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보웬
1. 개요
전 NBA의 농구선수로 리그 최고급 퍼리미터 수비 능력과 최악의 경기매너로 이름을 날렸다.
2. 선수 시절
1971년 캘리포니아 출신. 언드레프티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리그와 CBA를 전전하며 4년을 뛰었다.[3] 이후 마이애미에서 팻 라일리의 눈에 들어 96-97시즌에 히트와 10일 계약을 체결해서 한 경기에 나와 1분을 뛰었으나, 우승을 노리던 강팀이던 히트에서 그의 자리는 없었고 바로 방출이된다.
97-98시즌에 셀틱스에서 그는 NBA에서 처음으로 괜찮은 출장시간(21.4분)을 확보하고 61경기에 뛰는 등 자리를 잡는 듯 보였으나, 그와 포지션이 겹치는 루키 폴 피어스의 입단으로 출장시간이 다시 줄어들고, 고작 30경기만 뛰는데 그친다. 이후 그는 보스턴과 계약, 필라델피아로 트래이드된 이후 좀 뛰다가 시카고로 트래이드 직후 방출[4] 됐다가 다시 마이애미 히트에 입단하며 27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00-01시즌은 보웬에겐 중요한 시즌이었다. 사실상 이때가 NBA에서 확실히 자리잡은 시절이었는데, 82경기 모두를 뛰며 (주전출장 72경기) 평균 32.7분을 기록했는데, 7.6점 3리바 1.6어시이라는 기록이야 평범했지만 특유의 찰거머리 수비력으로 인상을 남기며 처음으로 올디펜스 세컨팀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보웬의 성공과 반대로 히트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2연속 수비왕을 오르며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던 에이스 알론조 모닝은 신장병을 앓게 되며 거의 뛰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히트는 00-01시즌 올스타 가드 에디 존스, 뛰어난 포워드들인 앤서니 메이슨, 브라이언 그랜트 등을 영입하며 50승을 거두지만, 1라운드에서 샬럿 호네츠에게 스윕당하며 광탈하게 된다.
01년 오프시즌에 이들은 로스터를 크게 갈아엎게 되는데, 메이슨은 밀워키로, 팀 하더웨이는 댈러스로, 리키 데이비스는 클리블랜드로, 댄 멀리는 피닉스로, 세드릭 세발로스는 은퇴하는 분위기에서 보웬은 샌안토니오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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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퍼스는 당시 일종의 변환기를 겪고 있었다. 샌안토니오는 89년에 입단한 루키 듀오 데이비드 로빈슨과 숀 엘리엇을 중심으로 강팀으로 성장했다가 이후 팀 던컨의 입단으로 던컨-로빈슨의 트윈타워를 중심으로 99년에 우승을 거두며 정점을 찍은 시점이었다. 둘의 골밑은 계속해서 건재했지만 문제는 이들의 프런트코트 파트너인 숀 엘리엇과 늙어가는 백코트였다.
99-00시즌 당시 팀의 주전은 에이버리 존슨-마리오 엘리-숀 엘리엇-던컨-로빈슨이었는데, 상대 스윙맨을 막을 선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엘리엇은 63년생으로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인데다가 원래도 수비력이 탁월한 선수는 아니었다.
원래 스퍼스에서 이 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던 것이 바로 68년생인 주전 스몰포워드 엘리엇이었기 때문. 그는 운동능력이 뛰어나고 수비력도 괜찮은 선수여서 97-98시즌에 불스와 스퍼스가 첫 경기를 치렀을때 (97년 11월) 조던을 틀어막아 그가 야투 3할대에 그치는 등 부진하게 한 적도 있다.[5][6] 그러나 문제는 엘리엇의 지병이었다. 엘리엇은 커리어하이 시즌을 찍은 95-96시즌 이후 별다른 이유 없이 조금씩 출장시간과 기량이 줄어들고 있었는데, 99년 우승 이후 자신이 93년 이후부터 신장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공개한다. 99년 오프시즌에 이식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99-00시즌 막판에 성공적으로 복귀하고 2년을 더 뛰지만, 이미 엘리엇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두 시즌동안 19경기, 52경기를 뛰며 20분 좀 넘게 뛰다가 01년에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33세에 은퇴하게 된다. 만약 엘리엇의 신장병이 없었다면 33세로 아직 건재했을 그가 스퍼스의 외곽수비를 담당했을 것이고 보웬을 굳이 욕심낼 이유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어 노장 슈팅가드 엘리까지 은퇴하며 외곽에 구멍이 뚫린 스퍼스는[7] 급히 전력보강이 필요했고, 수비력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던 보웬을 데려온 것.
