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야권
初夜權.
Droit du seigneur (프랑스어, "영주의 권리")
jus primae noctis (라틴어, "초야의 법")
1. 개요
중세 유럽에서 결혼하는 신부의 첫날밤을 남편이 아니라 그 지방의 영주가 치를 권리가 존재한다는 제도.
첫날밤의 권리를 영주가 갖고 있었고 결혼세를 냄으로써 면제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유럽에서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다만 유럽 외 지역에서는 초야권이 실제로 시행된 사례가 있다.
초야권과 관련된 인류 최초의 기록은 무려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한 길가메시 서사시로, 주인공 길가메시가 초야권을 주장하자 '''사람들이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신들은 엔키두를 창조해 그로 하여금 길가메시를 벌하게 하였다'''. 이슈타르 신전의 무녀가 매춘을 할 정도로 성문화가 개방적이던 메소포타미아에서도[1] 초야권은 막장의 상징이었던 셈.
2. 상세
2.1. 정설
중세 초야권의 기원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십일조와 연관지어서 생각하지만, 사실 초야권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애초에 초야권은 기독교 문화권의 도덕관념과 굉장히 모순되는 개념이다. 기독교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며, 혼인 관계를 벗어난 성교는 모두 도덕적 지탄을 받았다. 물론 암암리에 무언가 성행한다는게 이상할 건 없지만, 어쩄든 초야권급 막장을 대놓고 당시 법에 써놓기는 힘들다. 게르만족은 일반적으로 첫 수확물을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 주는 부족장에게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부족장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였다. 이 전통이 중세로 넘어오면서 제도화와 변질화를 거치게 되었지만, 농노들은 영주들에게 첫 수확물 중 일부를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바쳐야 했다. 물론 농노들은 영주들의 토지 또한 경작했다. 이것이 여러 종류로 파생 변질된 과정에서 나온 것이 초야권이다.
초야권 문제로 사건이 터져서 영주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일은 없다. 초야권의 남용으로 민란이나 다른 소요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사실 한 지역에서 거의 왕이나 다름 없는 영주 입장에서 위생과 교육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여자와 굳이 맨살을 맞댈 이유도 없고, 어쩌다 자기 눈에 띄는 하층민 여자가 있으면 부모나 본인을 잘 꼬셔서 첩으로 삼거나 하룻밤 치르고 후한 대가를 지불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첩으로 삼는 것이 당시의 관념으로는 하층민 여자의 부모 입장에서 딸이 눈에 띄어서 출세하게 되어 좋은 일이라 여기기도 했다. 아무리 곤궁한 영주라도 그깟 몇 푼 아껴보겠다고 성병, 후계자 문제 등을 야기할 수 있는 초야권 같은 걸 발동시킬 필요는 없다.
초야권은 실질적으론 노동력 상실을 메꾸기 위한 세금 징수 목적으로 쓰였다. 즉, 결혼을 영주에게 허락받기 위해 일정 금액의 세금을 내는 형태로 시행되었다. 남의 영지에 있는 남자 농노와 결혼하는 경우, 여자 쪽 소속 영지에선 노동력이 상실되므로 초야권이란 이름의 결혼세를 청구했고, 대개는 남자 쪽 영주가 결혼세의 일부를 부담하고 나머지를 남자 농노가 부담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남자 농노 측이 그것마저 부담할 경제력이 안될 때 여자 쪽 영지의 주인이 여자 농노와 초야를 보내고 대신 결혼세를 안 받은 것. 물론 이 경우도 형식적으로 같이 밤을 보냈으니 초야를 보냈다는 식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영지 안의 농노끼리 결혼하는 경우엔 노동력 상실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내지 않아도 되었다.
2.2. 실존 여부
이상이 20세기 말까지 초야권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말이긴 한데, 최근 역사학계의 견해는 '초야권은 거의 실행되지 않은 채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수준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를 미는 경향이 강하다.
중세에는 전 유럽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였고[2] 영주건 농민이건 모두 기독교 신자이며, 기독교는 10계명으로 간음을 금지한다. 물론 이때라고 불륜이 없었으랴마는 그거야 합의 하에 한 거고, 영주가 강제로 초야권을 법으로 시행하려 했다가는 파문이 내려오든지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든지 할 것이다.
다만 이 속설이 유명해지자 1400년대부터 이걸 이유로 해서 세금을 뜯어내려 하던 영주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정확히는 원래 중세에 결혼세가 있긴 했는데, 초야권이 유명해지자 몇몇 영주들이 "오호라 이런 게 있었구나~" 하면서 이를 근거로 세금을 받아내려 했다는 말. 1400년대 전까지는 중세에 결혼세가 있었어도 그게 초야권 때문이라는 사료는 없다.
