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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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김준근, <기산풍속화도>,석전하는 모양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소장.
1. 개요
2. 역사
3. 해외의 유사한 사례
4. 기타
5. 관련 인물


1. 개요


한민족의 민속 놀이. 조선시대에는 정월 대보름이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석전(石戰)은 말그대로 돌(石)싸움(戰)으로, 눈뭉치 대신 돌덩이(!!!)를 힘껏 던진다. 그러니까 전근대 전장에서 흔히 있던 피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끼리 한 것이다. 보통 인접한 두 마을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직접 마주보고 던지거나 아니면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한다.

2. 역사


<수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석전의 풍습은 삼국시대(고구려) 때부터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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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에 당도한 첫 해 동안에 나는 전통적인 편싸움, 즉 석전을 구경할 흥미롭고 미심쩍은 특권을 누린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은 한번만이라도 겪어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지혜롭고 박식한 여자들일지라도 언제나 앞으로 나서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입국 이후 몇 주가 흐른 뒤에 하루는 우리집을 나서 친구를 방문하고자 가는 길에, 두 패로 나뉜 것으로 보이는 아주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는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말하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내가 목격했던 석전의 전초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신랑은 나 혼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아주 고맙게도 끝까지 바래다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우리는 이내 돌과 던지는 무기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조선인의 집에 대피하고자 뛰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요리조리 피하기와 되돌아 가기를 반복하고 종종 담벼락 뒤로 우리들 몸을 숨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길모어 씨(Mr. Gilmore)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그때 뭔가 어수선하고 동요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분명하게 평정이 이뤄지기를 기다렸고 그리하여 현명하고 사려 깊은 여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 같은 종류의 일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은 우리들 중 성질이 급한 한 젊은 동포가 이 석전의 모습을 사진 찍으러 나갔다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어느 냉정한 미국인 한 사람이 최근에 호랑이를 사냥하기 직전에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호랑이의 모습을 먼저 담았는데, 그것에 그가 경쟁심을 느꼈던 것인지 우리들의 젊은 친구가 그 같은 시도를 했던 것이었다. 그는 곧 모든 던지는 무기들이 조준하는 대상물이 자기이며, 이들 피에 굶주린 악당들이 완전히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불운하기도 하고 불법적인 것이지만 6연발 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기에, 지나치게 흥분하고 불안했던 그는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는 도망을 쳤다. 그가 쏜 총탄은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의 다리살을 파고 들어갔고, 그가 쓰러지자 다를 그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정말로 양쪽 무리 모두의 분노가 가장 격렬한 형태로 완전히 얼어붙은 젊은 이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군중들은 분노의 외침과 더불어 그를 추격했다.

카메라와 외투는 내팽개쳐지게 되었고, 그는 미국공사관의 대피소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1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달렸는데, 간신히 이곳에 도착하니 헐떡거리고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의 총을 맞은 피해자는 그다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는데, 그는 벌금을 물고 몇 주 간의 투옥, 가장 엄한 견책, 그리고 이 나라를 떠나라는 완곡한 요청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 사태를 모면하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2]

