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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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재완공된 봉수교회 예배당.
봉수교회

1. 개요
2. 상세
3. 신자에 대한 의견
4. 역대 담임목사
5. 기타


1. 개요


봉수교회는 북한개신교 교회로서, 한국전쟁 후 최초로 북한 땅에 설립된 예배당을 가진 교회이다. 1988년 봄에 완공되어 11월 6일 첫 예배를 드렸다. 북한에는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 교회가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둘 뿐이다.[1][2] 북한 유일 공인 개신교 교단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소속되어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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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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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내부 모습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 건국동(옛 봉수동) 보통강변에 있다. 봉수교회 양 옆에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청사와 평양신학원이 있고, 뒤편에는 목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봉수교회는 북한 정부의 지원[3]과 교인들의 모금으로 1987년 착공해서 1988년 봄에 완공되었다. 첫 예배는 1988년 11월 6일 드려졌다. 첫 예배 설교는 김운봉 목사가 맡았으며, 북한 체류 중이었던 캐나다교회협의회(Canadian Council of Churches) 방북단 등 외국인들도 예배에 참석했다.
2000년대 들어서 예배당 노후화 문제가 제기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을 받아 2006년에 재건축을 시작해서 2007년에 재완공되었다.
봉수교회 현 예배당은 3층으로 되어있다. 1층에는 사무실, 당회실, 접견실, 성가대실, 화장실을 갖췄고 2층에는 1,000여개 좌석을 갖춘 예배실이 있다. 3층에는 2백석 규모 좌석과 방송실과 자모실이 있다. 그 외에도 음향 및 영상, 동시통역, 냉난방, 보일러, 비상발전, 전압승압 시설을 구비했다.
매주 오전 10시에 열리는 주일예배에는 북한 교인 뿐만 아니라 북한을 방문한 관광객, 사업가, 외교사절들과 북한에 주재하는 외교관, 국제기구 직원, 평양과학기술대학 교수·직원 등 외국인들도 참석한다[4]. 봉수교회의 북한 교인들은 주일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평일 조별모임[5]도 예배당에서 가진다. 현재 교인은 300여 명이며, 직분자로는 장로 9명·권사 14명·집사 5명이 있다.
2012년 9월 30일 봉수교회 주일예배 영상. 손효순 목사 집도. 그는 2013년 4월 소천했다.

