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역사

 


1. 개요
2. 유럽인의 이주 전(~1652년)
2.1. 선사시대~코이산족의 출현
2.2. 반투 팽창
3. 네덜란드인들의 정착(1652년~1814년)
4. 영국의 개입과 식민지배(1814년~1910년)
5. 남아프리카 연방(1910년~1948년)
6. 아파르트헤이트(1948년~1994년)
7.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1994년~)


1. 개요



현 남아공을 비롯한 남부 아프리카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동영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유럽인의 이주 전(~1652년)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전에는 기호학적인 상형문자[* 은데벨레족 사람들이 가옥의 벽을 꾸밀 때 밝은 색으로 그리거나 줄루 여성들의 장식품에 새겨졌던, 문자로서의 역할보다는 예술작품에 더 많이 사용되었다.] 등을 제외한다면 체계적인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시대의 역사는 구전 역사, 그리고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적인 영역에서의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시기는 함부로 단정짓기 굉장히 어려운 역사이며, '글자가 없는 문화권은 미개하다'라는 오래된 유럽중심적 편견 때문에 한동안 객관적인 평가가 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는 인류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며, 남아프리카가 현대의 모습이 되기까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때의 부족사회와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의 사회와 가치관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1980~90년대의 한창 아파르트헤이트가 진행되던 때에 출판되던 남아공사 관련 서적들은 이 시기를 두세 페이지 정도로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간략히 설명하고 유럽인의 도착 시기로 넘어가곤 했는데, 최근에는 대체로 옛날 책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이때의 역사를 설명하고는 한다.

2.1. 선사시대~코이산족의 출현


남아프리카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2천 5백만년 전 즈음부터 거주했다. 현재 남아프리카 지방은 인류의 진화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현생 인류가 남아프리카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2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의 전환기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 남아공 영토에 정착한 당시의 현생 인류의 DNA는 흔히 '가장 오래된 인류'로 불리고는 하는 현재의 코이산족[1]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코이산'이란 단어는 코이코이족과 산족을 묶어 부르는 명칭인데, 산족은 전통적인 형태의 수렵채집사회를 이뤘으며 코이코이족은 유목 문화를 일구었다.

2.2. 반투 팽창


반투 팽창(Bantu Expansion)이란 반투어족, 즉 반투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을 의미한다. 반투어족 사람들은 철기문화와 가축이라는 발달된 기술력으로 위에서 언급된 코이코이족과 산족을 몰아내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는 인도유럽어족의 팽창처럼 군사적인 정복 및 문화적인 확산과 혼혈이 병행되었으며, 기존 선주민들의 문화를 없애기보다는 느린 시간 동안 동화 및 흡수가 이뤄졌다.[2] 또한 반투어족 사람들의 정치체계와 기술력이 코이산족에게 전해짐과 동시에 많은 반투어군 언어[3]에도 코이산어의 흡착음이 유입되고 반투족은 부계혈통제도, 연령등급제도를 받아들이는 등 문화적, 언어적 상호작용이 존재했다.
여하튼 반투 사람들이 현재 남아공 영토에 당도한 것은 약 6세기 경으로, 반투 사람들은 코이산족을 훨씬 남동쪽으로 밀어낸 뒤 현 남아공 일대를 정복했다. 줄루족, 코사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으로 이루어진 응구니인들은 동쪽 해안을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츠와나족, 페디족, 소토족으로 위시되는 소토-츠와나인들은 내륙 평원에서 살았으며, 렘바인, 벤다인, 그리고 총가인들은 현 남아공의 북동쪽 지방에서 살았다.
10세기-11세기 경에 이룩된 마풍구브웨 왕국은 현 짐바브웨의 전역, 보츠와나의 일부,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쪽 끝부분 영토를 차지했다. 마풍구브웨 왕국은 남아프리카의 첫 반투계 국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으며, 남쪽의 현 남아공 영토의 반투계 부족들에게도 아주 큰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마풍구브웨 왕국은 남아프리카 전역의 부족들과 무역 관계를 맺었으며, 이 때문에 해당 지역의 반투인들의 정치 체계가 전문화 되었으며 농경과 목축, 교역 등 다양한 경제활동에 활기가 돌아 남아프리카 일대는 큰 문화적 발전을 겪었다. 다만 이 때문에 반투인들은 피그미족이나 산족과 같은 채집 부족이나 수렵 부족을 야만인이라 천시하게 되었고, 피그미들이나 산족은 식량이 부족할 때 반투족들의 농지로 와서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식량을 얻어갔는데, 시일이 지남에 따라 종속의 정도가 심해져 마치 농노(農奴)와 같은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출처1] 마풍구브웨 왕국은 동아프리카의 해안 국가들을 통해 인도, 아랍, 그리고 원나라까지 상아를 수출하기도 했다.[출처2] 마풍구브웨 왕국은 지나치게 건조해진 기후 때문에 가뭄이 연달아 들어 인구가 줄다가 13세기에 멸망했고, 짐바브웨 왕국에게 계승되었으며, 짐바브웨 왕국의 전성기에 세워진 그레이트 짐바브웨 같은 문화재는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이후의 짐바브웨의 역사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문서와 짐바브웨 문서의 역사 문단 참고.
참고로 후에 폐허가 된 그레이트 짐바브웨[4]의 도시유적을 발견한 백인들은 "미개한 흑인들이 이런 걸 건축했을 리가 없어! 분명 백인인 페니키아 상인들이나 아랍 상인, 시바 여왕이 여기 정착해서 흑인들을 부린 것이 분명해!"(...)라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며 로디지아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써먹었다.
여담으로 조선시대 초 제작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오렌지 강이 표시되었다 하며, 중세 시대 케냐와 탄자니아 스와힐리 해안 지방에서 무역하던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이 원나라로도 전해진 후 지도 제작에 반영된 듯 하다.

