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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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NBA에서 활약했던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태생의 캐나다 국적의 농구선수. NBA 역사상 180 클럽을 4차례나 달성해 내고 이중 3번은 3시즌 연속 기록해낸 샤프슈터이기도 했다.[3]
2.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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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라라 대학(사립)에서 포인트 가드로 활약 후,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피닉스가 케빈 존슨의 후계자로 생각하며 15번째 픽으로 지명했다. 매년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당시 제이슨 키드가 선발인지라 절대 주전 자리를 넘볼 수 없었기에 출전시간이 상당히 제한되었고, 기껏해야 백업 포인트 가드, 스몰라인업의 슈팅가드였다. 결국 98년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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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스에서 내시는 초반에는 마이클 핀리와 함께 좋은 활약을 보였고 얼마후 마찬가지로 신예였던 디르크 노비츠키, 마이클 핀리와 함께 속공 오펜스를 운영하며, 2001년에 첫 올스타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후, 2000-01 시즌부터 2003-04 시즌까지 평균 득점 16점과 평균 어시스트 7.7개 수준을 꾸준히 기록하며, NBA의 상급 포인트가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사이에 베테랑 포인트 가드 반 액셀을 영입하는데, 한 때 이들을 묶어 '빅4'로 부르기도 했을만큼 당시 댈러스는 빠르고 공격위주의 화끈한 농구를 구사하는 팀이었다.
03-04 시즌이 끝난 후, 내시는 댈러스와 재계약하기를 원했지만, 내시보다 젊은 노비츠키를 중심으로 팀을 운영하려고 하던 댈러스는 내시에게 그저 그런 재계약을 제시했다. 이 때, 피닉스 선즈가 훨씬 좋은 조건을 내세우자, 내시는 댈러스에게 피닉스의 조건만큼 제시해주면 댈러스에 남겠다고 말했지만, 댈러스는 거절했고, 내시는 피닉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30대가 된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한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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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댄토니 감독은 속칭 "7초 이하" (Seven Seconds or Less)라는 속공 공격 전술을 구사했고, 내시는 이 시스템에서 말그대로 용이 되었다. 피닉스에서의 첫 시즌에서 내시는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나 숀 매리언같은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지휘하며 시즌 평균 어시스트 11.5개를 기록했고, 전 시즌에 29승밖에 못했던 피닉스를 리그 최고의 팀으로 끌어올리며 04-05 시즌 MVP가 되었다. 05-06 시즌에는 아마레가 무릎수술 때문에 시즌을 날려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득점 18.8점, 어시스트 10.5개, 야투 성공률 51.2%, 자유투 성공률 92.1%를 기록, 팀의 디비전 1위 자리를 지키면서 2년 연속 MVP를 달성했다.
내시는 피닉스에서 오랫동안 올스타급 기량을 유지했다. 09-10 시즌에는 '''36세'''의 나이로 평균 득점 16.5점, 평균 어시스트 11개를 기록했을 정도. 하지만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샌안토니오, 댈러스, 레이커스등 다른 강팀들과 만나 번번히 탈락해 끝내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의 벽을 넘는데는 실패했으며 매리언이나 아마레같은 주축 선수들이 떠나면서 컨텐더 자리에서 서서히 내려갔다. 어느덧 40대가 가까워진 내시는 우승을 위해 피닉스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책이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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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시즌 계약이 만료되면서 선즈를 떠날 것을 선언했고, 조국인 캐나다의 토론토 랩터스와 뉴욕 닉스의 치열한 영입경쟁을 거절하고 우승도전을 선택하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2013년,15년 1라운드 픽과 2013,14년 2라운드 픽+현금으로 사인앤 트레이드 되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다. LA 레이커스 입장에선 2004년 게리 페이튼과 칼 말론을 영입했던 일명 전당포 레이커스 이후 8년만에 다시 결성하는 반지원정대이다.
