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그리스도교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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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
朝鮮그리스도敎聯盟 (조그련)
Korean Christian Federation
1. 개요
2. 역사
3. 현황
4. 평양신학원
5. 성서와 찬송가
6. 관련 영상
7. 관련 인물
8. 관련 문서
9. 참고 문헌
10. 여담


1. 개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북한개신교 교단으로, 북한 유일의 공인 개신교 교단이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교파를 '초월'하여[1] 북한 전체 개신교 신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개신교 교단임을 표방한다. 약칭은 '''조그련'''이며 현(現)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강명철 목사, 서기장은 오경우 목사이다. 강명철 목사는 강량욱 목사 손자이자 강영섭 목사 아들이며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신학원에서 수학했다.
북한의 모든 사회단체가 그렇듯이 조그련 역시 조선로동당과 북한 정부의 통제 하에 있는 관변(官邊) 단체이다. 현(現) 중앙위원회 위원장 강명철 목사는 2014년 4월 23일 재미교포 최재영 목사와 가진 면담에서 지하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 존재를 부정한 바 있다[2][3][4].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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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독교도련맹 전 총회장 김익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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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독교도련맹 전 위원장 강량욱 목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1946년 11월 28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1946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창립대회 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창덕학교 학창 시절 스승 강량욱 목사가 선출되었으며, 1949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총회 시 총회장[5]으로 일제강점기 많은 부흥과 은사를 행한 명망 있는 개신교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총회장 김익두 목사는 1950년 10월 14일 38선 넘어 북진하던 한국군UN군을 지지한 이유로 후퇴하던 조선인민군에게 신천군 서부교회에서 예배 중 살해당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유일한 지도자로 남은 강량욱 목사는 1983년 소천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남았다.
1946년 3·1절 기념대회 참가 여부를 두고 소련군정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이북5도연합노회 주도 개신교 간 발생한 갈등이 계기가 되어 친정부 개신교 단체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1946년 6월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강량욱 목사를 주동으로 일제강점기 중국 산동성 선교사였던 박상순 목사, 일제강점기 유명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 그 외 김응순 목사, 조택수 목사, 홍기주 목사[6] 등 친정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조선기독교도련맹 결성준비위원회를 준비했다. 1946년 11월 28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했으며, 창립대회 후 교단 조직을 확대해 도·군·면 단위 지역기독교도련맹 조직을 구성하였고, 1949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총회를 개최하여 김익두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7].
조선기독교도련맹은 1946년 6월경 결성준비위원회부터 1946년 11월 28일 창립까지 평안도보다는 황해도·함경도개신교 신자들을 주된 기반으로 하였으며[8], 창립 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조직 확장 과정에서 이북 전역의 개신교 신자들로 그 기반을 넓혀나갔다고 알려져 있다.
강량욱 목가 대표하는 친정부 개신교 세력은 1946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실시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등 이미 연맹 창립 전부터 적극적 친정부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토지개혁 실시 후에도 (기존 이북5도연합노회가 주일 성수 명분으로 참가를 거부한) 1946년 11월 3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 적극 참가를 주장하는 등 일관된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이들은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창립하고 나서 이북 개신교 주도권을 놓고 이북5도연합노회와 더 적극적으로 경쟁했으며, 북한 당국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지원하고 반대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이북5도연합노회를 탄압하여, 광복 직후 결성된 이북5도연합노회는 한국전쟁 발발 무렵이면 주요 인사가 체포되거나 월남하는 등 사실상 와해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은 한국전쟁 중 북한 정부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조선인민군 "서울탈환 기념예배"를 하는 등 친정부 활동을 벌였는데, "서울탈환 기념예배" 외에도 1950년 8월 5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주관으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전쟁승리를 위한 기독교도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1952년 11월 19일 월북한 김창준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동맹과 조선기독교도련맹 합동으로 '''"남북조선기독교도 항의대회"'''가 열려 미국을 비난하고 미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토장이 되었다[9].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창립한 친정부 개신교 세력은 정치에 적극 관여했다. 강량욱 목사는 이미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어 1946년 2월 16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되었고,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의 다른 신자들도 조선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했으며,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공직에 피선(被選)되었다. 1946년 2월 초대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장로가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연금되면서 최용건 세력과 조선기독교도련맹 세력이 조선민주당을 주도했으며, 1958년 최용건 세력이 탈당하여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하면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세력이 완전히 조선민주당 당권을 잡았다. 최용건 세력과 친정부 개신교 세력이 주도하게 된 조선민주당은 1946년 7월 22일 북조선로동당 등 정당·사회단체들이 가입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가맹했으며, 1948년 8월 25일 초대 최고인민회의 및 지방인민회의 선거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통하여 공동으로 후보를 공천해 출마했다. 1949년 6월 27일 남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해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는 조선민주당과 조선기독교도련맹 둘 다 가맹단체로 참가했다. 강량욱 목사 본인도 1948년 초대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대의원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이 된 이래 부주석이 될 때까지 계속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정치에 적극 관여한 조선기독교도련맹 인사 중 강량욱 목사는 대의원으로만 일하지 않고 외교 부문에서 활동하여 각종 국제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다가, 1972년 사회주의헌법으로의 개헌과 동시에 부주석으로 피선되어 1983년 소천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했다. 또한 1958년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한 최용건을 대신하여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1981년 1월 28일~29일 간에 개최된 조선민주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광복 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2/3 이상이 이북에 있었고, 이북 개신교는 한반도 전체의 개신교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인한 교회파괴와 정부에 의한 교회폐쇄로 이북에 단 하나의 교회 예배당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에 관해 방북하여 김일성과 면담을 나눈 적도 있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 조동진 목사는 6·25 전쟁 전 3,000여 곳에 달했던 교회 예배당 중 500여 곳은 전쟁 중 포격이나 폭격으로 파괴되고 나머지는 용도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략 신자들도 전란 와중 죽거나 대거 월남하고 더러는 북한 정부에 의해 극렬 반정부 인사로 지목되어 사형당하는 등 크게 감소했고, 살아남은 신자들도 당장 생존의 문제가 닥치고 전란 직후의 북한 정부와 주민의 극도로 악화된 반(反)기독교 감정 때문에 공개 신앙활동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더구나 1958-60년 북한 정부와 조선로동당의 대대적 반종교 선전과 종교인 제재 조치는 북한 개신교 신자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이로 인해 친정부 성향인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마저 한국전쟁 후 상당기간 사라지게 된다[10].