이후 8년간 브루스 보웬은 리그 최고의 정상급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고, 스퍼스의 3번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득점력은 정말 코너의 3점 빼면 없는 수준이라[8] 공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팀 던컨이 전성기였던 터라 보웬의 구멍까지 틀어막아 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수비로 명성을 날리던 코비 브라이언트, 론 아테스트, 테이션 프린스 등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매년 디펜시브 팀에 올랐고(총 8회 1st 5회 2nd 3회), 500여 경기 연속출장의 대기록을 가지고 있다[9][10]
기록만으로는 수비를 평가하기가 어려운 선수다. 보통 수비에 장점이 있는 선수라면 스틸이나 블록슛 두 카테고리에서 뭔가 튀는 기록을 남기는 게 보통인데 스퍼스에서의 8년간 이 선수의 평균 스틸은 0.8개, 평균 블록은 0.4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웬은 상대의 슛을 직접 저지하기보다 최대한 볼을 어렵게 잡게 만들고, 최대한 찰싹 붙어 쉬운 슛을 못 던지게 만들며, 돌파하는 상대를 골밑의 팀 던컨에게 몰아넣는 지능적인 수비가 주특기였다. 저런 후진 기록을 보이고서도 디펜시브팀에 꾸준히 오른 게 그의 능력을 역으로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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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웬의 헥토파스칼 킥에 맞은 선수는 당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포워드였던 월리 저비악.
그러나 심각할 정도의 거친 플레이, 상대의 부상을 아랑곳 하지 않는 위협적 플레이는 언제나 심각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1] 컨테스트 과정에서 몸싸움도 심했고, '''점프슛하고 내려오는 상대의 발 밑에 일부러 발을 집어넣는'''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물론 본인과 팀은 고의가 아니라 수비 과정 중에 불행하게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부인했지만 워낙 보웬 발을 밟고 다치거나 다칠 뻔 했던 선수들이 많아서 공감을 얻지 못했다.
사실 80년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같은 경우 보웬보다도 훨씬 더럽고 거친 플레이를 자주 했다. 점프한 상대 발 밑에 발을 집어넣는 쓰레기 짓의 경우 빌 레임비어는 고의가 아니라고 보기 불가능할 정도로 자주 했으며, 이 때문에 로버트 패리쉬같은 선수는 피스톤즈를 상대할 때 항상 고생했고, 분노가 폭발해 먼저 주먹을 날린 적도 많다.
그러나 NBA는 거칠었던 7,8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선수들을 보호하는 쪽으로 룰을 개정해왔으며, 이런 더러운 플레이에 대한 페널티를 강화해왔다. 부상을 유발하는 플레이에 가해지는 플래그런트 파울에 대한 처벌은, 89-90시즌만 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12] 90-91시즌부터 누적시 퇴장과 벌금을 포함해 점점 강화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도를 지나치는 거친 플레이가 줄어간 것.
사실 90년대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거칠어서 90년대 후반에 데뷔한 빈스 카터만 해도 (핸드체킹 금지룰 때문에) 지금 득점하기 훨씬 쉽다고 하고 있다. 공중에 뜬 선수를 가격해 거꾸러뜨리는 플레이는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플레이인데, 84년 결승 당시 케빈 맥헤일이 커트 램비스에게 했을 때는 난투가 일어나긴 했으나 해설자도 "저것도 경기의 일부죠"라고 하고 맥헤일은 퇴장이나 벌금, 출장정지 등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슷한 플레이를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앤드류 바이넘이 호세 바레아에게 했을때 바이넘은 거의 매장 당했다. 보웬이 그토록 무자비한 욕을 먹은 이유는 저런 플레이가 그나마 용인되는 시대가 아닌 위험한 플레이를 자제하는 시대에 보웬은 위험천만한 플레이를 했으며, 두번째로는 인터넷으로 이런 플레이가 순식간에 전세계에 퍼지는 시대에 뛰었기 때문인 것이다.
레이 앨런이나 빈스 카터 등 스윙맨 에이스들과는 앙숙인 사이. 뿐만 아니라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같은 PF/C 와도 상당히 사이가 안 좋다.
08-09시즌 종료 후 노쇠화에 따라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된 후[13] 바로 밀워키 벅스에서 방출되었고 그대로 다른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했다.