리그 최고의 센터였던 드와이트 하워드도 올랜도에서 레이커스를 상대로 우승트로피를 내주웠던 역사를 뒤로하고 트레이드로 레이커스에 합류하고 전시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에이스역할을 맡았던 앤투완 제이미슨이 스스로 자기몸값을 후려지고 최소연봉으로 반지원정대에 합류하여 또한 반지는커녕 파이널에 진출해본적도 없는 내쉬를 포함하여 우승반지를 얻기위해 선수들이 모여 역대 최고의 반지원정대가 꾸려진다. 많은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정작 팀은 시즌 내내 삐걱거렸고, 내시 본인도 레이커스에서의 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거기에 부상까지 당하며 많은 경기에 결장했다. 막차로 플레이오프에는 간신히 합류했으나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스윕당하고 내시는 두경기밖에 못뛰어 여러 모로 아쉬운 시즌이 되고 말았다.
13-14시즌 레이커스 선수로서 한화로 100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골골대며 출장을 못하고 있는데 하라는 재활은 안하고 휴양지에서 골프휴가를 즐긴것을 들켜 빈축을 사기도 했다. 레이커스는 내쉬가 재활을하면서 젊은 선수들의 멘토가 되어주길 원했지만 100억이라는 엄청난 연봉을 받는 선수신분으로 재활해서 선수복귀를 하기는커녕 골프휴가를 즐겼기 때문에 이는 정말 프로답지 못한 행동으로 먹튀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13-14 시즌부터는 경기조차 제대로 뛰지 못하다가 미국시각으로 2015년 3월 21일 결국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원래 14-15 시즌이 끝난후 은퇴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부상으로 코트에 서지 못하자 은퇴를 앞당기게 되었기 때문에 팬들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것에 안타까워했다. 통산 기록은 17387득점 10335어시스트(어시스트 부문 역대 3위). 은퇴 후 8월 25일에 피닉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UC 산타클라라 대학을 다닐 당시 양손으로 가는 곳마다 '''테니스 공'''을 드리블하면서 다녀서 드리블 실력을 연마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른 손끝감각 덕분에 크로스오버나 별 다른 훼이크 동작 없이 드리블 페이스만 자유자재로 조절해 상대 수비를 제칠 수 있는 드리블 실력을 키워냈다. 그 덕에 볼 키핑에 신경쓰느라 자세를 낮게 가거나, 의미없는 좌우 게걸음 대신 꼿꼿이 선 상체로 높은 위치에서 코트를 바라보는 시야가 일품이며 더블팀이 몰리면 아래쪽을 공략해 빈공간을 찌르는 바운드 패스를 쏴주는 뛰어난 패서이다.
특히, 09-10 시즌까지 팀동료였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의 픽앤롤(정확히는 픽 앤 슬립)은 알고서도 못막는 NBA의 대표적인 공격 패턴 중 하나였다. 양쪽 손으로 자유자재로 패스가 가능하고, 드리블을 빡빡한 수비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골밑에서 양손으로 몸의 균형을 잃으면서도 슈팅을 쏘는 능력도 있다. 이 덕분에 탑에서의 픽앤롤을 통한 1선 수비 벗겨내기에 이은 연쇄적인 스윙으로 코트를 벌려 3점슛 폭발을 노리는 마이크 댄토니 감독의 전술을 충실히 실현해낼 수 있었다.
또한 NBA에서 손꼽는 슈터 중 하나로, 2005-06시즌, 2007-08부터 2009-10시즌까지 총 4차례 야투 성공률 50% 이상, 3점슛 성공률 40% 이상, 자유투 성공률 90% 이상을 기록한 괴물 슈터다. 속도를 제외한 신체능력에서는 상대 포인트 가드에 비해 부족한 편이지만, 슈팅과 BQ로 득점을 하거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포인트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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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엄청난 슛 성공률을 보여주는 이 짤방이 나온 후, 국내 마니아들 한정으로 건담내시라는 별명이 붙었다. 건담에서 파생된 제갈내시[6] , 내시승상이란 별명도 있다. 게다가 선즈를 이끌고 매년 파이널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좌절하는 등 실제 그분과 싱크로율이 매우 높아서 은근히 잘 어울리는 별명. 팬들은 그분의 최후까지 닮지는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었지만..
