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1. 개요
2. 상세
3. 연표
3.1. 선사시대 ~ 통일 이전
3.2. 고왕국 시대 (기원전 32~22세기/제1~6왕조)
3.3. 제1중간기 (기원전 22~21세기/제7~10왕조)
3.4. 중왕국 시대 (기원전 21~18세기/제11~12왕조)
3.5. 제2중간기 (기원전 18~16세기/제13~17왕조)
3.6. 신왕국 시대 (기원전 16~11세기/제18~20왕조)
3.7. 제3중간기와 고대 이집트의 종말(기원전 11세기~4세기, 제21~31왕조)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이집트/역사에서 고대 이집트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상세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거기서 발달한 데에는 나일 강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는데,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청나일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 5월경에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10월쯤에 나일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강의 범람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강물로 인해 잠겨있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는 농경사회를 이어나가기에 좋은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년 정도 전(약 B.C. 3,600년, '''기원전 36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1]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유럽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하였다.'''[2] 2016년도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즉, 기원전 5316년 시기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사 참고
약 B.C. 3100년경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였다. 다만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여하간 이집트 사람들이 단군처럼 믿고 있는 것은 메네스이다. 이후 널리 알려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3]
정말이지, 유구한 역사로 인류 역사에서 최강의 자리를 가장 오래 차지하고 있던 나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성립 이후부터 역사를 계산할 경우 '''이집트가 인류 최강의 문명집단이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더 길다.'''[4]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B.C. 2200년경까지의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이후부터 힉소스인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 아시리아에 정복당할 때까지의 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냐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피라미드가 처음 건립된 시기부터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던 시기 사이 간격보다 클레오파트라가 있던 시기와 'iPhone이 출시된 시기 간격이 더 짧다.
실제로 고대 로마 시절 로마인들에게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 문화 유적'''으로 취급받았으며, 그 시절에 이미 관광코스였다. 그 고대 로마인들이 남긴 건축물들도 현대인들에겐 고대 문화 유적으로 취급받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그 간격이 긴지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다른 지역 고대인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사하라 이남 지역보다는 레반트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한 교역의 증가에 인한 상호 교류의 결과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의 접촉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3. 연표



3.1. 선사시대 ~ 통일 이전


선사시대에 이르면서 급격히 오른 기온에 따라 오늘날 사하라 사막 지방의 기후는 변하기 시작했다. 빙하기 때까지 사막이었던 사하라 일대는 BC 10000년 즈음부터 풀과 키 작은 관목으로 뒤덮히기 시작했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가 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생활 영역이 넓어졌다. 그러나 사하라 사바나는 지구 자전축 등의 변화와 BC 6000~5000년 전 있었던 급격한 기온 하강으로 다시 사막화가 진행되었다.[5] 그리고 이 사막화의 피난자들이 이집트와 오리엔트 문명의 건설자라는 설이 20세기 후반 이후 꽤 지지를 받고 있다.
이미 기원전 4400년경부터 나일계곡에서는 초기 문명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가령 대규모 원정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정복자의 기념물이라든가, 귀족의 것으로 보이는 화장용 파레트, 무기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문화는 '나카다 문화(Naqada culture)' 라고 부르는데, 4기까지 이르는 나카다 문화 끄트머리에서 이미 이집트 상형문자의 전신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기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게르제 문화(Gerzean), 나카다 제2기 - 기원전 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016년에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450km 거리의 소하그 지방 나일강 유역에서 기원전 5316년쯤 선왕조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도시와 고분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집트 땅에는 통일 직전에는 크게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으며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던 것을 통합한 것이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라는 인물로 그가 이집트를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이집트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기원전 3100년경의 일이다.'''

