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대교

 


서울특별시도
강변북로
가양 방면
원효대교 북단

13
한강대교 북단

남양주 방면
동작대교 북단
노들로
양화교 방면
여의상류IC

한강대교 남단
 
종 점
현충로 동작역 방향과 직결
漢江大橋 / Hangangdaegyo(Way Bridge)
한강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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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Hangangdaegyo
(Way Bridge)
한자
漢江大橋
관리기관
한강대교
서울특별시
강변북로
길이
1005M
[image]
구조형식
1차 교량
핀 프랫 트러스교(Pin Connected Pratt Truss Bridge)
2차 교량
리벳팅 타이드 아치교 (Riveting Tied Arch Bridge)
강판형게르버교(Steel Plate Girder Gerber Bridge)
확장 교량
용접접합 타이드 아치교 (Welding Tied Arch Bridge)
강판형게르버교(Steel Plate Girder Gerber Bridge)
중지도(노들섬)
1. 개요
2. 역사
3. 한강대교를 경유하는 버스 노선


1981년 12월 24일 제1한강교 확장개통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3가와 동작구 본동(노량진동) 사이를 잇는 총연장 1,005m의 한강 위에 놓인 최초의 인도교[1]이다. 노들섬 가운데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일제치하의 조선총독부가 제1기 치도사업의 일환으로 1916년 3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17년 10월 7일에 준공하였다.[2] 이 때 노량진 쪽에는 경간 60m인 7연의 한강대교와 용산측에 경간 60m인 3경간의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양쪽다리 중간은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하여 준공하였다.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소교가 유실되어 복구 후 1935년 확장된 신교가 건설되었다. 1950년 6월 28일 6.25 전쟁으로 인해 폭파되었으며, 9.28 수복 후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고, 1954년에 완전 복구되었다. 1979년 1월에는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1984년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에 따라 제1한강교 에서 한강대교로 개칭되었다.
한강대교는 서울 도심에서 인천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한강 최초의 인도교이니만큼 도심에서 노량진-영등포를 거쳐 인천으로 향하는 핵심 간선로 역할을 해 왔으며, 지금도 직진만 하면 용산-서울역-시청-광화문까지 바로 이어진다. 하지만 도심권에서 영등포-인천을 잇는 길은 마포대교서강대교를 이용하는 것이 최단거리가 되면서 기존의 역할은 많이 줄어든 반면, 동작구관악구를 도심과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역할이 강화되었다. 상도터널-양녕로 또는 상도터널-상도로를 통해서 상도동, 봉천동, 서울대입구를 잇는 입구이기 때문에 다리 남단으로 상습정체가 발생한다. 현재는 21번 서울특별시도로 지정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1번 국도 구간의 일부이기도 했다.
정식 명칭이 과거 제1한강교, 현재는 한강대교임에도 '한강 인도교'라는 명칭이 많이 익숙한데, 이는 한강홍수통제소의 수위 관측지점 명칭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여름철 홍수 때마다 잠수교와 함께 뉴스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명칭이 한강대교로 변경되었다.
겨울이면 한강이 얼어붙었다는 판정을 내리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한강 결빙 관측지점은 노량진 방향 2번째와 4번째 교각 사이다. 상류 쪽으로 100m 부근의 남북 간 띠 모양 지점이 얼었는지에 따라 결빙 여부를 판정한다. 이 기준은 한강 결빙 여부를 처음으로 판정하던 1906년 당시 한강대교 부근 노량진이 한강의 주요 나루 가운데 하나이고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결빙 관측 기준점으로 지정한 데서 유래했다. 통상적으로 1년 중 가장 추운 1월 중순 쯤에 한강 결빙 소식이 전해진다.[3]
양 옆으로는 자전거도로가 놓여있는데다 올림픽대로 및 강변북로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없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다만, 고속터미널 및 서래마을 등 신반포로 일대에서 용산, 서울역 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 억지로 한강대교로 갈 생각은 하지 말 것. 한강대교 타기 위해 이수교차로에서 현충로 방향으로 우회전하는 순간 도로구조상 이유로 바로 자라니가 되는데, 현충원 방향 차로가 최상위 차로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이 경우 자전거는 동작대교를 경유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정 한강대교를 타고 싶으면 처음부터 사평대교 ~ 이수고가차도를 경유한 뒤 1개 차로만 횡단하면 자전거로 안전하게 한강대교로 진입할 수 있다. 이수교차로에서 한강대교 쪽으로 자전거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신반포로에서 출발한다면 동작대교로 우회하라고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도 기술하였다.

