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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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20년 12월 12일부터 방영하는 tvN 예능 프로그램이다.
본래의 방송명은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였으나 설민석의 하차 이후 방송명이 변경되었다.
2. 프로그램 구성
3. 출연진
3.1. 현 출연진
3.1.1. 은지원
3.1.2. 존박
코로나19 확진으로 임시 출연 중단.
3.1.3. 이혜성
3.2. 게스트
- 1회: 다니엘 린데만, 알베르토 몬디
- 2회: 새미 라샤드, 알베르토 몬디
- 3회: 다니엘 린데만, 동애영(董艾穎)[2]
- 4회: 알베르토 몬디, 줄리안 퀸타르트, 전범선
- 5회: 타일러 라쉬, 서민교 교수, 전범선
- 6회: 동애영, 다니엘 린데만, 전범선
- 7회: 알베르토 몬디, 다니엘 텐들러, 전범선
- 8회: 타일러 라쉬, 조관희 교수
3.2.1. 스페셜 강사
3.3. 하차한 출연진
3.3.1. 설민석
여러 논란으로 인해 3회를 끝으로 하차했다.
4. 방영 목록 및 시청률
- 닐슨미디어코리아 전국 기준. 빨간색은 최고 시청률, 파란색은 최저 시청률.
- 2화는 티빙에서 완전히 삭제되었고, 유튜브 티비엔 계정에 올라온 강의 요약 영상도 내려갔다. 사실상 흑역사 취급된 걸로 보인다.
- 전문성 논란 때문에 4화에선 반일 관련 컨텐츠들로 방송하려고 했다. 일본의 잔학성을 부각하면서 반일감정을 자극해 자신의 잘못을 가리고 부활을 노린 것으로 보이지만, 논문 표절 사건으로 인해 그마저도 무산되었다.
- 1개월여만에 새롭게 시작한 4회에서도 5% 넘는 시청률을 보이며 생각보다 설민석 효과는 생각보다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설민석 하차 후 프로그램이 어떻게 변경될 지 궁금증이 반영된 시청률이기 때문에 다음 회차부터 반영된 시청률이 포스트 설민석에 대한 평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5. 비판과 논란
- 시청률에서 보다시피 화제성도 크나 성공적인 시청률과 다르게 첫회 분부터 지적이 나오며 비판 여론이 치솟았다. 전반적으로 자극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린 내용이 많았다. 게다가 2화의 경우 이집트 자문을 맡은 전문가가 프로그램이 자문 내용을 하나도 반영하지 않음은 물론 수준미달의 사실확인임을 지적하고, 자문 과정에서 제작진이 보여준 각종 추태[6] 까지 폭로하면서 제작진이 사과했다.(#)[7] 이후 프로그램명에 이름까지 들어간 진행자 설민석의 논문 표절 보도와 함께 그의 하차로까지 이어졌다.
- 설민석이 하차 이후 그에게 가려져 있던 제작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6시간 장시간 녹화에 1시간 반 편집본이 방영이 되다 보니 시대 배경 설명도 빈약하게 편집했다는 점이다[8]
- 주제 설정도 자극적인 주제들로만 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4화 페스트를 제외하고 모든 회차 전쟁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좋기는 하지만 1, 3화 같은 경우에는 강의 내용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는 굉장히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9] 이다.
6. 고증 오류
6.1. 1~3화 설민석 강의 편
6.2. 4화 페스트 편
4편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자문에 참여한 박흥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카파 공성전에 관한 자료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없으며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 흑사병이 발생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밖에 강의 전반에 깃든 중세에 대한 편견을 비판했다.
중세는 신본주의고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당대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으며[10] 인민주권, 권위의 상승이론과 같이 근대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상당수가 이미 중세 시대부터 오랫동안 준비되고 형성된 것들이었다.[11] 설령 흑사병이 그러한 개념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흑사병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이 전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래의 박흥식 교수의 논문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자선이 보편적 의무로 간주되었던 이전과 달리 흑사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빈민층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강화되었다.
중세인들이 신앙에만 의존하며 흑사병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거나, 근대초에 교황의 권위는 몰라도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등의 설명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린 것이다.