3.2. 고왕국 시대 (기원전 32~22세기/제1~6왕조)


통일 이후 약 천 년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하며, 피라미드가 등장하지 않는 전기 500년의 제1, 제2왕조는 초기왕조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집트를 통일하고 고왕국을 세운 것은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인데, 전갈모양 표식 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왕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오늘날 이집트 역사가들에게 동일 인물로 거의 확정받고 있으나 나르메르와 메네스가 부자지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스콜피온 킹(혹은 카) - 나르메르 - 메네스(=호르아하) 이런 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 혹은 스콜피온 킹 - 나르메르(=메네스) 이런 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인데 현대 이집트 역사가들은 후자 쪽을 더 신뢰하고 있다. 이후 1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트(Djet)가 구리 확보를 위해 시나이반도로 원정을 떠나는 등 왕국의 체계를 갖춘다. 수도는 아비도스.
고왕국 시대에는 수도는 멤피스였으며, 상하 이집트를 모두 다스리는 왕은 신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며 여러 거대 피라미드스핑크스를 건설했다. 이는 제3왕조 때 시작해 제4왕조에서 정점을 기록했다. 행정이나 예술 등의 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누비아 등에 군사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역사유적으로 유명한 것이 피라미드로, 가장 유명한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기원전 2550년쯤에 지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아직 청동기시대에조차 진입하지 못하였다.[6]

3.3. 제1중간기 (기원전 22~21세기/제7~10왕조)


제6왕조 시기에 이집트는 페피 1세와 페피 2세의 '''지나친 장수에 따라'''[7] 후계구도와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방의 총독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벌이는 급격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기근이 닥쳤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제1중간기라고 부른다. 로마의 군인황제시대 저리가라로, 70일간 70명의 파라오[8], 146년간 27명의 파라오가 설쳤다. 제9, 제10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만을 지배했다.

3.4. 중왕국 시대 (기원전 21~18세기/제11~12왕조)


약 140년간의 제1중간기의 혼란이 수습된 것은 제11왕조 시기로, 멘투호테프 2세의 통일 성공 이후 이때부터를 중왕국으로 분류한다. 중왕국 시기의 수도는 멤피스보다 상당히 상류에 있는 테베(오늘날 룩소르Luxor)로[9], 이 시기에는 파라오는 아메넴헤트 1세 이후로는 세누스레트(Senusret)라는 이름을 물려 사용했으며(1세 ~ 3세)[10], 고왕국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졌으며 아몬라(아몬 + 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도 누비아나 시리아, 리비아 등에 대한 군사원정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아시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미리 후계자를 파라오로 승격시켜 재위가 겹치는 공동통치를 구사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이 시대의 유물로는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 대표적인 문학 저서는 '아메넴히트의 대화'가 있다. 중왕국 시대의 파라오였던 아메넴히트가 암살된 후 아들 세소스트리트1세에게 영혼으로 나와 인간에 대한 불신과 견제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다.

3.5. 제2중간기 (기원전 18~16세기/제13~17왕조)


기원전 17세기경 전차 기술을 가진 힉소스인[11]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되었는데 이 시기를 제2중간기라고 부른다.
비록 나일 하류의 삼각주(델타)가 정복당했다고 하더라도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건재했으며, 이들은 힉소스 지배층에게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반항하면서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 힉소스인은 '''파라오를 자칭하였다.''' 그래서 힉소스도 100여 년 정도 존속한 15왕조로 인정된다. 15왕조는 테베에 있던 16왕조에 이어 17왕조와 혼인#을 맺기도 하였는데, 때문에 15, 16왕조의 둘, 혹은 넓게 잡아 17왕조까지의 셋을 힉소스계열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고 했는데 애초에 16~17왕조는 테베계열 출신이다(중왕국 자체가 테베의 지방 정권에서 시작한것이다.) 특히 17왕조는 힉소스 정권인 15왕조와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 과정에서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 2세(Seqenenre Tao II)는 힉소스와의 전투 중 사로잡힌 뒤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 결국 세케넨레 타오 2세의 아들이자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Kamose)의 동생인 아흐모세 1세(Amosis I)가 힉소스인의 정권을 1세기 정도만에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18왕조를 개창, 신왕국을 건설한다.
제2중간기는 정복당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아시아에서 수레, 청동기 등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온 시기이기도 했다.[12]

