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흑사병
Black Death, Plague | 흑사병(黑死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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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세기 '''흑사병'''(Black Death) 또는 '''역병'''(Plague, ''플레이그''), '''대역병'''(Great Plague, ''그레이트 플레이그'') 사태는 1346년에 유럽 동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353년까지 유럽 전역을 강타했던 대규모 전염병의 유행을 이른다.
이때 창궐한 질병의 원인균은 DNA 추적 결과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일 가능성이 유력하며, 일부 학계에서 에볼라 출혈열 등의 이견이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만약 14세기 직전의 소창궐과 15세기 이후 3차 대역병의 유행이 모두 같은 페스트의 창궐이었다면,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혔던 범유행전염병이 된다.[1]
사태 이전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에 달했으나, 대역병의 풍파가 지나간 후 15세기에는 3억 5천만으로 줄었다. '''최소 1억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2] 이외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전 세계적으로 2억 명이 넘는 사람이 같은 시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역사상의 한 기간에 발생한 사망자 통계 가운데 가장 급격한 증가이다. 특히 그 기세는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의 3년간 최고조에 달하여, 유럽 인구의 1/3에서 절반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했다. 지역에 따라 발병률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벨기에나 폴란드의 경우 사망률이 20%에 그쳤던 곳도 있으나, 보다 극심한 지역은 사망률이 80-90%까지도 집계되었다.
2. 명칭
본래 'Plague(''플레이그'')'는 그 자체로 '역병'이라는 뜻이었고 페스트 역시 같은 뜻이었으나, 사태 이후 사실상 중세 흑사병 또는 흑사병의 원인균을 칭하는 말로 변했다. 이를 사전적 의미와 구분하기 위해 'bubonic plague'라 칭하기도 한다.
중세 흑사병을 가리키는 'Plague'는 대문자로 쓰고 정관사 the를 쓰지 않는다. 즉, 'Plague'를 고유명사로 취급한다는 것인데, 거의 모든 인도유럽어족 언어에서 14세기 흑사병을 표현할 때에는 관사 없이 대문자로 표기하는 관습이 남아 있다. 그만큼 역병의 대표적 사례이자 많은 사람이 죽은 사태였다는 뜻이다. 이를 더 강조해서 '대역병', 즉 '그레이트 플레이그(Great Plague)'라고도 불린다.
3. 원인
중세 유럽을 휩쓴 이 역병의 원인균은 주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세 당시에는 현대와 같이 체계적인 의학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몇 가지 소수 가설도 있다. 치사율이 높은 여러 세균성 감염의 증후군이었다는 설, 에볼라 바이러스의 조상격 되는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다는 설,[3] 탄저병이 원인이었다는 설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이론은 역시 페스트균에 의한 감염이며, 특히 쥐가 옮기는 벼룩에 의해 페스트 균(''Yersinia pestis'')이 전파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4] 최근에는 북유럽·남유럽의 희생자들의 사체에서 추출한 죽은 세포의 DNA를 분석하여, 이들이 페스트균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있었던 모든 역병의 창궐이 페스트균의 단일적 소행임은 확실하지 않으나 페스트가 주축이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역병이 짧은 기간 내에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중세라는 시대적 한계에 따른 의학 지식의 부족과 그에 따른 행정적·제도적 미비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당시에는 현미경이 없었으며, 세균의 발견은 1676년 현미경을 처음 고안한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후크에 의해서야 이루어졌다. 예방 의학의 발달은 더욱 늦어서, 1877년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와 콜레라, 결핵의 원인이 박테리아임을 밝혀내기 전에는 이러한 역병이 미생물에 의해 일어났음을 알 길이 없었다. 중세의 위생관념은 현대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는데, 사체와 분변을 거름으로 사용했으며[5] , 흙으로 신체를 닦기도 했고, 벼룩이나 쥐 등 유해생물에 대한 방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인류가 손 씻기를 생활화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서였는데, 이전에는 의사가 시신을 부검하던 더러운 손으로 산모의 출산을 돕거나 감염된 환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다른 환자를 진료하기도 했다.[6]
보건 당국 역시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역병의 전파가 공기, 특히 더러운 냄새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으며, 거리에 불을 피워 공기를 태우려 하거나, 기독교 신학이 지배하던 시대상에 맞게 신앙의 힘으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감염자와의 접촉이 주된 전염 경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마르세유 지방의 경우, 감염지로부터 도항한 이주자에 대한 40일간의 구금을 통해 잠복기를 넘기는 방법으로 전염을 방지하려 했다. 영어로 검역을 뜻하는 단어 '쿼런틴(quarantine)'은 바로 이 40일간의 구금 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통제 조치는 신고하지 않은 보균자의 유입을 초래했으며, 감염자가 급증하여 1348년을 전후해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행정력이 마비되었다.