3. 네덜란드인들의 정착(1652년~1814년)


남아프리카 지역은 1488년 희망봉의 발견으로 포르투갈인들을 비롯한 유럽인에게 처음 알려졌으나 처음에는 유럽인들은 이 지역에 썩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인도향신료였고 이곳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잠깐 들리는 통로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덜란드인들은 처음에는 이곳에 잠깐 정박해서 배를 재정비하고, 현지 아프리카인들에게서 음식을 구매하는 일종의 기지 같은 용도로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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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리베이크가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것을 묘사한 그림
이 지역에 최초로 본격적인 정착을 시작한 유럽인들은 17세기 얀 판 리베이크(Jan van Riebeeck)를 따라 정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소속의 네덜란드인들로 대다수가 칼뱅주의 개신교도들이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와의 무역에 있어 중간보급항 차원에서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개척했고 그 명을 받은 판 리메이크와 그의 일행은 1652년 4월 6일에 남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이 시기 해당 지역에 살던 코이코이족은 처음 네덜란드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물물교환을 위해 먼 길을 갈 필요가 없어져서 굉장히 만족했으나, 점점 많아지는 네덜란드인들의 수에 비해 그들이 만족할 만한 곡식이나 가축을 공급할 기술력이 코이코이족에게는 없었기에 네덜란드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해졌고, 후에 네덜란드인들이 코이코이족의 목장을 습격하는 등 불화가 이어지자 코이코이족은 결국 물물교환을 중단했다. 때문에 판 리베이크는 네덜란드에서 더욱 많은 농부들을 모집해왔고, 유럽인들의 농장들이 점점 더 많아져 식민지의 영토는 계속 넓어졌다. 이때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농부들의 후손이 후에 설명할 보어인(Boers, 아프리칸스어로 '농부'라는 뜻이며 '부르'라고 발음한다.[5])이 된다.
처음에는 케이프타운의 혹독한 기후와[6] 좀처럼 늘지 않는 인구 때문에 식민지 경영에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자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위그노들의 합류[7]로 식민지의 규모는 점점 커지게 된다.
또한 동인도 회사가 인도, 인도네시아, 동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잡아온 노예들도 인구 증가에 가세했다. 판 리베이크는 현지의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는 걸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과 자바인 노예들을 잔뜩 들여왔다. 결국엔 몇년 지나지 않아 동인도 회사의 설득에 동의하고 코이코이족, 산족과 계약노예(Indentured servitude) 조약을 반강제로 맺어 노예로 만들어 버리긴 하지만. 이렇게 노예가 된 사람들은 현재의 '케이프 컬러드(Cape Coloureds)'의 조상이 되었으며, 워낙 수가 많았기에 현대의 소위 '백인' 남아공인들도 혈통을 추적하면 이 유색인종 노예들의 혼혈들이 많다고 한다.