3. 신자에 대한 의견


  • 이북 평양 출신 재미교포한국전쟁 중 아버지 이태석 목사를 북한 군에 잃은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전(前) 총회장 이승만 목사(1931년 3월 25일-2015년 1월 14일)[6]는 1978년 북한 방문을 시작하여 2014년 마지막 북한 방문까지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는 1988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번 봉수교회를 방문했는데, 봉수교회를 방문했을 때 자신이 월남하기 전 같이 학교·교회를 다녔던 동기·교우의 자녀를 수십여 명이나 만났다고 한다. 이승만 목사는 봉수교회 외에 평양과 지방에 있는 가정예배처소도 방문했는데, 이 곳 신자들은 전쟁 전(前)부터 믿던 개신교 신자거나 적어도 전쟁 전(前) 개신교 신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 이북 함경남도 원산 출신 재독교포로 아버지 이풍운 목사를 원산에 두고 월남한 이영빈 목사는 1955년 10월 독일에 감리교 선교사로 이민한 후 북한에 남아있는 아버지 이풍운 목사와 서신 왕래를 할 수 있었다. 이영빈 목사는 서신 왕래를 통해 아버지 이풍운 목사가 한국전쟁 후에도 소천할 때까지 원산에서 가정예배처소를 운영하며 매 주일마다 몇 명의 교인들과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했. 이영빈 목사의 아버지 이풍운 목사는 일제강점기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를 시작한 개신교 신자로, 1960년 원산에서 소천했다. 이영빈 목사는 1981년부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감독을 받고 있는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했는데 그 중에는 평양이 아닌 원산지역에 있는 가정예배처소도 있었다.
  • 북한 개신교 연구자 목원대학교 명예교수 김흥수에 따르면 봉수교회는 운영 초기 가정예배처소 신자들의 비협조로 좌석을 채우는데 어려움을 겪어 비신자에게 요청하여 임시로 자리를 채웠으며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관계자들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봉수교회는 운영 초기 성가대를 신자 아닌 전문 음악인에게 요청하여 임시로 성가대 역할을 맡겼으며 이 역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관계자들이 인정한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봉수교회의 운영 초기 가정예배처소 신자들이 비협조적이었던 이유는 오랫동안 가정예배처소 방식의 신앙생활이 익숙한 점도 있었지만 정세가 바뀌어 다시 자신들이 탄압당할 수 있음을 우려한 점도 있었다고 한다.
  • 북한 개신교 연구자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에 따르면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개신교 신자들의 자발적 의사로 조직된 교단은 아니나, 그렇다고 한국 정보기관이나 (거의 대다수 탈북 전 종교에 관심도 없었고 공인 종교단체 무지하던) 탈북자 측 주장처럼, 종교와 전혀 관련 없는 조선로동당 당원들의 동원으로 조직된 교단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봉수교회를 포함하여 조선그리스도교연맹 활동이 북한 정부 및 당의 통제와 동원 아래 있음은 맞지만 그 구성원들은 한국전쟁 전(前)부터 믿던 개신교 신자거나 그 자녀들이라고 한다. 2002년 12월 11일 김병로 교수 본인이 방북 중 평양 대동강구역 옥류가정예배처소를 방문하면서 강량욱 목사 동료였던 강병석 목사의 딸 강세영 장로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강세영 장로와 만난 자리에서 몇몇 주제로 진솔하게, 심지어 조만식 장로에 대해서까지 대화를 나눴다.
  • 에릭 와인가트너(Erich Weingartner) 전(前)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북한 담당자이자 전(前) 세계식량계획(United Nations World Food Programme, WFP) 식량원조연락소(Food Aid Liaison Unit, FALU) 대표[7]에 따르면 1997년 12월 세계식량계획 식량원조연락소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 체류하고 있을 당시,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른 체류 외국인 거의 대부분이 잠시 본국으로 귀환했음에도) 그의 가족과 함께 불시에 봉수교회를 찾았는데, 다른 참석 외국인이 없었음에도 예배를 하고 있었으며 "훨씬 복음적인 예배"였다고 한다. 또한 그 후 봉수교회가 건립되고 가정예배처소에 가서 왜 (봉수)교회에 출석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니 "가봤는데 익숙하지 않고 옛날이 더 좋아서 다시 돌아왔고" 한다.
  • 종교 관련 증언을 하는 탈북자들은 대부분 조선그리스도교연맹 활동이 순전히 보여주기식 쇼일 뿐이며 그 신자들은 전쟁 전 개신교 신자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3만여 명의 탈북자 중 종교를 이유로 탈북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탈북 전 종교에 관심이 있던 경우도 거의 없고, 더구나 공인 종교단체에 대한 정보를 알만한 위치에 있었거나 그 구성원이었던 경우도 거의 없음을 고려해보면 그들의 북한 종교에 대한 증언이 그다지 신빙성 있다고 할 수 없다[8].
  •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태영호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봉수교회 교인들을 포함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구성원들은 전쟁 전(前) 개신교 신자들과 아무 관련 없는 조선로동당 당원일 뿐으로 단지 동원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해외에 있어서 국내 상황 전반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알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9]. 게다가 여러 방북 인사의 증언, 1980-90년대 북한 외부 인사와 접촉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간부들의 면면, 그의 책 내용 상당수가 이미 한국 정보기관 및 다른 탈북자들이 했던 발언의 재탕일 뿐 새로운 내용이 별로 없다는 비판까지 고려한다면 태영호의 봉수교회 및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대한 증언이 신빙성 있다고 할 수 없다.
  •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전(前) 위원장 강량욱 목사부터가 일제강점기에 안수 받은 개신교 목사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외에 1980-90년대 외부 인사와 접촉한 당시 연맹 간부 김성률·김득룡·고기준·김운봉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개신교 신자였다는 사람들이며 월남 개신교 인사 중 그들을 개신교 신자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순전히 가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모퉁이돌선교회 이삭 목사조차도 다른 사람의 증언을 참고하여 고기준 전(前) 서기장은 한국전쟁 전 평양신학교 신학생이었던 사람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 현재 조선로동당은 종교인 입당을 금지하지 않는다. 당장 강량욱 목사[10] 차남 강엽섭 목사와 손자 강명철 목사부터가 조선로동당 당원이다.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 또한 개신교 신자였음에도 조선민주여성동맹 가입과 조선로동당 입당을 허락받은 당원이었으며, 이는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미담'으로 언급하는 사실이다. 즉, 봉수교회 교인들이 설사 조선로동당 당원이라고 해서 그것이 '봉수교회를 포함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구성원들이 전쟁 전 개신교 신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에 대한 협조야 해방 직후부터 각 종교 신자 사이에 있던 상황이었고, 협조적인 종교인과 그 자녀·손자들이 북한 당국의 허락을 받아 신앙생활을 한다든가, 박해 받아 원거주지에서 추방당했던 종교인과 그 자녀·손자들이 몇 차례 있었다는 사면 조치로 추방지로부터 돌아와 북한 당국에 협조해 공인 종교단체에 가입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법한 상황이다.
  • 2020년 4월 출판된 김병로 서울대학교 교수의 《그루터기》에는 탈북자로서는 아주 드물게 공인 종교단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교인 집안 출신 증언이 나오는데, 제한적이긴 하지만 1978년 혹은 1980년부터 북한 당국 허락으로 조선민주당평양직할시인민위원회 간부였던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인 할머니가 가정예배처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 증언에 의하면 봉수교회 건립 전이라 할아버지의 집 일부를 작은 예배당으로 꾸려 사용했다고 하며, 성서·피아노를 비롯하여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허락받은 교인방북 외국인전도는 금지되었으며, 할아버지는 가족 중 아들이나 조카가 자신의 대를 이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일'을 맡아주길 바랬지만 둘 다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거나 집안 나머지의 반대가 극심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정작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성서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 할머니가 흥얼거리곤 하던 찬송가에 관심이 있던 증언자 본인은 조부모의 거절로 공인 종교단체 교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어쨌든 이 증언에 따르면 적어도 1980년대 초반에는 합법 가정예배처소가 존재했으며, 공인 종교단체 신자는 전쟁 전 교인이거나 최소한 그 인척이라고 한다.
  • 대북 교류에 힘써왔던 서울 후암동교회 담임과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조동진 목사는 봉수교회 집사들은 대부분 남한이나 외국에 있는 월남 실향민 목회자들의 친척이라고 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또한 북한 개신교 연구자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는 자신의 저서와 관련한 신문 인터뷰에서 봉수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과거 이북의 유명 기독교인들의 친척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4. 역대 담임목사