다만, 흑사병 하면 떠오르는 역병 의사의 복장 이미지는 플랫 에러처럼 현대인들이 가진 중세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 중세 유럽에서 까마귀 가면과 장코트를 입는 역병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상술했듯이 불로 공기를 태우는 등의 미신적 행위가 있었던 것은 맞으나, 까마귀 가면 복장은 이로부터 400년은 더 지난 17세기에 들어서 유행하던 미신으로, 대역병 사태와는 관련이 없다.[7]
4. 전파
역병의 전파 경로에는 여러 추측이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 혹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전염 루트는 다음과 같다.
- 몽골의 크림 반도 침공과 생물전
흑사병의 원인인 페스트균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기후 지대에 서식하는 쥐 등의 설치류에 기생하던 쥐벼룩을 중간 숙주로 하는 박테리아로, 몽골 제국의 킵차크 칸국 유목민들이 쥐와 접촉하면서 그 감염이 시작되었다. 1347년에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크림 반도에 있는 제노바의 식민도시 카파(페오도시아)를 침공하였는데, 제노바 시민과 몽골군 사이에서 공성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 부대는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 안으로 쏘아 보내는 일종의 생물학전을 시도하였다.[8] 중세 공성전 전술 가운데는 죽은 적군 시체나 동물 시체를 성 안으로 날려 보내는 전술이 존재했다. 비슷한 전법을 드라큘라 백작으로 유명한 블라드 가시공도 사용한 바 있다. 이러한 전투의 결과, 카파 시내에서 대역병의 시작을 알리는 감염이 발생하였다.
- 죽음의 배(Death ships) 사건
1347년 10월 경, 흑해에서 출발한 12척의 제노바 적(籍) 상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에 도착했다.[9] 그런데 선단의 선원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으며, 생존자 역시 전신을 광범위하게 뒤덮은 고름과 검은 부종을 보이며 죽어가고 있었다. 곧 주민들은 선원들이 끔찍한 괴질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칠리아 당국은 해당 선단을 즉시 항구에서 떠나도록 명령했으나, 그들이 떠난 직후 항구 주민들 역시 선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서 죽어나갔다. 괴질은 삽시간에 시칠리아 전체로까지 퍼졌으며, 주민들이 이탈리아 각지로 이동하면서 제노바, 피사, 그리고 베네치아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했다.
- 유럽 대륙으로의 전파
>[image]
>흑사병이 1348년 본 항구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었다.
>이 병으로 국민 전체의 30%에서 50%가 사망했다.
>
>영국 웨이머스 항에 새겨진 흑사병 동판
1347년 연말에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흑사병 감염이 보고되었다. 마르세유에서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감염자가 발생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에까지 퍼져나갔다. 1349년에는 영국의 웨이머스(Weymouth) 항에 흑사병이 도착하여, 수개월 뒤 런던을 거쳐 스코틀랜드까지 전파되었다. 1350년에는 북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 감염자가 발생했다. 감염은 인구가 밀집해 있던 대도시에서 특히 심했으며, 상대적으로 낙후하여 산촌 형태의 도시 구조가 유지되었던 곳에서는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유동 인구가 적었던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일대의 마을들, 또 최초 감염지에서 먼 내륙에 위치해 인구 유입을 차단할 시간이 있었던 벨기에나 폴란드 일부 지방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생존할 수 있었다. 이 유행은 1351년 이미 수천만 명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흑사병이 1348년 본 항구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었다.
>이 병으로 국민 전체의 30%에서 50%가 사망했다.