3. 평가
워낙 악명이 높았던 선수라 그가 공식적으로 2012년에 은퇴했을 때는 수 많은 NBA팬들이 기뻐했다. 수 많은 팬들은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안될 선수"라는데 공감한다. 수비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했던 수 많은 위험한 수비방식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반응들.. 스퍼스 팬덤에서도 그의 악명 때문에 영구 결번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고, 실제로 그가 영구결번 되었을 때는 "저딴 놈에게 영구결번이냐?"는 날선 반응도 있었다.[14]
그래도 구단 입장에서는 정말 헌신적으로 뛰어준 선수이고, 수비에서 쌓아올린 실적도 뛰어나며[15] , 그와 함께 팀 던컨은 3번의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구단 차원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준 듯..
한편 라마커스 알드리지가 스퍼스에 들어오고 브루스 보웬의 영구결번을 풀자마자 안티팬들이 무지막지하게 반색하며 재영구결번이 되지않기를 바라거나 12번 영구결번이 알드리지로 바뀌는걸 원하는 의견도 나왔다. 다만 어디까지나 영구결번은 '''구단 차원'''에서 특정 선수에게 그의 공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알드리지가 아무리 잘해도 보웬의 공헌도가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재영구결번될 확률이 100%에 가깝다. 게다가 영구결번을 푼 것도 구단의 요청에 보웬이 허락해서 한 것이지, 만약 보웬이 허용하지 않았으면 구단이 해제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스퍼스 홈구장 천장에 영구결번된 보웬의 저지가 '''여전히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6]
4. 기타
클리퍼스의 해설자로 일하고 있었지만 최근 카와이 레너드에 관련된 강도 높은 비난을 한 것이 결과가 되어 클리퍼스에게서 해고 당했다.[17] 보웬의 발언이 왜 문제가 되었냐면 클리퍼스가 바로 카와이를 자유계약선수로 노리고 있기 때문. 카와이는 LA에서 뛰기를 희망해왔는데 자신을 비난한 보웬이 해설자로 있다면 카와이가 자신들과 계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한듯하다.
이에 농구계와 팬들은 보웬이 인신공격이나 허위 주장을 한것도 아닌 해설자로서 충분히 할 수있는 의견 피력을 한것에 대해 너무 카와이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해고한 것이 아니냐 하고 클리퍼스를 비난하고 있다.
은퇴후 선수시절 도저히 막기 힘들었던 상대로 코비 브라이언트와 디르크 노비츠키를 꼽았었다. 그 두 선수에 한해서는 최선 이상을 해도 막을 방도를 도통 찾기 어려웠다고...
4.1. 보웬은 프랑스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적이 있는가?
국내 농구 커뮤니티에선 보웬이 프랑스에서 뛸 당시 득점왕을 차지했다는 정보가 널리 알려져있으며, 나름 이름있는 해설자이자 농구잡지 루키의 전 편집장인 조현일 역시 자신의 글에서 이를 사실인양 언급할 정도였다. 그런데 보웬에 대해 설명한 NBA공식 홈페이지 스퍼스 페이지나 보웬을 다룬 다른 어떤 공식 사이트에도 이러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NBA.com의 보웬 관련 페이지에서는 "보웬이 마이애미와 계약하기 전에 프랑스 프로 리그에서 23.2점을 기록했다"고 짧게 나와있으며,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이렇게 나와있다. 구글에 쳐봐도 관련 정보는 없으며, "보웬 득점왕설"은 영미권에서 전혀 없는 얘기란 걸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보웬이 뛰었던 1996-97 시즌에 프랑스 1부리그의 득점왕은 22.5점을 기록한 David Booth로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보웬이 프랑스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소문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보웬의 당시 득점은 23.2점, 득점왕보다 오히려 '''평균득점이 높다.''' LNB Pro A는 7,80년대를 거치면서 득점왕들의 개인득점이 점점 줄었으며, 90년대엔 이미 20점대로, 2010년대에는 매번 10점대 득점왕이 나오고 있다.[18] 즉, 보웬의 당시 득점은 득점왕'''급'''이었으며, 실제로 그 이후 현재까지 보웬보다 높은 기록을 낸 득점왕은 단 한명(24.1점/2003-04시즌) 뿐이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왜 보웬은 득점왕으로 기록되지 못했을까? 이는 보웬이 풀시즌을 소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보웬은 97년에 마이애미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 그의 프랑스 리그 기록을 보면 경기수가 16경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랑스 1부 리그 경기수는 30경기가 넘기 때문에 보웬은 절반밖에 뛰지 않아 득점왕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셈.
종합하자면 보웬이 프랑스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가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보다도 더 뛰어난 기록을, 시즌 절반 정도 뛰면서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NBA에서 40경기 뛰면서 평균 33점 기록했으나, 출장경기수 부족으로 득점왕이 못 되고 32점 기록한 선수가 득점왕이 된 셈이다.