3.6. '''신왕국 시대''' (기원전 16~11세기/제18~20왕조)


[image]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강역.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남쪽으로는 하르툼에 이르는 거대한 강역을 자랑했다.
'''고대 이집트 역사 최고의 전성기.'''
이후 17왕조의 대를 이은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는 소말리아와의 무역로를 열었으며, 투트모세 3세는 메깃도 전투에서 아시아 각국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시아(중동)의 시리아, 레바논 지역 등을 점령하여 신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제18왕조는 270년을 존속했으며, 특히 말기의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톤)는 아톤신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투탕카멘이 바로 아케나톤의 후계자. 그 이후 110년간 이어진 제19왕조에서 람세스 2세 때는 최전성기로 유명하다. 오리엔트의 양대강자로 히타이트카데시 전투에서 맞붙기도 했다.
한편 람세스 3세 시기에는 인류 역사상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람세스 3세의 장례신전을 짓는 공사 도중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예정이던 봉급을 주지 않자, 노동자들은 봉급을 주기 전에는 일을 할 수 없다며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은 성공했으며 노동자들은 밀린 봉급을 정상적으로 받았다.

3.7. 제3중간기와 고대 이집트의 종말(기원전 11세기~4세기, 제21~31왕조)


바다 민족 영향기에 이집트는 제21-22왕조의 하 이집트와 제23왕조의 상 이집트로 분열되었다. 이 혼란기에는 결국 바다 민족의 리비아와 누비아의 이민족 왕조가 들어섰다. 리비아 출신의 소센크 1세(제22왕조, 기원전 945~기원전 924년 재위)와 누비아 출신의 피예(제25왕조, 기원전 747~기원전 716 재위), 사바코(기원전 716~기원전 702년 재위)가 대표적 인물로 각각 하이집트와 상이집트 중심의 패권체제(+이집트 내의 주변 도시국가의 조공체제)를 일시적으로나마 유지시켰다. 이 시기는 오리엔트 지역에서 후기 청동기 문명이 붕괴한 시기로서, 이집트 역시 상당한 시간 동안 국력의 쇠퇴를 겪었다.
누비아 흑인 출신의 쿠시왕조는 아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패권 다툼에 나섰으나, 에사르핫돈 왕의 침공으로 수도 멤피스와 하이집트 전역이 지배당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원한 건 직할이 아닌 이집트 도시 소국들의 조공이었으므로 얼마 안 가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쿠시 왕조는 멤피스의 회복을 꾀했으나 다시 빼앗기고 누비아의 나파타로 천도했고 이후 점차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후 철기 문명 시기로 진입하고, 기원전 7세기(664년)부터 말기왕조인 제26왕조(사이스 조, 상인왕조)로 약 140년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입김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시리아가 사라진 직후 기원전 525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완전히 복속(직할 통치)되었다. 이때 벌어진 그리스의 지원을 받은 반란도 실패로 돌아갔다. 페르시아에는 캄비세스 2세 같은 망나니도 있었고, 다리우스 대제크세르크세스 1세 휘하에서는 주요 영토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집트는 영토와 종교가 존중받았다. 그래서 이집트의 제27왕조와 31왕조는 아케메네스 왕가다.
이집트는 그리스의 성장과 페르시아의 쇠퇴에 따라 기원전 404~344년 아미르타이우스와 제28~30왕조가 짧은 독립기를 누리긴 했지만, 넥타네보 2세를 마지막으로 재병합 당했고, 그나마도 26년 뒤 다리우스 3세알렉산드로스 3세한테 망하면서 정복되어 헬레니즘 제국의 일부를 거쳐 마케도니아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 넘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와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32왕조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이집트는 전혀 다른 국가가 되기 시작한다.

