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image]
[clearfix]
한국 천주교의 순례지 중 한 곳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 위치해 있다.[1] 본당은 청주교구 감곡성당.[2]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와 국내의 더불어 성모성지로 이름이 높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순례지'''일 뿐. 한 등급 위인 '''성지는 아니다.''' 하지만 신자들 사이의 인지도는 웬만한 성지들과 대등한 수준이다.
매괴(玫瑰)는 중국어로 '메이구이'라고 읽으며 장미꽃이라는 뜻이다. 로사리오의 중국식 표현이다.
감곡 본당은 '''1896년 설립'''되어 무려 128년이나 되는, 의외로 꽤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주임 신부는 프랑스 출신의 임 가밀로 신부'''로, 초기 한국 천주교와 관련이 깊은 파리 외방전교회[3] 소속. 1893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 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성당이 사목지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게 되었다. 임 가밀로 신부는 이곳이 성당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임 가밀로 신부는
문제는 그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 민씨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다는 것.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면서 의병들이 사용하게 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image]
프랑스식 본명은 카미유 부이용. 초대 본당 주임신부였으며 51년 동안 한국 땅에서 생활하며 어머니가 선종했을 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임 가밀로 신부는, 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의 신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독실한 성모신심으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다음 해에 바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발령이 나기 전 오지[4] 로 가는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가서 기도했는데, 그 때 리지외의 테레사(통칭 소화(小花. '''작은 꽃''') 테레사) 수녀와 만나 영적 남매 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꾸준히 이어져, 그녀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고 성녀로 시성된 후, 소화 테레사의 성상을 감곡 성당 내에 모시기도 했다. 그 성상은 지금도 감곡성당 내에 있다.
부임하고 신자들에게
먼 이국 땅으로 가는 아들을 위해, 임 가밀로 신부의 어머니는 선물로 '''기적의 패'''[5] 를 한 보따리 안겨주며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직접 제작한 루르드의 성모상과 기적의 패를 한 보따리 들고 조선으로 입국했다.
전술한 것처럼 여주 부엉골에 부임한 임 가밀로 신부는 민응식의 집을 보고 성당을 세울 결심을 하지만, 당시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쥔 민응식은 상상도 못할 가격을 불렀다.[6] 이에 돈이 없는(…) 임 가밀로 신부는 "저 땅에 성당을 세우게 해서 당신께 봉헌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성모 마리아께 청하면서 밤에 몰래 '''민응식의 집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민응식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땅을 팔게 되었고,''' 이것은 거래문서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땅을 얻어 신이 난(…) 임 가밀로 신부는 즉시 성당을 지었다. 짓기 시작할 때는 "강북에는 명동성당, 강남에는 감곡성당"을 모토로 명동성당과 똑같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는 도중 일제가 자재를 공출해 가면서 훨씬 작은 모습이 되었다. 마치 명동성당의 자식 같은 느낌으로, 외양은 똑같지만 크기는 아담하다.
임 가밀로 신부의 독문무공이자 절세신공(…)인 '''기적의 패 땅에 심기'''는 이후 일제가 성당 뒷동산에 강제로 신사를 세우려고 하던 때에도 발휘되는데, 일제의 만행을 본인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자 임 가밀로 신부는 '''"당신께서 주셔서 성당을 지어 봉헌한 거룩한 땅이니, 당신께서 지켜 주십시오!!"'''라고 하며 또 밤에 몰래 신사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 신사 공사만 하려 하면 야생동물들이 떼거지로 나타나 방해하거나, 억수같은 비가 내리거나, 인부의 팔·다리·손가락(…) 등이 부러지는 안전사고들까지 겹쳐 공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신사 공사는 철회된다.'''