단점은 수비. 전성기 시절에도 디펜스가 약했다. 일단 다른 포인트 가드들에 비해 신체능력이 좀 딸리는 편이라[7] 상대 포인트 가드의 순간돌파를 막는 것이 어렵고, 힘도 좋은 편이 아니라 상대 포인트가드가 천시 빌럽스, 데런 윌리엄스 처럼 조금 덩치가 있는 경우 골대 주변에 가서 포스트 플레이를 하면 얄짤없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피닉스의 공격 패턴이 속공에 위주한만큼 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내시가 없을 때 피닉스의 공격 수치는 확연히 떨어진다는 분석들이 많이 나온 덕에 이러한 주장은 금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ESPN이 2016년 발표한 포인트가드 랭킹에서는 키드를 제치고 역대 7위에 선정 되었다.[8]
4. 승상(?)[9]
지지리도 우승과는 거리가 먼 선수다. 특히, 04-05 시즌부터 07-08 시즌까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번번히 발목을 잡히며 고배를 마셔야했다. 09-10시즌 플레이오프에는 드디어 샌안토니오를 물리쳤지만, 결국 우승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게 분패하며 또다시 우승의 꿈은 저멀리.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까지 이적해서 공격수가 휑해졌지만 아마레가 나가고 나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어시왕을 먹었다!
5.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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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3일(한국시간), 케니 엣킨슨 감독의 후임으로 브루클린 네츠의 감독 계약을 맺었다. 계약기간은 4년. 골스에서 선수육성 컨설턴트를 맡은적은 있으나 코치 경력은 전무하다보니 제 2의 제이슨 키드가 되는게 아니냐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존재한다.
첫 행보로 노비츠키를 코치로 영입하는 시도를 했으나, 노비츠키 본인이 고사하였다.
션 막스 단장[10] 에 따르면, 내쉬는 "끝내주는 커뮤니케이터"이며 오늘날의 NBA 감독 트랜드가 "매니저" 쪽에 가깝다는 걸 감안하면 선수생활 내내 적이 없던 것은 물론 그 흔한 구설수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듯 하다. 성격 까탈스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케빈 듀란트가 골스 시절 내쉬의 컨설턴팅을 받은 것을 회고하며 내쉬가 정말 훌륭한 사람임을 인증하는 팟캐스트 인터뷰가 이를 반증한다.[11]
허나 또 어빙이 자극적인 발언[12] 을 하는 바람에 험난한 감독 생활이 예고되고 있다.
어시스턴트 코치로는 피닉스 선즈 시절 동료이자 픽앤팝 달인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선임했다. 그리고 '''본인의 스승 마이크 댄토니를 네츠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하였다!''' 선수시절 스승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감독을 하게 된 희귀한 사례.[13] 그리고 첫 경기부터 골스를 가비지로 보내버렸다.
6. 기타
엄청난 축구광이고 실제로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다. 종종 타임아웃이 될 때 농구공을 발로 현란하게 트래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토트넘 핫스퍼의 광적인 팬이며, 부분 소유주가 될 계획도 있다고 스스로 밝힌 바가 있다. 또한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지분을 보유한 4대 소유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티에리 앙리등과도 친하여, 2008년 "차이나타운에서의 승부" (Showdown in Chinatown)라는 이름으로 로비 파울러, 살로몬 칼루, 티에리 앙리 등의 축구 선수들과 제이슨 키드, 배런 데이비스 등의 NBA 선수들과 함께 대규모 자선 축구 시합을 벌인 적이 있다. 2013년에는 자신이 축구선수의 꿈이 있었다며, 미국을 방문하는 인터 밀란의 트라이아웃을 지원하기도 했다. 피닉스 시절 올스타 위크엔드 덩크 컨테스트에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도우미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헤딩으로 정확한 패스를 보내며 축구에 대한 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축구 사랑때문인지 2018-19 시즌부터 UEFA 챔피언스 리그 중계권을 확보한 TNT는 스티브 내시를 스튜디오 패널로 영입했고, 토트넘 홋스퍼 FC가 극장골로 결승전에 진출하자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루카스 모우라의 골이 들어가자 마자 '''바로 스튜디오를 뛰쳐나가 건물을 두 바퀴 돌았다!''' 울면서 들어온건 덤.
