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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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현 부천 하나원큐 농구단 감독.
2. 선수 시절
2.1. 대학 시절
양정고 졸업 후 대학 하위권팀이던 성균관대학교에 입학, 신입생으로서 참가한 1985-86 농구대잔치에서 팀선배 서지태(2m, 3학년)[1] 와 더블포스트를 이루어, 성균관대를 대학부 1위 및 농구대잔치 1차대회 8강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하며, '''1985-86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성균관대학교의 성적은 별로였지만 이훈재는 4년간 팀의 주전센터로 뛰며 대학선발팀에 뽑히는 등 기량을 인정받았고, 졸업 후 중앙대 출신 이준호(197cm)[2] , 천정열(185cm) 등과 함께 기아자동차에 입단하게 된다.
2.2. 기아자동차 시절
이훈재가 입단하던 1989년의 기아자동차는 유재학-허재-강정수-정덕화-김유택-한기범 등 국가대표 라인업을 구성, 1988-89 농구대잔치부터 1992-93 농구대잔치까지 전무후무한 대회 5연패를 달성하던 그야말로 최강 멤버들이었고, 특히나 김유택-한기범의 국가대표 쌍돛대는 신예 이훈재나 이준호가 비벼볼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출장 기회조차 잡기 힘들던 기아에서의 한 시즌을 보내고 상무에 입대한 이훈재는 최병식(193cm)과 함께 상무의 골밑을 지키며 1990-91 농구대잔치에서 상무를 4강까지 이끄는 돌풍을 이끌기도 했지만, 제대 후 복귀한 팀에서 이훈재의 자리는 다시 벤치였다.
하지만 최강 기아자동차의 5연패 기간 동안 이훈재는 부상으로 신음하던 한기범과 불미스러운 일로[3] 김유택이 각각 자리를 비울 때마다 주전으로 나서 골밑 수비 한 자리를 훌륭히 메웠고, 1992년에는 주전 멤버 강정수, 정덕화가 나란히 은퇴하며 백코트에 공백이 생기자 3번자리로 포지션을 변경해 외곽수비까지 담당하는 등, 화려한 주전 라인업(허-동-택 트리오)로 대표되던 기아자동차에서 궂은일 담당으로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1993-94 농구대잔치에선 주전들의 노쇄화 속에 팀의 농구대잔치 8강 탈락 및 6연패 좌절을 지켜봐야만 했으나, 이듬해 1994-95 농구대잔치에서는 아예 주전 스몰포워드 자리를 꿰차면서 상대팀 에이스들(삼성전자 문경은, SBS 정재근, 고려대 양희승, 연세대 우지원 등)을 꽁꽁 묶는 찰거머리 수비를 자랑했고, 가끔씩 저돌적인 돌파를 선보이며 기아자동차가 통산 6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후 공수 만능 스몰포워드 김영만이 입단하면서 출장시간이 다소 줄긴 했지만,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수비력은 여전했고,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기아자동차의 통산 7번째, 이훈재 개인으로선 5번째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쥔다.
2.3. 프로 시절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소속으로 참가한 KBL 원년시즌, 이훈재는 -허재-김영만-클리프 리드-로버트 월커슨 등 주전라인업에 밀려 여전히 식스맨이었지만, 수비가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해 상대팀 에이스를 꽁꽁 묶어버렸고, 원년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부상중인 허재를 대신해 주전으로 출전, 상대팀 원주 나래의 3점슈터 정인교를 잘 마크하며 팀에게 원년시즌 우승을 안겨주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이훈재는 KBL 원년시즌 '''우수 수비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가져갔고, '''수비 5걸'''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다음 시즌(1997-98) 노쇠화가 온 것인지 예년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이훈재는 원래 안좋던 득점력까지 완전 추락하면서 플레이오프 들어 출장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특히 허재와 클리프 리드가 대폭발했던 대전 현대와의 챔피언결정전에는 단 1분도 출전하지 못하면서 전력상 배제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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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종료 후 대구 동양의 포워드 박준영(195cm)[4] 과 1:1 트레이드로 대구 동양 오리온스로 이적한 이훈재는, 전희철, 김병철, 김광운(181cm), 정재훈(184cm), 허남영(195cm) 등 주력 선수들은 물론 갓 입단한 박재일까지 모조리 상무/공익으로 보내버린 박광호 사단에서 졸지에 주전 포워드를 차지하게 되었고, '''98-99 시즌 대구 동양은 프로도 아닌 수준으로 완전 시궁창에 처박히며 처참하게 멸망했다.''' 