복지부동의 표본을 보여주던 일제강점기의 한국 천주교에서도 임 가밀로 신부는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고,''' 이에 서대문형무소에도 3번이나 수감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명목상 프랑스와 일본이 동맹이었기에 그 이상의 처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프랑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임 가밀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죽게 해 주시오."'''고 말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임 가밀로 신부는 칼을 찬 일본제국 경찰들과 함께 감곡성당으로 돌아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가 끝나고 엉엉 우는 신자들 앞에서 일본제국 경찰들이 칼을 빼들었는데… 돌연 성당 문이 벌컥 열리며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목숨을 건진 임 가밀로 신부는 그 뒤 2년간 더 사목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라는 유언과 함께 선종했다. 유해는 성당 인근 야외에 모셔젔다가 83년에 성당 내 벽제대 아래에 모셔왔다.
[image]
감곡성당 내부의 성모상. 앞서 설명했듯이, 루르드에서 제작되어 설립자인 임 가밀로 신부가 설치했다.
8.15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터가 좋은(…) 감곡성당의 위치는 남하한 북한군의 진지가 되었다. 이 때 '''성당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북한군에게 여러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도깨비불 같은 것이 나타나 날아다니거나, 잘 서있던 성수대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등등. 두려움에 떨던 북한군은, 성당 안 제대 위에 위치한 성모상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성가대석에 올라가 성모상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분명히 석고로 되었기에 총알 한 방 맞으면 산산조각 나야 할 성모상이 금강불괴를 시전했는지(…) 멀쩡히 서 있었다고 한다. 물론 가슴에 총알 구멍은 난 상태. 이에 북한군은 6발을 더 쐈고 성모상은 몸에 총 7군데의 총상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래도 부서지지 않자 북한군은 성모상을 직접 부수기 위해서 사다리를 놓고 망치를 들고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엄청나게 환한 빛을 비추어서 북한군이 놀라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질려버린 북한군은 '''"성당 내에 우는 여자(…)가 있어서 못 살겠다!!"'''며 성당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후퇴할 때 감곡의 사람들을 납북하려 했던 북한군이었으나, 그 이전에 동네 사람들은 죄다 성당으로 피신했다. 성당 내 우는 여자(…)에게 겁을 먹은 북한군은, 성당 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끌고 가지 못하고 그냥 후퇴했다고 한다.
이후 이 성모상은 '''수난받은 성모상, 성모 칠고(七苦)를 상징하는 성모상'''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8]
사실 이런 것은 가톨릭 내에서도 꽤나 신심이 열정적인 사람들이나 알던 사실이었으나, 2000년대 중반 무렵, '''감곡성당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감곡성당은 납골당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역의 어떤 곳과 트러블이 일어났다. 결국 그것을 해결하지 못해서 무리한 사업추진과 더불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이런 초유의 사태에 천주교 청주교구는 교구 내의 유명한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를 그곳으로 급히 부임시켰고,[9][10] 김웅렬 신부는 갑작스럽게 진천성당 주임신부에서 감곡성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게 된다. 김웅렬 신부에게 "1년에 발생하는 이자만 좀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부임하는 날부터 사채업자들이 들들 달달 볶아대고 사무장을 폭행, 또 납골당 문제로 신자들도 분열된 상태에 엄청난 빚을 해결할 방도도 보이지 않고, 지인들은 김웅렬 신부가 돈 달라고 할까봐 전화도 받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체중이 1달 사이에 10kg가 빠져버린 김웅렬 신부는 한때
'''"야밤에 보따리 싸고 튀자!!"'''
…라는 생각까지도 했지만, 일과 기도를 하던 중에 "'''너마저 나를 버릴 셈이냐!''' "라는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는, 마음을 돌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열정적으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평소 성모신심이 깊었던 김웅렬 신부는 감곡성당의 유래와 그 신심, 루르드와의 관련 등을 연구하고 공부, 또 본인이 활발하게 강연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감곡성당과 수난받으신 성모님의 이야기, 임 가밀로 신부의 영화같은 이야기들을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에 눈물 콧물을 질질 짠(…) 신자들의 엄청난 방문이 이어지게 되며, 삼삼오오 모은 그 신자들의 코묻은 헌금으로 '''30억이 넘는 빚을 1년 반만에 모조리 갚았다'''고 한다. 알렐루야~
그리고 빚 다 갚았다는 증서를 교구청에 보내자, 빚 갚을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장봉훈 가브리엘 청주교구장 주교는 어리둥절하며 "이게 뭐냐"고 김웅렬 신부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김웅렬 신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울먹이며 "볼 것도 없이 그곳은 성모님이 계신 곳"이라며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모 순례지로 선포'''했다.