4. 영국의 개입과 식민지배(1814년~1910년)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점령하기 전,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이미 내륙의 오렌지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확장해 있었다. 1795년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이 이를 빌미로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해버렸다. 1803년 네덜란드에게 반환하였다가 1806년 재점령했다. 결국 1814년 런던 협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케이프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고 점차 영국인들은 영국군을 앞세워 정착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들을 피해 점점 내륙으로 들어가는 Great Trek이라 불린 대이동을 했다. 이 과정 중에 토착 흑인 부족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교류도 하면서 점차 자신들을 독립된 민족적 주체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보어인, 혹은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19세기 초반에 샤카 대왕의 지도 아래 동북부에서 줄루족이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펼치면서 19세기 중엽 무렵에는 케이프타운 일대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중부에는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을 필두로 한 아프리카너 국가들, 그리고 동부에는 줄루 왕국이 삼파전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줄루 왕국은 치열한 전쟁 끝에 1879년 영국에 정복되었고, 보어인들은 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국 등을 건국했지만, 남아프리카 지역의 귀금속 채굴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갈등을 일으킨 끝에 1899년 보어전쟁이 발생한다. 보어인들은 게릴라전과 독일의 물밑지원에 힘입어 영국군을 무던히도 괴롭혔지만[8] 결국 엄청난 병력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1902년 트란스발, 오라녜 연합군이 영국에 패전하면서 영국령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보어인의 강력한 저항에 진절머리 난 영국군 역시 무자비한 강경책으로 나서 보어인 마을들을 초토화하고, 강제수용소에다가 보어인들을 수용시켰는데, 2만 8천 명에 가까운 여성과 어린이들이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학대로 죽어 영국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화형시켜 죽인 이래 이처럼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비탄하기도.

5. 남아프리카 연방(1910년~1948년)


남아프리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영국은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한 나라였으나,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이 남아공을 식민화한 뒤에도 현지의 반발로 인해 법률을 존중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타 영 연방국가와 남아공의 법률 체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1910년에는 영국의 4개 식민지인 케이프 식민지, 나탈, 트란스발, 오렌지 자유주를 합쳐 내정에 대해 영국과 타 영연방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령인 '''남아프리카 연방'''(남아연방)이 출범했다.

6. 아파르트헤이트(1948년~1994년)


1948년 국민당이 집권하면서[9]부터 완전히 막나가기 시작해 1952년 의회에서 법원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이로서 사실상 영국 추밀원으로 상고하여 결정을 뒤엎을 수 있는 방법 자체를 원천 차단했다(...). 영국과의 관계는 아예 틀어졌는데, 일단 영국 본토 정부에서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다가 1960년 헤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가 남아공을 방문해 대놓고 '변화의 바람'이란 연설을 해버렸다.
해럴드 맥밀런은 어느 때에도 침착 냉정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런 맥밀런마저도 남아프리카 총리의 초청을 받자 흥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페르부르트 박사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종교처럼 숭배하고 "만사에 오직 나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진 "끔찍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이날 맥밀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의회 앞에서 아프리카너 정권에 도전하는 연설을 했다. 긴장한 나머지 연설 직전에 몸이 아플 정도였다. 연설 자체는 철저한 준비를 거쳤다. 아프리카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다. 민족적 자각은 정책상 고려해야 할 정치적인 사실이었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아프리카 최초의 민족주의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계속해서 불평등을 감내해야 한다면 흑인들은 공산주의로 돌아설 것이었다. 맥밀런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영국의 정책은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
페르부르트는 당시 남아프리카 연합의 총리로, 이를 기점으로 영국계 주민의 평균 연령이 더 높고 젊은 연령층이 적은 것을 고려해 투표 연령을 18세로 내리고, 독일령이었고 독일계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대다수였던 나미비아까지 본토의 일부로 포함시켜 투표해 5% 차이로 영국 국왕의 남아프리카 연방 내 지위를 박탈하고 1961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을 건국해 완전히 독립했다. 국기의 유니언 플래그는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후 1994년 국기변경 이후로 사라졌다.
영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었고, 나머지 강대국들이 멀고 먼 남아프리카까지 군사 개입을 할 리가 없었던 걸 아는 남아공 정부는 대놓고 인종차별 정책을 그대로 밀고 가기 시작했다. 흑인들은 도시에는 고용된 경우가 아니면 입장을 하지 못했으며, 입장을 했다 하더라도 케이프타운이나 더반의 해변가, 공원 내 벤치, 공중화장실 등의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일단 그 전 1950년대에 유색인들은 의회 진출 금지, 또한 색이 다른 민족들 간의 성관계도 당연히 금지법들이 통과돼서 시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잊으면 섭하다.[10]
이 때문에 1954년부터 FIFA로부터 제명당해 월드컵 예선조차 나가지 못하고 1970년에는 IOC에서도 제명되어 올림픽에도 못 나가는 수모를 당하는 등 국제 사회로부터 갖은 왕따를 당한다. 넬슨 만델라 등은 지속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보수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며 반공을 국시로 제창해서 비록 욕은 뒤지게 먹었을 지언정 미국과 영국 등이 암묵적으로 지지하였고 특히 이스라엘 하고 짝짜꿍이 맞아[11] 이스라엘의 핵실험을 남아공 영토 내 에서 돕고 남아공에 재래식과 비대칭 무기 노하우가 이스라엘 서 부터 전래되었다.
1980년대 들어 남아공은 주변 백인 국가(로지디아 등)들의 독립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조금 완화했는데 이때 백인들만 참여할 수 있었던 의회[12]를 백인 의회, 컬러드(흑인-백인 혼혈) 의회, 아시아인 의회로 나눈 것. 다만 컬러드 의회와 아시아인 의회는 권한이 미약해서[13] 삼원제를 시행했을 당시엔 컬러드와 아시아인들의 투표율이 매우 저조했다.