4. 대중매체에서


고대 이집트가 워낙에 유명한 까닭에 고대 문명의 신비성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 등장하며 그럴 때마다 역사가 제멋대로 왜곡된다. 또 미라피라미드, 스핑크스 때문에 온갖 기이한 생물체들이 살며,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법의 도구가 발굴되고,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들어선 이계처럼 묘사되는 등 오리엔탈리즘초고대문명설의 대표적인 피해 문명이다.
파라오(게임)에선 고대 이집트의 도시들을 건설하는 목표로 플레이를 하게 된다.
유희왕에서는 멀쩡히 정체가 밝혀진 18대 파라오이름 없는 파라오가 되고 일곱 가지 비보(秘寶)로 석판에서 마물을 소환해 외침을 막는 기괴한 오컬트 나라로 변질되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 3부에서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숙적 DIO가 은거하고 있는 이집트로 원정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미이라 시리즈에서는 별의별 이상한 고대인고대 생물이 살고 있는 정신 나간 곳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집트 문명이라 하면 모랫빛으로 가득찬 무미건조한 건물들을 떠올리곤 하는데, 최근 발견된 바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는 알록달록한 벽화들로 가득차있었고,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역시 지금과 같은 모래색이 아닌 흰색 외장재로 둘러져 있어 실제 고대 이집트의 모습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대 이집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한편, 이런 고대 이집트의 모습을 반영한 몇 안되는 작품이 바로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이집트 왕자이다.
4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가장 유명한 고대문명을 갖고있는 만큼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꼬박꼬박 개근 출전중. 문명 5에서는 불가사의 건설시 생산력 20% 증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황제 난이도 이하로는 사기 특성이지만 불멸자 이상의 난이도로 가면 과학력이 딸려서 이 생산력 20% 증가 혜택을 보기도 전에 다른 문명들이 상위 테크 불가사의를 뺏어가버린다.
시리어스 샘에서는 첫 작품이 고대 이집트였고, 3에서는 현대 이집트로 전체 줄거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로도 유적지였던곳이 등장하지만 1에서는 대략적인 외관과 이름만 빌렸다. 3은 처음에는 카이로 시가지에서 시작하다가 유적지로 가는 구성이다. 3은 현지 취재를 한 등 어느정도 고증을 반영한듯한 모습도 있다.
대한민국의 워터파크오션월드롯데월드의 어트랙션 파라오의 분노가 고대 이집트를 테마로 제작되었다.
뚜렷한 개성이 있는 문명을 일구었기에 보드게임에서도 소재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가 태양신 라카멜 업.
[1] 여기서의 상하는 나일강의 상하류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북쪽이 위로 가게 그리는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 가까운 윗부분이 하이집트에 해당하고(지중해에서 지금의 카이로까지), 카이로 남쪽의 고왕국 당시의 수도인 멤피스부터 지금의 아스완 댐 근처의 급류지역(First Cataract 라고 불리는 지역)까지가 상이집트에 해당한다. 거기서부터 남쪽으로는 당시에는 이집트 본토로는 안 쳐주었다고 한다.[2] 사실 파라오라는 명칭이 대내외적으로 쓰인 건 BC 1500년을 전후한 중왕조 시기인데, 고대 이집트의 지배자=파라오라는 생각이 널리 통용되는 터라 그렇게 쓴다. 매머드는 북극해의 섬 몇몇에서 기원전 1700여 년경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3] 참고로 기자의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대는 이집트 문명이 시작 후 1,000여 년이 지난 시기인데, 이 시기의 한반도는 북부지방이 청동기 시대에 막 돌입한 시점이다. 한국도 전 세계에서 청동기 시대가 가장 일렀던 지역(고대에는 한 문명의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다가 현대에는 다수의 민족 및 국가의 영토로 갈라진 지역이 있어 지역이라고 칭함)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집트의 문명이 얼마나 일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고조선의 출발이 언제였는지는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언제였는지보다는 중국 한족(漢族)계 문명이 아님이 분명하고 한반도 북부와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는 요하-난하 유역의 문명 발달과 연관이 있다.