한국전쟁 도중 북한 정부의 교회 폐쇄 외 미군 폭격으로 교회 예배당이 파괴되고 교인들이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신의주제1교회·신의주제2교회·의주읍교회·용천군 동상교회 등이 그런 사례이다. 또한 북한 정부에게 희생당한 개신교 신자들과는 반대로 국군이나 미군에 의해 북한 정부에 협조하던 조선기독교도련맹 신자들이 희생되기도 했는데, 용강군 진지동교회 장로 김석훈·강서군 강서교회 장로 김광한·정평군 무산교회 장로 한성도·운산군 입석교회 장로 강처인·안악군 봉산리교회 장로 김영섭·평안남도기독교도련맹 위원장 윤재만 목사 등이 그런 사례이다.
한국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파괴되거나 용도변경되는 등 사라지면서 북한 개신교 신자들은 가정에서 예배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중추를 이루는 가정예배처소의 시초가 되었다. 가정예배처소의 실존 여부는 전 조선로동당 간부로서 한국에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북한 정부에서 1960년대 말 '풀어주는 사업'을 통해 원래 개신교 신자인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가정에 모여 가지는 예배를 공식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김흥수 목원대학교 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가정예배처소를 운영한 개신교 신자들은 한국전쟁 전부터 북한 정부에 협조하거나 전쟁 중 북한 정부에 공을 세웠거나 조선로동당 간부와 인척관계에 있는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일찍이 북한 정부에 협조하여 전쟁 후 가정예배처소 예배를 허락받은 사람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도 있었는데, 김일성의 특별 배려로 그녀는 개신교 신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여성동맹에 입당·가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재독교포였던 이영빈 목사의 아버지 이풍운 목사도 1960년 소천 시까지 원산에서 가정예배처소를 운영했다고 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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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강량욱 목사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기점으로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이 재개되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중 강량욱 목사가 남한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 때 강양욱 목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목사이며 하나님을 안 믿을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1970년대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은 거의 전적으로 대외 활동이어서, 남한에서 발생하는 여러 시국 사건에 다른 공인 종교단체들과 동시에 성명을 발표하거나,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등 개신교 국제조직과의 교류 등이었다. 하지만 1972년 9월 목회자 양성 목적으로 1950년 7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평양신학원을 개원하는 등 대내 활동도 아예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원은 개원하면서 강량욱 목사를 원장으로 하였으며, 전쟁 전 평양신학교나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한 이영태 목사·김득룡 목사 등이 강의를 맡았고, 이렇게 재개된 신학교육을 통해 고기준·김운봉 등 나머지 조선기독교도련맹 간부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국제조직을 통한 ··교포 개신교 신자 간 교류가 시작되었다. 1976년 미국 민주당 카터 정부가 취한 미국인 북한 여행 허용도 이 교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개신교 국제조직을 통한 남·북·교포 개신교 신자 간 교류는 종교 교류보다 통일운동 확산에 그 목적이 있었으나 종교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 때 북한 개신교와 교류하고자 한 남한·교포 개신교 신자들은 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연관된 진보·개혁적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남·북·교포 개신교 삼자 간 첫 공식 접촉은 1986년 9월 2-5일 스위스 제네바 인근 글리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 주최 세미나에서 성사되었다. 이 회의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서기장 고기준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책위원장 강문규 목사가 평화통일을 주제로 발제한 다음 삼자 간 성찬례성경공부를 함께 진행했다. 스위스 제네바 인근 글리온에서 1988년과 1990년 두 차례 더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차례 개최된 남·북·교포 개신교 간 회의는 각각 '제1차 '''글리온 회의'''', '제2차 글리온 회의', '제3차 글리온 회의'라고 명명된다. 그러나 제3차 글리온 회의 후 글리온 회의는 지속되지 못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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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 28일 홍동근 목사 방북 중 찍은 홍동근 목사와 조선기독교도련맹 관계자들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고기준 목사[13], 김득룡 목사[14], 홍동근 목사, 김운봉 전도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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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24일 제2차 글리온 회의[16] 중 찍은 남·북·교포 개신교 관계자들 모습. 사진의 맨 하단 좌측 세 번째 인물이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1980년대는 해외 교포 개신교 신자의 방북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조선기독교도련맹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 시작되어 1980년대 초반 본격화된 해외 교포 개신교 신자의 친지 상봉을 목적으로 한 방북은 북한 가정예배처소 신앙생활의 공개 계기가 되었다.
1978년, 평양 출신 재미교포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선교부 이승만 목사가 친지 상봉 목적으로 방북했다. 이승만 목사는 여동생들과 부모 묘소를 방문하고 나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위원장 강량욱 목사를 면담했는데, 이승만 목사는 훗날 당시 면담 자리에서 강량욱 목사가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목사는 아버지 이태석 목사를 한국전쟁 와중 북한 당국에 잃는 아픔을 겪은 인물로서, 이집트 카이로 출장 시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관과 접촉하여 북한에 잔류한 가족 생사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당시 북한 부주석 강량욱 목사의 초청을 받아 방북할 수 있었다[17].
1979년 4월, 평안북도 철산 출신 재미교포 조국통일촉진회 총무 노의선 목사(1911-1993)[18]가 고향 방문 목적으로 방북했다. 노의선 목사는 방북 중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장 강량욱 목사를 면담했다.
1981년 6월, 평양 출신 재미교포 조국통일촉진회 회장 김성락 목사(1902-1989)[19]고향 방문 목적으로 방북했다. 김성락 목사는 방북 중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강량욱 당시 위원장 목사를 면담했으며,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면담과 오찬을 같이 했는데, 식사를 앞에 두고 김일성이 그에게 식전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1981년 9월 18-29일, 평안북도 피현 출신 재미교포 선한사마리아인교회 담임 홍동근 목사(1926년 5월 15일-2001년 11월 11일)[20]가 친지 상봉 목적으로 방북했다. 홍동근 목사는 피현 인근 개천을 방문하여 어머니와 형제·자매와 상봉하고 나서, 북한을 떠나기 전날 1981년 9월 28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해서 당시 간부였던 고기준 목사, 김득룡 목사, 김운봉 전도사와 담화하는 시간을 가졌다.[21] 이 방북을 시작으로 홍동근 목사는 지속적으로 방북한다. 1988년 북한 정부 수립 40주년을 맞아 치러지는 9·9절 행사에 초대 받아 참석했으며,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초대 받아 참석하던 도중 김일성과 면담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부터 2001년 소천할 때까지 매년 방북하여 평양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강의했다[22].
조선기독교도련맹이 방북한 해외 교포 개신교인들에게 공개한 가정예배처소 중에는 평양 뿐 아니라 평안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지역의 가정예배처소들도 있었다.