2. 역사


[image] 서울특별시의 시도등록문화재
서울특별시의 등록문화재
번호 시작

1호

2호
한강대교
보신각 앞 지하철 수준점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용산진노들나루 사이를 잇던 수운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한양도성에서 출발하여 남쪽을 향하는 나루터는 크게 동쪽의 광나루[4], 남쪽의 한강진[5],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노량진과 용산진이었다. 이들 3개 나루터는 영남대로를 구성하였는데, 정조 시대에 들어서는 그 당시 정조의 국책사업 신도시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노량진-용산진간 통행량이 급증하였기 때문에 배다리(부교)를 부설할 정도로 전통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다.
근대인 1900년 7월 한강에 철도교가 가설되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미국인 J.모스(Morse)에게 경인선 철도의 부설권을 부여할 당시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으나 모스로부터 철도부설권을 가로챈 일본은 공사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보도 가설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민간용의 차량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도보로 한강을 건너는 이들은 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건넜기 때문에, 보도 교량을 건설할 만한 수요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자동차가 수입되기 시작하고 강을 건너려는 수요가 증가하면서[6] 조선총독부가 인도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917년 최초로 가설된 인도교는 중지도∼노량진 간의 7경간 440m의 대교와 중지도∼한강로간의 3경간 188m의 소교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차도는 4.5m, 좌우 보도는 각각 1.6m였다. 이러한 철교 및 인도교의 개통으로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가 급격히 도시화되었다.
이 교량은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하여 가설하였으므로 폭이 좁고 중앙차도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상기 수치와 비교, 0.5m정도의 오차 가능)에 불과하였다. 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교량 가설 10년 후에는 협소한 인도교 하나로 그 교통량을 처리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그후 1925년 7월에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소교 부분이 완전 유실되는 등 손상을 입었으므로 유실된 소교를 길이 459m, 너비 18m로 확장하여 재건하고 전차#s-3궤도도 부설하는 공사를 1927년 5월에 시작하여 1929년 9월에 준공하고 18일에 도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소교에 비해 대교 부분의 폭이 협소하여 차량 소통 등에 불편이 누적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34년 8월 신교 건설에 착수하여 2년 후인 1935년 10월에 현재의 규모와 거의 같은 교량을 준공하였다. 같은 기간에 2번째의 인도교인 광진교도 건설되었다. 그로부터 이 한강교는 서울과 강남을 연결하는 단 둘뿐인 통로로서 서울의 간선도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광진교, 한강철교와 함께 한강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을 폭파했다. 이 때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폭사 및 익사하였으며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되었던 것을 9.28수복 후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고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하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로, 한강대로 남단 교차로는 한때 경부고속도로의 임시 종점이었던 적이 있다. 1968년 12월 서울 - 수원 간 부분개통 당시 투기꾼들로 인해 한남IC ~ 반포IC 구간의 토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해당 구간을 1년 뒤인 1969년 12월에 한남대교와 함께 개통하고, 최초 개통 시에는 임시로 반포IC에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방면으로 꺾인 선형의 도로를 건설했다. 