어쨌든 실제로 득점왕이 아니었어도, NBA와 타 리그 간의 격차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상술된 대로 보웬은 (외곽선수들에겐 가장 쉬운 득점 중 하나인) 코너 3점슛을 제외하면 NBA에선 득점력이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런 선수라도 유럽에서 꽤 수준있는 리그에서 최고수준의 득점원으로 군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보웬이나 한때 KBL을 지배했던 피트 마이클의 경우, 진짜 득점기술 자체가 없는게 아니라 득점할 수 있는 기술은 있지만 이게 NBA 수비에선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공격에서 잉여가 되고 마는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비가 몇 단계 내려간 리그에선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19]
[1] 한국에는 KIA 타이거즈에서 활동했던 브렛 필의 모교로 알려져 있다.[2] 2015년 라마커스 알드리지를 영입하면서 보웬의 허락을 받고 일시적으로 결번을 해제했다.[3] 대학 졸업 후 곧바로 프랑스로 넘어가 프랑스 리그 LNB의 2부 리그인 Pro B 리그의 STB 르아브르(Le Havre)에서 1년씩 뛴 뒤 CBA에서 그 다음 1년을 뛰었다가 프랑스 1부 리그의 브장송(Besançon)으로(이 팀은 2009년에 해체한 뒤 재창단해 현재 2부리그에 소속되어 있다. 다만 보웬이 뛸 당시엔 1부리그였다) 넘어가 여기서 주전으로 23.2점을 기록하는 득점왕'''급'''기록을 냈다. (공식 득점왕이 아니다) 이후 마이애미, 보스턴, 필라델피아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2000-01시즌 마이애미에서 자리를 잡고 이후 스퍼스로 트레이드.[4] 불스 왕조의 마지막 남은 멤버 중 하나인 토니 쿠코치 트래이드의 샐러리 맞추기용 부록으로 끼워팔린 것이었다. 이때 불스는 루키 포워드 듀오 론 아테스트- 엘튼 브랜드가 있었기 때문에 보웬이 전혀 필요없었다.[5] 조던이 극적인 동점 3점으로 연장에 돌입해 시카고가 승리한 그 경기. 클러치능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3쿼터와 1차 연장을 제외하곤 야투율이 형편없었다.[6] 많이 유명한 선수는 아니지만 엘리엇은 정말 좋은 선수였다. 엘리엇은 데뷔 이후 두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93 오프시즌 당시 데니스 로드맨 트래이드로 디트로이트로 이적해 한 시즌을 잠깐 뛴 것 외에는 전 커리어를 스퍼스에서 뛴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다. 실제로 그가 94-95시즌에 다시 엘리엇이 스퍼스로 복귀한 이후 팀 성적은 55승에서 62승으로 뛰게 된다. 스퍼스가 99시즌 이후 00플옵 1라운드에서 맥없이 탈락한 건 팀 던컨의 부상 탓이지만 그 전에 53승에 그친 건 엘리엇의 빈자리가 컸다. 전성기 때 올스타급 선수였던 (2회 올스타) 엘리엇이 건강했다면 코비를 잘 막아줄 수 있었을 것이고, 스퍼스도 굳이 보웬에 욕심을 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7] 실제로 2001년 당시 서부컨파에서 코비는 1차전에 48득점을 포함해 시리즈 평균 33.3점을 몰아넣으며 샌안토니오 백코트를 영혼까지 털어버렸고 시리즈 스윕의 일등공신이 되었다.[8] 필드골 시도의 절반 이상이 3점. 그마저도 경기당 2~3개로 많지도 않다. 성공률은 40%대로 높은 편이나 3점 스페셜리스트로 활약했다고 보기엔 시도수가 너무 적다. 애초에 보웬은 슈팅력이 좋아서 잘 넣은게 아니라 공격력이 NBA 기준으로 제로 수준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오픈상태에서만 쏴서 저렇데 잘 넣은 것이다. 즉, 로드맨처럼 슈팅력이 극악수준은 아니다뿐이지 슈팅력 자체는 NBA 스몰포워드 중 평균 이하이나, 통상라인보다 1미터 짧아 사실상 롱2에 가까운 위치인 코너 3점을 와이드오픈 상태에선 잘 넣어줬기에 없는 것보단 나은 옵션으로 활용한 것. 위에서 언급한 로드맨의 경우 공격력이 별로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공격에서 스크린과 공격리바운드란 중책을 맡은 반면, 보웬은 공격에선 진짜 잉여가 됐기 때문에 코너에서 3점 역할이라도 맡은 것이다.[9] 연속 출장 기록이 깨진 이유는 부상이 아니라 거친 플레이로 인한 사무국 징계 때문.....[10] 재밌는 건 보웬의 더티플레이 대선배인 빌 레임비어 역시 NBA 역대 5위인 무려 685연속 출장 기록을 갖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부상이 아닌 징계 때문에 기록이 깨졌다.