 평균적으로 몇 년에 한 번 열까말까 할 정도다. '''그래서 소양강댐의 수문이 열리는 상황 자체가 하나의 뉴스거리로 다뤄지곤 한다.'''
소양강댐의 방류는 한강 수계의 홍수로 이어진다. 여름철 폭우 시 소양강댐이 수문을 개방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연이어 한강 다리에 나가 있는 특파원이 '소양강댐 수문 개방으로 수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의 뉴스를 보도하는 패턴을 볼 수 있다. 반대로 가뭄이 극심한 경우에도 소양강댐 수위가 몇 미터까지 낮아졌다는식의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rowcolor=#ffffff> '''방류횟수'''
'''개문일자'''
'''폐문일자'''
'''방류이유·비고'''
초회
1978년 8월 28일
불명
만수 기념 및 방류 시험
2회
1981년 7월 12일
7월 15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조절
3회
1984년 9월 2일
9월 4일
태풍 준 상륙으로 인한 홍수조절
1984년 9월 한강 대홍수 발생
4-5회
1987년 8월 30일
9월 7일
태풍 셀마 상륙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조절(2회)
6-9회
1990년 7월 25일
9월 18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조절(4회)
1990년 9월 한강 대홍수 발생
10-11회
1995년 8월 24일
8월 31일
태풍 재니스 상륙으로 인한 홍수조절(2회)
12회
1998년 8월 13일
8월 17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조절
13-14회
2003년 9월 9일
9월 15일
태풍 매미 상륙으로 인한 홍수조절(2회)
15회
2006년 7월 19일
8월 3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조절
16회
2011년 7월 27일
8월 3일
2011년 중부권 폭우 사태로 인한 홍수조절
17회
2017년 8월 25일
8월 28일
춘천~양구~홍천 지역 호우로 인한 홍수조절
18회
2020년 8월 5일
8월 15일
2020년 중부권 폭우 사태로 인한 홍수조절
1973년 완공 이후, 1978년 8월 말 처음 수문을 개방[5]한 데 이어 1984년[6]과 1987년(2회), 1990년(4회), 1995년, 1998년, 2003년(2회), 2006년, 2011년, 2017년[7], 2020년[8] 등 준공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수문을 개방한 횟수는 총 18회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여느 댐과 마찬가지로 수력 발전 및 평시 한강 수위 조절용으로 이루어지는 보조 배수는 수문의 개방과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한 해에만 무려 3번을 개방한 1990년은 고양군 한강 제방이 터진 그 유명한 중부 지방 대홍수였다. 소양호는 만수위인 198 m를 넘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 문화방송(SBS 개국 이전) 중계차가 모두 소양강 댐에 나왔을 정도였다.
2020년 8월 5일 폭우로 인해 담수 제한수위를 초과하여 3년만에 수문이 개방되었다. # 실시간 소양강댐 수문 개방 영상. 강원일보의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이다.

3. 건설


한국대댐회 소양강댐 40년사스포츠한국미디어 기사 외 다양한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3.1. 사업계획


소양강은 막대한 포장수력을 보유하고 있음이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최초 조사는 1950년대에 유래를 발견할 수 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과 함께 대하천 유역의 수자원 다목적 개발의 필요성에 중점을 두었다. 1966년 4월 특정 다목적댐법을 제정한다. 1966년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당시까지 고려되어 온 발전 단일목적 개발을 치수와 이수를 겸한 다목적 개발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소양강댐 규모의 최종 결정까지는 건설부와 한전 간의 견해차가 심하여 장기간에 걸쳐 심각한 정책 논쟁의 수렁에 빠지기도 하였다.