1981년 6월, 함경남도 원산(현 강원도 원산) 출신 재독교포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회장 이영빈 목사가 아내 및 이화선 목사와 함께 방북했다. 이영빈 목사는 방북 중 강원도 원산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영빈 목사 방북 시 그가 방문했던 원산가정예배처소 책임자는 리성봉 전도사였는데, 그는 훗날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된다.
1982년 7월, 간도 용정 출신 재캐나다교포 토론토한인연합교회(현 알파한인연합교회) 전충림 장로, 충청북도 진천 출신 재미교포 퀘이커 신자 차상달 씨가 미국 퀘이커 지원으로 방북했다. 그들은 방북 중 3곳의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했다.
1986년, 평양 출신 재미교포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선교부 이승만 목사가 재차 방북했다. 이승만 목사는 방북 중 평양 경상골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했다.
1986년,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NCCC) 대표단이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고 가정예배처소도 방문했다. 미국교회협의회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표단은 개성의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19일-26일,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NCCC) 대표단이 재차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와 가정예배처소 4곳을 방문했다. 미국교회협의회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미국교회협의회 방북 대표단은 아리 브라우어(Arie Brouwer) 미국교회협의회 총무, 드웨인 엡스(Dwain C. Epps) 미국교회협의회 부총무·국제부장, 윌리엄 크리비(William Creevy)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 목사, 마틸린 로체스터(Mattilyn T. Rochester) 아프리카감리교감독시온교회(the 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평신도지도자, 함성국 연합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로 구성되어있었다. 이번 방북에서도 대표단은 평양 뿐 아니라 지방의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표단은 개성에서 개성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 부위원장을 만났으며 개성의 가정예배처소 3곳을 방문했는데, '''특히 대표단 중 이북 출신 재미교포 함성국 연합감리교회(UMC)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는 개성 지역의 한 가정예배처소 예배에서 전쟁 전 평양 성화신학교 동기 오사문과 재회하기도 했다.''' 대표단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외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와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같은 다른 공인 종교단체들도 방문했으며, 조선민주여성동맹과 평양산원 등 사회단체와 복지시설도 방문했다. 대표단은 방북 일정 초반 주체사상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는 주체사상 외 니케아 공의회 등 그리스도교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루돌프 볼트만·위르겐 몰트만·어거스틴·박형규 등의 인물들을 전거로서 언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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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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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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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재건축 전 칠골교회
1988년과 1992년 사회주의권 해빙과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영향을 받아 평양에 2곳의 교회가 건립되었는데, 바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다. 봉수교회는 1988년 11월 6일 첫 주일예배를 드렸으며, 칠골교회는 1989년 거의 완공 단계까지 건축했다가 다시 건축해서 1992년 11월 29일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중 칠골교회는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이 다니던 하리교회를 재건한 것이다. 봉수교회는 2008년 재건축되었으며 칠골교회는 2014년 재건축되었다.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에서 김운봉 목사 집례로 첫 주일예배가 있었다.
1988년 11월 4-12일, 캐나다교회협의회(Canadian Council of Churches) 대표단이 방북하여 북한의 종교시설 및 종교단체들을 방문했다. 방북단은 테리 브라운(Terry Brown) 성공회 주교, 글렌 데이비스(Glenn Davis) 장로회 목사,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리아 화이트헤드(Ria Whitehead) 그리고 가톨릭 테리 갤러거(Terry Gallagher) 신부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23].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단독 초청으로 방북한 이들은 11월 6일 '''봉수교회 첫 주일예배에 참석'''했으며 축성된 지 1달이 채 되지 않은 장충성당에 방문했다.
1989년 1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 미국 선한사마리아인교회 담임 홍동근 목사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24]. 향린교회 담임이었던 홍근수 목사의 형 홍동근 목사는 이미 1981년부터 비교적 자주 북한을 방문해온 진보 성향 개신교 인사였고, 조동진 목사는 원래 한경직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었던 "북한해방기도운동"에서 활동하는 등 보수 성향 개신교 인사였지만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대북 교류에 나서게 된 인사였다. 1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두 사람은 1월 22일·29일 두 차례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동진 목사는 박관오 총장·최장룡 부총장의 안내로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를 시찰했으며, 홍동근 목사와 마찬가지로 월남실향민으로서 방북 일정 중 평안북도 의주군을 방문하여 친척들과 상봉하고 조부모의 묘소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1989년 3월 25일-4월 4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25]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가 야당 출신 사업가 유원호, 재일교포 작가 정경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 황석영과 함께 방북했다. 문 목사는 도착 당일(3월 25일) 순안공항에서 친척 누이를 만나고, 이튿날(3월 26일) 봉수교회 부활절예배에 참석했으며, 주일 다음날(3월 27일) 김일성과 첫 번째 면담을 가졌다. 문익환 목사는 3월 28일 봉수교회 오른쪽에 위치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하여 위원장 강영섭 목사, 부위원장 리철 목사, 서기장 고기준 목사, 봉수교회 담임 리성봉 목사와 함께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장재언 사무엘, 장충성당 초대 신도회장 박경수 바오로와 만났으며, 3월 29일 조선로동당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 면담했고, 3월 30일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하여 조선불교도련맹 승려들과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4월 1일 자신이 묵던 숙소에 찾아온 김일성과 두 번째로 면담을 가졌고 이튿날 4월 2일 장충성당 공소예절에 참례했으며 같은 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간부들과 면담 및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4월 3일 북한을 떠나 베이징 경유해 도쿄에 잠시 머무르며 현지 한인 교회에서 보고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3일 귀국했고 바로 체포·구속되었다.
1990년 11월 23일-12월 4일,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 데일 키츠맨(Dale Kietzman) 수석부총장, 찰스 위크맨(Charles Wickman) 개발담당 부총장이 김일성종합대학·김형직사범대학의 공동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방북자들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형직사범대학의 캠퍼스를 시찰하는 것 외에 11월 25일 옥류관에서 전(前) 국제연합 주재 북한 대표[26]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한시해와 석찬(夕餐) 겸 면담을 가지는 등의 일정을 가졌다. 한시해 부부장과의 석찬 겸 면담 자리에서 데일 키츠맨 부총장은 그에게 미국과 북한 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김일성종합대학·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선로동당 인사들과 함께하는 미국 방문을 권유했는데, 한시해 부부장은 처음에 시큰둥해 했지만 데일 키츠맨 부총장의 거듭된 권유와 방미를 가능하게 주선하겠다는 약속에 이를 수락했다[27]. 한편, 이 해 조동진 목사는 홍동근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원 초빙교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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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부터 강영섭 목사, 권호경 총무, 김일성 주석, 박경서 국장, 고기준 목사.