1347년 10월 초 제노바의 갤리선이 메시나에 흑사병을 퍼뜨린 이래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치명적인 전염병의 굴레에 빠져들었으며,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각 공동체들도 점차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 도시들이 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이 전염병이 전방위적으로 미칠 파괴력을 미리 가늠할 수 없었으며, 공동체의 지도층 가운데 다수가 희생을 당하여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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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 가운데 흑사병에 대한 도시의 대응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피스토이아이다. 이 도시는 인근 도시들이 흑사병으로 피해를 입자 그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보건위생규정 ’(Ordinamenta sanitatis)이라 이름붙인 법령을 제정하여 대응했다. 1348년 5월 2일 제정된 이래 6월 중 순까지 무려 세 차례나 개정된 이 법령은 당시 도시의 구체적인 대응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총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법령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조치는 피사나 루카와 같이 이미 전염병 발생이 확인된 지역을 방문하거나 그곳으로부터 도시로 진입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문지기들은 어느 누구도 비밀리에 잠입하지 못 하도록 철저히 경계를 서야만 했으며, 불법적으로 들어온 자는 발각되면 500 데나리우스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감염지역을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시 참사회의 특별 허가가 필요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품도 통제했으며, 특히 직물의 반입을 경계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보고했듯이 직물을 통해 오염된 독기가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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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흑사병 시기 도시정부가 시행하였던 여러 조치들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 일부 중북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는 그 이전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거리 청소, 비위생적 요소 제거, 위험인물 추방, 종교적인 속죄행진 등으로 질병에 대처했다 . 예컨대 피렌체의 1325년 도시법은 도시 내에서 동물의 가죽과 같이 악취를 풍기는 상품의 교역을 금지시켰고, 공적인 장소에서 도축도 금지시켰다. 정기적으로 시장과 도시 전역에 걸쳐 청소 작업도 행하여졌고, 분뇨 구덩이는 밤에만 비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독기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오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1348년 3월 피렌체에 흑사병이 발병하였을 때에도 앞선 시기의 환경개선조치들을 재차 실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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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이나 쓰레기를 치워 도시의 위생상태를 전반적으로 개선하고, 육류 및 생선의 찌꺼기 처리과정을 비롯하여 식료품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며, 흑사병 환자들을 수용할 특별병원을 한적한 지역에 건설하여 환자들을 효율적으로 격리시키고 치료하려 노력했던 점 등은 이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던 보편적인 조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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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중세 말기에도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공간이었지만, 근대 초까지 이어진 만성적인 흑사병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정부 당국은 전염의 위험성이 큰 빈민들을 도심의 공공장소와 중심가로부터 격리시킬 기회를 얻었다. 흑사병 환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던 조치들로 인해 빈민들과 하층계급은 도시 내에서 뿐만 아니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시 당국의 각종 통제조치들, 즉 출입금지와 위험한 인물에 대한 보고 의무, 빈민들과 떠돌이들에 대한 추방 등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띠었다. 흑사병은 근대 초 부랑자 및 빈민들에 대한 도시의 편견과 억압에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 결과 유랑민들의 삶은 더욱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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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널리 퍼진 신화, 즉 '과학자'와 '종교주의자' 사이의 장대한 논쟁을 묵인한다. 유감스럽게도 양 진영의 일부 구성원들이 오늘날까지 이런 신화를 지속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과학사가도 이러한 '갈등' 모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한다. 16세기와 17세기,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종교주의자'의 박해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진영이 존재하지 않았다. 박해와 갈등이라는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거나 아니면 과장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민간에서 지어낸 이야기다(갈릴레이에 관한 3장의 언급을 참고하라).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기를 바라는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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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M. 프린시프, 『과학혁명』
6.3. 5화 태평양 전쟁 편
- 5회차는 1~4화와 다르게 해당 회차를 감수했던 전공자와 함께 녹화해서인지 큰 오류는 없었다. 굳이 자잘한 오류를 손꼽자면 리틀 보이 투하를 설명할 때 진주만 공습 당시를 설명할 때 잘만 사용한 육군항공대란 단어 대신 아직 창설되지 않은 공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과 전쟁부(Department of the War)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의 직책을 오늘날 국방부 장관[12] 으로 잘못 설명한 것이 있다.
- 한반도 분단에 대한 설명 도중에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오류를 범했다. 단, 현재까지 남아있는 분단국가 중 외세에 의해 갈라진 국가를 의미하는 설명이면 맞는 말이다. 현재 한국 외의 분단국가로는 대만과 중국, 북키프로스와 남키프로스가 있다. 동독·서독은 이미 통일했으니 분단국가가 아니며, 중국의 경우 중국과 중화민국의 이념갈등으로 벌어진 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망명정부가 타이완 섬에 자리잡으며 중국이 분단된 것이다. 키프로스 분단의 경우 북부의 터키계가 남부의 그리스계 군부의 쿠데타에 반발하면서 촉발된 내전이 원인이며, 터키가 개입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역사적, 지리적으로 우리와 전혀 연관없는 민족인 미국, 소련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38도선을 경계로 분단시킨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방송에서 해당 오류가 미국과 소련의 합의하에 한반도를 분할통치한다는 내용의 퀴즈에 이어서 나왔으므로,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나 뉘앙스상으로 보나 외세에 의해 분단된 지구상 유일한 국가라는 설명이다.
7. 기타
- 이혜성의 경우 프리 선언 후 첫 고정 프로다.
- 생각보다 강의 전개 흐름이 굉장히 빠르다. 1회에 2개 정도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시간이 부족한지 배경설명이 굉장히 빈약한 편이다. 현대사는 앞뒤 배경설명이 중요한 편인데 1회 독일편에서도 대공황에 대한 설명이 빠진 것이 비판에서 나왔던 점이고 특히 3회에서는 중일전쟁에 대한 배경 등도 굉장히 간략하게 넘어가 아쉽다는 평이 있다.
- 설민석이 논문 표절 사건으로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로 하면서, 기촬영분인 4회는 미방분되었다. 물론 최태성[13] , 이다지처럼 방송가에 종종 얼굴을 비추는 다른 강사들을 기용해 방송 재개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러기엔 초반의 비난 여론이 커서 강사 초청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설민석 후임으로 들어오겠다는 사람도 없을 정도다.#
- 설민석의 이름을 걸었던 방송이기에, 해당 포맷의 프로그램이 다시 진행되면 프로그램의 이름은 교체되었고 설민석 체제의 형식은 종영되었다고 보면 된다.
- 2021년 1월 30일에 방송을 재개했으며, 당분간은 스페셜 강사로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