즉 현재의 현충로사평대로가 1년간 경부고속도로 구실을 하였다.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됨으로 인하여 1979년 1월에는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에 준공하였는데, 기존 교량과 같은 규모의 설계에 의하여 중지도∼한강로의 소교 구간(북측)은 기존교량의 동쪽을, 중지도∼노량진의 (남측) 대교 구간은 기존 교량의 서쪽을 확장하였다. 종전의 폭을 20m에서 40m로 확장하여 쌍둥이 교량으로 탈바꿈하였으며 그 이름도 예전의 한강인도교에서 한강대교로 개칭하였다.
한강대교 남단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 노들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노량진로상도터널이 있는 양녕로와 연결된다. (흑석동 방향은 하단에 기술함.) 북측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수도권 전철 1호선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이 있는 용산역이 있으며 이 근처에 '용던'이라고 불리는 용산 전자상가가 있다. 남단측에서 강을 따라 상류로 가는 흑석동 방면 차도 진입은 상도터널 위쪽 어깨길로 우회하거나 노량진로를 통하여 P턴하듯 노들고가를 타야 한다. 또한 남단측에서는 노들길 김포공항방향(하류쪽)으로 바로 합류가 가능하나 상류측 합류는 불가능하며, 88올림픽강변대로로는 합류하는 길이 없으므로 노들길 혹은 흑석로를 경유하여 진입해야한다. 북단측에는 강변북로 진입로도 이어져 있으며 동향(상류쪽) 서향(하류 인천쪽) 모두 쉽게 합류가 가능하다.
과거에는 북측에도 남측에도 모두 고가차도와 크로스 되었었기에 다리에 진입하는 지역 근처의 조망이 좋지 않았으나, 2010년 전후로 모두 철거하여 현재 시야가 좋아진 상태. 남측의 경우 노량진역과 연결되는 고가는 정화사업으로 철거되었고, 노량진북고가차도는 2020년 철거 예정이나 일부 구간을 존치하여 보행 육교로 활용할 예정이다.
2013년, 이곳에도 마포대교에 이어 서울특별시와 삼성생명이 함께 자살방지 캠페인으로 생명의 다리를 설치했다. 하지만 수년 운영중에 몇가지 사회적 이슈와 함께 2015년 5월부로 삼성생명이 계약을 연장하지 않아 모두 철거될 예정이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한강대교 위에 보행교를 놓게 된다. 보행교는 노량진 방향으로는 2020년에 철거될 노량진북고가차도의 존치 구간, 노들섬 쪽으로는 보행육교와 연결된다. 남단의 아치 구조를 이용해 기존 차도 사이 상층부 공간에 노량진과 노들섬을 잇는 길이 500m, 폭 10.5m의 보행교를 놓는다. 뉴욕브루클린 대교처럼 1층은 차도, 2층은 보행로로 운영된다.#
2020년 8월 6일 오전 11시 폭우로 인해 홍수주의보가 발령되었다. 2011년 7월 홍수주의보 이후 9년만이다. #
2020년 9월 10일부로 서울특별시 시도등록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

2.1. 한강대교 폭파




3. 한강대교를 경유하는 버스 노선



[1] 사람이나 자동차가 다니도록 놓은 다리[2]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년 전이다. 이 당시 총 공사비는 843,000원이 소요되었다.[3] 아무래도 옛날에 비해 이제는 한강다리가 많이 늘어났고 나룻배는 타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어서, 굳이 자주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한강대교를 측정지점으로 삼냐는 불평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한강이 얼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만한 지명인 '여의도 63빌딩 앞'이나 '노량진' 같이 지명으로 표시하기를 요구하지만, 한강의 수온은 측정지점에 따라 달라지기 쉬운데다 위치에 따라 결빙여부 판단도 크게 갈릴 수 있어 어렵다. 당연하지만 통계는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에 의해 측정된 것임이 보장되어야 작년과 올해의 값을 비교할 수 있다.[4]광진교/천호대교[5]한남대교[6] 강화도 조약이후 인천항이 개항되어 인천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자 경인축의 수요가 폭주하였고, 여기에 기존 남부지방행 교통량이 더해졌으니 수운으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