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위
不遷位
유교 사회에 있었던, 덕망 있는 인물에게 주어지던 서훈의 하나. 부조지전(不祧之典)이라고도 한다.
본래 유교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 이게 넘어가면[1]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고인이 특별히 출세했던 위인이거나 덕망이 있는 경우 신위(神位)를 옮기지(遷) 않고(不) 후손들이 대대로 계속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다.
과거에는 국가에서 나라의 위인을 불천위로 지정하기도 했는데, 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따로 지정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의 잔재는 아직 큰 가문 위주로 남아 있다. '문중 종가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 번 지낸다'는 말이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집안 내력이 오래된 명문가에서는 당연히 불천위 제사를 지낼 역사적 인물이 많기 때문.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중요한 인물[2] 의 경우에 나라에서 지정한 것으로 국불천위(國不遷位)라 불렸고,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결정된 향불천위나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유명한 조상을 기리는 사불천위 등도 있었다. 종묘에 배향된 배향공신의 경우 해당 인물의 가문에서도 불천위로 제사를 지냈다.
국가에서 지정한 것으로, 개국군주, 나라의 영토를 넓힌 왕, 전성기를 연 왕 등 나라 발전을 이끈 왕이나 왕족, 공신들이 뽑혔다.
국가급 불천위가 시작된 것이 확실히 확인되는 건 통일신라부터지만 그 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초대 군주나 대왕 등의 칭호를 받은 왕들이 다른 왕들보다는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신라의 신궁이나 석탈해의 사당에 대한 기록, 그리고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왕궁이 평양에 있었음에도 동명성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국왕들이 졸본으로 행차했던 것이 그 예.
통일신라 대 혜공왕(765~780) 때 이르러서 5묘제에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며,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3] 신라 왕계가 난리가 나는 하대 들어서 무열왕계가 아닌 선덕왕과 원성왕이 즉위했을 때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불천위는 건들지 않았고, 애장왕 때 따로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아예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5묘에 부묘했다.
불천위는 고려를 거쳐 조선 대에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그 결과가 종묘다. 5대가 지나면 신주를 묻는 게 아니라 정전에서 덜 중요한 영녕전으로 옮기고 불천위는 정전에 모두 몰려 있는데, 아무래도 조선이 한국 역사상 가장 유교가 융성하고 사회적 의무가 강했던 시기니 제사를 안 지내면 불효, 불충으로 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4]
다음은 조선 왕들의 불천위 표다.
이상 13명이 불천위로 지정되었고, 나머지 정전에 있는 순조, 문조(효명세자, 추존), 헌종, 철종은 조선 멸망 당시 4대가 지나지 않아 영녕전에 옮기지 않았고,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까지 살았지만 정전에 자리가 남아 있어서 들어간 경우다. 만약 조선이 망하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면 순조도 불천위로 지정되었을 것이고, 헌종, 철종 등 덜 중요한 왕은 영녕전으로 갔을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으므로 역시나 불천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신이 아닌 경우, 특히 여성이 그 개인의 공적으로 인해 서훈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장계향(張桂香)이 국불천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 단위에서 불천위로 지정한 경우로 주로 한 마을의 유림들이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나 학파의 시조를 제사지낼 때 등이었다. 다만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는데, 시조나 중시조(中始祖)이면서 국가에 큰 공헌을 세우거나 높은 벼슬을 지내 가문을 부흥케 했으며 유림들 사이에서 덕망이 크고 학문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야 했다. 이렇듯 까다롭다 보니 지정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이나 이황 등은 너나 할 것 없이 인정했지만 기대승이나 조식 등 오늘날에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더라도 당시에는 논란을 일으킨 경우 지정받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향불천위에는 문묘 18현 등이 있는데, 모두 유학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대학자들이다.
문중 단위에서 불천위를 지정한 경우로, 주로 시조나 중시조, 고위 관직 출신 조상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지나치게 남발되어 신분제가 붕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불천위로 지정된 조상이 많을수록 그 가문은 명문가임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족보를 위조하거나 갖은 이유를 들어 불천위로 지정했다.
1. 개요
유교 사회에 있었던, 덕망 있는 인물에게 주어지던 서훈의 하나. 부조지전(不祧之典)이라고도 한다.
본래 유교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 이게 넘어가면[1]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고인이 특별히 출세했던 위인이거나 덕망이 있는 경우 신위(神位)를 옮기지(遷) 않고(不) 후손들이 대대로 계속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다.