이에 신이 난(…) 김웅렬 신부는 평화방송에 장기출연하며 이런 사실들을 더 홍보했고, 더 많은 사람들, 게다가 개신교 신자들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자 30억이었던 감곡성당은 김웅렬 신부가 배티순교성지 전담신부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었을 때는 '''흑자 7억…''' 대단하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으로 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감곡성당은 루르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공식 인증되었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 전대사 성당으로 감곡성당을 지목해서, 1년 동안 하루에 1번씩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특전을 누리게 되었다.
로마 성모 대성전의 대사제 버나드 프랜시스 로 추기경은[11] 감곡 성모 순례지를 로마 대성전과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전과 성모 순례지로 인증, 지정했고 2009년에는 사도좌 내사원장 스탠포드 추기경이 전대사 특전을 부여했다.
아래 목록은 1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전대사. 단체순례시, 혹은 신자 1명이 1년에 하루 날을 잡아 순례할 때, 아래의 조건들 하에서는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유효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알겠지만 이런 전대사 특전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또한 7년간 유효한 전대사, 즉 2015년 6월 8일까지 추가로 유효한 전대사 조건은 이러하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만족시키고 아래와 결합할 경우 해당 신자에게는 전대사의 특전이 주어진다.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전 주임 신부는 배티순교성지 전담신부로 발령이 나서 현재는 없지만[12] 아직도 꾸준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성모순례지로, 한적한 뒷산과 조용한 시골 분위기로 인해서 신자가 아니더라도 방문하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당 부지뿐만 아니라 산 자체도 성당 재산이다. 물론 울타리 쳐 놓고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가볍게 마실 나오는 경우도 많으나, 기본적으로 성당의 땅이며 기도하고 묵상, 산책하라고 개방한 것이니 거기 가서 소란을 피우거나 놀고 먹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성당 뒷산 정상에는 무려 15m짜리 십자고상이 감곡 전체를 내려다보는 형태로 세워져 있고, 옆에는 임 가밀로 신부가 성체강복을 하는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뒷동산에는 보기 드문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는데, 2000년대 중반 죽어가서 다 베어내고 만든 것.
경내에 역대 신부들의 유물과 기록들을 모아 놓은 작은 박물관이 있다. 성체거동을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과 램프 영사기[13] 등 신기한 것도 다수.
성당 아래 매괴여자중학교와 매괴고등학교는 성당 부설로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유서 깊은 학교다. 천주교회가 문맹퇴치와 함께 우리말을 가르쳐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도 민족의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공헌하는데 기여하였다.
점심시간 같은 쉬는 시간 때에 학생들이 뒷문을 통해 성당에 와서 쉬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뒷문이 폐쇄되고 성당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감곡까지 직통으로, 약 1시간 40분만에 가는 버스 노선이 있어서 대중교통 편을 이용하여서도 의외로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점이 장점. 정류장에서 내려서 다리만 건너가면 금방이다. 중부내륙선이 개통하면 감곡역을 통해서도 갈 수 있다. 고속도로로 접근할 경우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IC에서 내려서 들어갈 수 있다.
매년 10월 첫 목요일마다 이곳에서 청주교구 성체현양대회가 열린다. 미사와 성체 거동[14] 을 거행하는데,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체 거동을 거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참례한다면 신자로서는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10월 4일에 100차 성체현양대회가 거행되었다.
2018년 10월 루르드의 것을 본뜬 성모 동굴이 완성, 축성되었다. 같은 날 거행된 100차 성체현양대회와 함께 이루어져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94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이고, 주변이 조용한 전원 지역이라서 그런지, 드라마의 촬영 배경이 되기도 했다. SBS 드라마 용팔이 등이 대표적.