야심차게 뽑은 외인 센터 그레그 콜버트(199.5cm)가 8경기만에 미국으로 도망가버리면서 팀 플랜이 꼬여버린 대구 동양은, 2R에서 뽑은 신인 정락영과 노장 이훈재를 팀의 주축으로, 자칭 "가나 왕자" 존 다지(188cm)와 함량미달의 센터 자바리 마일스(198cm)에 이팀 저팀에서 긁어모은 백업들(김재열(190cm,F), 신현식(196cm,C), 이인규(187cm,G))로 구성되었던, 프로는 물론 대학팀들과 붙어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의 전력이었고, 가뿐히 '''32연패'''와 역대 시즌 최저승(3승 42패)를 달성한다. 이미 32세의 노장이던 이훈재는 이 엉망진창인 팀에서 그나마 믿음직한 베테랑이었고, 여전히 득점력은 없었지만 성실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정락영과 함께 대구 팬들의 몇 안되는 위안거리였다. 약간 공로상 같은 개념(?)이었는지, 악몽의 98-99시즌이 끝나고, 42패나 한 꼴찌팀 소속임에도 이훈재는 98-99 시즌 종료 후 생애 두 번째 '''수비 5걸상'''을 차지한다.
99-00 시즌, 소집해제 후 복귀한 전희철과 루키 포워드 조우현이 합류하면서 다시 식스맨으로 돌아간 이훈재는, 비시즌동안 장착한 3점슛(경기당 0.6개, 성공률 50%)을 선보이며 팀이 전시즌보다 무려 17승을 더 올리는데 기여하지만, 겨우 1경기 차로 아쉽게 6강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한다. 다음시즌엔 김병철까지 복귀했지만 시즌 내내 엉망진창이던 팀은 00-01 시즌 꼴찌로 재추락하고, 박재일에 밀려 수비용 식스맨 자리도 내준 이훈재는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택한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 미국으로 지도자 유학을 갔다가, 2001년 인천 금호생명 팰컨스의 코치로 부임하며 곧바로 귀국한다.
2003년 신동찬 감독이 물러나면서 감독 대행으로 한시즌간 팀을 이끈뒤 물러났으며,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상무 농구단의 감독직을 맡았다. 프로팀들이 참가하지 않는 아마추어 농구계에서 독보적인 강팀인 상무팀 감독으로서, '''농구대잔치 9회 우승''',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 2회 우승'''을 비롯, 수차례의 전국체전 우승과 KBL 윈터리그, KBL D리그 우승 트로피를 싹쓸이 하고 있다.
2013년 인천에서 열린 제 3회 동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 대회 대표팀 코치로 임명되며, 최부영 감독을 보좌하며 윤호영, 박찬희, 김종규, 이정현 등이 이끌던 당시 대표팀을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같은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 대표팀에선 유재학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합류, 팀을 대회 3위에 올려놓으며 2014 스페인 농구월드컵 티켓을 따냈다.
2014년 스페인 농구월드컵에 역시 유재학 감독, 이상범 코치와 함께 참가했으나 대회 전패에 그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하기도 했고, 같은해 열린 제 17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도 같은 코칭스태프들과 참가하여, 대한민국 농구대표팀에 12년만의 금메달을 안겨주기도 했다.
2019년 3월, 부천 하나원큐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계약기간은 3년이다.
2020년 10월 11일 양인영을 FA로 영입하였다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는데...
결국 2020-21 시즌은 2월 1일 아산 우리은행 위비전 패배로 인해서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었다.
4. 관련 문서
[1] 타이완에서 농구 유학을 온 장신 센터로, 85-86 농구대잔치 1차대회 리바운드왕을 차지했다.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단했으나, 기본기 부족으로 많이 출전하지 못하면서 2년만에 은퇴했다.[2] 울산 모비스와 국가대표팀 센터, 이종현의 아버지다.[3] 1989-90 농구대잔치 당시 간통 사건으로 출장정지를 받았다.[4] 휘문고 시절 우지원, 석주일을 제치고 92학번 랭킹 1위 포워드로 불리던 그 선수 맞다. 대학에서 폭망한 대표적 고교 유망주로 꼽히는 인물. 트레이드 직후 바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