봉수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는 강영섭 목사이다. 그 후 리성봉 목사, 손효순 목사를 거쳐 현재 담임목사는 송철민 목사이다.
  • 1대 강영섭 목사 : 북한에서 부주석까지 지낸 강량욱 목사의 아들이며 오랫동안[11]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위원장을 맡았다.
  • 2대 리성봉 목사 : 원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지역조직인 원산가정예배처소 책임자와 강원도그리스도교연맹의 위원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 3대 손효순 목사 : 리성봉 목사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를 맡았다가 병으로 소천했다.
  • 4대 송철민 목사 : 2014년 초부터 봉수교회 담임목사를 지내고 있다. 1968년 7월 31일, 평양시 출생.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부 력사학부 졸업, 평양신학원 통신과정 졸업. 본래 해방 이전부터 강량욱 목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생활을 하던 집안 출생이었으며, 강영섭 목사의 권유로 평양신학원에 재학했다.

5. 기타


봉수교회에는 여러 명사들이 방문했다. 빌리 그래이엄 목사,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이엄 목사, 문익환 목사,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 재미동포 홍동근 목사 등이다.
봉수교회 재건축 당시에는 교회 양 옆에 십자가 탑을 세울 계획이었으며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동의도 받았으나 북한 군부의 반발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1]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외에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소속된 가정예배처소들이 있다. 가정예배처소의 존재에 대해서는 남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된 후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2] 두 곳 외에도 예배당이 있는 개신교 교회가 더 있으나 나머지는 모두 금강산 관광, 경수로 공사, 개성공단 운영을 위해 방문했었던 한국 사람들을 위한 교회였고 현재는 모두 운영이 중단된 상황이다.[3] 당시 북한 정부가 봉수교회 건립을 지원한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대외적인 선전의 필요성, 두 번째는 대내적인 유화책이고 세 번째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요구였다. 인권 탄압으로 악명높은 북한도 석방, 사면 등 사회에 대한 나름의 유화조치들을 취한 적이 있다.[4] 북한이 아무리 폐쇄적인 국가라고 할지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기독교인인 외국인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거의 매주 외국인들이 예배에 참석한다. 따라서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매주 드리는 게 아니라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5] 일종의 구역예배.[6] 이승만 대통령과 동명이인.[7] 1985년 처음 WCC 북한 담당자로서 조그련과 접촉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고, 1997년 5월부터 1999년 10월까지 세계식량계획 식량원조연락소 대표 자격으로 북한 평양에 체류했다.[8] 탈북자 중 99.9% 이상이 종교와 상관 없는 이유로 탈북했으며, 그들 중 3/4 이상이 함경남도 혹은 함경북도 농촌 출신이다. 게다가 그들 거의 대부분은 탈북 전 종교에 관심이 없었고, 공인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를 알만한 위치나 그 구성원으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탈북자 중 대부분은 그런 알기 어려운 정보는커녕 자신이 살던 지역 외 정보에도 어두운 사람들이다.[9] 외교관으로 오랫동안 일하고 있는 김평일마저 북한 내부 사정은 자세히 모를 것이라는게 외부 인사들의 평가다.[10] 강량욱 목사는 조선사회민주당 당원.[11] 1989년부터 2012년 사망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