>
>영국 웨이머스 항에 새겨진 흑사병 동판
1347년 연말에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흑사병 감염이 보고되었다. 마르세유에서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감염자가 발생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에까지 퍼져나갔다. 1349년에는 영국의 웨이머스(Weymouth) 항에 흑사병이 도착하여, 수개월 뒤 런던을 거쳐 스코틀랜드까지 전파되었다. 1350년에는 북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 감염자가 발생했다. 감염은 인구가 밀집해 있던 대도시에서 특히 심했으며, 상대적으로 낙후하여 산촌 형태의 도시 구조가 유지되었던 곳에서는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유동 인구가 적었던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일대의 마을들, 또 최초 감염지에서 먼 내륙에 위치해 인구 유입을 차단할 시간이 있었던 벨기에나 폴란드 일부 지방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생존할 수 있었다. 이 유행은 1351년 이미 수천만 명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5. 유럽의 피해
행운은 우리에게 거의 미소짓지 않고, 다가오더라도 꽃이 지듯 재빨리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만에 빠져 자신이 불멸이라 착각하는 것을 방지하고 스스로 자제하며 살게 하려는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1348년, 그리스의 한 작가
흑사병으로 유럽은 수년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흑사병 떄문에 인구 7500만-2억 명,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몰살했다. 흔히 유럽인구의 1/3 정도가 죽었다고 언급하다. 사실 아시아에서도 맹위를 떨쳤지만 유럽에선 위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종말론 등으로 '인류 멸망 카운트다운' 정도로 여겨졌다. 거기에 중세 말기에 크게 성장한 도시들[12] 은 전염의 폭증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오 복받은 후손들아, 너희는 이 끔찍한 비통을 겪지 않고 다만 우리가 남긴 증언들을 우화로 읽겠지.
[11]
당시 유럽에서는 고양이를 나쁘게 보았다. 그래서 흑사병이 일어나자마자 그 책임을 고양이에게 돌려 마구 잡아죽였다. 쥐를 잡는 고양이가 줄었으니 당연히 쥐의 수가 폭증했고, 이는 전염병의 확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허나 유럽 사회가 비과학적인 방식으로만 흑사병을 다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유럽에서도 많은 의사[13] 들이 나름대로 환자를 격리시키고 환자가 사용한 물건을 태우는 등 방역조치를 취했고, 시체 운반인처럼 환자와 노출되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안면까지 완전히 덮는 마스크를 쓰고 일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역병 의사 참고.[14]
몇몇 자치도시들은 이러한 방역 조치로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특히 밀라노가 성공적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병자들을 격리하여 인구 15% 이하만이 사망했다.[15] 이 외에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도 질병 발생구역을 격리하고 외부 선박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그렇다 해도 인구가 밀집된 데다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대부분 시민의 반 내외가 사망했다.[16] 혹은 베네치아의 외딴 섬에 강제로 격리되어 버려지기도 했다.[17] 이 외에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등의 험준한 산간지방들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아이슬란드같이 인구가 적었던 곳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 [18] 폴란드 왕국은 이례적으로 국가 전체가 전염병을 크게 피해갔는데, 이에 대해 여러 가설이 있다. 첫째는 앞선 지역처럼 인구도 적고 띄엄띄엄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 국왕이 전염병의 정보를 듣자 빠르게 각 성에 봉쇄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시 폴란드와 보헤미아 지역은 쥐들이 적었다는 것이고, 이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달리 고양이를 잡아죽이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 의학수준이란 건 결국 거기서 거기였다. 대다수 치료법은 나쁜 피를 뽑아 체내의 균형을 맞춘다는 사혈요법이었고,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과학적 연구 역시 없었다. 일례로 1348년 10월 파리대학 의학부는 1345년 3월 20일에 화성, 목성, 토성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관측되었는데 이 떄문에 지구 대기에 치명적인 오염이 발생했고, 이것이 흑사병이 원인이라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의 의학수준은 현저히 낮았다.
애초에 치료도 불가능했을뿐더러 많은 사람들이 채찍질 고행단[19] 같은 행위에 합류했기 때문에 전 유럽의 인구는 큰 폭으로 감소했다.[20] 코니 윌리스의 소설 둠즈데이 북에 흑사병으로 한 마을이 전멸하는 과정이 생생히 그려졌다.