여기에 근대의 학자들이 중세는 이렇게 미개한 시대였다고 까면서 후대에 유명해졌다고 본다. 초야권은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에게 사실처럼 뻥튀기되어 역사서에 기술되었다. 그 때문에 제아무리 당대 지식인들의 발언이라도 왜곡된 말을 후세에 전할 수 있고, 현대의 사람들도 불확실한 추측을 사실인 양 기록으로 남기면, 후대에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위험이 있을을 알게 되었다. 볼테르는 "우리가 중세를 배우는 이유는 중세를 까기 위해서다."라고 발언했을 정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중세 항목도 같이 참고할 것.
그렇다고 해서 “유럽에서는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로 딱 잘라 정의하긴 힘들다. 초야권이 유럽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유럽전역이든 특정 지역에 한정하든 존재했다고 보는 역사가들과 근거들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역사적 흐름에 따라 초야권이 왜 대두가 되었고, 왜 부정하려 하는지부터 이해를 해야 한다.
초야권이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지고 확대해석 된 시기가 있었는데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이다. 당시엔 귀족과 왕족들을 시민들의 적으로 몰아가기 위해 그들의 악행을 필요 이상으로 과대해석하거나 강조한 시기가 있었다. 이때 초야권이라는 상위계층들이 하위계층을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미개한 규정은 민중을 선동하기에 매우 적합한 떡밥이었다. 초야권의 존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현대의 초야권에 대한 이미지는 이때 정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흔하다. 현대 영어권에선 초야권을 말할 때 프랑스어를 그대로 적거나 lord’s right로 프랑스어를 직역한 표현을 쓰는데, 당시 초야권이 위에 적은 이유로 프랑스에서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특히 연구되었고 주변 유럽국들은 “그랬었나 보다” 정도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가 되자,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정당히 지배하고 있다고 여긴 식민지에서나 존재할법한 미개한 풍습들이 유럽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초야권도 포함된다. 이때부터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초야권이 미개한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유럽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쓸데없이 과대해석 하긴 했지만, 여러 근거를 고려하지 않고 없었다로 못박는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존재유무의 애매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판본에 따라 초야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되어 있다가, 2000년대 중반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만 존재했다고 서술되었고, 2020년 8월 30일 기준 “이런게 있긴 한 데 실제로 한 건 아니고 세금 뜯는 핑계용이었을 것이다.”[3] 정도로 애매하게 서술되어있다.
2.3. 관련 기록
초야권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되는 최초의 기록은 로마 제국 시절인 서기 300년 정도의 '''문학'''작품이다.
<The Life of St. Gerald of Aurillac>은 930년에 성인 Gerald에 대해 쓰여진 전기인데[4] 여기서 Gerald는 자신의 영주로서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의 영지에 속한 농노 여자아이를 범하려 든다. 여기서 신이 나타나 Gerald를 막는데, 현대적인 시점에서 보면 신이 악행을 범하려는 Gerald를 막기 위함인 것 같지만, 놀랍게도 전혀 다른 이유이다. 신은 Gerald가 동정을 지켜 성스러움을 보존하기 위해, 농노여자아이를 반나절 만에 외모를 추악하게 만드는 기적을 부렸다. Gerald는 농노여자아이의 반나절만에 외모가 180도 바뀐 모습을 보고, 같은 사람임을 믿지 못하지만,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맞다고 확인시켜주자, 지레 기겁하며 그 자리를 떠난다. 여기서 Gerald가 잠자리를 가지기 위해 영주의 권리를 운운한 점, 신이 Gerald를 벌하지 않은 점을 보아, 적어도 당시 상류층은 이와 같은 ‘권리’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다.
1500년대 말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한 영주가 초야권을 근거로 '''신부에게 성희롱을 했다가 농부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료가 남아 있다.
국내 서적 중에는 김응종 충남대 사학과 교수의 저서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에서도 실제 유럽에서 초야권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다만, 초야권을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는 것은 긍정한다.1 2 3
스코틀랜드의 역사학자 Hector Boece가 1527년 쓴 Historia Gentis Scotorum(스코틀랜드인들의 역사)에서,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3세가[5] 초야권을 폐지하고 혼인세를 내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법은 875년에 이완 3세라는 국왕이 만든 것으로 되어 있으며, 즉 적어도 스코틀랜드에선, 초야권이 실제로 행해졌고, 후에 혼인세로 변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국왕 항목을 보면 이완 3세라는 왕은 없다. 875년에 재위하던 국왕은 카우산틴 1세다. 이름이 잘못 전해졌거나, 그런 거 없었거나...
그리고 당시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는 학자들이 선하고 정당한 '입법자'로서의 왕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그러한 전설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15세기 스코틀랜드의 작가인 윈턴의 연대기에서는 150년 전 알렉산더 3세가 백성들을 위해 제정한 여러 기상천외한 법령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윈턴의 주장 이외에 실제로 그러한 법들이 시행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외에도 1643년에 출간된 성인전 Acta Sanctorum에도 성인 Margaret을 다루는 전기에서 초야권이 언급된다.