[clearfix]
1. 개요
한국 천주교의 순례지 중 한 곳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 위치해 있다.[1] 본당은 청주교구 감곡성당.[2]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와 국내의 더불어 성모성지로 이름이 높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순례지'''일 뿐. 한 등급 위인 '''성지는 아니다.''' 하지만 신자들 사이의 인지도는 웬만한 성지들과 대등한 수준이다.
매괴(玫瑰)는 중국어로 '메이구이'라고 읽으며 장미꽃이라는 뜻이다. 로사리오의 중국식 표현이다.
2. 유래
감곡 본당은 '''1896년 설립'''되어 무려 128년이나 되는, 의외로 꽤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주임 신부는 프랑스 출신의 임 가밀로 신부'''로, 초기 한국 천주교와 관련이 깊은 파리 외방전교회[3] 소속. 1893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 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성당이 사목지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게 되었다. 임 가밀로 신부는 이곳이 성당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임 가밀로 신부는
라고 기도하였으며, 부엉골로 돌아가서 성모 마리아께 끊임없이 청하였다.'''"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 민씨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다는 것.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면서 의병들이 사용하게 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3. 임 가밀로 신부
[image]
프랑스식 본명은 카미유 부이용. 초대 본당 주임신부였으며 51년 동안 한국 땅에서 생활하며 어머니가 선종했을 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임 가밀로 신부는, 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의 신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독실한 성모신심으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다음 해에 바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발령이 나기 전 오지[4] 로 가는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가서 기도했는데, 그 때 리지외의 테레사(통칭 소화(小花. '''작은 꽃''') 테레사) 수녀와 만나 영적 남매 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꾸준히 이어져, 그녀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고 성녀로 시성된 후, 소화 테레사의 성상을 감곡 성당 내에 모시기도 했다. 그 성상은 지금도 감곡성당 내에 있다.
부임하고 신자들에게
라는 명언을 했다.'''"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먼 이국 땅으로 가는 아들을 위해, 임 가밀로 신부의 어머니는 선물로 '''기적의 패'''[5] 를 한 보따리 안겨주며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직접 제작한 루르드의 성모상과 기적의 패를 한 보따리 들고 조선으로 입국했다.
전술한 것처럼 여주 부엉골에 부임한 임 가밀로 신부는 민응식의 집을 보고 성당을 세울 결심을 하지만, 당시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쥔 민응식은 상상도 못할 가격을 불렀다.[6] 이에 돈이 없는(…) 임 가밀로 신부는 "저 땅에 성당을 세우게 해서 당신께 봉헌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성모 마리아께 청하면서 밤에 몰래 '''민응식의 집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민응식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땅을 팔게 되었고,''' 이것은 거래문서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땅을 얻어 신이 난(…) 임 가밀로 신부는 즉시 성당을 지었다. 짓기 시작할 때는 "강북에는 명동성당, 강남에는 감곡성당"을 모토로 명동성당과 똑같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는 도중 일제가 자재를 공출해 가면서 훨씬 작은 모습이 되었다. 마치 명동성당의 자식 같은 느낌으로, 외양은 똑같지만 크기는 아담하다.
임 가밀로 신부의 독문무공이자 절세신공(…)인 '''기적의 패 땅에 심기'''는 이후 일제가 성당 뒷동산에 강제로 신사를 세우려고 하던 때에도 발휘되는데, 일제의 만행을 본인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자 임 가밀로 신부는 '''"당신께서 주셔서 성당을 지어 봉헌한 거룩한 땅이니, 당신께서 지켜 주십시오!!"'''라고 하며 또 밤에 몰래 신사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 신사 공사만 하려 하면 야생동물들이 떼거지로 나타나 방해하거나, 억수같은 비가 내리거나, 인부의 팔·다리·손가락(…) 등이 부러지는 안전사고들까지 겹쳐 공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신사 공사는 철회된다.'''