[4] 이집트가 최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시기를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하는 시기로 상정할 경우. 또 중세에도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패자였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파티마 왕조, 맘루크 왕조를 비롯한 많은 무슬림 제국들의 중심지였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중요한 땅이었다. 근대에서도 중동에서는 역량 있는 지역 강국 중 하나이며,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국이다.[5] 독일포츠담 기후연구소는 이 사막화가 BC 4000년경에 300년간 급격히 진행되었다고 보기도 한다.[6] 고조선이 건국된 시기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는 알려져 있으나, 고조선 기원전 2333년 건국설은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는 설화다. 고려 중기에 일연이 야사를 기록하여 "여고동시"라고 기재하였고, 조선 초에 서거정이 동국통감에 "당요 무진년"이라 기록한 것에 따른 산출방법이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고조선 건국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료는 없었으며, 중국의 요순 시대보다 50년 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중국 설화에 얹혀서 연대를 늘리는 방향으로 창작한 것이다. "우리 역사도 중국에 뒤지지 않아"라는 식의 일종의 자존심 표출. 실제 건국 시기는 불확실하나, 대략적으로 훨씬 후대인 기원전 10세기~7세기경으로 본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이미 고대 이집트가 막을 내리는 시기이다.[7] 각각 재위하기만 50년, 94년이었다. 페피2세는 특히 태조왕을 더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이다.''' 여섯 살에 즉위해 '겨우' 99살에 죽었지만...여하간 존재 자체가 웬만한 왕조보다 길다(...). 하지만 다른 왕들의 재위가 하도 짧아서 제6왕조의 기간은 160년 수준에 불과하다.[8] 혹은 75일간 5명의 파라오. 여기서 70은 정확한 숫자보다는 동양에서의 100과 마찬가지로 많다는 뜻을 의미하는 듯하다. 많은 자칭 파라오들이 난립했다는 것.[9] 애초에 11왕조를 열은 멘투호테프 1세가 테베의 총독이었다. 이 왕조는 재상 아메넴헤트 1세에 의해 찬탈당해 약 150여 년 만에 망한다.(중왕국으로는 70년 만.) 12왕조는 210년을 간다.[10] 이것이 그리스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우스레트 여신의 남자"라는 의미라는 설도 있다.[11]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터키 등지에 속하는 지역에 살던 다수의 유목민 집단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인들과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성경창세기출애굽기의 내용에 근거하여 이들을 유태인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으나, 관련된 유물이 하나도 안 나와서 아직은 말만 그럴싸한 떡밥 수준.(출애굽의 타이밍은 힉소스의 침공 이전이란 의견, 힉소스의 침공이 곧 요셉의 도래라는 의견, 신왕국시대라는 의견 등으로 나뉘는데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참고로 힉소스의 어원은 외국 땅의 왕자(외지인)들이라는 "히카우 카슈트(Hikaw khasu)t"였는데, 이집트 사학자 마네토의 오류로 '양치기(목자,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오역하면서 유목민으로서의 "힉소스 민족"이란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힉소스 민족이란 곧 셈족이다.[12] 청동기 부분에서 "그럼 청동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집트인들은 무슨 도구 들고 싸웠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집트의 경우 순동기 사용기간이 상당히 길다. 이집트에서 구리를 가공해서 무기나 도구를 만든 흔적은 선왕조시대 유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청동가공법은 몰랐던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집트 내에서는 주석이 나질 않기 때문에 전량을 무역에 의존해야 했다. 단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도 크게 다르진 않은 상황이라 후대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영국에까지 가서 주석을 가져오곤 했었다. 헌데 힉소스 이전까지 이집트의 교역범위는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일대 정도로 극히 제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