3.2. 설계


1960년 Smith Hinchman & Grill 기술회사에 의하여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제안된 형식은 108 m의 콘크리트 중력댐이었다. 1962년 11월 건설부는 일본 공영과 소양강댐 기술조사 및 설계 용역을 체결하였는데 콘크리트 중력식이 무난하다는 고찰이었다. 1967년에는 건설부가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의 건의에 따라 높이 122 m의 중력댐을 검토하게 되었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건설 기간 중 돌발 사태에 안전을 기할 수 있으며, 댐 완공 전에라도 발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고, 국산 시멘트 사용은 국가 경제에 호경기를 가져오리라고 판단했다. 1968년 5월, 건설부는 예비설계를 마치고 곧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본설계까지 실시하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은 Rockfill사력식이면 총공사비 203억원 규모에서 34억원의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공기도 5년에서 4년으로 1년 단축할 수 있다고 설계변경을 제의하였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우리나라의 철근, 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의 부족과 막대한 수송비 등으로 막대한 건설비가 소요될 예정이었다. 소양강댐 건설지에는 사력댐에 필요한 바위, 자갈, 모래 등이 풍부한 점이 착안되었다. 또한 콘크리트 댐은 건설 과정이나 평시의 안정성은 높지만, 전시 각종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들었다. 콘크리트 댐은 폭탄에 맞았을 때 구조가 파괴되지만, 사력식 댐은 그런 식의 충격에서 강하다. 당시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특히 전쟁에 대한 대비를 고려해야 했던 시절이다.
이렇게 현대건설의 고집으로 1968년에 중반에 이르기까지 설계변경안으로 마찰을 빚는다. 착공이 1967년 4월이었는데, 대단히 늦어진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주영 회장이 건설부 장관과 대동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런 자리는 없었고, 건설부 장관의 단독 보고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되려 사력식댐이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무엇이 진실이든 대통령이 즉석에서 판단을 내린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포병장교 출신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콘크리트 댐이 적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잘 알았다.

3.3. 규모


한전은 전력 단일목적에 유리한 저댐(10억 톤)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전은 마침 정부가 일본 마루베니(丸紅)상사와 차관계약을 서두르고 있음을 포착한다. 정부는 이 저댐 건설에 필요한 기자재 공급원으로 1967. 4.12 마루베니와 차관($13,956,000)의 계약을 체결한다. 1967. 4.22 경제기획원 승인을 받아 1967. 5.20 L/C를 개설하여 전격적으로 저댐 건설을 기정사실화하고 댐 전체공사의 건설을 한전이 담당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편, 미국의 기술지원하에 구성된 한강유역 조사단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소양강댐 규모는 고댐(145m)이 최선의 방안이고, 중댐(122 m)은 차선이며, 저댐은 부적당하다는 의견이었다. 한강에 있어서 충주 및 소양강 지점은 대체불능의 전략적인 댐 지점이므로 최대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무총리가 건설부, 상공부 및 한전의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2차에 걸쳐 조정을 시도해 보았으나 계속 결정이 지연된다. 건설부의 최종성 차관은 이문혁 수자원국장을 대동하고 대통령에게 직접 브리핑하여 '''소양강댐은 다목적 중댐 규모로 개발하도록 하라'''는 결단을 받아냈다.

3.4. 시공


주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 등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에도 장비가 갖춰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차관을 들여 건설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그것을 건설업체에 대여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때 양성된 기능공과 기술은 현대건설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알려진다.
건설 과정은 기술 부족으로 매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자재를 덤프트럭에서 실어다 그대로 부어 만드는 Dumped riprap 공법이 사용되었다. 이 공법은 저렴하고 안전했지만 외관이 좋지 못하여 그 이후 건설된 사력댐은 표면이 매끈한 Handed riprap 공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삼성물산이 시공하던 소양강댐의 추가 보조여수로 공사에서 2005년과 2006년에 보조여수로 붕괴사고가 있었다.