복지부동의 표본을 보여주던 일제강점기의 한국 천주교에서도 임 가밀로 신부는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고,''' 이에 서대문형무소에도 3번이나 수감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명목상 프랑스와 일본이 동맹이었기에 그 이상의 처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프랑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임 가밀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죽게 해 주시오."'''고 말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임 가밀로 신부는 칼을 찬 일본제국 경찰들과 함께 감곡성당으로 돌아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가 끝나고 엉엉 우는 신자들 앞에서 일본제국 경찰들이 칼을 빼들었는데… 돌연 성당 문이 벌컥 열리며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성모승천대축일이 포인트. 임 가밀로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게 해 달라고 한 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영화가 따로 없다. [7]'''신부님!! 사셨습니다!! 조선이 해방되었어요!!!'''
목숨을 건진 임 가밀로 신부는 그 뒤 2년간 더 사목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라는 유언과 함께 선종했다. 유해는 성당 인근 야외에 모셔젔다가 83년에 성당 내 벽제대 아래에 모셔왔다.
4. 해방 후
4.1. 칠고의 성모상
[image]
감곡성당 내부의 성모상. 앞서 설명했듯이, 루르드에서 제작되어 설립자인 임 가밀로 신부가 설치했다.
8.15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터가 좋은(…) 감곡성당의 위치는 남하한 북한군의 진지가 되었다. 이 때 '''성당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북한군에게 여러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도깨비불 같은 것이 나타나 날아다니거나, 잘 서있던 성수대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등등. 두려움에 떨던 북한군은, 성당 안 제대 위에 위치한 성모상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성가대석에 올라가 성모상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분명히 석고로 되었기에 총알 한 방 맞으면 산산조각 나야 할 성모상이 금강불괴를 시전했는지(…) 멀쩡히 서 있었다고 한다. 물론 가슴에 총알 구멍은 난 상태. 이에 북한군은 6발을 더 쐈고 성모상은 몸에 총 7군데의 총상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래도 부서지지 않자 북한군은 성모상을 직접 부수기 위해서 사다리를 놓고 망치를 들고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엄청나게 환한 빛을 비추어서 북한군이 놀라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질려버린 북한군은 '''"성당 내에 우는 여자(…)가 있어서 못 살겠다!!"'''며 성당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후퇴할 때 감곡의 사람들을 납북하려 했던 북한군이었으나, 그 이전에 동네 사람들은 죄다 성당으로 피신했다. 성당 내 우는 여자(…)에게 겁을 먹은 북한군은, 성당 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끌고 가지 못하고 그냥 후퇴했다고 한다.
이후 이 성모상은 '''수난받은 성모상, 성모 칠고(七苦)를 상징하는 성모상'''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8]
4.2. 부흥기
사실 이런 것은 가톨릭 내에서도 꽤나 신심이 열정적인 사람들이나 알던 사실이었으나, 2000년대 중반 무렵, '''감곡성당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감곡성당은 납골당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역의 어떤 곳과 트러블이 일어났다. 결국 그것을 해결하지 못해서 무리한 사업추진과 더불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이런 초유의 사태에 천주교 청주교구는 교구 내의 유명한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를 그곳으로 급히 부임시켰고,[9][10] 김웅렬 신부는 갑작스럽게 진천성당 주임신부에서 감곡성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게 된다. 김웅렬 신부에게 "1년에 발생하는 이자만 좀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부임하는 날부터 사채업자들이 들들 달달 볶아대고 사무장을 폭행, 또 납골당 문제로 신자들도 분열된 상태에 엄청난 빚을 해결할 방도도 보이지 않고, 지인들은 김웅렬 신부가 돈 달라고 할까봐 전화도 받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체중이 1달 사이에 10kg가 빠져버린 김웅렬 신부는 한때
'''"야밤에 보따리 싸고 튀자!!"'''