과거에는 국가에서 나라의 위인을 불천위로 지정하기도 했는데, 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따로 지정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의 잔재는 아직 큰 가문 위주로 남아 있다. '문중 종가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 번 지낸다'는 말이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집안 내력이 오래된 명문가에서는 당연히 불천위 제사를 지낼 역사적 인물이 많기 때문.
2. 종류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중요한 인물[2] 의 경우에 나라에서 지정한 것으로 국불천위(國不遷位)라 불렸고,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결정된 향불천위나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유명한 조상을 기리는 사불천위 등도 있었다. 종묘에 배향된 배향공신의 경우 해당 인물의 가문에서도 불천위로 제사를 지냈다.
2.1. 국불천위(國不遷位)
국가에서 지정한 것으로, 개국군주, 나라의 영토를 넓힌 왕, 전성기를 연 왕 등 나라 발전을 이끈 왕이나 왕족, 공신들이 뽑혔다.
국가급 불천위가 시작된 것이 확실히 확인되는 건 통일신라부터지만 그 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초대 군주나 대왕 등의 칭호를 받은 왕들이 다른 왕들보다는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신라의 신궁이나 석탈해의 사당에 대한 기록, 그리고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왕궁이 평양에 있었음에도 동명성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국왕들이 졸본으로 행차했던 것이 그 예.
통일신라 대 혜공왕(765~780) 때 이르러서 5묘제에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며,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3] 신라 왕계가 난리가 나는 하대 들어서 무열왕계가 아닌 선덕왕과 원성왕이 즉위했을 때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불천위는 건들지 않았고, 애장왕 때 따로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아예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5묘에 부묘했다.
불천위는 고려를 거쳐 조선 대에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그 결과가 종묘다. 5대가 지나면 신주를 묻는 게 아니라 정전에서 덜 중요한 영녕전으로 옮기고 불천위는 정전에 모두 몰려 있는데, 아무래도 조선이 한국 역사상 가장 유교가 융성하고 사회적 의무가 강했던 시기니 제사를 안 지내면 불효, 불충으로 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4]
다음은 조선 왕들의 불천위 표다.
이상 13명이 불천위로 지정되었고, 나머지 정전에 있는 순조, 문조(효명세자, 추존), 헌종, 철종은 조선 멸망 당시 4대가 지나지 않아 영녕전에 옮기지 않았고,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까지 살았지만 정전에 자리가 남아 있어서 들어간 경우다. 만약 조선이 망하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면 순조도 불천위로 지정되었을 것이고, 헌종, 철종 등 덜 중요한 왕은 영녕전으로 갔을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으므로 역시나 불천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신이 아닌 경우, 특히 여성이 그 개인의 공적으로 인해 서훈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장계향(張桂香)이 국불천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2.2. 향불천위(鄕不遷位)
마을 단위에서 불천위로 지정한 경우로 주로 한 마을의 유림들이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나 학파의 시조를 제사지낼 때 등이었다. 다만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는데, 시조나 중시조(中始祖)이면서 국가에 큰 공헌을 세우거나 높은 벼슬을 지내 가문을 부흥케 했으며 유림들 사이에서 덕망이 크고 학문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야 했다. 이렇듯 까다롭다 보니 지정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이나 이황 등은 너나 할 것 없이 인정했지만 기대승이나 조식 등 오늘날에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더라도 당시에는 논란을 일으킨 경우 지정받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향불천위에는 문묘 18현 등이 있는데, 모두 유학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대학자들이다.
2.3. 사불천위(私不遷位)
문중 단위에서 불천위를 지정한 경우로, 주로 시조나 중시조, 고위 관직 출신 조상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지나치게 남발되어 신분제가 붕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불천위로 지정된 조상이 많을수록 그 가문은 명문가임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족보를 위조하거나 갖은 이유를 들어 불천위로 지정했다.
[1]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으면, 아버지의 고조부는 5대조가 되므로 사대봉사에서 벗어난다.[2] 왕이나 왕자, 부마 등의 왕족이나 2품 이상의 시호를 받은 신하 중 주요 인물.[3] 이에 대해서는 천자가 7묘, 제후가 5묘를 두도록 한 기존의 예법과의 절충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천자로써 행세하면서(외왕내제) 천자국 제도에도 맞고 제후국으로써의 제도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형식을 취했다는 것.[4] 조선 시기가 군약신강이네 뭐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실제로 조선 왕들은 왕권이 강했다. 그런데 왜 군약신강이란 말을 들을 정도였냐면 왕권은 강한데 그걸 휘두르기에는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왕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권신조차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아 죽일 수 있었지만 연산군처럼 막 나가면 폐위당할 수 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