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교

 

'''박수교의 수상 및 감독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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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자 농구단 역대 감독'''
정광석
(1986~1993)

<color=#373a3c> '''박수교'''
'''(1993~1994)'''

신선우
(1994~2005)





'''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
'''박수교
朴守教'''
''' 출생 '''
1956년 7월 13일 (68세)
[image]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학교 '''
청운초등학교(졸업)
인창중학교 (졸업)
인창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졸업)
''' 직업 '''
농구선수(가드/ 은퇴)
농구감독
''' 실업입단 '''
1978년 현대전자 농구단
''' 소속 '''
''' 선수 '''
[image] 현대전자 농구단 (1978~1988)
''' 감독 '''
[image] 현대전자 농구단 (1993~1994)
[image]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1999~2002)
[image]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4~2005)
''' 코치 '''
[image] 현대전자 농구단 (1989~1993)
''' 프런트 '''
[image]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5~2006 / 단장)
''' 행정 '''
(2018~2019 / 기술위원장)
''' 방송해설 '''
(1997)
KBS SKY SPORTS (2002~2004)
(2003~2004)
(2006~2016)
(2014, 2018)
''' 별명 '''
표범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첫 출발
3.2. 기아 - 모비스 시절
3.3. 전자랜드 시절
4. 해설자 시절
5. 다시 행정가로...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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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현역 시절에는 80년대를 주름잡던 최고의 명 가드. 그러나 감독과 프런트로서는 좋은 선수라고 해서 좋은 지도자 및 행정가가 될 수는 없다의 전형적인 사례.

2. 선수 시절


연세대학교 시절 신동찬, 신선우와 함께 연세대의 주축으로 평가받으며 최고의 가드로 명성을 얻었다. 탁월한 득점력이 무엇보다 일품이었고, 패스 한 방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여우같은 플레이로 그야말로 한국 가드의 계보를 잇는 적자 중의 적자였다. 얼굴도 잘 생겨서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나서 대학 시절부터 농구대잔치를 뛰었다면 그야말로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 선수. 물론 그 시절에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선수임에는 분명했다.
선수 시절에 성깔도 있는 선수라서 당시 얌전하게 플레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심판 판정에 거세게 항의도 하고, 쇼맨십 비슷하게 대응도 했고, 무엇보다 선수로서 팀원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있었던 선수. 한국 남자 농구의 첫 업적으로 평가받는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대표팀 주장이자 포인트가드로 맹활약하면서 한국이 중국을 누르고 극적인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현대와 삼성이 1977년 창단을 선언하고 선수를 모집할 때,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결국 현대로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출범한 농구대잔치에서도 그 뛰어난 플레이는 어디가지를 않아서 선수로서 뛴 다섯 시즌동안 세 번의 우승을 현대에게 안겨주면서 화려한 시절을 이어갔다. 1986-87 농구대잔치 MVP에 빛나는 인물.
1988년을 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명 가드로서의 명성을 안은 채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3. 지도자 시절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는 거의 완벽하게 실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4대 프로 스포츠 감독들을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실업 시절이야 선수층 빈약으로 그렇다 쳐도 프로농구로 넘어와서는 잘 나가던 기아 엔터프라이즈 - 모비스 오토몬스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해당 구단 팬들에게는 심각한 흑역사로 취급받는데, 특히 전자랜드 단장 시절의 행보는 가히 충공깽 수준으로 무능의 극치를 보였다. 그나마 그와 행보가 비슷한 농구인으로는 이충희, 박종천 정도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셋 모두 현대전자의 주전으로 맹활약했던 선수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3.1. 첫 출발


1년 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수교는 현대전자 코치에 임명되어 지도자 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코치로서 계속 일하다가 스카우트 전쟁에서 자꾸 밀린 것에 책임을 지고 정광석 감독이 1993년 사퇴하자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실업팀 감독으로 처음 데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박수교가 처음 발을 내딛은 시절은 흔들려도 여전히 기아차가 건재하고, 삼성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연세대와 고려대가 실업팀을 두들기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SBS 창단 과정에서 우수 선수 스카우트에 실패하면서 선수층 보강도 이루어지지 않던 시점이었다.
결국 박수교는 이렇다 할 인상적인 모습 하나 제대로 보이지 못 한 채 1년만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후임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신선우다. 감독직 사임 후, 박수교는 라디오 진행자를 맡으면서 한동안 농구와는 거리를 두며 지냈다.

