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성지
1. 개요
경기도 안성시와 접하고 있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조성된 천주교 성지로, 지리적으로 서쪽은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도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으로 충북 진천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 순교성지는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태안반도 지령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의 서운산(547m)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예로부터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1] 인 데다가 충청 좌도와 우도,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어 박해를 피해야 했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배티 일대로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이며, 계속되는 박해로 이 지역 거주 신자들이 점차 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역대 전담신부
3. 배티성지 4가지 영성
3.1. 조선시대 박해기간 동안 교우촌 (한국 천주교의 카타콤(Catacomb))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온 프랑스인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1837년 5월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배티에서 성사를 주었고, 이로써 배티 교우촌은 충청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후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3] 을 거처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나 현재까지 확인된 기록에 나타난 교우촌만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에 이른다.
3.2.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 마을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4] 주교는 신부 시절이었던 1850년 대목구장 페레올 고 요한[5]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설립 지시에 따라 배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 교사(소성당 및 사제관 겸용)로 사용할 방 2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다.
다블뤼 교장 신부는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하다가 다시 교우촌 순방에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티 신학교를 맡게 되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며서 그들의 유학에도 힘을 써, 1854년 3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고 제천 배론 성지에 새 신학교가 설립되지만, 초가집으로 된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6] 신부, 페롱 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등이 오랜 동안 거쳐하며 사목활동을 했다.
1999년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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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사목 중심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면서 2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년 3월 1일~1861년 6월 15일)는 15살이었던 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 요동성당에서의 7개월 사목 활동 후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11년 6개월 동안 조선의 복음화에 일생을 바친 '''백색 순교자''' 또는 '''땀의 증거자'''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3념 여름 조선대목구 신학교 지도를 맡은 이후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요 본당으로 삼아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사목 순방이 끝나는 9~10월에는 배티 사제관에 거쳐하면서 저술에 몰두하여 글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어려 편의 <천주가사>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天主歌辭)’와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한 한글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지었다.
3.4. 복자 9위를 탄생시칸 순교자들의 본향
배티와 인근에는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소를 비롯하여 ‘6인 묘’와 ‘14인 묘’ 등 유명ㆍ무명 순교자 묘소가 산재해 있으며, 박해 시기 동안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 수는 34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놋점 출신 오반지 바오로와 배티 출신 장 토마스, 절골 출신 박경진 프란치스코 등 8명과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4. 성지 현황
충청북도가 2011년 3월 4일 배티성지의 ‘조선교구 신학교지’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소’ 그리고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 등 3곳을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하면서 충청북도와 진천군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성지 개발에 들어갔다.
성지 들머리 주차장의 조립식 강당이 있던 자리에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2011년 4월 15일 가졌고, 2012년 4월 15일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고딕 양식 기념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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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2012년 10월 10일에는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와 박해시대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보여줄 최양업 신부 박물관 기공식을 가졌고, 2014년 4월 11일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순례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최양업 신부 성당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새로 조성하고, 복원된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된 초가집 마당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복녀 이성례 마리아 흉상을 새로 제작해 설치하였다.
또한 배티 일대에 산재한 15개의 박해시대 교우촌을 산길로 잇는 배티 순례길 조성 및 삼박골 피정센터 등도 추진하고 있다. 관련기사
배티성지에 있는 성모상들은 거의 모두가 역시 충북에 위치하는 감곡 매괴성당의 '칠고의 성모상'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매괴성당에서 주임 신부로 재직했던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가 배티성지로 부임한 기간 동안에 추진된 것이었다.
4.1. 각종 행사
- 배티은총의 밤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ㆍ시성을 지향으로 매월 첫 주 토요일에 열리는 신심행사
늦은 6시 30분부터 고해성사 및 촛불 묵주기도(부), 토요 특전 미사 (2부), 성시간 및 치유 예절(십자가 보목 친구) (3부), 간식 (4부)로 늦게까지 진행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는 없고[7] , 영성관을 이용하여 하룻밤 자거나, 인터넷 포털 다음에 개설된 김웅렬 신부님 카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로 들어가면 지역 소모임방에 운행하는 버스 정보가 있으니 이용할 수 있다.
- 배티성지 라틴어 미사
2달에 1번 짝수 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에 라틴어 미사가 봉헌되며 누구나 참례할 수 있다.
- 배티성지 순례길 산행
산행은 매월 둘째 주일 점심 식사 후 산행과 묵주기도 5단 봉헌으로 진행된다.
5. 출처
- 가톨릭 정보 – 성지
- 배티성지 홈페이지 – 성지 소개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