…라는 생각까지도 했지만, 일과 기도를 하던 중에 "'''너마저 나를 버릴 셈이냐!''' "라는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는, 마음을 돌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열정적으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평소 성모신심이 깊었던 김웅렬 신부는 감곡성당의 유래와 그 신심, 루르드와의 관련 등을 연구하고 공부, 또 본인이 활발하게 강연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감곡성당과 수난받으신 성모님의 이야기, 임 가밀로 신부의 영화같은 이야기들을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에 눈물 콧물을 질질 짠(…) 신자들의 엄청난 방문이 이어지게 되며, 삼삼오오 모은 그 신자들의 코묻은 헌금으로 '''30억이 넘는 빚을 1년 반만에 모조리 갚았다'''고 한다. 알렐루야~
그리고 빚 다 갚았다는 증서를 교구청에 보내자, 빚 갚을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장봉훈 가브리엘 청주교구장 주교는 어리둥절하며 "이게 뭐냐"고 김웅렬 신부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김웅렬 신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울먹이며 "볼 것도 없이 그곳은 성모님이 계신 곳"이라며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모 순례지로 선포'''했다.
이에 신이 난(…) 김웅렬 신부는 평화방송에 장기출연하며 이런 사실들을 더 홍보했고, 더 많은 사람들, 게다가 개신교 신자들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자 30억이었던 감곡성당은 김웅렬 신부가 배티순교성지 전담신부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었을 때는 '''흑자 7억…''' 대단하다.
5. 전대사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으로 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감곡성당은 루르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공식 인증되었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 전대사 성당으로 감곡성당을 지목해서, 1년 동안 하루에 1번씩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특전을 누리게 되었다.
로마 성모 대성전의 대사제 버나드 프랜시스 로 추기경은[11] 감곡 성모 순례지를 로마 대성전과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전과 성모 순례지로 인증, 지정했고 2009년에는 사도좌 내사원장 스탠포드 추기경이 전대사 특전을 부여했다.
아래 목록은 1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전대사. 단체순례시, 혹은 신자 1명이 1년에 하루 날을 잡아 순례할 때, 아래의 조건들 하에서는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유효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알겠지만 이런 전대사 특전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또한 7년간 유효한 전대사, 즉 2015년 6월 8일까지 추가로 유효한 전대사 조건은 이러하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만족시키고 아래와 결합할 경우 해당 신자에게는 전대사의 특전이 주어진다.
- 매괴 성모상 앞에서 전례에 참여했을 시
- 매월 첫 토요일 신심미사와 기도에 참여했을 때
6. 그 외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전 주임 신부는 배티순교성지 전담신부로 발령이 나서 현재는 없지만[12] 아직도 꾸준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성모순례지로, 한적한 뒷산과 조용한 시골 분위기로 인해서 신자가 아니더라도 방문하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당 부지뿐만 아니라 산 자체도 성당 재산이다. 물론 울타리 쳐 놓고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가볍게 마실 나오는 경우도 많으나, 기본적으로 성당의 땅이며 기도하고 묵상, 산책하라고 개방한 것이니 거기 가서 소란을 피우거나 놀고 먹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성당 뒷산 정상에는 무려 15m짜리 십자고상이 감곡 전체를 내려다보는 형태로 세워져 있고, 옆에는 임 가밀로 신부가 성체강복을 하는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뒷동산에는 보기 드문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는데, 2000년대 중반 죽어가서 다 베어내고 만든 것.
경내에 역대 신부들의 유물과 기록들을 모아 놓은 작은 박물관이 있다. 성체거동을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과 램프 영사기[13] 등 신기한 것도 다수.
성당 아래 매괴여자중학교와 매괴고등학교는 성당 부설로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유서 깊은 학교다. 천주교회가 문맹퇴치와 함께 우리말을 가르쳐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도 민족의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공헌하는데 기여하였다.
