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민
1. 소개
90년대 초 보기 드문 장신 가드였으나, 당시 최강팀이던 기아자동차 입단 후 수비 전문 선수로 육성되었다. 은퇴 후 최근까지 KBL 심판으로 지냈다.
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
대경상고 3학년 시절, 모교를 동국대총장기 우승으로 이끌며 본인은 MVP를 수상, 전국에 조금 이름을 알린다.[1] 하지만 같은 학년에 차세대 국가대표 슈터로 꼽히던 광신상고 문경은에 용산고의 원투펀치 김승기-김재훈, 송도고 홍사붕 등 뛰어난 선수들이 워낙 많아 당시 대학 강호들의 스카웃 레이더에서 벗어났고, 대학 하위권 팀이던 동국대학교에 입학한다.
1~2학년 때까지는 대학 무대에서도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으나, 3학년이던 1992년 1년 선배 박재현(189cm,F), 이병률(196cm,C)과 함께 1992 시즌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6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2] 반짝 활약을 보였고, 덕분에 동국대는 1992-93 농구대잔치에 출전하는 6개 대학팀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1992-93 농구대잔치에서도 봉하민은 선배들과 함께 강력한 수비력을 선보이며 풀리그 두 번째 경기만에 금융팀 산업은행을 꺾는 등 돌풍을 일으켰으나, '''대회 도중 감독을 경질하는''' 어처구니없는 학교의 행태에 선수단이 흔들리면서 첫 승 이후 내리 '''12연패를 당한 채 14개 팀 중 꼴찌를 차지한다.''' 아쉬운 팀 성적에도 불구, 팀의 에이스였던 봉하민은 '''1992-93 농구대잔치 수비상'''을 수상하며 활약을 인정받는다.
선배들이 졸업하고 다시 전력이 수직 하락하면서 봉하민의 4학년 시절은 전 대회 예선탈락으로 마무리 되었고, 같은 90학번 중 문경은, 김승기, 홍사붕 등이 치열한 스카웃 경쟁을 치른데 반해 다소 조용하게 명문팀 기아자동차의 유니폼을 입는다.
2.2. 실업-프로 시절
비록 주전들의 노쇠화로 1993-94 농구대잔치 8강에서 어이없이 미끄러지긴 했지만, 농구대잔치 5연패에 빛나는 기아자동차는 여전히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허재라는 국가대표 기둥가드의 존재로 인해, 봉하민은 대학시절의 다재다능함을 봉인한 채 이훈재와 함께 상대 2-3번을 집중마크하는 수비전문 식스맨으로 육성되었고, 1994-95 농구대잔치에서도 삼성전자의 문경은을 그림자 수비하며 기아자동차의 통산 6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1995년 상무에 입대한 봉하민은 이상민-조성원-문경은-조동기 등 호화멤버들로 구성된 상무에서 수비 등 굳은 일을 전담하는 식스맨으로 헌신했고, 상무가 2년 연속(1995-96, 1996-97) 농구대잔치 결승에 오르는데 기여했지만 2차례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제대 후 원 소속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로 복귀, 프로 첫 시즌을 맞았으나, 대한민국 최강으로 꼽히던 -허재-김영만의 백코트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고, 허재의 부상투혼 속에 팀이 1997-98 시즌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랐음에도 봉하민은 미미한 활약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 허재가 원주 나래의 정인교와 1:1 트레이드로 떠나면서 하드웨어가 좋은 2번이던 봉하민의 출장시간이 점차 늘었고, 특히 시즌 중반부터는 수비 약점이 드러나버린 정인교를 제치고 아예 주전 2번으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 시즌 평균 7분이던 출장시간은 두 배가 넘게 늘었고(평균 19분), 특히 플레이오프 들어서는 평균 30분을 넘게 출장하면서 김영만과 함께 플옵 4강 상대 수원 삼성의 문경은-이슈아 벤자민(190cm, F) 쌍포를 완벽하게 봉쇄해버렸다.[3] 대전 현대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도 봉하민은 조성원 봉쇄임무를 부여받고 출전했으나, 주전센터 제이슨 윌리포드와 노장 식스맨 김유택의 연이은 부상으로 골밑이 흔들리면서 시리즈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고, 봉하민은 마크대상이던 조성원이 챔프전 MVP를 수상하는걸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도 전 시즌 대비 주전으로 도약하며 보여준 맹활약을 인정받아, 봉하민은 '''98-99 시즌 기량발전상'''을 차지하게 된다. 98-99 시즌 동안 봉하민은 '''평균 5.2득점-2.4리바-0.6어시-0.7스틸'''을 기록하며 역시 커리어 하이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99-00 시즌 새로 취임한 박수교 감독은 2번 포지션에 정인교를 다시 중용하기 시작했고, 봉하민은 수비용 식스맨으로 다시 물러나야 했다. 수비력은 여전했지만 오히려 감퇴해버린 공격력(99-00 시즌 3점 성공률 27.4%) 탓에 출장시간은 자꾸만 줄어들었고, 시즌 중반 이후엔 2년차 황문용[4] 에게 식스맨 자리도 내어주고 만다.
시즌 종료 후 봉하민은 포지션 경쟁자였던 정인교와 함께 묶여 2:2 트레이드로 여수 골드뱅크 클리커스로 트레이드 된다.[5] 00-01 시즌 동안 봉하민은 새팀 여수 골드뱅크에서 좀처럼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고, 시즌 중반 정락영의 부상으로 포인트가드를 급히 찾던 여수 골드뱅크의 요청에 의해 서울 삼성 썬더스의 박성배와 사상 초유의 1:1 임대 트레이드를 통해 서울 삼성 썬더스 유니폼을 입는다. 박성배가 여수의 "골든보이"로 불리며 금새 주전 1번자리를 꿰찬 반면, 봉하민은 서울 삼성의 두터운 선수층을 뚫지 못하고 고작 7경기 출전에 그친 채 시즌 종료 후 별 소득 없이 여수로 복귀한다.[6] 만년 하위권 팀에서조차 출장시간을 잡지 못하던 봉하민은, 결국 01-02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동갑내기 김도명, 허영 등과 함께 KBL 심판이 되어 최근(2015년)까지 활약했다. KBL 팬들이라면 알겠지만, 봉하민 심판의 명성은 김도명 심판과 함께 선출심판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는데, 주요 사례들은 아래와 같다.
- 2015년 1월 인천 전자랜드 테렌스 레더가 다가가자 위협을 느꼈다고 테크니컬 파울 선언;;. 기사영상
- 2013년 11월 인천 전자랜드-창원 LG 경기에서 터치아웃 오심. 기사
- 2012년 2월 인천 전자랜드-전주 KCC 경기에서 라인크로스 오심. 출처 NBA매니아
4. 관련 문서
[1] 당시 결승전 상대는 천재가드 이상민(2학년)과 단신슈터 조성원(3학년)이 이끌던 홍대부고였다.[2] MBC배는 4위.[3] 이 4강 시리즈에서 문경은은 4경기 동안 9-8-6-10점으로 제대로 틀어막혔다.[4] 99-00 시즌 식스맨상 수상[5] 여수 골드뱅크 get: 봉하민, 정인교 ↔ 부산 기아 get: 정진영, 박재현[6] 별소득이 없진 않았다. 00-01 시즌 서울 삼성이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봉하민은 무임승차(?) 식으로 우승반지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