사망률이 극히 높았던 이유로 당시 유럽의 인구 과잉 또한 꼽힌다. 1150~1300년 사이 유럽 인구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경작지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인구가 더 빨리 증가했다. 부족한 경작지는 과도하게 분할됐으며, 일부 지역에선 자율적이었던 삼포제가 강제로 시행되거나 공동지 및 임야의 이용권이 제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인구밀집 지역에선 경지 부족으로 생산활동을 하지 못 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불황 속에서 격심한 기근을 겪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식단에서 전분의 비중이 높아지고 단백질 및 비타민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됐다. 영양실조는 면역력 저하로,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다.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사망률이 극심하게 차이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이유를 경제 사정과 식단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21]
중세 흑사병 창궐 원인으로 고양이를 악마의 동물로 여겨 씨가 마르도록 잡아댄 덕분에 고양이의 개체가 급격히 줄고, 상대적으로 쥐가 대량으로 번식해 대대적으로 병이 번졌다는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고양이와 개를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오류(?)를 터트려서 쥐의 천적이 사라져 결국 쥐가 더 번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주장인데 중세의 광신과 무식함이라는 편견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
우선, 중세 흑사병이 최초로 창궐하게 된 설 중 하나로 쥐벼룩 등 설치류 동물들과의 접촉을 꼽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초 접촉이며 흑사병은 '''엄연히 사람과 사람 간에도 전파가 되는 질병'''이다. 다시 말해 설령 중세 유럽에 쥐가 하나도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사람끼리 옮기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유기동물은 방치하면 공중위생의 심각한 위협이 되어, 흑사병 창궐의 원인이 될 확률이 높다. 동물 그 자체는 매개체가 되지 않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사체를 파먹거나 분변 등 오염물과 접촉한 뒤 그걸 그대로 퍼뜨리고 다닐 수 있다. 유해동물은 근대 의학이 들어선 후에도 구제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부당한 폄하이다.
전문가들 또한 이 의견을 원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세 흑사병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옮겨가는 전염에서 질병 매개체와 접촉하지 않도록 차단하고 환자를 격리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고양이, 개 구제령을 내리지 않았던 동아시아, 무함마드가 아낀 동물이라고 고양이를 즐겨 기르던 이슬람권도 큰 피해를 입었다.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서, 유행이 잦아든 후 유럽에는 다중 유산 상속을 받아 부유한 사람이 늘어나고, 인구가 크게 줄어든 탓에 노동자의 임금이 많이 상승하는 등 경제적 영향이 있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일꾼들이 식사 제공에 많은 돈을 요구했으며, 이를 제재하기 위해 왕이 제한 선을 그었으나 그러한 것들의 필요 없이 일꾼들이 많은 임금을 받았다.
이렇게 노동인구가 크게 줄어들자 중세 농노제와 장원제가 붕괴되었다. 르네상스와 거의 같은 시대지만, 흑사병 창궐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르네상스의 시작보다 약간 빠르다.
6. 유럽 이외 지역의 피해
- 흑사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에까지 퍼졌다. 북송~남송대 당시 중국의 인구는 1억을 돌파했으나 흑사병에 전란과 맬서스 트랩 등의 문제까지 겹쳐 6,000만 명대로 감소한다. 이 때문에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원나라가 흑사병과 여러 가지 막장 테크가 겹쳐 결국 급속히 멸망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14세기 초 청해-영하 지역에서 처음으로 흑사병 병원체가 발견되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건 다름 아닌 중앙아시아-몽골 지역에 있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이었다. 이미 이 지역의 오랜 이슬람화로 크게 세력이 약해져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해 가며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페스트가 이 교역로를 통해 전파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 공동체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만다.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22]
- 위의 교역로가 박살난 여파로, 원나라의 실크로드를 비롯한 고려, 베트남, 일본의 동아시아 국제 무역 파이프라인이 완전히 개박살난다. 그로 인해 현재의 달러 같은 역할을 했던, 그래서 각 국 정부가 국고에 채워놓았던 원나라 화폐 교초는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고 동아시아 세계의 경제는 몰락한다. 그나마 농업국가인 고려와 베트남은 어느 정도 버틸 만했지만, 흑사병이 제대로 퍼졌던 원나라와 농업 기반이 애매했던 일본은 대혼란의 시기를 겪는다. 이 때문에 발생한 도적떼가 홍건적과 왜구. 그리고 이 두 세력은 그나마 버티던 고려를 습격해 침입하여 그나마 버티던 고려의 국력을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버린다. 이 여파로 원, 고려, 가마쿠라 막부, 쩐 왕조가 멸망하고 명나라, 조선, 무로마치 막부, 호 왕조가 대두되었으니,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동아시아는 페스트로 인해 큰 변화를 겪었다 볼 수 있다.