1992년 1월 7-1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권호경 총무와 세계교회협의회 박경서 아시아국장이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의 공동사업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41차 정기총회의 북한 대표단 참석여부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했다. 권호경 총무와 박경서 국장은 12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두 사람 중 권호경 총무가 설교를 맡았으며, 13일 오전 김일성과 조찬 겸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1992년 3월 31-4월 5일, 미국 유명 보수 복음주의 성향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방북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북한 개신교 탐방 겸 미국 정부와 북한 정부 간 외교 중재 등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는데, 4월 2일 김일성과 면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4월 5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고 나서 김일성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을 부탁받아가지고 출국했다.
1992년 5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박관오의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방북 중 5월 23일 김일성과 오찬 겸 면담을 가졌으며, 같은 날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하여 대회의실에서 개신교 관련 도서 기증식을 가졌고, 이튿날인 5월 24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개신교 관련 도서 기증은 이미 1989년 1월 조동진 목사의 첫 방북 때부터 논의되고 있던 주제로,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한 개신교 관련 도서 권 수는 2,517권이며, 기증할 도서를 마련하는 데는 한국기독교출판협회 등의 도움을 받았다.
1992년 11월 29일, 칠골교회에서 강영섭 목사 집례로 첫 주일예배가 있었다.
1994년 1월 27일-2월 1일, 미국 유명 보수 복음주의 성향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재차 방북했다. 이번에도 역시 북한 개신교 탐방 겸 미국 정부와 북한 정부 간 외교 중재 등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는데, 차이점이라면 대통령과 집권당이 빌 클린턴미국 민주당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9일 김일성과 가진 면담과 오찬 시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 답신을 받았으며, 30칠골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1999년 1월 19일-26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단 7명(강문규, 서경석, 김명혁, 박청수, 최창화, 박남수, 윤남중))이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의 초청을 받아 농업자재 지원 등 남북농업협력 방안 논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북했다. 방북 대표단 7명 중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강문규 목사,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서경석 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강변교회 담임 김명혁 목사, 희망친구기아대책 회장 새순교회 원로 윤남중 목사 등 5명이 1월 24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1999년 2월, 이름을 '조선기독교도련맹'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개칭했다.
2001년 8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개최를 앞두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VCR 300대를 지원했다. VCR 지원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부에서 한국비디오선교회 제작 성서통신대학 교재용 강의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한다는 것이 알려진 뒤 그 사용을 더 촉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28][29].
2001년 8월 15일-21일,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참가 겸 북한 개신교 탐방을 위해 개신교 대표단이 남측 참가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다. 개신교 대표단은 NCCK 총무 김동완 목사를 단장으로 윤병조 목사·성명옥 목사·박순경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박지영 한국기독청년협의회 간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개신교 대표단은 아니지만 통일연대 참가단 일원으로 당시 향린교회 담임 홍근수 목사와 미주교포 대표단 일원으로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만 목사 등도 방북했다. 방북 개신교 관련 인사들은 8월 16일 봉수교회를 방문하여 리성봉 목사·강영섭 목사 등을 만나 간단히 예배를 드렸으며, 8월 19일 봉수교회를 재차 방문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1983년 1월 이를 오랫동안 맡았던 강량욱 목사의 소천 뒤 3년여 간 공석이었다가 조선적십자회, 조선사회민주당, 평양직할시인민위원회에서 간부로 일하던 김성률 목사가 1986년 9월에서 89년 1월까지 맡았다. 1989년 1월 김성률 목사가 퇴임[30]하고 강량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가 2012년 1월 소천할 때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소천한 뒤 이듬해 2013년부터 강영섭 전 위원장 아들이면서 평양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을 역임한 강명철 목사가 중앙위원장을 맡고 있다.

3. 현황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12,000명의 개신교 신자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12,000명의 신자가 있는지 증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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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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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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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처소 예배 모습[31]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중앙조직은 총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로 되어있다. 총회는 연맹의 최고의결기구이며 4년에 한 번 개최힌다.[32] 총회는 중앙위원회 사업 보고를 받아 그 내용을 평가하며, 사업방향·수정안건·규약채택 등을 논의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중앙위원회는 연맹의 사업총괄기구로써 1년에 2번 정기회의를 개최힌다. 중앙위원회는 직할시·도그리스도교련맹들과 교회·가정예배처소들을 관리·감독하고 산하 4개 부서(조직부, 경리부, 선전부, 국제부)를 관리·감독하며 총회를 포함하여 연맹의 각종 선거를 관리한다. 중앙위원회에서도 사업 진행 책임자는 그 구성원인 서기장이다. 상무위원회는 한국의 정당·노동조합·학생회·시민단체 등에서 가지는 집행부 회의와 같은 성격의 기구라고 할 수 있다. 상무위원회 위원은 중앙위원회 위원장·부위원장·서기장과 중앙위원회 산하 4개 부서(조직부, 선전부, 국제부, 경리부)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한 달에 한 차례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구체적 사업 진행 상황을 논의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는 1987년 건축된 3층짜리 건물로 봉수교회 정문 오른편에 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는 창립부터 한국전쟁까지 독립된 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전(終戰)부터 1987년까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청사에 입주해있었으며, 1987년에서야 현재의 3층짜리 건물로 독립된 청사를 가지게 된다. 청사 1층은 중앙위원회 산하 4개 부서인 조직부·선전부·경리부·국제부의 사무실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2층은 지도부인 위원장·부위원장·서기장 집무실들이 자리잡고 있고, 3층은 회의실과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3층은 1987년부터 1999년까지 평양신학원이 입주해있었지만, 2003년 평양신학원이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으로 건축된 독립된 건물로 이사가면서 현재 회의실과 강당으로 사용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지역조직은 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과 그 산하 가정예배처소로 이루어져 있다. 평양직할시 포함 대부분의 광역행정구역에 지역그리스도교련맹이 조직되어 있으며, 각 직할시·도그리스도교련맹도 4년에 한 번 총회를 개최한다. 가정예배처소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핵심이자 말단조직을 이룬다. 그러나 자강도·량강도·라선특별시에는 지역그리스도교련맹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 현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피선되기 전 평양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공식 발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2곳의 교회와 500여 곳의 가정예배처소가 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2곳의 교회를 제외하면 500여 곳의 가정예배처소가 있다는 연맹의 공식 발표는 증명되지 않았다. 단, 위에 언급한 바 있는 조선로동당 간부 출신 신평길의 증언과 여러 외부인사들의 방북 증언을 종합해보면 가정예배처소 존재 자체는 사실인 듯하다. 지금까지 외부인에게 공개된 가정예배처소 중에는 평양 지역의 가정예배처소 뿐만 아니라 평안남도, 강원도, 황해북도 지역 가정예배처소도 있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1946년 11월 28일 창립일을 기념하여 매년 11월 28일에 창립 기념식을 가진다.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한 최악의 시기에도 창립 기념식을 지내지 않은 해가 없었다고 한다.