, 상투의 나라 중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 등이 기록한 조선의 석전 풍습을 보면, 거의 조폭들의 집단항쟁 수준이었다. 수십, 수백의 장정들이 서로 짱돌을 던져대고, 곳곳에서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진 부상자가 속출하며, 심지어는 승세를 탄 쪽이 상대방 마을로 쳐들어가서 집까지 부술 정도였으니(...). 마치 전쟁 같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듯 하나, 그래도 위의 사례를 보면 '''일단은''' 놀이 취급이라 총 같은 무기는 반칙이었던 듯.
어찌나 과격한 놀이였던지 실제로 사람 몇 죽어나가는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1930년 1월 경, 석전놀이를 구경하던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Clare W. Hess)는 재미삼아 한 편에 끼어서 다른 편으로 돌 하나를 던졌는데, 하필 다른 편 석전꾼의 머리에 적중했다. 돌은 맞은 석전꾼은 머리가 터저서 뇌가 흘러나와 즉사했다. 클레어 헤스는 죽은 석전꾼의 가족들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지만, 백성들 생각으로는 원래 석전놀이는 상대편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려고 돌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작(...) 그거 가지고 문제를 삼은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석전은 때로는 권력자, 예를 들어 평소에 횡포를 부리던 지주라거나,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아전 등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 돌을 던지는 식으로 항의하는 '민심' 의 표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놀이와는 별개로 프로스포츠 성격의 석전이 또 따로 있었다. 즉 전용 코트를 정해놓고 그 영역 안에서 정해진 인원끼리 투석전을 벌였는데 순수 민첩원딜인 투석꾼과 별개로 몽둥이를 쓰는 딜러와 방패를 쓰는 탱커가 있으며,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진을 짜고 기동하는 등 전략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검투경기처럼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사람이 실신하거나 죽어나가는 맛까지 있으니 이렇게도 재미진 경기에 관중이 없을리가 없다. 단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돌던지기와 돌피하기에 능한 전문 석전꾼이었다.[3] 이 스포츠는 상무적인 요소가 강했던 초창기 조선 왕실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태종 이방원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워있다가도 석전경기가 열린다 하면 벌떡 일어나서 구경갔고, 태조 또한 석전을 좋아했다. 세종의 경우는 처음에는 지원했지만 아무래도 유교를 국시로 삼는 국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싸움을 즐기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다 하여 결국 금지했는데, 이런 와중에 양녕대군의 아들들이 몰래 석전을 벌이다가 사람을 죽여서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제전 성격의 석전경기는 계속 했다.
하여간 말도, 탈도 많은 이 미풍양속(?)은 '''전투민족의 소양을 길러''' 중종 조에 최임이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일례로 제포에 웅거한 왜구가 차일(가리개)과 방패를 설치하고 버티자, 안동지방민으로 구성된 투석 부대를 투입해 짱돌로 모조리 '''개박살'''내버렸다고 한다.[4] 임진왜란때는 죽령 방면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초조해진 사흘 이상의 귀중한 시간을 벌고 가토 기요마사가 길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조선시대 석전으로 가장 유명했던 고장은 안동, 김해, 평양 세곳으로 개중 안동은 현재도 차전놀이라고 하는 집단간 경쟁하는 민속놀이가 치뤄지고 있다. 거진 진짜 군사훈련에 가까운 경우도 많았는데, 당장 나무 몽둥이에 방패까지 든 평양 석전꾼들이 터프하게 돌맞으면서 밀고들어오자 서울 석전꾼들이 밀렸다는 내용도 있다. 위장 잠입하여 적 마을에 침투 사보타주(뭐 걸리면 어디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를 벌이거나, 상대 마을로 처들어가 집을 부수기도 하고, 부락의 체급별로 다양한 단체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군사 작전에 버금갔다.
이후에도 기록에 왕왕 석전 부대가 나타나지만, 조총 등 개인화기가 발달하면서 유희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영조 때에도 기록이 보이는 등 꾸준히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는 안동의 석전꾼들이 이름이 높았으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평양의 석전꾼이 유명했으며, 돌을 던지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 장정들은 머리에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에 패해 집으로 도망오면 어머니가 이를 크게 질책하며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대단했고 터프했다 하겠다. 소년들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가 권장 되었을정도. 석전에 승리한 마을은 석전꾼들이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개선했고, 패배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일제에 의해 근절되기 전까지 석전은 계속되었으며[5], 조선시대에도 이미 여러 번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깡패건달로 보는 100년'에 따르면, 석전꾼들은 정월 대보름에 강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으로 한 해의 농사를 여는 풍습인 석전에 전문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석전꾼은 범죄자나 거지 등 불량배들이 많았고, 관의 감시를 받았던 이들은 관리들의 동원에 쉽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반체제적인 독립협회가 집회를 할 때 공권력으로는 해산시킬 수 없었기에 사적인 인력들[6]을 동원하여 해산시켰는데, 이 중에 오강의 석전꾼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석전은 일반적으로 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조한 북한에서 초기에 고구려의 풍습 중 하나였던 이 석전놀이를 재현하였다가 딱 한 번 시행해보고 그만 뒀다고 한다. 이유는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당연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금지다. 했다가는 폭처법은 기본이요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므로 특수폭행죄도 성립하고, 재수 없으면 소요죄가 적용될 공산이 크며, 사상자라도 나오면 가해자는 폭행치사죄가 적용된다. 대신 현대에는 학교 운동회나 행사 같은 때 돌 대신 콩주머니나 모래주머니를,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박을 향해 던지며 노는 '박터트리기 놀이'[7]를 한다.[8]