- 코카서스 지방은 워낙 험준하고 교통이 안좋았기 때문에 확실히 피해가 덜하긴 했지만 참화를 피해가진 못했다. 그래서 흑사병에 걸렸다고 판명되는 사람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조금 몰인정한 처사라고 생각 될지 몰라도 위의 네스토리우스 공동체처럼 마을의 전멸을 피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집들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고 문과 창문도 없었는데, 일종의 공동 묘지처럼 쓰였다.[23]
- 중동에서도 마찬가지로 흑사병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중동권이 의학이 비교적 발전한 편이었다고는 하나, 현재도 페스트는 그리 만만하게 볼 질병이 아닌데 14세기 의학 수준으로 페스트에 맞서 효과적인 대처가 얼마나 가능했을지. 환자 격리 및 시체소각 등의 조치로 피해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으나 이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만다.
- 이집트가 그 타격이 심했다. 지중해 지역과 인도 지역에 모두 접한 이집트는 지중해 무역의 주요한 거점이었고, 이렇게 교류가 많다보니 당연히 전염병의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의 저자 윌리엄 맥닐은 여기에 이집트를 지배한 맘루크(Mamluk)에 의한 요인도 든다. 즉 이들이 노예를 구입하기 위해[24] 페스트가 처음으로 퍼진 흑해 연안과 지속적인 접촉을 가졌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1347~1349년 동안 이집트 인구의 1/3이 사망했다고 한다. 1340년대 최초 유행 이후 1517년까지 페스트 유행 횟수를 계산해보면 이집트가 31건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리고 시리아에 20회, 이라크에 1회로 그 차이를 확연히 볼 수 있다.
1347년 첫 번째 유행 당시 페스트는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들어와 나일 강을 따라 상 이집트(남부 이집트)로 진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약 50만에 달하던 카이로의 인구 중 20만여 명이 사망했고, 14세기 중반 800만으로 추정되던 이집트 인구는 이때 1/3의 인구를 잃는 충격과 이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페스트[25] 로 인해 인구는 지속적 감소, 1798년 나폴레옹 침공 당시에는 겨우 300만에 달할 정도였다.
페스트가 이집트에 미친 영향은 막심했다. 도시 인구가 반 토막이 났다는 건 도시 상인 계층과 도시 노동자가 반 토막이 났다는 걸 의미했고, 특히 항구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페스트의 특성상 상인들이 우수수 죽어나갔다. 농촌 지역 역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갔다. 이집트 경제의 두 축인 상업과 농업이 이렇게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유럽 패권 이전-13세기 세계 체제'의 저자 자넷 아부 루고드는 이러한 인구 상실로 인해 이집트 경제와 산업이 충분한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고, 이 손실분을 벌충하기 위해 맘루크 왕조가 더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26] 그러다보니 또 경제와 산업 발전이 더뎌지는 저주받은 사이클이 생겨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이후 이집트는 이전에 누렸던 무역의 중심지 위치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여전히 중요한 지역이긴 했지만, 오스만 통치에 있어서는 다른 지역에 우선순위가 밀렸고 무역에 있어서도 오만 상인·포르투갈 상인·인도 상인들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1347년 첫 번째 유행 당시 페스트는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들어와 나일 강을 따라 상 이집트(남부 이집트)로 진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약 50만에 달하던 카이로의 인구 중 20만여 명이 사망했고, 14세기 중반 800만으로 추정되던 이집트 인구는 이때 1/3의 인구를 잃는 충격과 이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페스트[25] 로 인해 인구는 지속적 감소, 1798년 나폴레옹 침공 당시에는 겨우 300만에 달할 정도였다.
