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7 농구대잔치
1. 개요
1996년 11월 30일부터 1997년 1월 6일까지 펼쳐진 당시 대한민국 농구대회 중 최정상 레벨의 대회. 이 대회가 끝나자마자 KBL 원년시즌이 개막하였고, 이후 농구대잔치는 규모나 권위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그런고로 스폰서가 없었다.
2. 참가팀
- 실업팀 (8팀)
- KBL 출범을 앞두고 금융 3팀(기업은행, 산업은행, 한국은행)이 농구팀 해체를 선언했다.[4] 이중 산업은행 농구단은 나래이동통신에 매각되어 팀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한국은행 출신 선수 3명(김영래, 김상준, 이승학)도 나래이동통신으로 합류하게 되었다.[5] 한국은행의 나머지 선수들(김재득, 황상하, 신창남, 김도완 등)은 모두 선수생활을 접고 한국은행의 일반 행원으로 남았다. 나래이동통신에 공식 인수된 산업은행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기존 산업은행 선수단 중 10명만 나래이동통신으로 이적했고 안세환, 김동현 등은 은퇴 후 일반 행원으로 남았다. 뭐 국책은행은 그냥 취업하기도 어려운 곳들이니 언제 은퇴할지 모르는 농구선수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판단이긴 했다. 실제로 나래이동통신 소속으로 KBL에 진출한 선수 중 정인교, 이인규, 강병수, 최호를 제외하곤 3년 이내에 모두 은퇴했다.
- 신생 실업팀인 동양제과와 대우증권이 새로 참가하였다. 동양제과는 고려대와 한양대, 대우증권은 연세대와 명지대 출신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창단되었다.
- 기업은행은 마지막 농구대잔치가 끝나면 나산그룹에 농구팀을 매각하여 팀을 존속시키려고 했으나, 내심 상무를 KBL에 참가시키고자 했던 프로농구연맹 측에서 기업은행 농구단의 인수를 불허하였다. 기업은행은 이에 반발하여 1996-97 농구대잔치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후 상무의 KBL 참가 불가 통보를 받은 프로농구연맹은 부랴부랴 기업은행과 나산그룹을 달래었고, KBL 개막직전 광주나산 플라망스를 겨우 참가시켜 8개 팀으로 프로 원년시즌을 시작했다.[6]
- 대학팀 (9팀)[7]
3. 운영방식
- 조별리그: 대학 9팀, 일반부 8팀씩 2조로 나뉘어 조별 풀리그를 통해 각 조 3위까지 6강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부여했다.
- 6강 플레이오프: 각조 상위 3팀 씩 총 6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했다. (6강, 4강전, 결승전 모두 3전 2선승)
4. 대회결과
4.1. 조별 리그
※ 승패 동률 시 골득실차로 순위 결정.
4.2. 6강 플레이오프
4.3. 대회 결산
- 최종 순위
- 우승: 연세대학교 / 준우승: 상무 / 3위: 고려대 / 4위: 경희대
- 개인부문 시상
[1] 에이스 허재가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음주파문에 이어, 음주운전 & 뺑소니 사건까지 터뜨리며 구속된 상태였다. 곧 훈방되긴 했지만, 당연히 선수자격정지 먹고 농구대잔치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대한농구협회"에서 내린 징계라 "아마추어"선수 자격만 정지된 상태여서, 뒤이어 열린 1997 KBL 원년시즌에는 무리없이 출전했다는게 함정..[2] 발목부상으로 1997 KBL 원년시즌 초반까지 뛰지 못했다.[3] 간염(!!)으로 인해 선수생명이 위태로울 때였다. KBL 원년시즌을 통으로 날리고 1997-98 시즌 후반에 겨우 복귀하였다.[4] 모두 국책은행이라, 은행업무 외의 영리 사업을 할수 없었다.[5] 원래는 김동철도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군 입대로 불발되었다.[6] 팀 인수 및 창단절차가 늦었던 광주나산은 1996년 11월에 열렸던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에도 참가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드래프트 탈락 선수들을 대상으로 부랴부랴 외인 2명을 찾아 선발했다. 근데 여기서 찾은게 빌라노바대 출신 득점기계 에릭 이버츠였다.[7] 대학농구연맹 소속 10개팀 중 동국대만 불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