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니프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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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국적의 항공사였다. 1982년 금융위기로 파산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회사이다.
2. 역사
2.1. 초기
폴/토마스 브래니프 형제가 1928년 5월 28일 동생 폴의 이름을 따 항공 운수를 시작한 게 최초이다. 실질적인 운영은 동생 폴(1897~1954)이 맡았으며 형 토마스는 지원을 했는데, 당시 토마스 브래니프(1883~1954)가 오클라호마에서 꽤 날리는 보험 설계사였기 때문에 수월한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동년 6월 20일 첫 상업운행을 개시했으나, 유니버설 항공에 인수당한 후 1930년 회사를 다시 차렸다.
이후 형제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폴의 노력으로 회사는 1934년 미국 우정국으로부터 항공우편 운송권을 받았고[5] 1935년에는 최초로 멕시코에 취항했다. 토마스는 몇 차례의 주식공모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많은 자본을 확충했다.
이후 텍사스를 중심으로 노선을 확장해나갔으며, 많은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를 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민간 항공 위원회는 브래니프 항공에 카리브해, 중앙/남아메리카 운수권을 부여했다. 이후 브래니프 항공은 남미 노선을 집중적으로 확장시켜 메이저 항공사로 발돋움하며, 인수합병으로 미국내 노선도 집중적으로 확장해 왔다.
그런데 1954년, 토마스 브래니프가 사냥 차 비행선을 탔다가 추락사하였고, 그 해 말에는 폴 브래니프마저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브래니프 형제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경영자로는 부회장이었던 찰스 비어가 선임된다.
2.2. 중기 : 제트기 시대
찰스 비어는 안정적인 경영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제트기 시대에 맞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해나갔다. 1950년대부터 보잉 707과 720을 도입했고, 1960년대 중반까지 자사 항공기들을 제트기로 빠르게 대차해나갔다. 1964년에는 보잉 2707을 주문예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 2707의 결과는 다들 알겠지만...
1964년 브래니프 항공은 보험지주 회사인 그레이트아메리카 코퍼레이션에 인수되었다. 그레이트아메리카 회장 트로이 포스트는 기존 경영진의 보수적 경영을 못마땅해했고, 운영진을 교체시켰다. 새로 사장이 된 하딩 로렌스는 회사를 현대적이고 주목받는 이미지로 대대적 개편시켰다. CI를 바꾸고, 항공기와 매표소, 게이트 라운지 등에 각자 다른 색을 칠하는가 하면, 여승무원들에게 플라스틱 버블을 쓰게 하고 복장도 우주적으로 뜯어고치는 등 새롭고 다채로운 시도를 많이 하였다.
이후 베트남 전쟁 수송계약을 체결하고, 공격적이고 미래적인 마케팅 컨셉으로 사세를 확장시켰다. 제트레일이라며 러브필드 공항 주차장부터 터미널까지 모노레일을 깔아 서비스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보잉 727-100QC 모델을 도입해 심야 화물운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1977년, 보잉 747을 도입하였다.
2.3. 몰락
1978년, 카터 행정부에 의해 항공운수 자유화가 실시되었다. 이 때문에 1978년 말부터 LA와 보스턴에 허브를 신설하고 노선을 대규모 확충하게 되는데,[6] 효과는 좋았지만 하필이면 오일쇼크가 발생해서 전체적인 유지비가 상승, 적자를 기록한다.
1979년부터는 에어 프랑스 및 영국항공과 합작해 콩코드를 굴리기 시작했다.[7] 노선은 댈러스 - 워싱턴 D.C - 런던/파리. 근데 '''망했다. 아주 거하게.''' 이 일은 회사에 있어 매우 큰 악재였으며 건실하던 브래니프에 하이킥을 날려 망하게 하는 직접적 요인이 된다.
유지비도 유지비였지만[8] , 애초에 브래니프가 운영하던 댈러스~워싱턴 D.C 노선 경로[9] 에서 콩코드 손님이 나올 리가 없었다.[10] 브래니프 항공은 나중에는 10%의 추가요금까지 없애 일반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과 가격이 같게 했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댈러스부터가 탈 만한 수요층이 없는 걸... 결국 1980년 6월 30일 콩코드 서비스를 종료한다.