3.5. 비화


정주영 회장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설계 변경 과정의 비화를 말한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받은 보상금을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하였다. 최초 설계사인 일본공영이 유리한 설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착복할 의도가 있었으며, 건설 사정에 밝지 않은 건설부가 이에 넘어갔다는 식의 진술을 한다.
사력댐의 문제가 컸다. 공사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응 능력은 중력식 콘크리트 댐보다 떨어진다. 약 7년에 걸쳐 일본공영만이 아닌 많은 회사와 함께 설계안을 잡았는데, 시공사의 주장만으로 설계 변경하기는 도박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현대건설은 댐 건설 이력조차 없었다. 이런 회사에 세계 최대 규모의 사력식 댐의 설계, 시공을 전부 맡기는 방안이 현실적이었을까? 따라서 사력댐 반대에 타당성이 없다 볼 수 없고, 되려 박정희의 즉흥적인 결정으로 7년간 준비한 설계안이 뒤집혔다는 사실이 이례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건설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매우 큰 위기상황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즉 건설부가 우둔했거나 정략적인 이유만으로 사력댐을 반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콘크리트가 많이 소요되는데, 시멘트 사업부(현 현대시멘트)를 소유했던 현대건설이 왜 반대했겠느냐, 정 회장의 선의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 현대시멘트 공장은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었다. 소양강댐에서는 매우 먼 위치다. 막대한 양의 시멘트를 이송하면 그만큼 큰 비용이 든다. 과다한 이송비는 당시 현대건설의 설계변경 주장의 각론 중 하나였다. 따라서 현대건설이 아닌 지리적으로 유리한 다른 시멘트 회사가 이득을 가져갈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 1967년 전후하여 많은 시멘트 공장이 충북에 건설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콘크리트 수요를 염두에 두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댐이 아니더라도 수요가 충분하리라는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설계안을 따르면 기자재와 장비를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그들이 많은 이득을 가져가게 된다는 반론도 있다. 마루베니 상사를 통해 기자재를 도입한 상황은 있다. 또한 몇몇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많은 일본계 상사들이 로비를 했다는 정황도 포착된다. # 그러나 이 부분은 댐의 규모 확정 과정의 이야기로 수주경쟁을 뜻한다고 보인다. 댐 규모 확정 과정에 이견이 많았다는 진술들이 이와 일치한다. 그러나 콘크리트 댐과 관련된 일본공영의 착복 시도는 여전히 정주영 회장의 진술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콘크리트 중력댐 건설안을 내면서, 국산 콘크리트 사용은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콘크리트 중력댐이든, 사력댐이든 기자재와 장비가 없기는 똑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력식을 채택하면 '''현장에 널린 모래와 자갈을 바로 댐 건설에 활용'''할 수 있는 덕분에, 건설비용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영화산업과 다소 거리가 있는 현대그룹이 뜬금없이 당시 인기작이었던 영화 나바론 요새 후속편을[9] 수입하는 데 도움을 준 일 역시 당시 상황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정 회장의 선의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많은 공사비가 절감되었으며, 이는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황상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회장에게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당시 정황에 근거한 막연한 추측을 말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소양강댐 건설 과정에는 많은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착공 직전까지 많은 방안이 난립하는 모습이 보인다. 심지어는 1967년에 착공이 되었는데도 많은 이견이 있었고, 최종 설계는 1968년 8월에나 확정된다. 지금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진행방식이다. 여러 의견들이 난립하다가 최고 결정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최종 정리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개발독재시대에 흔히 보이는 행태였다. 좋게 보면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고, 나쁘게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모습이다.

4. 교통


버스나 자가용으로 갈 수 있다. 버스는 춘천역에서 11번, 12번 (남춘천역에서는 11번)을 타면 된다. 자가용 이용 시 거의 꼭대기까지 주차장이 있지만, 주차 공간이 협소한 편. 댐 하부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며, 여기에서 시내버스 또는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상부 주차장은 악천후에는 운영하지 않으니 주의할 것. 또, 청평사로 가는 유람선과 북산면, 동면 수몰지역으로 가는 여객선이 운항되며, 소양호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도 운행 중이다.

5. 관광


춘천에서 남이섬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사실상 춘천시의 랜드마크이다. 2013년 기준으로 그해 남이섬에 271만명, 소양강댐에 121만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한다. 소양강댐의 건설로 생겨난 소양호는 그 자체가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댐으로 길이 수몰된 탓에 댐 안의 몇몇 마을은 그야말로 '육지의 섬'이 되어버렸다.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만든 물문화관이 있으며 청평사와 연계한 여객선 관광 루트도 존재한다. 예전에는 가까운 곳에 선착장이 있고 당시 (도로 사정이 열약해서) 오지였던 양구군을 빠르게 갈 수 있었기에 여객선과 병력 수송용 LST(제2보병사단 참고.)가 운행되기도 했었다.
참고로 2005년경까지만 해도 주차장에서 선착장까지 노점상과 포장마차들이 즐비했었으나 물문화관 공사 시작쯤해서 전부 정리되었다. 주차장에서 댐을 가로지르고 오르막길을 좀 올라가면 댐 조망이 가능한 '수연정'이라는 팔각 정자가 있다.
소양강댐은 수문을 개방했을 시의 그 위용이 대단하여 또다른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는데, 평소에 장마철만 되면 수시로 수문을 열어 수위를 조절하는 다른 댐들과 달리 소양강댐은 몇년에 한번 수문을 열까 말까한 정도여서 장마철에도 수문을 잘 개방하지 않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1973년 완공된 이래로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18회 개방했을 정도. 거기다가 홍수에 대비하여 옆에다 보조여수로를 별도로 뚫어놓았는데, 정작 보조여수로를 활용한 첫 방류는 10년이 지난 2020년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6. 안보


애초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자갈과 흙, 암석의 조합인 사력댐으로 건설한 만큼''' 매우 중요한 국가중요시설이다. 당연히 왠만한 폭탄과 미사일의 공격에도 방호가 가능하며[10] '''가급 국가중요시설'''이라 무기고와 경비병력들도 배치되어 있으며 제2군단에서도 소양강댐에 대한 방호 훈련을 틈틈히 실시한다.
간첩 또는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의 테러 공작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변전 시설 인근에 벙커와 같은 군사 시설들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댐 자체를 파괴하거나 폭파해 서울을 수몰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수도권에 대한 수도 공급에 지장을 주거나 변전 시설을 파괴해 전력난을 유도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7. 기타