2015년 09월 16일 네이버에 나온 루키 기사에 따르면 내쉬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티브 커의 제안을 받아들여 플레이어 컨설턴트, 즉 가드진의 경기 운영 담당 코치가 되었다. 예전에도 조던 클락슨 등의 가드들에게 자신의 경기운영 요령을 전수해주었고, 결과가 나름 좋았다. 따라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가드진들에게 좋은 코치가 될 것 같다. 16-17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내쉬도 우승반지를 얻게 되었다.
샤킬 오닐을 2번이나 제치고 MVP를 수상했기 때문에 내쉬의 MVP는 이제는 방송인이 된 샤킬 오닐을 다른 패널들이 놀려먹는 전문 소재다. 그랜트 힐은 내쉬의 MVP 수상을 끝없이 질투하는 샤크에게 "이래서 우리가 피닉스에서 함께 우승을 못 한거다.(08-09시즌) 너가 그렇게 같은 팀 포인트 가드를 싫어하잖아"라면서 디스를 한 적도 있다.[14][15]
실제로 내쉬는 우승을 못해 저평가 당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력자체 만큼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다 NBA 역사상 2019년까지 백투백 MVP는 총 9명이었고 더불어 내쉬는 유일한 비로터리픽 출신이었다.[16] 그런 점을 감안하면 그가 결코 저평가 당할 이력의 선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7][18]
손흥민의 광팬으로 알려져있다. 손흥민이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댓글을 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전직 농구선수 임재현의 별명인 임내시는 이 선수에서 따왔다.
'''댈러스 시절, 엘보 어택으로 악명 높은 칼 말론[19] 의 팔꿈치에 맞아서 이빨이 나간 적이 있었다.'''
[1] 1996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1" = 185cm, 하지만 이때 보다 키가 좀 자라서 맨발 188cm 정도다.[2] 시즌 MVP를 2번이나 차지했지만, 정작 우승은 커녕 파이널 진출조차 못한 내시에게 붙은 한국 한정 별명이다. 정확히는 위에도 있듯이 건담내시->제갈내시->내시승상->승상이 된 것이지만, 우연찮게도 위나라에 도전하던 제갈량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졌다.[3] 여담으로 180클럽에 들어간 선수들은 그 시즌에 우승을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는 역대급 레전드 래리 버드도 그랬고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스테판 커리 또한 그랬다.그렇다면 내시의 커리어는...[4] 댈러스는 연봉 9백만 달러에 4년계약, 피닉스는 연봉 천만 달러에 6년계약이었다. NBA에서는 30대 들어가면서 계약 조건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30세가 된 내시의 입장에서는 장기 계약이 훨씬 더 끌렸을 것이다.[5] 계약당시만 해도 올스타급 언저리 정도였기 때문에 너무 계약기간이 길고 액수도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All-NBA 3rd팀이 최고실적이었다) 이후 30을 넘어 전성기를 누리면서 가성비 최강급 대박 계약이되었다.[6] 제갈건담->제갈내시[7] 일단 흑인 vs 백인, 그리고 30줄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더더욱 드러났다.[8] 1위 매직 존슨, 2위 오스카 로버트슨, 3위 존 스탁턴, 4위 스테픈 커리, 5위 아이재아 토마스, 6위 크리스 폴[9] 시즌 MVP를 2번이나 차지했지만, 정작 우승은 커녕 파이널 진출조차 못한 내시에게 붙은 한국 한정 별명이다. 정확히는 위에도 있듯이 건담내시->제갈내시->내시승상->승상이 된 것이지만, 우연찮게도 위나라에 도전하던 제갈량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졌다.[10] 내쉬와는 피닉스 시절 한솥밥 먹은 경력이 있다. 이때도 막스는 피닉스의 단장이었고, 내쉬가 있던 피닉스는 찰스 바클리 시대 이후 최대 전성기였다.[11] 내쉬 역시 듀란트를 OKC 시절부터 듀란트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밝혔던 적이 있었다. 이후 골스의 컨설턴트 매니저로 합류한 이후에는 당연히 사이가 더 좋아졌다.[12] 사실 이는 기자들의 자극적인 제목선정에 기인한다. 허나 발언 자체가 부적절한건 변하지 않는다.