7.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1994년~)


1990년 감옥에 갇혀있던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공식적으로 철폐되고,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1994년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이후로 표면적인 인종차별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에서 흑인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경제력은 백인에 비해 형편없었다. 이걸 고치겠다고 흑인들의 경제력 신장을 대대적으로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던 'Black Empowerment Plan'을 시행했는데 1995년에 백인들과 흑인들의 소득차는 4:1이었던 것이 아파르트헤이트 종결 6년 이후인 2000년의 호구조사에서는 6:1로 오히려 벌어졌다. 21세기의 첫 10년간 흑인 중산층(일명 블랙 다이아몬드)가 상당히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체적으로는 백인과 흑인간의 빈부격차가 심한 상태. 2011년 남아프리카의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8천 달러인데도 불구하고, 전 국민의 25%가 하루 1.25달러 아래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 정도면 한국으로 치면 한국 국민의 25%가 하루에 4000원도 못 쓰는 수준.
흑인 대통령 및 그가 임명하는 각료와 공무원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이 집중되었는데, 이들은 무능하고 뇌물을 밝혀대는 노멘클라투라가 되었다. 또한 과거 국가 기간을 지탱한 백인 관료층이 축출되면서[14] 그간 유지되던 사회구조가 완전히 망가졌다. 사실 이는 선거제도가 영향을 준 것도 있는데 남아공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전국 단위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이 때문에 의원들이 지역현안에 크게 신경을 안 써도 앞 번호만 받으면 당선이 되기 쉽고 이 때문에 유권자들과의 접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역 관리에 소홀해지고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해지기 때문에 인프라가 제때 확충되지 않는 결과가 나와서 빈민층들이 시위하는 일이 꽤 자주 있다.[15] 불안한 치안과 정치권의 부패, 그리고 인종간 빈부 격차 등은 남아공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면 중 하나.
2008년 만델라의 후임인 음베키 대통령이 하야하고 후년에 강경 좌파인 주마 대통령[16]이 등극해 흑인우월주의가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월드컵 의 성공적인 개최 및 투자 유치로 잠깐 남아공 경제가 호황세를 맞이하여 여태 모든 우려가 마치 기우 인 것 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그 후 부정부패와 무능한 국정운영 으로 인해 상당수의 공기업들의 디폴트가 발생하고 고용률은 곤두박칠 쳤으며 전반적인 인프라가 노후화 됐는데 그걸 개선할 돈은 없는 상황이 겹쳐 월드컵 전후 1~2년을 제외한 2010년대 내내 남아공은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그러다 주마 대통령도 2018년에 전임인 음베키 처럼 하야하게 되었고 부통령 이었던 라마포사가 승계, 그리고 2019년도 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 가 승리하면서 당수인 라마포사가 보궐이 아닌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과거에는 '부시맨'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곤 했으나 이는 현대에는 멸칭으로 받아들여지므로 유의.[2] 오늘날 줄루어에도 코이산 제어 특징과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3] 이는 현대에도 많은 모어 화자를 거느린 줄루어, 코사어, 소토어 등에서도 들을 수 있다.[출처1] 네이버 지식백과: 줄루전쟁의 역사적 배경 - 줄루전쟁 (1) (전쟁사, 김성남)[출처2] 유네스코 - 마풍구브웨 유적지[4]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종교적인 용도로 이용되었기에 사람이 살았으나, 1830년대 남아프리카의 줄루 제국이 팽창하면서 북쪽으로 밀리던 응구니족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거주하던 이들을 쫓아내버려 폐허가 되었다.[5] 흔히 한국어로는 보어라고 옮겨지는데, '보어'는 영어식 발음이다.[6]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부 해안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도 나타나는 등 농산물을 수확하기에는 좋은 기후 조건을 갖고 있으나, 케이프타운 인근 지역은 바닷바람이 거세 농경에는 신통치 않았다.