3.2. 기아 - 모비스 시절


1999년, 박인규 감독의 뒤를 이어 새롭게 기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재밌는 것은 1998-99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현대와 기아가 맞붙었는데, 양 측 사령탑인 신선우와 박인규는 모두 1982 뉴델리 멤버였고, 계약 만료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약 만료가 된 후, 후임으로 거론된 인물이 바로 박수교였다. 결국 박수교는 챔프전에서 2년 연속 준우승을 거둔 기아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히 망했다. 외국인 선수 장악에 실패해 외국인 선수가 박수교의 뺨을 때리려 했다는 루머가 돌 정도로 흔들리기도 했고,[1] 주축이었던 김영만은 부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부상 때문에 고전하던 김영만은 무리해서 나가다가 전성기를 잃어버렸다. 뭐 이런 악재가 있다고 해도 전년도 31승 팀이 21승으로 추락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1999-2000 시즌 기아의 최종 성적은 21승 24패로 5할 승률 밑이었지만, 턱걸이로 6위를 차지하면서 PO 진출에는 간신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게 박수교의 감독 커리어 통틀어 유일한 PO 진출이었다. 2000-01 시즌에는 17승 28패로 9위,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팀명이 바뀐 2001-02 시즌에는 18승 36패로 마침내 최하위라는 수모를 당했다. 계속되는 부진에 허덕이면서 명가 기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결국 이 세 시즌을 끝으로 박수교는 모비스 감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감독직도 끝날 줄 알았는데...

3.3. 전자랜드 시절


2004년, 전자랜드를 이끌던 유재학 감독이 연봉 2억 3천만원이라는 당시 최고액의 대우를 받고 모비스로 이동하면서 전자랜드의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바로 당시 해설위원 생활을 하던 박수교였다.
그런데 여기서 박수교는 또 다시 전설을 썼다. 전년도까지 유재학 감독 체제 하에 30승으로 4강에 올랐던 전자랜드가 17승 37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최하위로 추락하며 다시 몰락한 것이다. 물론 프로농구가 외국인 선수의 선발, 선수들의 군 문제 때문에 전력이 자주 변한다고는 해도 이 경우는 너무 쉽게 무너진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 때의 몰락으로 인해 한 시즌만에 감독직을 물러나면서 진짜로 지도자 생활은 완벽히 접는가 싶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단장으로 승진했다'''! 팬들은 이 놀라운 승진 능력(…)을 칭송(?)하여 이때부터 '''수교본좌'''란 별명을 내려 주었다. 동시에 '''박수괴'''란 별명도 으로 얻었다. 이 때문에 전자랜드 팬들은 뒷목을 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단장으로서는 더더욱 무능의 끝자락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프로농구 최초의 유일한 '''외국인 감독'''[2]으로 동부에서 코치로 꽤 잘 나갔던 제이 험프리스를 세웠으나, 험프리스는 20경기 3승 17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단명 감독''' 신기록 수립.[3] 작전타임 등 경기 중에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돼야 되는 농구에서 언어 문제로 의사소통이 안 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리빌딩을 명목으로 단행한 문경은 트레이드에서도 딱히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고[4], 드래프트에서는 하필이면 망픽일 때 1픽이 걸리는 불운으로 성과가 전혀 없었다. 그가 단장으로 재임한 2005-06 시즌의 전자랜드는 '''8승 46패'''로 전설적인 '''32연패'''의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제치고 '''역대 한시즌 최다패 신기록'''을 수립한다.[5] 결국 2006년, 최희암이 새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단장 자리에서도 자연스레 물러나게 되었고, 그렇게 박수교는 진짜로 현장에서는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워낙 감독, 단장 등으로 너무 위대한(…) 업적을 쌓은지라 남자부고 여자부고 어느 쪽으로도 다시는 현장 복귀는 어려워졌다.
'''현재까지도 전자랜드 팬들은 박수교라는 이름 석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제이 험프리스, 박종천 등과 함께 지도자도 아닌 시궁창 취급을 하며, 나아가 전자랜드 팬들에게 있어 이 세 명은 아예 감독도 아니고 단장도 아니다.'''