3. 아시아에서의 초야권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몽골인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청말민국초기 일부 한족 역사학자들과 신력건(信力建)이라는 현대 중국의 언론인 등이 민담과 전설, 민간풍습을 재구성하여 추측한 주장에 불과하다. 정사(正史)인 《원사(元史)》, 《원조비사(元朝秘史)》, 《신원사(新元史)》등에는 초야권과 관련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청말(淸末)에 이르면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청(反淸) 선전의 일환으로 원말(元末) 농민 봉기 시절과 관련한 여러 뜬소문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초야권도 그 중 하나이다.
김호동 교수에 의하면 몽골제국에 대한 괴담 중 하나라고 한다.
4. 기타
다른 지역에서도 초야권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왕에게 받을 선물로 초야권을 얻어내서 그거 행사하려다가 신랑에게 맞아 죽었던 위인이라든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라든가. 그리고 종종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일어나는 종교적인 초야권은 여성의 처녀혈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것들은 황금가지에 수록된 여러 설화들이 실제와 다른 것 처럼 엄밀한 검토가 되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
오덕들 사이에서는 다키마쿠라나 에로 동인지 등을 해외에서 구매할 때 세관에서 검사를 위해 뜯어보는 것을 뜻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5. 대중매체
강제로 첫날밤을 빼앗는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매체에서는 네토라레, 네토리같이 묘사되는데, 일부에선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판타지 세계에서 중세를 미개하다고 까 내릴 목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는 주인공과 대적하는 귀족이 이를 한다는 묘사를 넣어 신분을 앞세워 막장 행위를 하는 무개념 악역으로 묘사 할 때 종종 쓰인다.
게임에서 이 초야권을 직접/간접적으로 주장/행사한 캐릭터로는 란스가 있다.
신일숙의 만화 리니지에서 반왕 켄 라우헬은 초야권으로 인해 탄생한 캐릭터.
지혜안의 만화 에스할름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인 이본느는 자신을 짝사랑한 젊은 영주 루트에게 초야권을 빌미로 강간당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웨스테로스에도 초야권이 존재했지만, 성군 자에하에리스 1세가 왕비 알리산느 타르가르옌의 조언으로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용의 씨들은 과거 타르가르옌 가문의 초야권 행사로 태어난 사람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때는 오히려 타르가르옌 가문 사람들을 반신처럼 여겨 초야권을 반겼다고.
물론 이건 사전적인 의미의 초야권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단지 린다 정에게 당한 장태영이 결혼식 직전에 강간하여 복수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선 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대박을 거두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온 초야권은 엉터리이다. 하긴 영화 자체가 윌레스와 프랑스 공주의 사랑과 임신이라는 터무니없는 전개였으니...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이 전개가 터무니없는 이유는 일단 실제 역사에서의 프랑스 공주 이사벨은 영화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나중에 태어났으며 윌리엄 월레스 사후에나 잉글랜드로 시집오기 때문이다.
Leslie Stevens의 'The Lovers'에서도 초야권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결혼을 앞둔 마을 처녀를 미치도록 좋아하게 된 기사도의 화신이자 전쟁 영웅인 영주가 등장한다. 영주는 기독교도이고 영지민들은 노르망디 부근의 이교도로 나온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그에게 동생이 초야권에 대해 알려주며, 영지의 기독교 사제에게 이런 게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받는다. 여기서 사제는 '이교도들에게는 이러한 법이 있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의 법에는 없고, 심지어 죄악일 수 있다'고 답한다. 초야권을 행사하러 마을에 가자 촌주는 '그들의 법에는 이런 것이 없지만, 우리의 법에는 존재하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허락한다.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은 구하기 어려운 이 책보다는 이를 영화화한 찰턴 헤스턴 주연의 'The War Lord(1965년작)"를 보는 것이 낫다.
불쏘시개급 소설 초인 고교생들은 이세계에서도 여유롭게 살아가나 봅니다!에서는 부패 귀족이 실제로 행사해서 주인공 일행에게 박살난다.
Reigns에서 마녀가 공작[6] 이 이 제도를 실행하려 한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용인하면 민심/신앙이 깎이고 군사가 오르며, 금지하면 민심이 오르고 군사가 깎일 수도 있다. 작중에서 마녀가 선한 캐릭터인 만큼 게임 내에서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 고증오류가 된다.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민심이 너무 많이 깎인다.
[1] 당장에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길가메시를 벌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엔키두의 야성을 벗기기 위해서 여신관을 보내서 성관계를 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2]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서기 1100년 무렵에는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했다.[3] it seems likely를 써서 확정 못 하고 있다.[4] Gerald of Aurillac이 855~909년 실존인물임에는 여지가 없는데, 해당 서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쓰여져 현대 과학으로 보았을 때 100퍼센트 신뢰하긴 힘드나, 적어도 당시 시대상을 알 순 있다.[5] 재위기간 1058~1093[6] 말이 공작이지 공작의 그 공(公)이 공(空)으로 보일 정도로 비중이 없는 캐릭터다. Reigns/캐릭터의 해당 항목 참고.