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호젠펠트
[image]
Wilhelm Adalbert Hosenfeld (1895년 5월 2일 ~ 1952년 8월 13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예비역 육군 보병대위. 폴란드의 무고한 사람들과 유대인들을 탈출시켜 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구해 준 그 독일군 장교이다. 스필만 뿐 아니라 다른 유대인과 폴란드 사람들을 도와 준 의인이다. 그는 전쟁 초반에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후에는 나치 독일에 실망하여 일기에 '국가사회주의 혁명은 모든 면에서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하늘이 노할 만한 죄인들이다' 라고 썼으며 슈필만을 만났을 때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뿐 인륜을 저버리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 욘 라베같은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헤센 출신.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가톨릭 교사 집안에서 성장했고, 당시 불던 독일의 애국주의와 반더포겔 운동, 아내 안네마리[1] 의 평화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제국 육군 장교로 참전하여 1917년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여느 사람들처럼 나치당에 가입했다. 호젠펠트는 초기에는 나치를 열렬히 지지했으나 갈수록 나치의 정책에 실망해갔다.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가톨릭에 적대적인 태도 등을 비판했고, 20세기의 신화를 깠다가 학교 위원회로부터 100%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다시 예비역 소집으로 육군에 복귀했다. 소집 당시에는 병장이었고 이후 대위까지 진급하게 된다. 전투병과인 보병 위관급 장교였지만, 나이가 많은 예비역이었기에 일선 전투부대가 아닌 후방에서 장병들의 체육 관련 업무 등 행정직을 맡았다.
호젠펠트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폴란드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폴란드어를 배웠고, 금지된 행위임에도 성당을 찾아가 폴란드식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포로수용소를 짓는 임무를 맡은 동안엔 자기 직권을 남용하여 수감된 폴란드인들이 가족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고 정해진 형기보다 일찍 내보냈으며, 체육관을 관리할 때는 박해받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 위조 신분증을 주고 자기 사무실 내지 자기가 관리하는 체육관에 고용하는 방식으로 보호했다. 전쟁 끝무렵에는 유대계 폴란드인인 블라덱 슈필만을 발견하고 그가 살아남는 걸 도왔다.
1945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25년형[2] 을 선고받고 심문을 당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추정되는 흉부대동맥 파열로 인해 1952년 사망했다. 수감생활 중 뇌졸중을 여러 번 겪는 바람에, 죽기 직전에는 지능이 7세 수준으로 퇴화되어 자기가 왜 고문당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구해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이 그가 한 행동을 알려 탄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련은 독일군 포로들에게 자비가 없었고, 전쟁 초기에 수용소를 담당했고 바르샤바 봉기 이후 대리 정보 담당관으로써 포로를 심문해야 했던[3] 호젠펠트의 이력은 재판에 더 불리하게만 작용했다.
90년대 들어 호젠펠트가 구해준 사람들인 레온 바름과 블라덱 슈필만, 슈필만의 아들인 안제이 슈필만(Andrzej Szpilman) 등이 호젠펠트를 야드 바솀[4] 의 세계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에 추가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2009년에 추가되었다. 추가가 늦은 이유는 소련에서 때린 25년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억울했든 어쨌든 전범재판에서의 유죄판결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고. 세계의 의인에 추가되기 1년 전쯤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훈장인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메달을 받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이기도 한 슈필만의 자서전[5] 에는 그의 일기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며, 호젠펠트의 편지와 일기를 묶은 책이 영어와 독어로 출간되어 있다.
독일 중부의 헤센 주에 있는 풀다(Fulda) 시의 휜펠트(Hünfeld)라는 동네 출신으로 구글 지도에 그의 집이 나온다. 오늘날 독일의 거의 정 중앙에 있는 곳이다. 풀다 시에는 호젠펠트(Hosenfeld)라는 마을도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 후반부에 출연한다. 배우는 2차대전 독일군 전담 배우로 통하는 토마스 크레치만. 단 크레치만이 당시의 호젠펠트보단 많이 젊었다 보니 쨍쨍할 나이의 현역 같은 느낌이 난다. 영화에서 호젠펠트의 가족 사진은 실제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가족 사진을 참고해 최대한 비슷하게 찍은 것이다. 고증을 매우 잘한 사례다.