봉수교회·칠골교회는 예배가 끝나면 신자들이 바로 귀가하지만, 가정예배처소는 예배가 끝나도 신자들이 바로 돌아가지 않고 식사와 친교 시간을 갖는다.

4. 평양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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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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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원 강의실
평양신학원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소속 신학교이다. 북한 개신교 유일의 성직자양성기관으로 1950년 7월 폐교된 조선기독교도련맹 소속 평양신학교를 계승하여 1972년 9월에 개원했다. 평양신학원은 1971년 5월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회의의 결정에 의거하여 개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원 후 1999년까지 운영하다가 2000년까지 1년여 동안 운영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다 2000년부터 운영을 재개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양신학원 위치는 처음에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청사에 있었고 다음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 3층에 있었다가 2003년에 한국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을 받아 건축한 건물로 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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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평양신학원 강의실 모습. 사진 맨 좌측 인물은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평양신학원은 1972년 9월 개원 당시 학제로 3학년 6학기제를 채택했다가 2000년 9월부터는 5학년 10학기제를 채택했다.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교와 달리 학사·석사 과정이 통합된 신학교육기관이다. 개원 시 초대 원장은 강량욱 목사였으며 교수로는 고학진, 김득룡[33], 임현달, 이영태 목사 등 전쟁 전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 출신 목사들이 맡았다. 평양신학원 원장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이 당연직으로 겸직하기에 현재 원장은 강명철 목사이며 교수로는 오경우, 정경숙 목사 등이 있다. 신학교재는 처음에 한국전쟁 전 출판된 신학도서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한국과 해외에서 지원받은 신학도서와 북한 목사들이 쓴 신학도서를 사용한다. 특히 한국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34]장로교 출신의 이영태 목사는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련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도 저술했다고 한다. 평양신학원은 개원 시부터 지금까지 매해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기수가 졸업하면 다음 기수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신학생 선발을 한다. 재학생 숫자는 1기수부터 현재 14기수까지 9~12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입학은 입학 희망 교인이 소속된 교회나 가정예배처소의 추천을 받고 직할시·도그리스도교련맹의 허락을 받아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입학자격 중 학력은 고등중학교 졸업이면 되지만 거의 모든 재학생은 대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재학생은 중·장년 연령대의 사람이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며 평양신학원은 여성 입학을 허용한다. 신학생 중에 여성도 있다.
평양신학원에서는 구약성서, 신약성서, 조직신학, 실천신학,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찬송가학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종교 외의 인문·사회학 과목들도 개설하여 가르치는데 평양신학원 교수들이 아닌 북한 내 다른 대학교 교수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한다.
1990년에서 2001년 소천할 때까지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35]가 매년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성서강해·조직신학·기독교개론 등 개신교 관련 강의를 했다. 홍동근 목사는 2001년 11월 11일 강의를 위한 북한 방문 중 지병인 고혈압으로 소천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2003년에서 2008년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측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계절학기 강의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평양신학원 운영 지원은 이명박 정부 기간에 중단되었다. 현재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자체 능력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평양신학원의 시설은 교무실·교수실·강의실·휴게실·교육관·도서관 등 소규모 신학원으로서 큰 부족함 없이 갖추어져 있다. 강의실 정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옆면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성구(聖句)가 써진 액자가 걸려있다. 평양신학원 교육관은 봉수교회 재건축 시 봉수교회 임시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봉수교회 성가대 연습장소로 사용된다. 평양신학원 도서관은 수천 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중에는 한국과 해외교포 기독교계에서 지원한 도서가 적지 않다.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 역시 자신이 시무하던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통해 수백 권의 도서를 기증했으며, 홍동근 목사 사후 평양신학원은 홍 목사의 생전 기증 도서 및 그의 미망인 홍정자 여사가 추가로 기증한 도서를 정리하여 도서관 한 구석에 '홍동근 목사 기념서가'를 조성했다. 한국과 해외교포들의 기증 도서 외에 북한 목사들이 쓴 신학도서 역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36]

5. 성서와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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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도서관[37]에 전시된 북한에서 발행된 성서와 찬송가[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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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북한에서 발행된 구약전서[39]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성서찬송가가 인쇄·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가정예배처소 교인들은 한국전쟁 전에 발행된 성서와 찬송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1983년 신약전서를 발행하고, 1984년 구약전서를 발행했으며, 1990년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발행했다. 그리고 2008년 성경전서를 추가로 발행했다. 찬송가도 1983·1990·2008년 발행했는데, 1935년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한 신편찬송가의 1939년 개정판을 바탕으로, 1983년 악보 없이 가사만 수록한 수형본(手形本) 찬송가를 발행했다가, 1990년 악보를 수록한 찬송가를 다시 발행했으며, 2008년 역시 악보를 수록한 찬송가를 추가로 발행했다. 원래 1935년 발행 신편찬송가는 한국인이 작곡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1990년 발행 찬송가는 325장 김활란 작사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에 한국인 작곡가 이동훈의 곡조를 넣어 한국인 창작곡이 하나 있게 되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편집·발행한 성서와 찬송가는 봉수교회·칠골교회 및 가정예배처소들뿐만 아니라 북한 유일 가톨릭 성당 장충성당과 북한 유일 정교회 성당 정백사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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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북한에서 발행된 성경전서와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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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북한에서 발행된 성경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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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북한에서 발행된 성경전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공식 주장에 의하면 한국전쟁현재까지 발행된 성서의 부수는 35,000부지만 정말 그 정도 발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40]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발행 성서는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1977년 발행된 한국의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한 것이다. 하지만 공동번역성서를 100% 그대로 따르지 않고 일부 어휘에 있어서 개역성경의 어휘를 따랐다.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 편집자는 평양신학원 교수였던 이영태 목사이다. 이영태 목사는 일제강점기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이눌서의 조수로 일하면서 이미 1930년대부터 개신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함께 했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소속 평양신학원 교수로 일했다. 그는 평양신학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성서 편집 외에도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련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을 저술하는 등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내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목사였다고 한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발행 찬송가 중 1990년 발행 찬송가의 악보는 (1991년 오소운 목사가 조선일보에기고한 분석에 의하면) 1983년 남한 한국찬송가공회 발행 통일찬송가 악보를 그대로 베꼈. 오소운 목사는 북한 찬송가를 분석한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1990년 발행 찬송가를 편집한 사람은 신앙인도 전문 음악가도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훗날 오소운 목사 본인이 1990년 발행 찬송가가 네덜란드 국적 교포 이교열(李教悦) 목사에 의해 편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발행한 성서 외에 일부 한국 선교단체들이 번역·인쇄한 북한어 성경이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에 몰래 배포되고 있다. 한국의 대북 선교단체 중 "순교자의 소리"는 따로 북한어 성경을 번역하지 않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발행 《성경전서》 본문을 그대로 베껴서 인쇄한 성경을 몰래 배포한다.