페스트가 이집트에 미친 영향은 막심했다. 도시 인구가 반 토막이 났다는 건 도시 상인 계층과 도시 노동자가 반 토막이 났다는 걸 의미했고, 특히 항구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페스트의 특성상 상인들이 우수수 죽어나갔다. 농촌 지역 역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갔다. 이집트 경제의 두 축인 상업과 농업이 이렇게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유럽 패권 이전-13세기 세계 체제'의 저자 자넷 아부 루고드는 이러한 인구 상실로 인해 이집트 경제와 산업이 충분한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고, 이 손실분을 벌충하기 위해 맘루크 왕조가 더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26] 그러다보니 또 경제와 산업 발전이 더뎌지는 저주받은 사이클이 생겨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이후 이집트는 이전에 누렸던 무역의 중심지 위치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여전히 중요한 지역이긴 했지만, 오스만 통치에 있어서는 다른 지역에 우선순위가 밀렸고 무역에 있어서도 오만 상인·포르투갈 상인·인도 상인들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 한반도로도 흑사병이 전파되어 고려에서도 흑사병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특히 충목왕이 1348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 이 전염병이 바로 흑사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352년에 전염병으로 병사한 카이로의 압바스 칼리파 알 하킴 2세 역시 사인이 흑사병으로 추정된다.
7. 사태 이후
서유럽에서는 1720년 마르세유, 동유럽에서는 1770년대 모스크바에서 발병된 이후 한 번도 흑사병이 나타나지 않았다. 위생 상태의 호전이 이유로 거론되지만, 이 무렵 유럽에서 현재 대형 쥐들의 주류를 차지하는 시궁쥐(Brown rat)와 이전까지의 주류였던 곰쥐(Black rat)들 사이의 생존경쟁이 벌어졌고, 그때 승리한 시궁쥐들에 기생하는 벼룩이 전염력도 약하고 인간 피를 안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1] 범유행전염병 중 1위라는 것이지, 단순 질병 중 1위는 아니다. 감염성 질병 가운데 가장 많은 인류를 살해한 질병은 그 자체가 '마마(역병신)'라고 불린 천연두이며, 미래에는 인플루엔자가 그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2] 다만 인구수 조사만의 자료임으로 흑사병에 감염되어 죽은 것만이 아닌, 간접적으로 죽은 이들도 포함하는 수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를 들어 흑사병으로 의사가 죽을 경우, 그 의사가 커버하던 지역의 사고 등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다.[3] 일부 연구자들은 흑사병의 전파 범위나 그 속도, 증상이나 유전자 연구 등을 근거로 흑사병의 실체가 페스트가 아니라 에볼라 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성 출혈열의 한 종류가 아닌 가하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4] EBS의 한 종교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이 나왔다. 흑사병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자 이슬람의 학자들과 가톨릭계 국가의 학자들이 모여 서로 교차 연구를 진행하고, 이들은 신성한 불을 사용하면 이러한 흑사병을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교황 주위에 불로 벽을 만들어 교황을 지키자는 결론이 나왔고, 벼룩들이 그 불을 뛰어넘지를 못하므로 교황은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5] 물론 분변은 잘만 관리하면 훌륭한 비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분변을 모아서 사람과 닿지 않는 공간에서 건조, 동결, 열처리 등으로 소독하여 유해한 세균과 바이러스를 사멸시키고 거름으로 쓰일 양분만 남기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잘 관리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질병이 창궐하기 딱 좋은 환경이 된다.[6] 오히려 산파의 경우 아이를 받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기에 산모의 사망률이 매우 낮았다. 문제는 당시 의사들은 이를 미신으로 치부했던 것. 이러한 문제는 1847년에 와서야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에 의해 개선되었다. 패혈증 항목 참고.[7] 더 정확히 말하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고, 이 대역병 과정을 거치는 등 여러 차례 전염병을 겪은 끝에 나온, 당시로서는 경험을 통해 완성한 첨단기술의 산물이었다. 역병 의사의 가면은 약초를 집어넣고 태워서 공기를 정화하여 의사에게 당시 기술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를 했고, 집게와 막대기 등을 통해 거리두기를 어느 정도 실현시켰다. 물론 피를 빼거나 불로 지지는 등 미신적인 행위 자체는 남아 있었으나, 역병 의사 자체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볼 수 있다. 당장 인류가 미생물이 병원균임을 완전히 규명해낸 것은 과학혁명이 시작된 지도 한참이 지난 19세기 중반의 일이기도 하다.[8] Biological Warfare at the 1346 Siege of Caffa. Emerging Infectious Diseases, 8 (9), 971-975.[9] Michael Platiensis (1357), quoted in Johannes Nohl (1926). The Black Death, trans. C.H. Clarke.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pp. 18–20.