[11] 2007년 플옵 피닉스 선즈와의 3차전에서는 보웬이 공을 잡고 피벗할 때 오른쪽 무릎으로 스티브 내시의 그곳을 가격하자 내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경기 직후 보웬은 내시에게 "이봐 스티브,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는거 알지?"라고 해명했다고 한다.#[12] 파울당한 선수의 팀 감독이 자유투 던질 선수를 지정할 권리만 주어졌다. 마이클 조던처럼 어차피 자유투 잘 쏘는 선수에게 파울하면 페널티가 없는거나 다름없는 셈.[13] 컷 토머스, 페브리시오 오베르토 같은 선수들과 묶어서 패키지로 벅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스퍼스는 벅스에서 준 올스타급 선수인 리차드 제퍼슨을 영입했다. 기대받았던 제퍼슨이 적응 실패로 잉여가 돼 버린게 문제였지만.[14] 다만 이건 구단보다 선수 위주로 팬덤이 형성되는 한국 팬덤 한정이고, 샌안토니오 현지에선 이런 반응이 별로 없었다. 보웬보다 더 극악했던 '''빌 레임비어'''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 환영받는다는 걸 생각해보자. NBA에서 연고지 선수에 대한 지지도는 대한민국에서 대표팀 선수에 대한 지지도와 비슷하게 절대적이다.[15] 디펜시브팀 8번 수상은 엄청난 기록이다. 퍼스트와 세컨드팀 합쳐 8회 수상은 데니스 로드맨, 마이클 쿠퍼, 존 하블리첵,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NBA 공동 12위. 이 부문 1위는 합쳐 14번을 수상한 팀 던컨인데, 보웬이나 던컨 모두 올해의 수비수 상은 받지 못했다. 안습[16] 과거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 역시 이전까지 32번을 달았던 샤킬 오닐, 칼 말론에게 영구결번을 풀어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으나 존슨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이들이 거부한 것이다. 만약 알드리지가 영구결번된다면 두 선수 모두 같은 번호로 영구결번될 확률이 높다. 실제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는 30번을 달고 활약한 테리 포터와 밥 그로스 두 선수 모두를 위해 영구결번식을 해줬으며, 뉴욕 닉스 역시 얼 먼로와 딕 맥과이어 둘 다 15번으로 영구결번되어 있다. 이 경우 두 선수 모두 은퇴한 다음에 영구결번식이 이뤄졌기에 가능했다. 애초에 영구결번은 무슨 규칙이 아니라 구단이 선수에게 고맙다고 해주는 기념식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구단 마음대로다.[17] 이것이 진짜 해고 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계약을 갱신하지 않은것인지는 의견이 조금 분분하다.[18] 실제로 현재 대다수 유럽리그는 한 선수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미국보다 훨씬 적고, 이 때문에 유럽리그의 평균 스탯은 생각보다 상당히 적게 나온다. 한국농구에서 뛰었던 피트 마이클이 바르셀로나 FC에서 한때 팀내 득점 2위를 했을 때 기록은 '''10점대 초반'''이었다.[19]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똑같이 NBA에서 잉여라도 하위 리그에서 빛을 발하는 케이스와 그렇지 못한 케이스가 존재한다. 마이클이나 보웬처럼 기술 자체는 다양하게 존재하나 레벨이 낮은 케이스는 NBA보다 수준이 낮은 리그에선 활약을 많이 할 순 있다. 그러나 그렉 스팀스마처럼 특정 기술 하나(블럭슛)은 NBA급이지만 기술 수준이 제한적인 경우는 수준이 낮은 리그에서도 크게 빛을 발하진 못한다. 하지만 NBA진출을 놓고 보면 같은 레벨의 선수인 경우 하나라도 NBA에서 통하는 게 있는 후자가 더 유리한 것. 사실 보웬은 원래부터 수비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었으나 위에 언급된대로 "NBA에서 통하는 무언가"를 갖추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뛰어난 수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 피트 마이클 역시 커리어 중반부에 FC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낼 당시 NBA에서 주목한 이유가 바로 수비력이었다. 마이클 역시 커리어 초반엔 수비로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