6. 관련 영상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충성동 가정예배처소의 예배모습. 2010년 방북한 재미동포가 촬영한 영상이라고 한다.
2012년 9월 30일 봉수교회 주일예배 영상. 손효순 목사 집례. 그는 2013년 4월 소천했다.
2013년 7월 칠골교회 재건축 현장 영상. 영상에 나오는 북측 안내인은 백봉일 목사.
2014년 9월 14일 칠골교회 주일예배 영상[41]. 백봉일 목사 집례.

7. 관련 인물


  • 강량욱(1904-1983) : 초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1946-1983).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은 그의 아들 강영섭을 거쳐 현재 그의 손자 강명철에게 세습되었다. 1943년 장로교 평양신학교를 제38회로 졸업하고 1944년 목사로 안수받았다. 목사로 안수받고 고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이 시기 강량욱은 해박한 성경 지식과 뛰어난 찬송 솜씨로 "사경회 목사", "제2의 김익두" 등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월남 개신교 신자 중 광림교회 원로목사 김선도, 전(前) 인천제2교회 담임목사 이삼성 등 그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강량욱 목사의 설교 실력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고정교회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한국전쟁 전후로는 종교인으로서보다는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내었는데, 1958년 3대 조선민주당 당수로 선출되었고 외교 부문에서 활동했으며 1972년 개헌과 함께 부주석이 선출되어 사망 시까지 직임을 유지했다. 하지만 평양신학원 개원에 관여하고 말년에 이승만, 김성락, 노의선 등 해외교포 개신교 신자와 교류하는 등 종교 관련 활동도 병행했다.
  • 김성률(1918-2000) : 2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1986-1989). 1918년 2월 15일 평안북도 후창군(현 양강도 김형직군) 출생. 일제강점기부터 개신교 신자였으나 광복 후 주로 정계에서 활동했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에 입당하여 의주군당 위원장을 시작으로 후창군당 위원장, 용천군당 위원장, 평안남도당 부위원장,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당직을 역임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에 북한 측 자문위원으로 참가했다. 1981년 1월 28~29일 조선민주당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선되었으며, 1983년 평양직할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주로 정계에서 활동하는 와중에도 1980년부터 자택에 가정예배처소를 운영하며 자택 일부를 예배당처럼 꾸려놓았다고 한다. 1986년 9월 강량욱 목사가 사망한지 3년 만에 2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89년 1월 연맹 위원장에서 퇴임했으며, 계속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있었고, 2000년 12월 사망했다.
  • 강영섭(1931-2012) : 3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1989-2012). 레닌그라드 대학교 졸업. 강량욱 목사의 차남. 목사가 되기 전에 내각사무국 부국장·주 루마니아 북한 대사·주 몰타 북한 대사·최고재판소 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11월 초대 봉수교회 담임목사를 맡았다가, 1989년 2월부터 2012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강영섭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던 1999년 2월 '조선기독교도련맹' 명칭이 현재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변경되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칠골교회가 건립되고 평양신학원이 별개의 건물로 이전하였으며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재건축되었다. 또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북한에서 조그련의 사회적 위상 제고에 힘썼다고 한다.
  • 강명철 : 4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2013-).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평양신학원 졸업. 강영섭 목사의 장남. 아버지 강영섭 목사가 사망할 당시 평양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부친의 사망 이듬해 7월 연맹 총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피아노 반주를 할 줄 안. 2018년 6월 21일 WCC 중앙위원회 회의 겸 창립 70주년 행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났. 강명도와 사촌관계이다.
  • 고기준 : 전(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1982-1994). 전(前) 조선사회민주당 정치위원.
  • 리천민 : 전(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1994-2001). 전(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직부장. 고기준 서기장 소천 후 후임으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이 되었다.
  • 오경우 :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 전(前) 칠골교회 부담임목사. 연맹 서기장은 한국의 개신교 교단 총무·사무총장과 같은 성격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리천민 서기장 후임으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이 되어 현재까지 재임 중이다. 중앙위원회 산하 4개 부서(조직부, 선전부, 경리부, 국제부)는 중앙위원회의의 관리·감독을 받도록 되어있는데, 실제 이 4개 부서를 일선에서 관리·감독하는 직책이 바로 서기장이다. 2003년 3월 1일 서울에서 개최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 참석차 방한하여, 이튿날 3월 2일 소망교회 3·1절 기념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 김득룡(1910-1993) : 전(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부위원장. 1910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현 평안북도 의주군 혹은 피현군) 출생. 일제강점기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신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2년 9월 평양신학원이 개원 시 교수진 중 한 명이었다. 개원 시 몇 남지 않은 북한 잔류 목사 중 한 명으로써 신학을 교육했다. 강량욱과 함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다른 간부들을 목사로 안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81년 홍동근 목사는 방북 중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했는데 병환으로 입원중인 강량욱 목사 대신 김득룡 목사를 만났다.
  • 김운봉 : 전(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상무위원 겸 평양직할시그리스도교련맹 부위원장.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 첫 주일예배를 집도했다.
  • 리춘구 : 전(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선전부장. 2003년 3월 1일 서울에서 개최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 참석차 방한하여, 이튿날 3월 2일 소망교회 3·1절 기념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2004년 12월 1일 지병으로 소천했다.
  • 이영태 : 전(前) 평양신학원 교수. 남한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추어 편집한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의 편집자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미국인 남장로교 선교사 겸 성경 번역가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의 조수로 일했다. 이눌서 선교사의 조수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번역가로서 소질이 있었는지, 이미 1931년(소화 6년) 개신교 서적 《기독교 종험론》, 《구원론》 번역에 이눌서 선교사와 함께했음을 알 수 있. 공동번역성서 평야교정본 편집 외에도 평양신학원 교수로 일하면서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련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을 썼다고 한다.
  • 고학진 : 전(前) 평양신학원 교수. 1972년 9월 평양신학원 개원 시 교수진 중 한 명이었다. 개원 시 몇 남지 않은 북한 잔류 목사 중 한 명으로써 신학을 교육했다.