한때 가장 높은 수익과 성장률을 보이던 브래니프 항공은 이 콩코드와 기타 여러 이유 때문에 매우 큰 하락세를 타게 된다. 1978년까지 흑자였던 항공사는 1979년 약 4천만 달러의 손실을 낸 이래 80년 1억 2천만 달러, 81년 1억 7백만 달러의 손실을 낸다. 게다가 안 그래도 이때 오일 쇼크로 '''유류비가 94% 상승(!)'''한 상황인데도 허브를 신설하고 장비를 도입하는 바람에 대규모의 부채가 쌓였다. 또한 본사마저 러브필드에서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으로 옮기며 엄청난 돈이 깨져나갔다.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채권단은 하딩 로렌스를 회장직에서 내려오게 하였고, 아시아/유럽 지역 노선을 철수시키게 했다. 그 와중 1981년 여름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으로 또 손실을 입었다.[11] 이후 퍼스트 클래스를 없애는 등 계속해 자구책을 내놓았지만 내놓는 족족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982년 5월 12일, 브래니프 항공은 업무를 정지했다. 파산 이후, 1983년 기존의 자재를 인계받아 다시 시작했다가 망했고(1983~1989), 다시 한 번 시작했다가 망했다.(1991~1992) 그리고 9년 뒤 팬암도 똑같은 일을 겪게 된다.[12]
다채로움을 지향하던 항공사답게 최후까지도 다채로웠다... 행적만으로도 역대급 항공사라는 건 분명한 듯.
3. 특이사항
계열사를 보면 알겠지만 항공사 치고는 사업이 매우 다각화되어 있다. 항공사가 호텔도 운영하는 건 흔한 편이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 경호 부문과 교육, 부동산까지... 좀만 더 컸다면 종합재벌 같은 회사가 되었을 수도...?
1979년 9월부터 1980년 10월까지 한국에 취항했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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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이 스트립을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었다(...) 게다가 보면 알겠지만 승무원의 옷이 겹겹이다. 꽤 더웠을듯...
스페인과 포르투갈, 중남미에서는 광고가 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전 좌석 가죽시트임을 강조하려고 "fly in leather"를 그대로 직역해서 "en cuero"라 썼는데, 현지인들에겐 '''홀딱벗고 비행기에 타세요(fly naked)'''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사 항공 라운지를 "Rendezvous Lounge"라고 썼다가 난리가 나기도 했다. 브라질 포어로 'Rendezvous'가 창녀란 뜻이었기 때문(...)
[1] 소멸 당시의 데이터[2] Boeing Customer Code, 보잉사 고객코드[3] 본사 소재[4] 보다시피 매우 칼라풀하다.[5] 전년도 터진 메일 스캔들의 영향이 컸다.[6] 홍콩 등 아시아에 진출하게 된 게 이때이다.[7] 특이사항으로 브래니프가 굴리던 기체는 반반도색을 했다. 왼쪽에는 브래니프, 오른쪽에는 영국항공/에어프랑스 이런 식으로.[8] 가뜩이나 운영시기가 오일쇼크가 한창일 때였다.[9] 전 구간 내륙 노선이었다. 여기서 초음속 비행을 했다가는 지상에 소닉붐이 울리면서 아래에 사는 주민들에게 큰 민폐가 되며, 그렇다고 초음속 운항을 안 했더니 가격은 퍼스트, 좌석은 이코노미라는 개창렬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나마 콩코드가 흑자를 본 대서양 노선의 경우에도 먼 바다로 나가고 나서야 초음속 비행을 시작했기에 소닉붐 논란에서 자유로웠으며, 비슷하게 싱가포르항공도 싱가포르 - 바레인 - 런던 노선에서 영국항공과의 공동운항으로 콩코드를 리스했을 때 전 구간 초음속 비행을 하다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소닉붐으로 인한 민원이 들어와 역시 창렬이 되어 탑승률이 바닥을 기었다. [10] 콩코드의 주 수요층이 비즈니스 고객인데, 두 지역 모두 비즈니스 수요가 있다기엔... 차라리 시카고 같은 비즈니스 수요가 보장된 곳에 투입했다면 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11] 로널드 레이건이 관제사들을 대량해고시키고 그 자리에 군 관제사들을 채워넣은 것으로 유명한 그 사건이다.[12] 다만 차이점은 이쪽은 보잉 747을 무리하게 도입하고 알맞는 수요가 안 나는 노선에도 투입하는 바람에 사실상 이 항공사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13] 한국행 노선 철수도 위의 사건으로 인한 것이며 당시의 취항 기종은 보잉 747SP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