[10] 그의 남동생은 몽리외의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였는데, 흑사병으로 인하여 그곳에 살던 수도자 35명 중 '''34명이 죽고''' 오직 그만 홀로 살아남았다. 이후로도 그는 수도원에서 기르던 개 1마리와 둘이 남아 수도원을 지켰다.[11] 페트라르카는 생전 가족 및 친구들과 방대한 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흑사병 창궐 시기와 겹쳤기 때문에 그는 이 사태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의 편지에는 시인답게 그가 겪은 비통과 참절함이 문학적 표현으로 낱낱이 적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되고 있다.[12] 중세 유럽은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고 세계 전체에서 도시화율과 1인당 소득은 세계 제일이었다. 이는 상공업의 발달과 고대로부터 계승된 도시문명 전통에서 기인하는 특성이다. 중국의 도시는 무지막지한 인구 때문에 발달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상황에서 꾸역꾸역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유럽 도시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좀 더 근대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교통과 통행에 있어 더 편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뛰어난 교통이 흑사병 대창궐의 훌륭한 조건이 되어버렸다.[13] 대표적으로 노스트라다무스가 있다.[14] 다만 흔히 떠올리는 새대가리 역병 의사 복장은 흑사병 팬데믹으로부터 150년 가까이 이후에 등장한 최종진화형이고, 흑사병 당시에는 그냥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수준이었다.[15] 이때 밀라노가 사용한 격리 방식은, 흑사병에 걸렸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해당 병자의 가족들을 모두 집에 가둬놓고 굶어죽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감염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비인간적인 조치였지만, 방역을 위해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16] 그래도 이 정도의 수치라 할 지라도 '''좁은 공간에 많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의 특성상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상술한 대로 지역에 따라서는 인구의 70%가 사망한 지역이 있을 정도라면 도시에서 50%라면 그럭저럭 선방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17]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된 일명 포베글리아섬, 흑사병 환자 시체 16만 구가 이 섬에 버려졌다. 정신병원이 한때 들어섰으나 병원장의 끔찍한 만행이 드러나고 나서 몇 년 후 폐업해버렸다. 귀신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절대로 제한된다.[18] 이 때문에 현대에 와서도 공중보건 상 교통이 편리해질수록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아, 공항이나 항구 등에 질병 여부나 예방접종 여부를 조사하는 직원들이 있다. 만일, 예방접종을 맞지 않았을 경우 그 자리에서 돈을 내서 백신을 맞거나 거부할 경우에는 입국 금지 시켜버린다.[19] 흑사병을 타락한 인류에게 내린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하며 스스로의 몸을 채찍질하면서 순례하는 집단들로, 이들은 흑사병의 전파를 가속화했을 뿐만 아니라 폭도로 돌변해 마을을 약탈하기도 했다.[20] 보면 알겠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동으로 이러면 병 안 걸린 건강한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전염된다. 게다가 성격상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여 모인다. 그리고 그 집단이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순례'하고 돌아다닌다...[21] 베르나르트 슬리허 반바트,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 이기영 역 (까치글방, 1999), 126-129[22]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세계 최대 높이 산정호수인 이식쿨 호 인근에 있는 네스토리우스 공동체의 묘비의 연도를 살펴보면 더욱 명백해지는데, 1336년까지만 해도 한 해에 한두 개 정도였던 묘비가 1337~1338년에는 32개, 1338~1339년에는 72개에 달한다. 무슨 이유로 인해 사망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건데, 바로 페스트가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식 쿨 호수 인근의 네스토리우스 교단 공동체의 묘비는 1345년을 끝으로 사라진다. 14세기 페스트를 전후로 이 공동체가 거의 궤멸해 버린 것이다.[23] 이렇게 죽은 자들은 따로 매장 하지도 않고 그냥 백골 상태로 그 안에 방치한다. 따라서 아직까지 현존하는 이런 무덤들에는 지금도 수많은 백골이 그 안에 쌓여 있다.[24] 맘루크는 원래 노예 군인을 의미하는 말로, 군인으로 시작했다가 힘을 잡아 14세기부터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14세기 이집트는 오직 맘루크 출신만이 요직에 올랐고 주요한 업무를 담당했기에, 지속적인 노예 군인의 공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5] 위에서 언급한 맘루크 요인이 작용한 결과일지도? 다른 어느 중동 지역보다 심한 결과를 보여줬다.[26] 얘네는 원래 지들끼리도 싸우기 바빴던 애들이라, 이런 상황에서 남들이라면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만한 경제 발전 등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