  • 임현달 : 전(前) 평양신학원 교수. 1972년 9월 평양신학원 개원 시 교수진 중 한 명이었다. 개원 시 몇 남지 않은 북한 잔류 목사 중 한 명으로써 신학을 교육했다.
  • 정경숙
  • 백봉일
  • 손효순
  • 리성봉
  • 리성숙

8. 관련 문서



9. 참고 문헌


  • 《미완의 귀향일기 (상권)》, 홍동근, 한울, 1988
  • 《미완의 귀향일기 (하권)》, 홍동근, 한울, 1988
  • 《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집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 《북한 기독교 100장면》, 이찬영, 한국기독교총연합회, 2000년
  •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김흥수·류대영, 다산글방, 2002년
  • 《북한의 종교문화》, 하종필, 선인, 2003년
  • 《통일 이후 신학 연구 2》, 감리교신학대학교, 신앙과지성사, 2009년
  •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양현혜,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년
  • 《기다림과 서두름의 역사》(한국 장로교회 130년), 임희국, 국제제자훈련원, 2013년
  • 《사랑과 믿음속에 빛내인 삶》, 림이철, 평양출판사, 2013년
  • 《기쁨과 고난의길, 순례자》, 정상복 목사 고희 기념문집 출판위원회, 신앙과지성사, 2014년
  • 《북녘의 교회를 가다》, 최재영, 동연, 2019년
  • 《그루터기》, 김병로·윤현기·이원영· 천지혁, 박영사, 2020년
  • 〈문 목사 기독교도연맹 방문〉, 《한겨레신문》 1989년 3월 30일호(제272호), 《한겨레신문》, 1989년
  • 〈문익환 목사 방북관련 일지〉, 《한겨레신문》 1989년 4월 14일호(제284호), 《한겨레신문》, 1989년
  • 〈『통일찬송가』 樂譜 그대로 사용〉, 《조선일보》 1991년 5월 8일호(제21625호), 《조선일보》, 1991년
  • 〈그레이엄 목사 金日成(김일성)과 면담〉, 《경향신문》 1992년 4월 4일호(제14366호), 《경향신문》, 1992년
  • 〈부시, 김주석에 메시지 (그레이엄 목사 확인)〉, 《한겨레신문》 1992년 4월 7일호(제1204호), 《한겨레신문》, 1992년
  • 〈우리민족서로돕기 7명 방북〉, 《한겨레신문》 1999년 1월 19일호(제3404호), 《한겨레신문》, 1999년
  •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 (2)〉, 《사회운동》 19호(2001년 10월호), 홍근수, 2001년
  • 〈북한의 종교정책과 장충성당의 건립〉, 남궁경,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1년
  • 〈북한 찬송가와 남한 찬송가 (上)〉, 《기독교타임즈》 414호(2006년 2월 22일호), 《기독교타임즈》, 2006년
  • 〈남한 찬송가와 북한 찬송가 (下)〉, 《기독교타임즈》 421호(2006년 4월 11일호), 《기독교타임즈》, 2006년
  • 〈북한 주요 종교의 현황과 남북 종교교류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6호, 김흥수·류대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년
  • 〈북한 종교인가족의 존재양식에 관한 고찰 : 기독교를 중심으로〉, 김병로, 통일연구원, 2011년
  •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지하교인에 대한 고찰〉, 《신학과 선교》 45권, 조은식,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신학연구소, 2014년
  • 〈남·북 성경비교 책으로 출간··· 통일후 ‘겨레성경’ 실현 가능하다〉, 《국민일보》 2007년 1월 13일호, 노희경, 2007년
  • 〈영생하는 넋〉, 《조선사회민주당》 2015년 3호(636호), 채천룡, 2015년
  • 〈북한 성경에는 ‘하나님’이 없다〉, 《국민일보》 2016년 10월 8일호, 윤중식, 2016년
  • 〈6강 1980년대 이후의 기독교〉(2016년 10월 17일 강의), 《한반도 북부지역의 기독교사》, 갈릴리신학대학원, 김흥수, 2016년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거듭 내세워주시여〉, 《조선사회민주당》 2019년 4호(653호), 김경철, 2019년
  • 〈자료 소개 미국교회협의회 남북한방문단 보고회〉, 《기독교사상》 2020년 12월호, 대한기독교서회, 2020년

10. 여담


  • 재미교포 최재영 목사는 자신의 책과 기고문 등에서 북한 정부 및 조그련 측 주장을 대부분 그대로 반복하면서, 이북 지역 예배당들이 전부 한국전쟁 기간 폭격 등 포화를 입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 관련 기념물로 남아있는 포평읍교회·은율읍교회나 원산문화회관으로 용도변경된 원산 광석동교회 등의 예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북한교회연구원 유관지 원장도 수집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함주, 청진 등에 용도변경된 예배당이 있다고 주장했다[42].