[7]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25만 명의 위그노들이 유럽 각지로 탈출했고, 일부 위그노들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로 유입된다. 이들의 포도주 양조 기술 전파는 현재까지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포도주를 빚고 수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이들은 네덜란드계와 종교가 통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버리고 네덜란드어로 갈아탔으며 얼마 안가 네덜란드계와 완전히 동화되었다.[8] 초기 영국 원정대 지휘관의 삽질도 한 몫 했다. 자세한 것은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출판)'를 참조할 것.[9] 사실 당시 득표율로 보면 국민당은 37%, 연합당은 49%를 득표했다. 여기서 보이듯 유권자들(물론 대다수의 유색인종을 뺀 백인과 컬러드 한정)의 다수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한 건 아니었지만 선거구 조정이 제때 안되는 바람에 인구가 적은 선거구(주로 네덜란드계 유권자들이 밀집해있었던 곳이 다수였다)에서 국민당이 우세했고 결국 집권에 성공했던 것.[10] 1950년대라면 당시 기준으로 별로 이상한 건 아니였다. 미국은 소위 Jim Crow Laws 일컬어지는 법을 각 주마다 통과시켜서 사실상 백인과 비백인의 결혼을 무효화 혹은 원천 봉쇄했으며, 학교나 공공시설도 백인, 비백인이 따로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흑인보다 아시아인들(정확히는 중국인) 히스테릭컬하다고 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게 캘리포니아주로 결혼, 교육, 주거, 투표, 피선거권은 물론이요 '''술 사먹을''' 권리까지 제한했다. 주 헌법적으로 아시아인(중국인)의 존재를 악한 것으로 규정했을 정도(...)[11] 사회적으로는 남아공이 흑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들 컨트롤에 애를 먹는 동질감이 있었고 둘 다 제2세계, 특히 소련하고 아주 사이가 엿같아서 국제사회 에서 제재를 당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 1970년대 유엔에서 나가 외교적 고립을 겪던 대만도 합류해서 이 세 국가 사이 아주 깊은 유대와 연대가 자리하게 된다.[12] 1950년대 초반까지는 컬러드, 아시아계(여기서의 아시아계는 동아시아가 아닌 남아시아계를 의미한다. 동아시아계 중 한국계, 일본계, 대만계는 honourary white, 즉 '''명예백인''' 으로 준 백인 대접을 받아 백인지역 에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아파르트헤이트 를 겪은 한국 교민들도 증언하기를 당시 남아공은 유럽의 선진국 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반면 중국 대륙 출신들은 흑인과 같이 취급당해 차별받았고 이는 94년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BEE가 시행될때 중국인들은 '''흑인과 같은 대접'''을 보장받아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1953년 선거에서도 국민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연합당의 표밭(당연히 컬러드나 아시아계 유권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는 정당인 국민당에 투표할 리는 없었으니까)인 컬러드와 아시아계 유권자들의 피선거권을 없애고 몇 명의 의원들(그것도 백인)만 뽑을 수 있게 투표권도 제한했으며 1970년대 들면서 이마저도 없애버렸다. 정확하게는 아파르트헤이트 원칙에 따라 따로 의원을 뽑자고 명분을 내세우며 따로 의회를 만들었긴 했는데... 권한이 별로 없다보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 실상은 완전히 폐지된 거나 다름없었다.[13] 인구의 90% 가까이 차지하는 유색인종 가운데에서도 합쳐서 10% 가량의 컬러드와 아시아인(남아시아계)만 대표권을 얻었고, 그나마 두 의회를 합쳐서도 비슷하게 10% 정도였던 백인 의원석보다 적었다. 나머지 80%에 달하는 흑인들은 여전히 대표권을 못 얻었다. 1960년 샤프빌 시위와 1976년 소웨토 학생운동처럼 이전에도 반 아파르트헤이트 시위가 있었지만 격화된 건 1980년대였고, 그 가장 큰 이유는 불평등한 삼원제 때문이었다.[14] 남아공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며 가장 심각했던 사례 중 하나인 요하네스버그의 경우 80%에 달하는 관료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15] 남아공이 그럼에도 완전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이유는 종족 간 대표성 문제에 기인한다. 인구수가 적고 특별히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없는 백인이나 아시아인의 경우 만약 소선거구제가 실시되면 의회에서 대표되기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16] 원래 공산당 소속 이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