이 댐이 완공됨으로써 소양강을 따라 국도로 춘천시와 왕래하던 양구군이 도로의 수몰(...)등으로 육지 속의 섬이 되어버렸다. 배후령과 90년대 초까지 터널이 없는 비포장 길이었던 추곡고개를 넘어 소양호 옆으로 도로를 냈다. 그래서 양구~춘천 '''3시간'''[11]이라는 경악스러운 소요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평화의 댐을 올라가는 아흔아홉 굽잇길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만 통행량이 많다보니 사고의 위험이 높았다. 국도 개량 이후에는 50분이 소요된다. 소양강 댐 건설 이전보다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어쨌든 이제 굽이치는 길로 갈 일이 없으니 관리가 안 되어 낙석 등으로 인해 차량 운행이 매우 위험한 수준이다. 가끔 자전거를 타거나 드라이브 가는 사람만 있다. 드리프트 연습을 하는 모양인지 원형의 스키드마크가 빽빽히 난 구간도 있다.
이후 일반국도 기준 국내 최장의 배후령터널이 개통하여 통행은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 이후 양북1터널인제양양터널의 준공 및 개통으로 3위로 밀려났다. 이 둘은 고속도로의 터널이라 일반국도 기준에서는 배후령터널이 최장 길이다.
춘천 자덕들의 마실 코스로 유명하다. 업힐도 배후령이나 고탄에 비해 힘들지 않고 다운힐도 엄청 길지 않아서 마실용으로 자주 가는 편.
소양강댐으로 확보한 용수 중 농업용수는 춘천시 우두동에 있는 우두온수지에서 '''자연광으로 데운 뒤에''' 사용한다. 소양호의 물은 수질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고산 지대에서 바로 흘러 내려오는 물이라서 온도가 낮다. 그래서 그대로 쓰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온도를 높인 뒤에 쓰는 것.
댐 밑에는 전력생산시설이 있는데 당연히 '''국가중요시설이라 촬영금지구역이다.''' 밑에서 볼땐 절묘하게 돌출된 지형이 전력생산시설을 가리고 있어서 잘 안보인다.

8. 대중매체에서


  • 2006년에 KBS 과학카페서 방영된 슈퍼태풍 시나리오인 '슈퍼태풍 2030'에서 등장. 카트리나 급의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하루 1,000 mm[12]가 넘는 비를 뿌리자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난장판인 서울은 물벼락을 맞게 된다. 참고로 소양강댐은 하루 810 mm의 강수량까지 버틸 수 있게 지어졌다고 한다.
  • 2017년 맛있는 녀석들 123화 문세윤 특집에서 문세윤의 몸무게인 123.9 kg을 km로 환산해 그 거리에 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춘천 쪽으로 갔고, 결과는 서울쪽에서 딱 123.9 km인(...) 이곳 소양강댐(정확히는 선착장 근처 음식점 근방)에 도착해 여기서 제작진이 근처 식당에서 포장해 온 막국수 먹방을 했다.

9. 관련 문서


[1] =2.9 Pg=2.9×1015 g[2] =1.2 Pg=1.2×1015 g[3] =27 km2[4] 교차기록상 28일.[5] 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지사 이력 관리사업소에는 1981년 7월로 게시되어 있지만, 이보다 약 3년 앞선 1978-09-02자 제1200호 대한뉴스에는 동년 8월 말[4] '''188.23m 수위를 기록함으로써 준공 후 처음으로 수문을 열었다'''라고 영상 0:18~0:25에서 정식으로 밝히고 있으며, 방류 장면과 함께 10분 동안 약 25만 4천 톤의 물을 쏟아냈다고 덧붙이고 있다. 대한뉴스 제 1200호-소양강 다목적 댐[6] 이 해에 한강이 터져서 북한 적십자사에서 을 지원했다.[7] 6년만에 수문 연 소양강댐[8] 속보-소양강댐 제한수위 초과…오후 3시 3년만에 수문 개방[9] 콘크리트로 건설된 댐을 폭파해 그 물줄기로 교량(다리)을 무너뜨린다는 줄거리. 폭약으로 뚫은 개미구멍을 시작으로 큰 댐이 붕괴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10] 콘크리트로 건설된 북한의 수풍댐도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그 콘크리트보다 방호력이 더 우수한 사력댐은 말할 것도 없다.[11] 1991년 기준.[12] =1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