Wilhelm Adalbert Hosenfeld (1895년 5월 2일 ~ 1952년 8월 13일)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예비역 육군 보병대위. 폴란드의 무고한 사람들과 유대인들을 탈출시켜 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구해 준 그 독일군 장교이다. 스필만 뿐 아니라 다른 유대인과 폴란드 사람들을 도와 준 의인이다. 그는 전쟁 초반에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후에는 나치 독일에 실망하여 일기에 '국가사회주의 혁명은 모든 면에서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하늘이 노할 만한 죄인들이다' 라고 썼으며 슈필만을 만났을 때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뿐 인륜을 저버리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 욘 라베같은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2. 생애
헤센 출신.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가톨릭 교사 집안에서 성장했고, 당시 불던 독일의 애국주의와 반더포겔 운동, 아내 안네마리[1] 의 평화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제국 육군 장교로 참전하여 1917년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여느 사람들처럼 나치당에 가입했다. 호젠펠트는 초기에는 나치를 열렬히 지지했으나 갈수록 나치의 정책에 실망해갔다.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가톨릭에 적대적인 태도 등을 비판했고, 20세기의 신화를 깠다가 학교 위원회로부터 100%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다시 예비역 소집으로 육군에 복귀했다. 소집 당시에는 병장이었고 이후 대위까지 진급하게 된다. 전투병과인 보병 위관급 장교였지만, 나이가 많은 예비역이었기에 일선 전투부대가 아닌 후방에서 장병들의 체육 관련 업무 등 행정직을 맡았다.
호젠펠트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폴란드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폴란드어를 배웠고, 금지된 행위임에도 성당을 찾아가 폴란드식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포로수용소를 짓는 임무를 맡은 동안엔 자기 직권을 남용하여 수감된 폴란드인들이 가족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고 정해진 형기보다 일찍 내보냈으며, 체육관을 관리할 때는 박해받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 위조 신분증을 주고 자기 사무실 내지 자기가 관리하는 체육관에 고용하는 방식으로 보호했다. 전쟁 끝무렵에는 유대계 폴란드인인 블라덱 슈필만을 발견하고 그가 살아남는 걸 도왔다.
1945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25년형[2] 을 선고받고 심문을 당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추정되는 흉부대동맥 파열로 인해 1952년 사망했다. 수감생활 중 뇌졸중을 여러 번 겪는 바람에, 죽기 직전에는 지능이 7세 수준으로 퇴화되어 자기가 왜 고문당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구해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이 그가 한 행동을 알려 탄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련은 독일군 포로들에게 자비가 없었고, 전쟁 초기에 수용소를 담당했고 바르샤바 봉기 이후 대리 정보 담당관으로써 포로를 심문해야 했던[3] 호젠펠트의 이력은 재판에 더 불리하게만 작용했다.
90년대 들어 호젠펠트가 구해준 사람들인 레온 바름과 블라덱 슈필만, 슈필만의 아들인 안제이 슈필만(Andrzej Szpilman) 등이 호젠펠트를 야드 바솀[4] 의 세계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에 추가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2009년에 추가되었다. 추가가 늦은 이유는 소련에서 때린 25년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억울했든 어쨌든 전범재판에서의 유죄판결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고. 세계의 의인에 추가되기 1년 전쯤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훈장인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메달을 받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이기도 한 슈필만의 자서전[5] 에는 그의 일기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며, 호젠펠트의 편지와 일기를 묶은 책이 영어와 독어로 출간되어 있다.
독일 중부의 헤센 주에 있는 풀다(Fulda) 시의 휜펠트(Hünfeld)라는 동네 출신으로 구글 지도에 그의 집이 나온다. 오늘날 독일의 거의 정 중앙에 있는 곳이다. 풀다 시에는 호젠펠트(Hosenfeld)라는 마을도 있다.
3. 대중 매체
영화 피아니스트 후반부에 출연한다. 배우는 2차대전 독일군 전담 배우로 통하는 토마스 크레치만. 단 크레치만이 당시의 호젠펠트보단 많이 젊었다 보니 쨍쨍할 나이의 현역 같은 느낌이 난다. 영화에서 호젠펠트의 가족 사진은 실제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가족 사진을 참고해 최대한 비슷하게 찍은 것이다. 고증을 매우 잘한 사례다.
[1] 가톨릭 집안에 교사 아버지를 둔 호젠펠트와는 달리 개신교 집안에 보르프스베데(예술가촌) 출신 화가 아버지를 뒀다. 둘은 반더포겔 모임에서 만났다고 한다. 1920년에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두었다.[2] 이마저도 처음에는 사형(!)이었다가 사면된 것. 25년형을 때릴 때는 변호사도 없었다고 한다.[3] 이때 호젠펠트는 포로들에게 가해진 기혹행위를 비판하며 제네바 협약 준수를 주장했고, 전쟁포로의 지위를 부여해주려고도 했지만 결국 둘 다 실패로 돌아갔다.[4] Yad Vashem. 이스라엘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5] 정확히는 재출간본. 재출간 후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으며 현재 번역본은 절판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