3. 해외의 유사한 사례


스페인 등에서도 이런 돌팔매질의 전통(?)은 존재했으며, 스페인에선 이게 발렌시아주 부뇰의 축제인 라 토마티나[9]로 변화했다. 주 원인은 발렌시아 지방의 토마토 가격의 폭락과 프랑코 정부의 실책이었고 말이다. 단 일부러 토마토를 썩혀서 던질 수 없으니 으깬 토마토를 던지는게 룰이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 이브레아에서 개최되는 '오렌지 전투 축제'에서는 이름대로 오렌지를 던진다. 12세기 평민 출신의 비올레타라는 여성이 초야권 풍습에 따라 결혼식을 치른 뒤 영주의 성에 불려가게 되는데, 영주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겨 가지고 있던 단도로 영주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 민중들이 폭정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이것이 오렌지 전투 축제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주로 시칠리아산 오렌지를 사용하는데, 축제에서 던지는 오렌지는 상하거나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만을 사용하며 사전에 손으로 주무르거나 해서 최대한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부상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또한 럭비도 원래는 공 하나를 두고 마을 두 쪽이 박터지게 싸워가면서 상대편 마을까지 을 갖다 놓는 놀이였다.

4. 기타


사극 대왕 세종에서 프로 석전경기를 재현해 놓은 것을 볼 수있다. 이숙번의 측근인 구종수가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을 꼬드겨 같이 석전경기를 보러 가는데 나중에는 양녕대군이 직접 경기를 뛰어보기도 하고, 가장 솜씨 좋은 석전꾼들만 뽑아서 특수부대(전위군)를 만드는 등 양녕대군과 관련해서 석전이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었던 어리도 석전경기장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드라마 별순검 시즌 1에서도 석전과 관련된 사건이 등장한 적 있다. 남촌과 북촌에서 연례 석전을 벌이던 중 북촌 최고의 석전꾼이 죽게 되는데,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 누가 석전 시합전에 마시는 국에 비상을 타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
애니메이션인 장금이의 꿈 2기에서는 국왕이 참관하는 가운데 투석전이 열리는데, 부상을 막기 위해서 콩주머니를 던진다.
검정 고무신의 단역인 만득이가 돌싸움하다 앞니를 맞아 새까매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금지된지 제법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시골 동네의 놀이 정도로 표현된다.
다음 링크는 석전의 역사에 관한 만화이다. 만화에서 보듯이 짚으로 짠 모자 같은 것도 썼던 모양.
1부,2부,3부, 번외
각별도 마크에서 구현했다.

5. 관련 인물


원태우: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팔매질을 한 사람이다.

[1] 고구려는 매년 정초에 패수(정확한 위치는 비정 할 수 없다) 위에 모여 좌우 두 편으로 나누고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운다. 이 때 국왕은 요여(腰轝)를 타고 와서 구경한다.[2]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이다.[3] 프로 리그에서 아마추어 팀이 살아남기도 힘들었겠지만, 실력이 낮은 아마추어가 참가했다가 돌을 관중쪽으로 잘못 던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4] 이때 왜구의 돌격을 막기 위해 녹각목을 들고 전진.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40에서 50미터가량의 거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또 왜구가 차일과 방패를 설치했다는 것에서 어설프게 만든 차일과 왜구가 가져온 제대로 된 방패의 구분도 가능하다. 때문에 등장한 것이 일본방패호구설.[5] 금지한 이유는 치안 안정인데,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한(!) 원태우 지사의 사례처럼 투석을 통한 항일운동을 우려했다는 이유도 있다.[6] 풍운한말비사 기록에는 팔도의 역사, 보부상과 함께 오강의 석전꾼이 나타난다.[7] 콩주머니 던지기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8] 그런데 이 박터뜨리기를 포함해 운동회라는 것 자체가 일제시대에 들어 온 문화다.[9] 토마토 던지기로 유명한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