  •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는 탈북자 중 극히 적은 조선기독교도련맹 출신 탈북자(실명 비공개)를 인터뷰하여, 북한의 교회와 가정예배처소들이 어느 정도 실체가 있으며 그 구성원들이 전쟁 전 개신교도와 관련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 대북 교류에 힘써왔던 서울 후암동교회 담임과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조동진 목사는 봉수교회 집사들은 대부분 남한이나 외국에 있는 월남 실향민 목회자들의 친척이라고 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또한 북한 개신교 연구자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는 자신의 저서와 관련한 신문 인터뷰에서 봉수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과거 이북의 유명 기독교인들의 친척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1] 공산권의 관제 교단인만큼 진짜 초교파라고 설명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긴 하다. 물론 한국전쟁 전 장로교가 이북 개신교의 주류 교파였던만큼, 현 조그련도 장로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조그련 소속 봉수교회·칠골교회는 장로교 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가정예배처소의 책임자를 장로라고 부르곤 한다. 강량욱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전부터 개신교 신자로 있던 조그련의 고참 간부 다수도 장로교 출신이다.[2] 물론 북한 인사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북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공개 발언을 할 수 없음은 고려해야 한다.[3] 그러나 2001년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오경우 서기장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북-중 접경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목사들에 대해 항의한 사실이 있음을 고려하면, 조선그리스도교련맹도 비공인 개신교 신자 및 그 모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경우 서기장이 NCCK에 제기한 항의는 북-중 접경지역 선교에 종사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거의 NCCK와 거리가 먼 보수 성향 목사들임을 감안하면 별다른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개신교 대북 선교단체 중 갈렙선교회는 아예 북한에 정보원을 두고 있는 듯 북한 각지를 몰래 촬영한 영상물을 자신들의 유튜브 계정에 꾸준히 게시하고 있다.[4] 재미교포 최재영 목사 본인도 비공인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인사 중 한 명이다.[5]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이 있던 상황에서 총회장직은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 감리교.[7]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장직 있던 상황에서 총회장직은 이 연맹 내 일종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래지 않아 6·25 전쟁 시기 김익두 목사가 살해당함으로써 사라지게 된다.[8] 일례로 김응순 목사는 구한 말 최초로 창립된 개신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9] 강량욱 목사는 북한 정부와 김일성 수상에 전적으로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점'''이 빌미가 되어 한 때 김일성 반대파에게 공격받기도 했다고 한다.[10] 한국전쟁이 끝나고 조선로동당과 그 유관단체의 출판사들은 1959년에만 반(反)종교 소책자를 여섯 권이나 출판하며 종교반대하는 선전에 집중했다. 정하철이 쓴《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여야 하는가》(조선로동당 출판사, 1959년), 로재선이 쓴 《미제는 남조선에서 종교를 침략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조선로동당 출판사, 1959년), 김희일이 쓴 《인민의 아편》(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노재선이 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백원규가 쓴 《종교도덕의 반동성》(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작자 미상의 《생활과 미신》(조선여성사, 1959년) 이 6권이 바로 1959년 한 해에 출판된 반(反)종교 대중교육용 소책자이다.[11] 감리교 이영빈 목사는 1956-1960년 독일에서 아버지와 서신 교환을 한 것 외에 1981년 방북하여 원산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가정예배처소 책임자였던 리성봉 장로(책임자)는 뒤에 2대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된다.[12] 제3차 글리온 회의 후 일본 도쿄에서 삼자 간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이는 글리온 회의라 명명되진 않는다.[13] 1921-1994,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서기장.[14] 1910-1993,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부위원장.[15] 당시에는 전도사였으나 후에 목사로 안수받는다.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 입당 예배 때 설교를 맡았다.[16] 1988년 11월 23일~25일.[17] 물론 이승만 목사(1931년 3월 25일-2015년 1월 14일)는 이승만 대통령과 동명이인이다. 그는 1991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회장이 되었고, 2000년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의 총회장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1950년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동년 10월 UN군국군의 평양 진격 후 그를 찾아다니던 아내에 의해 인근 방공호에서 총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8]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신자.[19] 전(前)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1937-1958), 전(前) 숭실대학교 총장(1958-1964).[20]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21] 그러나 당시 방북에서 홍동근 목사는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했을 뿐 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사 방문 전 오전 일찍 찾아온 사회과학원 교수 진철국(陣鐵國)이라는 사람에게 1:1로 주체사상 강의 를 듣기도(···) 했다.[22] 재미교포 목사 중 홍동근 목사 뿐 아니라 조동진 목사도 같은 시기 평양신학원 초빙교수가 되어 조그련 신학생들에게 강의했다.[23] 물론 가톨릭교회는 캐나다에서도 캐나다교회협의회 가맹 교단이 아니지만, 특별히 테리 갤러거 신부가 캐나다교회협의회 방북단에 참가했다.[24]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초청을 받게 된 계기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한 박관오를 알게 되어서이다.[25] 좌파 성향 민주화운동 단체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신.[26] 당시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국제연합 미가입 상태였고, 단지 참관국으로 국제연합에 대표부를 두고 있을 뿐이었다.[27] 실제 데일 키츠맨 부총장을 비롯한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 총장단은 귀국 후 북한 정·학·종교계의 동시 방미 성사를 위한 주선에 힘썼다고 한다. 1991년 5월, 한시해 부부장을 비롯한 조선로동당 간부들·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조선그리스도교연맹 목사들이 미국에 방문하게 된다.[28] 평양 형제산가정예배처소, 평양 옥류가정예배처소 등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부에서 성서통신대학 교재용 비디오테이프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김득중 교수의 《마가복음 강해》 강의 비디오테이프를 신자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북 중인 남측 개신교 신자가 목격한 바 있다.[29] 현재 한국비디오선교회는 한국미디어선교회로 개칭했다.[30] 김성률 목사는 이 때 퇴임한 것이지 소천한 것이 아니다. 김성률 목사는 퇴임한 뒤 계속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등 정치인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조선사회민주당 기관지 계간 《조선사회민주당》의 보도에 의하면 김성률 목사는 2000년 12월경 소천했다.[31]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은 평양 광복거리가정예배처소라고 한다.[32] 1989년 강영섭 목사의 중앙위원회 위원장 선출 후 4년이라는 개최 주기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33] 감리교신학교 졸업.[34]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공동번역성서를 문화어에 맞게 개정하여 출판했다.[35]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36] 홍 여사는 이 일을 위해 직접 방북하여 평양신학원 관계자들과 협조하기도 했.[37] 대한성공회 부설.[38] 아래 왼쪽에 1983년 북한에서 발행된 신약전서가 보인다.[39] 인터넷 경매 사이트 코베이옥션에 경매품으로 올라왔던 1984년 구약전서의 사진. 그동안 국내 인터넷 서점이나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1990년 성경전서가 팔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1984년 구약전서는 그런 적이 거의 없었다.[40] 성서 발행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전(前) 총무가 83·84년에 각각 출판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실물을 확인한 적이 있고, 1990·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출판된 성경전서는 다수 기독교 관련 방북자들이 실물을 확인했다. 대한성서공회 부설 성서학도서관이 북한의 1983년판 신약전서, 1984년판 구약전서, 1990년판 성경전서를 소장하고 있다.[41] 개신교 신자가 아닌 사람을 위해 설명하면 예배 순서 자체는 한국 개신교와 큰 차이는 없다. 시작할 때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는 것, 대표 기도자가 중보 기도를 할 때 죄인 타령을 많이 하는 것, 설교 전까지 일어서서 예배를 드리다가 중보 기도와 설교 때는 자리에 착석하고 마무리 경에 다시 일어나는 것, 심지어 담임 목사가 설교 중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중년대의 여성 신자가 압도적이란 것까지 한국 개신교와 비슷하다. 차이라면 예배가 문화어라는 것, 양복보다 한복을 입은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것, 그리고 북한 특유의 조국 언급이 조금 많이 보인다는 것 정도.[42] 그럼에도 유관지 원장은 탈북 전 종교에 무관심했던 대다수 탈북자들이나 한국 정보기관 입맛에 벗어나는 증언을 거의 하지 않는 태영호 등 고위급 탈북자들과는 다르게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구성원들은 개신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 연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