점심시간 같은 쉬는 시간 때에 학생들이 뒷문을 통해 성당에 와서 쉬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뒷문이 폐쇄되고 성당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감곡까지 직통으로, 약 1시간 40분만에 가는 버스 노선이 있어서 대중교통 편을 이용하여서도 의외로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점이 장점. 정류장에서 내려서 다리만 건너가면 금방이다. 중부내륙선이 개통하면 감곡역을 통해서도 갈 수 있다. 고속도로로 접근할 경우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IC에서 내려서 들어갈 수 있다.
매년 10월 첫 목요일마다 이곳에서 청주교구 성체현양대회가 열린다. 미사와 성체 거동[14] 을 거행하는데,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체 거동을 거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참례한다면 신자로서는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10월 4일에 100차 성체현양대회가 거행되었다.
2018년 10월 루르드의 것을 본뜬 성모 동굴이 완성, 축성되었다. 같은 날 거행된 100차 성체현양대회와 함께 이루어져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94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이고, 주변이 조용한 전원 지역이라서 그런지, 드라마의 촬영 배경이 되기도 했다. SBS 드라마 용팔이 등이 대표적.
[1] 여기까지 읽고서는 '아, 엄청 먼 시골이구나'하며 부담을 느껴서 선뜻 갈 마음을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미천을 흐르는 장호원교만 건너면 바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에는 장호원성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감곡터미널이 있고 동서울터미널로 나가는 시외버스도 자주 있어 쉽게 갈 수 있다.[2] 본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음성 감곡성당'으로 지정되어 있다.[3] 프랑스 파리에 본부가 있으며, 성모 발현 중의 한 곳인 '기적의 패 성당'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지하 경당에 가면 한국어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4] 당시를 생각하면 조선은 오지였긴 했고, 박해가 활발하던 시절에는 외국인 신부들 사이에서는 순교하러 가는 땅(…)이란 소리도 들었다.[5] 파리의 성모 발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만들어 착용하라고 지시한 패.[6] 쉽게 말해 안 팔겠다는 소리다.[7] 신자들만 알 수 있는 얘기(?). 대축일에는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기에, 신자들의 밀집도가 장난이 아니다. 어지간한 작은 규모의 성당도 신자들이 본당을 꽉 채우는 경우가 부지기수. 그래서 그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으니까, 주일미사 때처럼 대축일도 연령별로 시간대를 나누기도 한다. 게다가 교중미사는 보통 점심 직전에(11시경) 시작하고, 본당주임신부가 직접 집전하며, 이것저것 꼼꼼히 규정대로 하다 보니 한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렇게 되면, 정오에 항복방송이 나왔는데 당시 통신 미비로 걸리는 시간차를 감안하면, 대충 들어맞는다.[8] 성모 칠고는 본래부터 천주교 교리에서 전해져 오는, 성모 마리아의 7가지 수난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1) 아기 예수의 성전 봉헌 당시 사제 시메온으로부터 받은 수난 예언, 2) 헤롯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이집트로의 도피, 3) 어린 예수를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찾음, 4) 십자가를 지고가는 예수를 만남, 5)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지켜봄, 6) 예수의 죽음, 7) 예수를 무덤에 묻음으로 나뉜다. 이들 가운데 후반의 4개는 십자가의 길에도 포함된다.[9] 김 신부는 CPBC 평화방송 등의 천주교 미디어에서 여러 강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타 신부다. 비슷한 사례로는 인천교구의 차동엽 노르베르토 신부가 있다.[10] 그 유명한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도 암으로 선종하기 불과 한달 전 매괴 성당을 찾아가 김웅렬 신부와 함께 미사를 집전한 일이 있다.[11] 미국 출신으로 보스턴 교구장으로 재임하다가 2000년대 초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에 대한 책임이 불거지면서 교구장직을 사임했고, 이후 로마 성모 대성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도 그의 행적이 나온다. 물론 비판적으로.[12] 현재는 한번 더 인사이동하여 서운동성당 주임신부 겸 상당지구 지구장신부로 있다.[13] 광원이 콜맨의 석유 랜턴이다.[14] 성체를 성광에 안치하고 앞세워 행진하며 기도하는 천주교 전통의 신심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