4. 해설자 시절


감독과 단장 등으로 또 하나의 전설(…)을 쓴 박수교는 이후 SBS Sports의 농구 해설위원을 맡게 된다.
SBS 해설 초창기에는 과거에 쌓은 업적(?)이 워낙 큰 데다(…) 목소리톤이 거부감이 든다고 까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그럭저럭 안정된 해설을 한다는 평. 해를 거듭할수록 넉살도 좋아지고 전체적으로 판세를 여유 있게 읽는 해설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방송사 우지원 해설위원이 너무 선수를 감싸주는 해설을 하는 데 반해, 때로는 냉정한 멘트를 날리기도 한다. 그래서 농구팬들은 KBL 복귀 욕심 내지 말고 영원히 해설에나 전념하길 빌고 있다(…).
2012년 마지막 중계에서는 종료멘트로 "모두 부~자 되시길 바랍니다"를 외치셨다(…).
해설위원의 연령이 전반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그의 경륜있는 해설이 계속되길 바란다는 목소리도 있다. 결정은 시청자의 몫.
2014년 안방에서 열렸던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농구에서 지상파인 SBS 해설위원으로 같은 모교 출신 후배들인 정우영 캐스터와 우지원 해설위원과 함께 12년만의 금메달 경기를 중계했다.
2014년 11월 18일 부산 kt 소닉붐고양 오리온스 경기 해설 도중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농구해설가 박수교 ‘장애 비하’ 채찍 필요. 이후 사과를 하긴 했지만, 평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발언. 박수교 장애인 발언 및 사과 장면. 한편으로는 새 외국인 선수 에반 블락에 대해 평가를 한 kt의 모 선수도 신중치 못한 의견을 남긴 것도 크겠지만...
이후 2014~2015 시즌을 끝으로 SBS Sports는 프로농구 중계를 사실상 마무리하게 된다.
하지만, 2018 아시안게임에서 남녀 농구팀 해설로 오래간만에 복귀하였다.
해설위원 시절의 평판#s-1을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농구판 이순철'''이라는 평이다.

5. 다시 행정가로...


아시안 게임 종료 이후로는 KBL에서 기술위원장 및 KBL 유소년 캠프를 포함해서 행정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2019년 12월 9일, 창원 LG 세이커스고문으로 영입되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LG 측에서는 농구와 농구 외적인 부분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기 위해 영입하였다고 밝혔으며, 덤으로 박수교의 요청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기술위원장은 2019년까지 맡기로 되어 있었다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 특히 LG 팬들은 19-20 시즌 끝나고 현주엽경질하고 환갑이 훨씬 넘은 박수교를 임명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하였다. 더군다나 과거에 모비스와 전자랜드에서 지도자와 행정가로서 능력이 상당히 형편없었다는 사실이 검증되었는데, LG까지 이러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박수교가 지도자를 하던 시절과 현재는 스타일이 많이 변해서 박수교가 그것을 익히는데도 또 엄청 애를 써야만 하며, 게다가 현장을 떠난지도 오래 된 상태다. 실제로 현주엽이 19-20 시즌을 끝으로 계약만료 이후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해 물러나기로 해서 팬들이 진짜로 걱정을 하기는 했으나, 다행히 LG는 조성원을 선택하면서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6. 관련 문서


[1] 당시 외국인 선수인 듀안 스펜서가 멱살을 잡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얘기가 돌았다. 경기 도중에 감독의 지시에 여러 차례 반발하거나 태업 논란도 있었던만큼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 이는 13년 뒤인 2018년에 전주 KCC 이지스에서 추승균 감독이 자진 사퇴하며 당시 코치로 있던 스테이시 오그먼이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유일의 타이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3] 이 기록은 훗날 같은 팀에서 박종천 감독이 '''12경기 1승 11패'''로 경신한다(…).[4] 문경은은 SK로 보내고, 김일두, 임효성 등을 데려오는 트레이드인데, 김일두는 김성철의 보상선수로 KT&G이적했고, 그나마 데려온 김성철도 나중에 다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임효성은 농구가 아닌 남편이란 사실로 더 유명하다(…).[5] 1998-99 시즌, 동양이 32연패의 기록을 세웠을 때는 한 시즌이 45경기 체제였기 때문에 3승 42패로 시즌을 끝냈다. 그래서 역대 한시즌 최다패 기록은 전자랜드에게 넘겨줬지만, 역대 최저 승률 기록인 0.067은 오리온스가 가진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듯 하다(…). 참고로, 46패를 기록했던 전자랜드의 승률은 0.148이며, KBL 원년부터 2018년까지 2할 아래의 승률로 시즌을 마쳤던 팀은 이 시기 전자랜드와 32연패의 동양, 그리고 2017-18 시즌kt 셋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