[13] 물론 미국도 감독이 어시스턴트 코치보다 훨씬 대접이 좋은 건 마찬가지지만, 기본적으로 코치가 감독을 "모신다기"보다는 같은 전문직인데 직무상 상사에 가깝기 때문에 젊은 감독 밑에서 노감독이 코치로 있거나, 경력을 쌓을대로 쌓은 은퇴 직전의 지도자가 코치로 일하는 경우도 흔하다. 내쉬처럼 선수 시절 감독을 코치로 두는 경우는 드물지만.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창시자 텍스 윈터, 그리고 같이 시카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한 존 바크같은 경우 감독 출신에다 경험치 만렙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초짜 감독 필 잭슨 밑에서 코치를 했다. 델 해리스같은 경우 레이커스에서 감독직을 하다 사임한 이후 댈러스에서 8년간 어시스턴트 코치 생활을 했는데, 아들뻘인 에이버리 존슨이 초임 감독 시절 그를 보좌했다. 레이커스 시절부터 잭슨이나 팻 라일리, 그렉 포포비치같은 초거물이 아닌 이상 NBA 감독은 성적이 안나오면 가장 먼저 짤리기 마련이고, 거물이라 하더라도 성적 압박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감독직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이 때문에 나이들어 힘들지만 은퇴는 하기 싫은 지도자들이 말년에 비교적 스트레스가 적은 어시스턴트로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노장 어시스턴트들은 감독 입장에서도 대선배라 함부로 못하기 때문에 위에 언급된 바크나 윈터는 시즌 중에 휴가 내고 "3월의 광란" 대학농구를 구경하러 가는 등 특혜도 누린다.[14] 내쉬는 개인기량이 엄청나게 뛰어나기보다는 팀시스템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선수라는 비판도 받는 편이지만 샤킬 오닐은 그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폄훼했다. 오닐은 아예 내쉬가 동정표로 (sympathy vote) MVP를 탔다며 자기가 너무 크고 강해서 매번 줄 수 없어서 내쉬에게 준 거라고 했는데 정작 본인은 1회수상, 내쉬는 2회 수상이다. 아무리 오닐이 내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저런 식의 폄훼는 기본적인 예의도 아니고 (당시 방송을 진행하던 다른 Open Court의 레전드 패널들도 불편해했다. 참고로 이들은 하나같이 내쉬가 아닌 제이슨 키드를 택할 정도로 내쉬에 대해 평이 박한 이들이다) 특히 '''같은 팀 동료였던 이에게는''' 더욱 터무니없는 발언이다.[15] 다만 내쉬가 개인기량보다 팀시스템의 덕을 본 거라는 평가는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 있다. 내쉬가 선즈 시절 댄토니 감독의 런앤건 방식에서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달라스 시절에 이미 내쉬는 리그 일류급 포인트 가드였다. 또한 댄토니 감독이 닉스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선즈는 (부상 및 주전들의 이적으로 약화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강호로 남았지만 댄토니는 또다른 MVP급 선수이 있는 휴스턴 로케츠의 감독을 맡기 전까지는 5할승률을 넘긴 적이 딱 두 번 뿐이었을 정도로 고생했다. 결국 당시 선즈의 성공에 관해서는 '''시스템이 내쉬를 만든 게 아니라, 내쉬가 있어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다'''라는 평가가 더 적절할 것이다. [16]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2020년도까지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면서 백투백 MVP가 됐기에 스티브 내시가 유일한 비로터리픽 출신 백투백 MVP는 아니게 됐다.[17] 비로터리픽 출신 중 정규시즌 MVP는 스티브 내시와 야니스 아데토쿤보밖에 없다. [18]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댈러스가 2004년에 내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댈러스의 리그 우승이 훨씬 앞당겨졌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매버릭스 오너 마크 쿠반은 최근 인터뷰에서 "노비츠키와 내시를 좀 더 오래 같이 두지 못한 건 내 실수였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 이때 칼 말론은 LA 레이커스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